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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신작시/이재훈/수레바퀴 지나간 길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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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재훈
수레바퀴 지나간 길 외1편
귓속에서 말이 끄는 수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모두들 잠을 자고 있을 때, 한 아기가 태어난다. 위대하여라. 대장간에서 들려 오는 풀무질 소리.
나는 주일날 하루 종일 TV를 보다가 뻣뻣해진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쇠망치 소리를 듣는다. 대장장이가 아이에게 반지를 만들어 준다. 아이는 반지를 끼고 축제에 간다. 바람이 북쪽으로 불고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나는 사랑하는 일이 계명을 어기는 일이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아이는 축제에서 뜨거운 입술을 가진 사람을 만나 춤을 추다가 반지를 잃어버렸다. 그리곤 장님이 되었다.
텅텅 대장간에서 쇠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시장 어귀 할매집에서 저녁으로 순대국을 먹고 방에 들어와 명화극장을 본다. 뻣뻣해진 머리 위로 내리 꽂히는 말발굽 소리. 방바닥에 길게 엎드린다. 아이가 말이 끄는 수레에 담겨 있다. 가슴에 수레바퀴 자국이 깊게 파인다.
황홀한 떨림
나무가 떨고 있다
자동차가 나무곁을 휙 지나자
나뭇잎 몇 개가 팔랑 떨어진다
팔짱 낀 연인이 사붓이 나뭇잎을 밟고 지난다
과자 부서지는 소리
남의 살 밟는 소리가 이렇게 경쾌할 수 있다니
기록된 역사에 의하면
148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밟았다
희망봉은 인간에게 밟히는 순간 역사가 되었다
외제차가 지나고 덤프트럭이 지나간다
목젖이 날카롭게 튀어나온 소년이
나뭇잎에 가래침을 퉥 뱉는다
나무는 떨고 있다
멀리서 아기를 잠재우는 자장가 소리에 놀라
살 몇 점이 팔랑 떨어진다
연인이 나뭇잎을 밟으며 꼭 껴안는다
몇 분의 시간과 공간이 바삭 부스러진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가
한 풍경으로 남아 떨고 있다
이재훈 / 1998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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