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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단편소설/눈 뜬 짐승 하나 가슴 속에 키우며/조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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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눈 뜬 짐승 하나 가슴 속에 키우며
趙健相
손가락 끝에 지그시 힘을 주어 마지막 숫자인 8을 누르자, 뜨끔한 통증처럼 손 끝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 흐르는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이윽고 전화의 신호음이 주욱주욱 줄을 그으며 달려가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미묘한 내 감정의 편린들이 그의 몸 어딘가에 부딪쳐서 강렬한 불꽃을 튕기며 무수한 스파아크를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 또 한 차례 저릿저릿한 전율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귓바퀴 근처에 밀착시킨 채 그동안 단절되었던 삼십 여년의 세월이 전화선 하나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신호음 소리를 마음 속으로 세고 있었다.
이윽고 서너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기 저쪽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에, 강현굽니다.」
강현구(姜賢九), 바로 그 남자였다.
이번에는 명치 끝이 뜨끔하면서 숨이 콱 막히는 듯한 충격이 왔다. 나는 바짝 타 들어가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떠듬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저어 ...... 배정주라고 ...... 잊혀지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떠듬거리는 내 목소리도 못마땅했지만 이쪽의 이름까지 대면서 상대방의 기억을 구걸하려는 듯한 내 말투에 은근히 짜증이 나서 나는 순간적으로 괜히 전화를 걸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저쪽에서는 잠깐 동안의 침묵 끝에 이내 들뜬 듯한 음성으로 반응이 왔다.
「아니, 정주씨 ...... 이거 얼마 만입니까?」
「참 오랜 만이네요.」
상대방의 반응이 의외로 곰살갑게 나오는 바람에 까실까실 털이 돋았던 내 목소리가 문득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듯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부드러운 그의 음성 몇 마디에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장마비에 흙담 무너지듯 스르르 주저앉음을 느끼며 자기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강현구의 말에,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로 대답을 얼버무렸고, 벌써 삼십 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서로 알아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횡설수설 지껄이고 말았다.
결국에는 내 핸드폰의 번호까지 또박또박 그에게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을 때, 나는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모조리 팽개친 듯한 허탈감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창문 밖에 뻗어 있는 감나무 가지의 무성한 잎들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유월의 햇살 속에서 기름을 바른 듯이 번들거리는 감나무 잎새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갓 잡아올린 생선처럼 파득거리며 뒤척이고 있었다. 나는 싱싱하고 발랄한 계절 앞에서 까실하게 늙어가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기야 여자 나이 쉰 일곱이면 이미 할머니 소리를 들어도 섭섭할 나이가 아니지만 강현구에게 전화를 걸고 난 뒤끝이어서 그런지 세월의 덧없음이 새삼스럽게 서글픔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이십대의 처녀 적 모습을 언제까지나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강현구와 나 사이에 기억되고 있는 서로의 모습은 여전히 이십대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어느날 갑자기 내가 쉰 일곱의 모습으로 그 앞에 나타났을 때를 상상한다는 것은 달갑잖은 일이어서 나는 내심 내 외모에 대하여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허뚱거리는 걸음으로 현관문 근처에 걸려 있는 체경 앞으로 다가가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눈 가의 잔 주름과 얼굴 여기저기에 이끼의 포자처럼 달라붙어 있는 기미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라 하더라도 헐렁한 홈웨어 속에 감춰져 있는 내몸의 두리뭉실한 살덩이가 이미 남들의 입방아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이른바 여편네의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도망치듯 얼른 체경 앞을 벗어나서 거실의 소파에 털석 몸을 주저앉혔다.
그동안 나는 너무나 오래 동안 나를 잊으며 살아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목표도 없이 그냥 내달려온 듯한 내 인생이 새삼스럽게 초라하고 서글프게 느껴졌다.
식어버린 커피잔을 기울여 말라붙은 입안을 축이며 나는 거실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강현구와 통화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믿어지지 않는 현실로 내 마음을 뒤숭숭하게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며칠 전, 대학 동창인 영미가 빅뉴스라면서 호들갑을 떨며 강현구의 소식을 전화로 알려 왔을 때만 해도 나는 반신반의 속에서 무덤덤하게 전화를 받았었다.
영미의 전화에 의하면 신간 소설을 소개하는 신문의 문예란에서 강현구의 이름을 발견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나의 옛 애인이었던 그 사람이라는 심증이 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강현구의 소설집을 샀는데 불행히도 작가의 사진은 실려있지 않아서 더 이상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강현구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한둘이겠니?」
내가 심드렁한 음성으로 영미의 호들갑에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자 영미는 펄쩍 뛰는 시늉을 하며 자기의 예리한 추리력이 빗나갈 리가 없다며 바득바득 우겨댔다.
「그 사람이 K대학 국문과 출신이니까 K대학 교수가 됐을 테고, 연애시절에 너한테 보냈던 편지를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 사람이 쓴 소설과 편지의 문체가 일치한다는 것쯤이야 담박에 알아챌 수 있지. 그 강현구가 이 강현구에 틀림없어. 아니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지마.」
영미의 호들갑은 이쪽의 분위기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혼자서 의기양양 했고 기고만장했다.
