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호/젊은시인조명/14 외 1편/박재열
페이지 정보

본문
젊은시인조명
박재열
14* 외 9편
내가 대학 2학년 영시 교과서에서 눈길을 거두면
숲은 프림로우즈, 드넓은 초원과 카우스립의 향기입니다
런던에서 에딘버러로 달리면 까만 활자의 향기, 묵은 밀밭
영국 낭만주의 문학사에 자꾸 눈곱이 끼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신(神)은 풀밭에 온통 구름떼를 풀어놓아
영한대사전 빽빽한 행간에 자주색 히스가 피고
양떼가 민둥산 산허리를 뜯습니다 나는
눈곱 속에서 한 마리 양을 찾습니다 그래야 런던에서 에딘버러까지
후기낭만주의를 가르칩니다
눈곱을 읽으면서 학생들은 눈곱만한 입으로 워즈워스를 달달 외웁니다
두꺼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웅덩이 속
거친 시가 빽빽이 자라 거대한 눈물 하나를 조각품처럼 세웁니다
낭만주의 영시에서 다시 눈물을 거두면
영시 교과서는 온통 숲과 프림로우즈, 허니서클과 카우스립의 나라입니다
죽음을 주제로 시 한 편이
접힌 귀를 초원에 묻고 맑은 조수처럼 흔들립니다
또 다른 워즈워스의 은빛 사색을 학생들에게 읽히면
영한대사전 활자 속엔 숟갈 만한 호수들이 반짝입니다
15*
발가락 속에서 티눈이 자고 있네 찹쌀 한 알 속에 바다가 깨어 흔들리네 티눈 서쪽에 봄비가 오고 절뚝거리며 언덕을 넘는 내가 보이네 약을 바르면 따뜻하게 치자향 눈뜨는, 남녘에 종일 치자향 봄눈이 쏟아지네 눈은 남녘의 꽃이고 눈물이라네 눈물로 비빈 폭설에 큰물 내려가고 처녀들의 손바닥 속에서 샤프펜슬만한 자궁이 열리네 아득한 자궁 속에도 눈이 오네 누구와 자궁에서 사랑을 나눠도 비밀은 미나리처럼 파랗게 돋네 나는 자는 티눈을 깨워 스스스 하고 여윈 몸을 따뜻하게 비벼 주네 세상의 맑고 높은 잠자리가 알곡처럼 무너지네 우리의 밑은 습하지만 죽음은 혀처럼 짧고 편안하다네
16*
내가 아내의 방을 들어설 때
가구와 침대와 아내는 깊은 바다였습니다
내가 수초 사이를 건드렸더니
버지니아 울프 위에 꼬부라진 아내는 짝 동그랗게 오그려졌습니다
아내를 펼치렸더니 더 알처럼 단단해졌습니다
나도 알을 깨고 들어가 울프처럼 옹크렸습니다
아내가 포란한 것은 울프의 몽크 하우스였습니다
여간해서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백악질의 결 고운 언덕에 기차가 비단벌레처럼 기었습니다
누런 곡식단, 햇살이 허공에 높은 황금 탑을 이루었습니다
우즈강은 자살의 긴 울먹임을 자제하려 마지막 딸꾹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울프의 젖은 담배 연기가 남아 있었고 교회에선
혼인식인지 장례식인지 까마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포란한 정강이가 점점 투명해지며 그 안에도 검은 예배가 끝났습니다
교회 안은 뱀 알처럼 여럿이었습니다
정강이가 드디어 부화를 끝마치고 건강한 낫자루를 비껴놓았습니다
그리곤 근육질의 자궁이 쿵 하고 닫혔습니다 교회 종이
검은 혀로 느리게 조종을 울렸습니다
키만한 여름 해가 뜨건 슬픔처럼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나는 기어이 울프를 자살케 한 우즈강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을 흔들듯 눈물로 그 다리를 쓰다듬어 줬습니다
17*