대학시절의 영미는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일상적인 대화에도 곧잘 문학작품의 어느 구절을 인용하거나, 환상적인 소설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혼동하는 듯한 돌출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주변을 놀라게 하거나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 잦았었는데 이번의 경우도 신문의 문예란에 소개된 기사를 근거로 강현구가 K대학의 교수이며 작가라는 사실을 알아내어 나에게 전화로 그의 소식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강현구의 소설집을 사서 읽고, 전화까지 걸어준 영미를 비난할 수는 없었지만 이산가족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도 아니고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일도 아닌데 남의 일에 그처럼 관심을 가지고 흥분하는 영미의 성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생각에 나는 씁쓸한 마음이 들어서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덤덤한 어조로 그저 고맙다고만 했더니, 영미는 눈치도 없이 한 술 더 떠서 남의 비위를 긁어놓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왜, 만나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쪽이 교수가 되고 소설가가 됐다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니?」
「자존심은 무슨 ......」
상대편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 내키는 대로 지껄이는 영미의 말이 불쾌해서 나는 몇 마디 싫은 소리로 쏘아줄까 하다가 그의 성격이 원래 그럴 뿐 악의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가슴으로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겨우 눌러 참으며 입안으로 웅얼거렸다.
그러나 영미는 내 기분을 도무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니가 만나기 어색하면 내가 한 번 먼저 만나볼까?」
영미의 이 말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만나서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하기 뭘 어떡해? 궁금하잖니,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
「너도 참 악취미다. 별걸 다 궁금해 하고 별걸 다 보고 싶어하니 ......」
「별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니?」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니가 한심해서 그런다.」
「한심하다구? 너를 생각해서 정보를 제공했을 뿐인데 ......」
「그게 나를 생각해 주는 거니? 이만 전화 끊자.」
나는 더 이상 전화로 수작을 하다가는 무슨 험한 말이 나올지 몰라 매몰차게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영미가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본의 아니게 기분을 언짢게 했으면 사과한다는 것이었다. 영미의 무던한 점이 바로 이런 성격에 있었다. 토라져서 심통을 부리거나 뒷전에서 입방아 찧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갑게 구는 것이 영미였다. 이같은 그의 붙임성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학시절부터 이 나이가 되도록 나름대로의 친구로서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가 또 흘렀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가 또 시작되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남편이 언제나처럼 이쑤시개를 입에 문 채 서둘러 차를 몰고 공사현장으로 떠나고 나자 집안이 절간처럼 적막하게 느껴졌다.
남편은 몇 달 째 정릉 유원지 입구에 다세대 주택 여러 채를 신축하고 있었다. 명색이 건축회사의 사장이면서 도무지 양복이라고는 몇 년 동안 걸쳐볼 생각도 안 하고 겨울에는 가죽점퍼 하나로, 그리고 여름에는 반소매의 남방셔츠나 티셔츠로 살아가면서 공사판을 무대로 인부들과 어울려 돈과 술에만 매달려 있는 남편의 모습이 이날따라 그렇게 천박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남편의 나이도 이제 예순이다. 결혼해서 이제까지 이십 팔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온갖 풍상 다 겪어 오면서 경제적인 여유는 그런대로 찾았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겨울 잔디밭처럼 메마른 남편은 아등바등 돈에만 매달려 멋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부부라는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남의 일처럼 낯설었다. 그동안 나는 남편이라는 사람의 성격이나 풍모에 대하여, 혹은 그의 생활신조나 취향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남남처럼 살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늘상 하던 버릇대로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일터로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박스러움을 느끼고, 이십 여년에 걸친 그와의 부부생활을 낯설어한다는 것은 강현구의 소식을 전해준 영미의 전화가 촉발시킨 의식의 반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내심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마음 속으로 강현구과 남편을 서로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등줄기로 벌레라도 기어가는 것처럼 스멀거리는 가려움증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무슨 전설 속의 까마득한 옛 이야기처럼,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30여년 전 중서부 전선 가까이 있는 Y읍의 여관방과 철모 속에서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그의 불안한 눈빛을 선연히 떠올리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검푸른 수림(樹林)의 바다였다.
서울에서 덜컹거리는 버스로 두 시간 여를 달려 중서부전선 가까이 있는 Y읍에 도착한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 앞을 가로막는 첩첩한 산줄기와 검푸른 녹음에 완전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길거리에도 온통 검푸른 국방색의 물결이었다. 군용 트럭과 찝차와 대오를 지어 행진하는 군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국방색의 물결이 두렵고도 낯설었다. 감색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의 평범한 내 옷차림이 오히려 눈에 띄는 거리였다.
나는 속 날개가 뽑히고 다리가 잘린 풍뎅이처럼 제자리에서 맴을 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나가던 군용트럭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야비한 휘파람 소리가 내 몸에 가래침처럼 달라붙고 있었다.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멀어져가는 트럭 위에서 구리빛 얼굴에 이빨만 하얗게 보이는 병사들이 주먹으로 허공을 내지르며 나를 향해 기성을 지르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그려 넣은 '서울다방'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나는 길을 가로질러 다방의 주렴을 손으로 걷어 올리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실내에 들어섰다. 거기에도 국방색 복장의 군인들이 테이블의 여기저기를 차지하고 앉아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향해 일제히 시선을 꽂았다.