내가 수업 시간에 그대에게 실언을 하면 강의실 가득 혀짜래기 꽃이 핀다 나는 가짜 시인이다! 라고 품었던 부끄러운 말을 하면 온몸이 누에처럼 오그라든다 나는 시를 쓴다! 라고 어렵게 말을 하면 백양나무가 삐쭉거리며 은색 어깨를 흔든다 나는 수업 시간에 랑그 속에 빠져 온몸에 난 잎사귀 속을 허우적거린다 내 입은 대롱 같아 무슨 소리든지 들어가면 웅얼웅얼 말이 되지 않는다
요 요 요 나는 누워서 움직인다 무지개 빛 스치는 화려한 파충류이다 나는 긴다 학생들 책상 위로 긴다 교재 위로 긴다 에어컨과 석유통 위로 긴다 배에 난 뻣뻣한 잎사귀를 세웠다 눕히며 즐겁게 강의실 밖으로 긴다 본관 돔 위로 긴다 세미나 하던 학생들이 도망간다 스륵 스륵 S자로 의자와 의자 사이 유연한 통로를 유연하게 긴다 뒤에 나의 새끼들을 달고 긴다 어제 부르튼 키스, 내 입에서 나온 단단한 구름, 드디어 빠롤이 나온다 구름에서 내 흙색 가슴이 나오고 가슴에서 독한, 또 모순된 담론이 튀어나온다
내가 그대에게 깎듯이 경어를 써가며 설명을 드리면 혀에서 쉬쉬 S자 바람이 나온다 나는 경어에 광포해지면 몸의 구멍에서 젖이 나온다 졸졸졸 내 온몸에 검은 젖이 돌고 밤알 만한 무덤이 돋는다 내가 교단에서 전염성이 강한 빠롤을 토하면 죽은 내 몸 곳곳에서 무덤이 깨어난다 무덤은 내 몸의 새싹이다 나는 사과처럼 무덤을 반으로 쪼갠다 안이 환하고 그 속은 스스스 아득한 돌밭이다 그대들은 까만, 까만 열매들이다 내가 교단에서 말문을 닫으면 백양나무가 흔들림을 거두고 곤혹스런 소리를 뱉는다 종강이 다가오자 세상의 모든 남녀가 모여 폭설처럼 혼음한다 그 신음소리에 산이 키를 높이고 누가 내 몸에 거석문화를 일으켜 세운다
18*
나는 연구실 책장 넷째 칸을 쥐똥나무로 둘러쌉니다 까만 열매가 겨울을 맞습니다 쥐똥나무의 열매가 힘겹게 은색 크리스마스를 넘습니다 내가 머리를 북북 긁으며 말문을 닫으면 쥐똥나무 고전주의가 열매를 맺습니다
대밭 주위는 쥐똥나무 생울타립니다 연구실에 눈이 옵니다 곧고 가는 쥐똥나무 줄기는 활의 재료입니다 눈 속에 파묻힌 곧고 호리호리한 유년시절을 골라 화살을 만듭니다 나는 몸을 곧은 겨릅으로 채웁니다 화살이 까마득히 올라간 하늘에 눈부신 금관악기가 떠 있습니다 언 손이 겨릅처럼 부러지면 금관악기가 드디어 붕붕붕 황금의 소리를 냅니다
죽은 쥐가 붕붕붕 등을 구부리고 발을 오그립니다 금관악기에 들녘은 천사들로 넘칩니다 사람들은 몰래 낳은 태아를 갖다버립니다 천사처럼 태아의 발바닥도 은색입니다 구청 쓰레기 봉투 속의 언 쥐, 쥐의 눈이 빤짝거립니다, 그리고 이층 슬라브 위로 계속 봄눈이 오고 얼음 밑으로 졸졸졸 성냥개비만한 개울이 흐릅니다 나는 성냥개비 불로 손톱 밑을 밝힙니다 쥐들이 분홍빛을 밝힌 후 머리카락 하나가 반쯤 하늘에 날아오릅니다
19*
레일에 귀대면 달그락 달그락 내 어릴 때가 들립니다 미카3 129 증기기관차가 나팔꽃 속 우리 집 앞마당을 지납니다 위험합니다 달그락 달그락 레일은 가장 깊은 곳을 울립니다 위험합니다 미카가 무쇠다리로 들이닥칩니다 아버지가 밤마다 시커먼 침목을 메고 올라오십니다 불쌍한 시지푸스, 주먹밥 위에 눈물이 그렁거립니다 나는 율동, 모량, 건천, 아화 . . . 꽃 같은 역명을 한 움큼 꼭 움켜쥐고 놓지 않습니다 나는 배고픔을 이 역명들 한 움큼 위에 풀어놓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자 내 흰빛 코스모스가 이 역두에 꽉 피었습니다