나는 뻣뻣하게 굳어진 몸을 겨우 지탱하며 구석진 자리 하나를 발견하고 그리고 발을 옮겼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소매 없는 셔츠에 손바닥만한 헝겊조각으로 겨우 아랫도리를 가린 듯한 미니스커트의 아가씨가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다가오더니 테이블 위에 엽차를 내려놓으며 빠안히 나를 내려다보고 곁에 섰다. 주문을 받으려는 자세였다.
「여기 시원한 걸로 주시고요 ......」
나는 그녀에게 마실 것을 주문하고 내가 찾아가는 부대의 위치를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아가씨는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녹음 테이프를 틀어놓듯 칼피스, 냉커피, 콜라, 사이다 등을 숨가쁘게 주절거린 뒤에 내 얼굴을 또 빠안히 내려다 보았다.
「칼피스로 주시고요 ...... 그런데 혹시 ...... 7279부대 12중대를 찾아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아시나요?」
돌아서려는 아가씨를 향해 내가 빠른 어조로 이렇게 물었을 때, 건너편 자리에 홀로 앉아서 꼬깃꼬깃 접은 신문을 뒤적이고 있던 젊은 군인 하나가 아가씨보다도 먼저 말을 거들고 나섰다.
「12중대요? 면회오셨나요?」
나는 젊은 군인을 향해 그렇다는 표시로 고개를 잠깐 끄덕여 보였다.
「누굴 면회오셨습니까? 제가 12중대에 있거든요.」
젊은 군인은 아예 몸을 반쯤 일으키며 따지듯이 물었다.
「강현구 소위라고 ......」
「아, 강소위님요, 바로 우리 소대장님이신데 ......」
군복 가슴팍에 김영호라고 새겨진 하얀 명찰을 달고 있는 그 젊은 군인은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을 텐데 내가 강현구의 이름을 대자마자 깍듯한 태도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고, 자기는 휴가가 끝나서 지금 귀대하는 길이니 부대 앞 위병소까지 안내하겠다며 내가 칼피스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음료수 값까지 지불하고는 다방 문 앞의 건들거리는 주렴을 한 손으로 거머쥐고 내가 나오기 좋도록 배려하는 등 온갖 친절을 다 베풀었다.
병촌(兵村)의 분위기가 낯설고 두려워서 애가 씌우던 차에 김영호 일병을 만난 것은 구세주를 만난 셈이어서 나는 땀 냄새를 풀풀 날리며 앞서서 걸어가는 김영호 일병의 꽁무니를 종종걸음으로 뒤쫓으며 마치 손아래 동생을 앞세우고 나들이 떠나는 누나처럼 마음이 포근해짐을 느꼈다.
부대의 위병소까지는 십분 거리였다. 군화가 유난히 번쩍거리고 말쑥한 복장을 한 병사 두 사람이 총을 멘 채 부동자세로 마주보며 위병소의 정문을 지키고 있고, 위병소의 건물 벽에는 '3인 이상 집단 행동하라' '일몰 이후 무단 행동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이상 위반자는 무조건 발포한다' 등의 경고문이 붉은 페인트로 씌어 있어서 나를 바짝 긴장시켰다.
「저기 앉아서 잠깐 기다리십시오.」
김영호 일병이 소나무와 단풍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잔디밭을 턱으로 가리키며 나를 돌아다 보았다. 위병소 앞에 작은 공원처럼 가꿔놓은 잔디밭이 있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잔디밭으로 걸어가 단풍나무 밑에 있는 녹색 벤취에 걸터 앉았다. 위병소의 건물 쪽으로 다가간 김영호 일병이 무슨 구호를 외치며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하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아마 휴가증명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위병소 뒤쪽으로 산기슭의 여기저기에 군인들이 기거하는 듯한 막사가 멀찌감치 바라다 보였다. 그런데 얼룩 무늬로 위장된 나지막한 단층의 막사들은 와글와글한 병사들의 함성으로 들끓고 있으리라는 내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 조용한 정적 속에 숨을 죽인 채 엎드려 있었다.
나는 문득 강현구가 저 막사 어딘가에서 병영생활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시울이 달아오르고 코 끝이 찡하게 아려오는 듯한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강현구 그 사람 하나만을 생각해서 느껴지는 서글픔만은 아니었다. 때마침 서쪽 산봉우리에 걸린 저녁해가 산기슭의 반을 그늘로 채우고 나머지 반은 빨간 노을로 불태우고 있는 대각선의 낯선 구도가 왠지 모르게 나를 처연한 분위기로 몰아넣고 있었고, 강현구 그 사람에게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은 채 불쑥 이 곳을 찾은 나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연민이 함께 뒤섞이면서 나를 이처럼 초조(初潮)를 맞은 소녀처럼 우울한 서글픔 속에 몰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위병소의 창문에 붙어 서 있던 김영호 일병이 내 쪽을 흘낏 뒤돌아보며 안에 대고 무슨 말을 하고 있었고, 창문 안에서 누군가의 머리가 반쯤 밖으로 나오며 역시 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자 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그들은 강현구 소위의 애인쯤으로 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풀어진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발 끝으로 잔디밭을 비벼댔다.
뽀얀 흙먼지가 내려앉아 있는, 굽이 낮은 내 구두 코 위로 개미 한 마리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핸드백 속에서 티슈 한 장을 뽑아 들어 개미를 떨어내고 내친 김에 구두의 흙먼지까지 쓸어내렸다.
그때 위병소의 창문에 붙어 섰던 김영호 일병이 빠른 걸음으로 내게로 오고 있었다. 그는 거의 뛰다시피 내게로 다가와서 퍽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강소위님이 지금 부대훈련에 참가 중이셔서 밤에나 돌아오신다는데 ...... 오늘 주무시고 가실 거면 여관방을 하나 잡아놓고 기다리시는 것이 ......」
그날 밤, 나는 다른 여관보다 값은 좀 비싸지만 시설도 괜찮고 깨끗해서 주로 부대의 장교님들이 이용한다고 김영호 일병이 안내해준 여관방에서 밤늦도록 강현구를 기다렸다.
방에는 이불 하나가 정갈하게 깔려 있었고, 그 이불 머리에 베개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수줍은 듯이 이불자락으로 반쯤 가려져 있는 베개의 모습이 퍽 야릇하게 느껴져서 나는 이불 자락을 끌어다가 베개를 덮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여관방의 창가에 붙어서서 산기슭의 부대 막사 쪽에서 마치 반딧불이의 야광체처럼 발갛게 흘러나오는 불빛을 건너다 보며 울컥 가슴을 치며 목구멍으로 기어오르는 서러움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늘이 붉은 색 페인트 통을 통째로 쏟아 부은 듯, 노을이 처연한 빛깔로 타오르던 저녁 나절부터 이 창문 앞에서 몇 시간을 홀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그냥 서울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것은 자존심이기도 했고, 비참하도록 초라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에 대한 증오 같은 감정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 뱃속의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에 묻어 둘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다짐을 받자는 생각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나의 임신 사실에 대한 강현구의 반응이라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는 생각 끝에 어렵게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나의 임신 사실을 그에게 알린다는 것은 여러 모로 찜찜하고 서글픈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서야 땀에 절어 있는 군복을 채 갈아 입지도 못한 채 강현구가 허겁지겁 여관방으로 찾아왔고, 철모의 그늘 속에 감춰진 피곤한 그의 눈이 나의 동태을 요모조모 훑어내리며 무슨 낌새를 채려고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방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가 천천히 철모를 벗으며 힐난에 가까운 퉁명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
나는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눈썹 근처의 이마를 경계로 위쪽은 비교적 하얀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유난히 광채가 번쩍이는 눈의 아래 부분으로부터 목덜미까지는 햇볕에 그을려서 구리빛으로 번들거렸는데 그의 얼굴에서 그처럼 무섭고 엄격한 표정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갑자기 찾아온 나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몰라도 여자의 몸으로 혼자 이런 산간벽지까지 찾아왔는데 다짜고짜 이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죄인 다루듯이 몰아세우는 그의 태도가 섭섭하여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을 본 그가 잠시 몸을 움찔 사리는 듯하더니 아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음성으로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가 해서 깜짝 놀랐잖아. 그리고 여기가 어딘데 연락도 하지 않고 갑자기 찾아오면 어떡한단 말이야.」
그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일만 해도 그가 부대훈련을 나갔다가 마침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며칠 후에 돌아온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첩첩산중에 찾아 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갔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행동은 얼마나 무모한 짓이 돼버렸을까. 그렇다.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아니, 지금 그를 만나고 있는 이 자체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시당초에 이런 일로 그를 찾아올 일이 아니었다. 그와 상의할 일도 아니었고, 그를 회유할 일도 아니었고, 그에게 매달려 하소연할 일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하여 내 스스로 결정해서 결행할 나만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생각의 가닥이 잡히니 뜻밖에도 모진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
다분히 비꼬는 듯한 쌀쌀한 대꾸에 강현구는 찔끔하는 눈치를 보이며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내친 김에 한술 더 떴다.
「곧 날이 밝으면 첫 버스로 떠날 테니까 내 걱정 말고 부대에 들어가 보세요. 피곤할 텐데 괜히 나 때문에 헛걸음 했네요.」
강현구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나는 방에 붙어 있는 세면장으로 들어가서 언짢은 감정의 퇴적물들을 쓸어내듯 오래도록 손과 얼굴을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씻었다.
그리고 내가 세면장에서 나왔을 때였다. 그때까지 방 한가운데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강현구가 갑자기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자기 몸안에 나를 끌어들였다.
「미안해. 연락도 주지 않고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내 머리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더운 콧김에 묻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품을 벗어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생각하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동안 그대로 서있었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그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팔에 힘이 가해지며 나를 이부자리 위에 쓸어뜨렸다.
실로 순간적인 일이었다. 나는 싸늘하게 식어 있는 내 몸 위에 엄청난 무게로 실려 있는 그의 몸이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해서 그의 가슴팍을 완강히 밀어내며 이부자리 위에 발딱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했다.
「연락도 주지 않고 갑자기 찾아온 것을 자꾸만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는 현구씨 생각이 맞아요. 나, 현구씨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 아니예요.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던 거예요.」
나에게 가슴팍을 떠밀린 수치심에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이 멀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강현구가 이번에는 몹시 불안한 눈으로 나를 건너다 보았다.
「나, 임신했어요. 그래서 알려드리기라도 해얄 것 같아서 찾아왔을 뿐이에요.」
끝내 참으려 했던 마지막 말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나오자 나를 바라보던 강현구의 시선이 풀석 꺾이며 갈팡질팡 흔들렸고 무릎을 감싸 안았던 손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강현구와 만난 것은 K대학의 ROTC 축제가 있던 2년 전의 5월 어느 날이었다.