자유당의 처마 끝은 부패했습니다 미카가 꽥! 했습니다 어머니는 허리까지 차고 넘치는 검고 눅눅한 미카를 휘저어 나갔습니다 미카의 울음이 늑대처럼 울렸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지하에 가두시고 지하 통로의 뚜껑을 꽝 닫았습니다 골방에는 아버지의 대동아전쟁, 아버지는 야하다 철공소에서 미군 공습을 피해 막 반공호로 뛰어든 후였습니다 그 지하실에서 다시 6.25를 맞았습니다 미카는 갈기를 세우고 난폭하게 울고 섰습니다 아버지는 코발트색의 눈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골방에서 썩은 침목을 뽑아냈습니다 미카는 강제로 우리들 등뼈를 나란히 세우고 그 위로 레일을 깔았습니다 무릎에 피가 맺혔습니다 미카, 미카, 제발! 물그릇이 엎질러지고 거대한 바퀴가 폭풍처럼 모든 것의 경계를 뭉개고 분꽃들은 모가지를 비틀었습니다 아버지는 미카를 따라 사라졌습니다 그 후 미카는 객실에 그림자만 가득 태우고 지나갔습니다 아버지는 랜턴을 켜지 않았습니다 랜턴을 켜면 그림자가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미카의 레일의 10리 밖 리듬이 잔잔하게 목젖에 고였습니다
20*
이 초생달이 한 떨기 장미이다 이 초생달이 생사람의 한 토막 영혼이다 이 초생달이 떨기떨기 낱말에 터지는 샘물이다 뚝뚝 얼음 어는 슬픔이다 털이 폭신한 고양이다
초생달이 별 밭에 잔뿌리 내린다 창에 박힌 초생달을 당기면 찌지직 실뿌리 뜯긴다 뜯긴 수정덩이를 품안에 품는다 얼얼한, 얼음이 녹으면서 따뜻한 숨을 쉰다
품속 초생달을 만지면 온몸에 폭신한 털이 난다 짐승이 나를 만진다 짐승의 머리를 귀엽게 만진다 낱말의 성기는 이내 뻣뻣해진다 아직 염통이 팔딱거리므로 내 가슴이 같이 펄떡거린다 짐승이 나를 핥는다 어떻게 한 떨기 초생달이 수정덩이, 짐승, 언어, 다시 성기로 변하나 털 안의 눈망울이 치어다본다 털 속에서 꼬리가 여러 개 나오고 다리가 힘없이 눕는다 초생달은 털 많은 하늘에 품긴 외로운 성기이다
21*
옹강산을 두고 가랴 밝고 싸늘한 것이 품긴다 풀들이 높을수록 빗장 걸어 갈무리한 향기가 소슬하다 풀대궁 속의 소리를 털어 내면 햇살은 분홍으로 머물다가 눈송이처럼 천천히 내린다 모든 것이 순결을 앞세워 소리지른 것이리라 구름이 머문 숨가쁜 헬기착륙장에 잠든 고추잠자리, 햇살에 취해 날아가지 않는다 헐벗은 날도래 유충들이 파란 공기 속을 날아다니자 이 세상의 모든 잠언이 다가와 H자처럼 순결해진다
가을 나무가 물에 얼굴을 빠뜨린다 만중운산에 뜬 초생달도 버선을 빠뜨린다 소매에 싸늘한 바람이 들어 파르르 떠는 것은 묵은 감정이 북받치기 때문이다 산이 가팔라 내 긴 홀몸 빼내 갈 일이 죄스럽다 그래도 이 심산의 나무들은 내 슬쩍 비치는 형체를 데드마스크로 떠 오래도록 하늘에 효수하리라 고로쇠나무들이 서로의 허리를 나눠 가며 높은 곳을 받드니 산비탈은 등 넓은 밀교가 된다 골짜기가 깊고 영험하여 바위틈에 낀 한 도둑의 발도 잊으니. . .
22*
추석을 앞두고 암소를 잡았다
임신한 적이 없어 숯불에 구워 소금 간장에 찍을 암소, 헛간에 헌
영감처럼 암소는 잠자코 서 있었다 다리를 저려하며
암소는 처녀처럼 고개를 돌렸다
동구 밖으로 굽은 뿔
둥그런 눈의 흰자위, 그 속으로 사람들은 이슬비를 맞으며 대야를 들고
비계를 얻으려 모였다 날 것들의 양철 긁는 저공비행
처녀의 생명은 풍선 속의 공기처럼 쉬이이 빠져버렸다
흰자위가 함박눈처럼 떨어졌다
굵고 허연 혀가 뽑혔다 쇠파리가 전투기처럼 덤볐다
가죽이 분리되었다 가죽 안은 하얀 비단 순두부 자루, 순결한 유방이 난도질당했다
곳곳에선 반란처럼 풀썩풀썩 생명이 뛰놀았다
지퍼처럼 배를 열자 배속은 신(神)의 정원이었다
막 라일락이 피고 시내가 흘렀다 저리 가라 쌩쌩 알 카에다의 전사들!