그때 강현구는 대학 3학년인 1년차 후보생이었는데 2년차 후보생인 4학년 선배들이 다분히 의식적이라 하리만큼 어깨를 뒤로 발랑 젖히고 막대기처럼 뻣뻣한 자세로 축제가 열리고 있는 교정의 잔디밭을 직각보행으로 누비고 있는 데 반하여 잔뜩 주눅이 들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흐늘거리는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1년차 후보생들의 무더기 속에서 그는 금방 눈에 띌 정도로 소년처럼 해맑은 얼굴의 귀공자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 영미가 강현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키가 크고 멋쟁이로 생긴 사람이 너의 파트너라고 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강현구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며칠 전에 파트너로 짝이 지어진 사람들이 사전에 함께 만나는 예비 모임이 있었는데 나는 회사의 야근에 걸려 그 모임에 참석치 못했던 관계로 파트너로 정해진 강현구의 모습을 축제날의 현장에서 먼 발치로 처음 보게 된 것이었다.
「어때, 멋있지? 네 파트너만 아니었으면 당장 가로채고 싶었다니까.」
영미는 정말로 당장에 가로채고 싶은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그만한 일쯤은 하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영미에게 등을 밀려 강현구 일행이 둥그런 원을 그리며 서 있는 잔디밭의 중앙으로 주춤주춤 걸어 들어갔다.
그동안 영미는 서울 시내 몇몇 대학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는 문학서클에 나가서 알게 된 K대학의 이정기라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더니 그의 부탁으로 ROTC 축제의 파트너로 초청을 받았고, 이정기의 친구인 강현구의 파트너로서 나를 천거했던 모양이어서 나는 엉겁결에 등을 밀려 축제장에 나오긴 했지만 축제의 분위기가 자꾸만 낯설고 서먹해서 괜히 따라왔다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시종 말 없이 축제마당의 한 구석에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미소를 입가에 띠고 앉아 있는 강현구에게서 어떤 편안함을 느끼며 신선한 충격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엉겁결에 등을 밀려 축제장에 나온 탓으로 옷차림도 그렇고 마음도 안정되지 않아서 바늘방석 같던 축제마당이었는데 강현구는 이같은 내 심정을 속속들이 헤아리고 있다는 듯이 떨떠름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는 파트너인 나에 대해서 매너나 말솜씨가 결코 세련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툴고 더듬거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서툴고 더듬거리는 그에게서 나는 삶의 진솔함과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스케줄에 따라 축제는 무르익어 갔고 조명이 비춰지는 무대 위에서는 파트너끼리 춤을 추는 순서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자 질서와 규율의 사슬을 풀고 무대 위로 뛰어오른 후보생들이 광란의 춤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막대기처럼 뻣뻣하던 후보생들의 몸이 문어발처럼 유연하게 흐느적거리고, 도도한 척 새침을 떨던 여성 파트너들이 내숭스런 가면을 벗고 함께 어울어져 어지러운 춤판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현구가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슬그머니 나를 데리고 축제마당을 벗어난 것은 이때였다.
처음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우리 나갑시다'했을 때 나는 당연히 무대 위의 춤판을 생각했기 때문에 다소 의외라는 생각에 멈칫거렸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가 성큼성큼 무대와는 반대쪽의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자석에 끌려가는 가벼운 쇠붙이처럼 자리에서 발딱 몸을 일으켜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축제마당을 빠져나온 강현구는 교문 앞 중화요리집에서 자장면 두 그릇과 군만두 한 접시, 그리고 성냥불을 켜 대자 파란 불꽃을 넘실대며 타오르던 독한 배갈 한 병을 시켰다.
「군대는 개인 행동을 금한다는데 이렇게 혼자 빠져나와도 괜찮겠어요?」
강현구의 갑작스런 일탈 행위가 불안하여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강현구는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겠지요, 오늘은 ......」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도 거리낌 없이 마주앉아 자장면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런데 술 안주용으로 시킨 군만두에 손을 대지 않는 나를 보고 강현구는 붕어 눈깔만한 하얀 사기그릇의 술잔을 내 앞에 들이밀며 한 잔만 마셔보라고 권했다. 아마도 군만두를 먹게 하려는 배려 같았다. 몇 번의 사양 끝에 나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코 끝에 스치는 냄새만으로도 독한 술인 줄 짐작하고 있었지만 워낙 앙징스럽게 작은 술잔이어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했는데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술기운이 화끈한 통증처럼 목줄기를 훑어내리는 바람에 나는 갑자기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심한 기침을 쏟았다.
「독한 술이니까 처음 마실 때는 혀 끝에 바르듯이 해서 넘겨야 되는 건데 ......」
그러면서 강현구는 얼마나 독한 술인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배갈 병을 기울여 재떨이에 술을 조금 따르더니 성냥을 켜서 불을 붙였다. 그러자 파르스름한 불꽃이 뱀의 혓바닥처럼 넘실대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술이 제 몸을 불살라 피워내는 불꽃이 나에게 전혀 두려움을 주지 않고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나는 내 앞의 술잔에 남아 있던 배갈을 입안에 털어 넣고 군만두 한 개를 우적우적 씹었다. 목줄기가 따끔했지만 아까처럼 기침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강현구가 그런 내 모습을 건너다 보며 역시 보일 듯 말 듯한 청량한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그날 이후 강현구와 나는 서로에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은 이성(異性)인 여성이나 남성으로서의 일부라기보다 빈 공간을 채우는 바람처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그가 채워주고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내가 채워주는 그런 의미로 그와 나는 서로에게 생활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누워서 딩굴며 책을 읽고 잠을 잘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방에는 시내버스 정류장까지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누구와 언제든지 통화할 수 있는 전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가 있었고, 단추만 누르면 절로 펴지는 자동우산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가 있었고 교양 있고 격조 높은 가정과 저택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없는 것이 있었다. 세상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넓은 가슴이 없었고 미래를 향한 강인한 도전의 꿈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폐쇄된 자신의 울타리 속에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남에게 간섭하는 일도 없었지만 남한테서 간섭 받는 것을 그는 너무나 싫어했다. 부모님은 그가 의사나 은행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국문과를 택했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서 와자지껄 떠들거나 패거리를 지어 활보하는 것을 기피했다. 그의 친구 이정기나 나의 친구 영미가 관여하고 있는 문학서클에도 그는 전혀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언제나 혼자였다.
이같은 그의 성격은 나의 성격과 일치하는 바가 많았다.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성격이 일치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즈음 퍽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도 내 생애를 통하여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될 만큼 곤혹스런 시간들이었다.
집안의 오빠가 무슨 사업을 한답시고 고향땅 강화도의 전답을 거덜내고 빚쟁이에 쫓겨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고, 홧김에 집을 나온 홀어머니는 강화읍의 자그마한 전세방에서 광주리에 생선을 담아 이고 다니며 파는 행상으로 연명하고, 결혼에 실패한 언니마저 친정집에 기어들어왔다가 집안이 그 꼴이니 갈 곳을 잃고 이 집 저 집 떠돌아 다니는 판국이니 내 생활에도 변화가 없을 리 없었다.
나는 다니던 학교를 포기할까 했지만 마침 건설회사의 타이피스트로 채용이 되는 바람에 S대학의 야간부로 학적을 옮기고 남산 밑 회현동의 지하 셋방을 얻어 자취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건설회사가 호황을 누리는 바람에 회사의 월급으로 학비와 생활비는 겨우 꾸려나갈 수 있었지만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서로가 연락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그래도 내가 직장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연락처의 구실은 톡톡히 하고 있었다. 멀리 강화도에서, 밥은 제때 먹고 샤느냐고,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우리 집안이 이런 꼴을 당해야 옳으냐고 울음부터 앞세우는 어머니의 전화로부터, 너만 편안하면 장땡이냐고, 내 취직자리도 좀 알아봐 달라고 보채는 언니의 주책없는 악다구니도 이따금 걸려오고, 지금은 경상도 어디에 숨어 살고 있지만 빚쟁이들의 성화만 없으면 곧 나가서 재기할 테니 두고보라고 여전히 허풍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오빠의 전화도 심심찮게 걸려왔다.
그러나 내 책상 위의 전화기에서 울려나오는 가족들의 사연들은 이처럼 한결같이 나를 우울하게 하고 있는 사연들 뿐이었다.
그리하여 마땅히 찾아갈 고향의 집도 없고 가족도 없는 나는 직장과 학교와 자취방의 삼각 구도로 짜여진 생활 영역 내에서 기계처럼 움직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단조로운 내 생활 속에 강현구가 뛰어들었고 강현구의 출현으로 내 생활은 사각구도로 바뀌고 말았다. 그리고 날마다 되풀이 되던 규칙적인 삼각구도의 생활에 비하여 강현구가 만들어 내고 있는 사각구도는 그 꼭지점이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 찍히는 바람에 그것이 정사각형이 되기도 하고 사다리꼴, 혹은 마름모꼴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기존의 삼각구도에서 꼭지점 하나를 임의로 제거해 버리고 강현구 자신이 그 꼭지점의 대행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기묘한 역삼각형의 구도를 이룰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퇴근 무렵에 회사 근처의 다방에서 나를 불러내어 영화관에 가거나 교외로 빠지는 바람에 학교의 강의를 빼먹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현구가 회사 근처에 나타나면서부터 이같은 소문이 회사에 퍼져 돌고 특히 나의 직속 상사인 김달중 과장의 심기를 자못 불편하게 뒤흔들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김달중 과장, 결론부터 말해서 지금의 내 남편이 된 김달중 과장은 그때 이미 나를 '시악시'로 점 찍어 놓고 요모조모 내 신상에 관한 조사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쪽이 고향인 김달중 과장은 그 흔한 '와이프'니 '아내'니 혹은 '부인'이니를 제쳐두고 한사코 '시악시'라는 호칭만을 고집하는 나이 지긋한 서른 셋의 노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왜 그의 '시악시'가 되었는지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엄연한 사실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강현구가 회사 근처에 얼씬거리고나서부터 김달중 과장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때로는 윽박지르는 시선으로, 때로는 간절한 호소의 눈빛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나를 조여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나에 대한 김달중 과장의 관심이 상사로서의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쯤으로 가볍게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관심은 간섭이 되고 강요가 되었다. 