여자들이 대야에 순두부를 퍼담았다 절구공이에서
뒷다리를 분리했다 머리를 분리했다 어디든 물컥 더운 김이 났다
귀에 묻은 시커먼 소음도 분리했다 네 다리 발목을 잘라 함지박에 담으니
피묻은 추상화가 되었다
테러단들은 또 자 편대로 신의 정원에 뛰어들었다 색색의 꽃 아이보리
연한 연두색의 전원, 눈이 녹고 아지랑이가 일었다 아지랑이를 손가락에 감고
색색의 꽃을 대야에 담았다 버드나무에선 움이 텄다
이 수줍은 정원의 나무와 계곡을 사각으로 나누었다
또 이른봄이 어두워 오자 아직
팔딱 팔딱 가슴에 뛰는 빨간 등을 십자가에 걸었다
23*
아내 속은 제 그리운 카타콤입니다 카타콤은 허물어진 흙담벽이고 그 안에 제 뼈가 부러져 있습니다 그 안에 제 태아가 자랍니다 아내는 제가 자라는 따뜻한 카타콤 입구를 막고 코스모스를 심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유혹의 담장을 올렸습니다 그게 무슨 유혹입니까 코스모스가 영혼을 손수건에 싸면 영혼은 가을 바람이 됩니다 유치환 시인의 노스탈자입니다 할 일이 없다구요?
제 영혼은 코스모스의 꽃잎을 한 장씩 건너가며 떼어 바람결에 놓습니다 꽃 바람개비가 하르르 돌면서 저만치 내립니다 그것은 코스모스의 카타콤입니다 왜 모든 것은 제 카타콤을 제 속에 품고 다닐까요 왜 그곳은 언제나 가을일까요 왜 아내의 어깨 위에는 늘 코스모스가 질까요 왜 또 아내는 블라우스 위에 풀밭을 베풀고 선사시대 벽화의 흰말을 풀어놓았을까요 왜 흰말은 구름을 보고 히힝 히힝 잠들지 못할까요 왜 아내는 돌아앉아 고개 숙여 기운 어깨받이로 세상을 울먹일까요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저는 아직 카타콤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카타콤은 거친 제 목소리일 뿐입니다 아내는 일찍부터 부리콜리 아스파라거스 파슬리를 썰어 넣고 마요네즈를 칩니다 아내는 겨울 온두라스 콜롬비아 나일 팜파스 같은 향기 나는 열대 우림 위에 케첩을 뿌립니다
오늘은 절 축하하는 날입니다 육질의 식용식물이 먹음직스럽습니다 축배 한 잔, 스프라우츠 파슬리 아스파라거스의 향을 유리 카타콤에 담습니다 마요네즈가 고소합니다 카타콤 속에 제 생명이 편서풍과 호우주의보와 푸성귀 사이에 잠깐 비쳤다 사라집니다 오 내 사랑 장미! 카타콤 속에 갇혔던 로버트 번즈가 신선한 장미 한 떨기를 노래하면서 태어납니다
시작메모
나는 못을 파고 수련을 심었다. 어느 마을 앞에서 왜개연꽃을 뽑아와 한쪽 구석에 심었다. 여름 날 수련을 많게는 네 송이까지 피었다. 몇몇 수련 잎은 뒤집어져 있다. 수련 잎을 개구리들이 좋아한다. 수련 잎에 개구리가 즐겨 앉는다. 수련 잎은 개구리에겐 멍석이고 정자이다. 어떤 놈은 가장자리를 두 발로 잡고 상체만 낸다. 연꽃 꽃색이 비친 개구리는 평화롭고 아기처럼 귀여워 보인다. 못 가로는 자작나무를 심어 그 은백의 줄기가 물 위에 흔들린다.
이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은 빠롤이다. 못은 그리 맑지 않다. 사물은 각이 지지 않고 형(型)을 띠지 않는다. 나는 빠롤을 찾는다. 구름은 흔적을 남기지 못하지만 구름과 휴지와 연잎은 물위의 세계를 만든다. 사람들은 사물의 각과 형을 떠 문법을 만든다. 미망이고 감옥이다. 더 이상 빠롤이 아니다. 기존이고 인용이고 상호주체이고 양식(mode)이고 체계이고 믿음이다. 랑그는 철지난 옷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다. 빠롤은 혼돈이고 튀어나옴이고 불안이다. 오래 전에 꽃을 지운 뼈 같은 미나리아재비이다.
약력
1949 경주 출생
1972 경북대 사범대 영어교육과 졸업
1976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78 현대문학 천료
시집 퀄퀄퀄퀄 물소리, 은유를 떼기치다
역서 크리스테바 읽기
현재 경북대 사범대 영어교육과 교수
- 이전글4호/초점/차이와 반복/이경수 02.06.14
- 다음글4호/기획/在日한국인 문학의 현주소/유숙자 02.06.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