그리고 내 신상에 관한 파악이 끝난 후에는 노골적으로 물질적인 선심공세가 시작되고 있었다. 생일이나 명절 때는 나로서는 과분한 옷이나 악세사리를 선물하고, 심지어 강화도에 계신 어머니에게까지 선물을 챙기는 바람에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기가 일쑤였다. 따라서 김달중 과장의 이같은 관심과 배려는 마치 그가 내 생활주변에 쳐놓은 그물처럼 나를 부담스럽게 옭조이고 있어서 강현구와의 만남도 극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강현구와 김달중 과장을 통하여 남자들의 세계에도 질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물론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해서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서로의 얼굴은 알아볼 수 있도록 먼 발치에서 보아왔던 처지인데 강현구는 김달중 과장을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 불렀고 김달중 과장은 강현구를 '기생오래비 같은 놈'이라고 부르며 서로를 미워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상대방을 얕보며 미워할 때 두 사람의 표정은 질투와 시기로 눈에 핏발이 서 있는 것 같았고 입안 가득히 거품을 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남자의 이같은 질투 섞인 난폭한 언사들이 나로서는 전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귓가를 스치는 가벼운 농담처럼 부담없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어느 사이에 내가 이처럼 남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느물느물한 여유와 배짱이 생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두 남자 사이에서 교활하게 이들을 이용하거나 삼각관계를 즐겼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두 남자가 서로 품고 있는 질투의 질량에 비하여 내가 느끼는 상황의 심각성이 덜 해서인지 나는 물색도 모르고 두 사람 사이에서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서 이같은 라이벌 의식의 균형이 깨진 것은 강현구가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되고 보병학교의 12주 교육을 마치고 전방부대 소대장으로 배치가 될 무렵이었다.
그 즈음 강현구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었는데, 그가 ROTC를 선택한 것도 부모님의 뜻이 아니었고, 국문과를 졸업한 것도 역시 부모님의 뜻이 아니어서 그동안 대학시절 내내 부모님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던 데다가 생소할 수밖에 없는 군대라는 조직 속에 편입된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막연한 불안감과 초조를 느끼게 했던 것이다. 더구나 막연하게나마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김달중 과장 앞에 나를 남겨놓고 일단 자리를 비켜 설 수밖에 없는 그로서는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은 강박관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대배치를 며칠 앞둔 어느날 그는 나를 향해 어리광처럼 투정을 부렸다. 자기가 없으면 '능구렁이 같은 놈'이 더욱 기세등등하여 다가설 테니 거기에 안 꺾일 장사가 어디 있겠느냐, 결국은 자기 신세가 닭 쫓던 개가 되어 목놓아 울다가 비무장지대 철조망 앞에서 장엄히 산화할 것이라는 둥, 자못 신파조의 넋두리를 늘어놓더니, 하기야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며, 미래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없이 하얀 백지 한 장 달랑 받아들고 무슨 그림을 그려야 될지도 모른 채 앉아 있는 꼴이니 매사가 두렵고 불안하다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사실 이제까지 내가 본 강현구의 모습은 강인한 추진력이나 주도면밀한 계획성에 의하여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성격은 이성적이라기보다 감성적인 편이었고 사무적이라기보다는 예술가적인 즉흥성을 띠고 있어서 어떤 틀에 갇히기 싫어하는 일탈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같은 강현구에 대하여 이제까지 내가 품어왔던 감정은 너무나 단순했다. 생활에 대하여 아등바등 기를 쓰거나 기계적인 틀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과 의도적으로 꾸미거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천진스런 그의 언행이 상대적으로 각박한 내 환경과 대비되면서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것과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그것뿐이었다. 그와의 장래를 설계해 본다거나 남자로서의 그를 원했던 적은 없었다. 강현구 역시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일반 사회와는 다른, 군대라는 새로운 환경에 편입되려는 순간에 그는 허둥거리며 어리광같은 투정을 넋두리에 담아 쏟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외로움 앞에서 흔들리며 무너지는 강현구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외박을 했다.
30여년 만에 소통된 내 전화에 대한 응답으로 강현구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그날은 마침 소나기가 거쳐간 유월의 하늘이 유리알처럼 청명하게 빛나고 있는 토요일이었다.
「북악 스카이웨이의 팔각정에서 오후 6시에 만납시다.」
핸드폰에서 울려나온 강현구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방안 가득히 떠돌고 있었다. 약속시간까지는 7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밀렸던 빨래감을 찾아 허둥대며 세탁기에 쓸어담고 세탁기를 가동시켰다. 그리고는 진공청소기로 방안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낡은 진공청소기의 털털거리는 소음이 강할수록 방안의 구석구석에 쌓여있던 먼지와 세균들이 서로 머리를 부딪히며 빨려드는 것 같아 마음이 후련해 왔다.
나는 한 시간 가까이나 땀을 뻘뻘 흘리며 안방과 거실과 다용도실의 구석구석까지 진공청소기의 빨대를 들이대며 쏘다녔다.
그런데 낡은 진공청소기의 소음이 귀에 익은 소리 하나를 머리 속에 불러들이고 있었다. 중서부전선 가까이에 있는 Y읍의 병촌에서 강현구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서울로 돌아오던 새벽 버스의 덜컹거리던 소음이었다. 그리고 나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들은 강현구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하고 있다가 참담하게 일그러진 음성으로 더듬거리던 말이 그 소음 속에 묻혀서 들려오고 있었다.
「애기를 가졌다니 그럼 어쩌자는 거야. 나보고 지금 어쩌라는 말이냐고. 어떻게든 자신이 해결했어야 할 일이잖아, 그것은 ......」
강현구와 헤어져 수림(樹林)의 바다 같은 Y읍을 빠져 나오는 새벽 버스 속에서 나는 굳게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나 결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동안에 세탁기의 전원도 꺼져 있었다. 나는 빈 소쿠리에 세탁된 옷가지들을 가득 담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소나기 뒤끝의 햇살이 화살처럼 따갑게 정수리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세탁된 옷가지들을 건조대에 널었다. 건조대 두 개가 빽빽하게 찰 만큼 세탁물이 많았다.
싱싱한 이파리를 무성하게 매달고 있는 감나무 가지 하나가 옥상 근처까지 뻗어 올라와 있었다. 놀랄 만한 생명력이었다.
나는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방안의 벽시계가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큼지막한 뚝배기에 아침에 먹다 남긴 찬밥과 밥통에 남은 밥을 긁어 담고 냉장고에서 열무김치와 나물을 꺼내어 한데 쓸어 넣은 후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듬뿍 퍼넣고 비벼서 볼이 메어져라 먹기 시작했다. 남편이 부산으로 이틀 간의 출장을 떠난 후 처음으로 솟구치는 왕성한 식욕이었다. 뚝배기에 가득한 밥을 거덜내고서야 나는 식식거리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포만감에 스르르 눈이 감겨왔다. 나는 기분 좋은 오수에 빠지며 지내온 내 삶의 흔적들이 너울너울 눈 앞을 스치며 흘러가고 있는 모습을 몽롱한 의식 속에서 더듬고 있었다.
Y읍에서 돌아온 나는 이튿날 곧장 변두리의 허술한 병원을 찾아가 뱃속의 생명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직장에 사표를 냈다.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해서였다. 누구에게도 이런 사실을 알릴 수도 없는 나는 외롭고 슬펐다. 그러나 혼자서 이겨내야 할 혼자만의 아픔이었다. 그러나 강현구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자취방에 칩거한 지 며칠 만에 김달중 과장의 집요한 추적이 결국 나를 찾아냈고 나는 다시 회사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의외로 몸의 회복이 빨랐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사표는 수리되지 않은 채 김달중 과장의 손에서 병가(病暇)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사표를 내고 잠적했던 사건은 나를 자신의 '시악시'로 만들겠다는 김달중 과장의 집념에 더욱 불을 붙인 결과가 되었고, 그의 끈질긴 설득과 구애작전은 가속도가 붙어, 이에 지쳐버린 나는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내가 복직한 후 실로 여섯 달 열 이틀, 즉 195일 만의 일이었다. 내가 여기에서 세세한 날짜까지 헤아려 따지는 것은 내가 계산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결혼에 성공한 남편, 김달중 과장이 그 기간 동안 나에게 혼신의 정성을 쏟았던 우여곡절이 너무나 한이 맺혀서 푸념 삼아 들려준 이야기 속의 계산된 날짜일 뿐이다.
그런데 그의 저돌적인 추진력에 굴복해 버린 내가 나긋나긋하고 감미롭게 신혼생활을 보낼 리가 없었다. 그러자 남편은 이미 자신의 '시악시'가 된 나에게 폭언을 퍼부은 적도 많았다. 니가 시집은 나한테 왔지만 맴은 아직도 강현구 그놈, 기생오래비 같은 놈에게 있는 모양이니 지금이라도 당장 그놈 찾아 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라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폭언에 맞대응하지 않았다. 심통이 나서 괜히 허세를 부려보는 그에게 맞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였다.
남편은 근본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실했다. 장모님을 모셔다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함께 지냈고, 처남인 내 오빠의 사업자금도 보조했고, 처형인 내 언니의 재가를 주선하여 새 가정을 꾸미도록 하는 등 뿔뿔이 흩어져 있던 내 가족의 훼손된 상처를 아물게 한 것도 남편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남몰래 눈 뜬 짐승 하나를 가슴 속에 키우며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 눈감아 주고 있는 남편인 것이다.
내가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오후 다섯시도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창문을 통하여 비스듬히 비쳐든 햇살이 거실의 탁자 위에 보자기 만하게 걸려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또다시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잠 속에 떨어졌다.
내가 옆에 놓인 핸드폰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여섯 시 십분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강현구가 보내온 전화려니 생각되었지만 나는 빨간 불빛을 튕기며 불에 덴 아이처럼 울어대는 핸드폰에 손을 뻗지 않았다.
얼마 동안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핸드폰 소리가 딱 멈췄다. 아마도 지금쯤 강현구는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면 통화료가 부과되오니 원하지 않으시면 ......'하는 투명한 여성안내양의 메시지를 듣고 있을 것이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이층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잘 건조된 세탁물들이 갓 세수를 마친 말간 얼굴의 아이들처럼 건조대 위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과 함께 놀고 있었다. 나는 세탁물들을 걷어서 소쿠리에 담았다. 서녘 하늘이 노을에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그러나 역시 강현구를 만나지 않은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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