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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초점/50, 60년대의 丘庸시/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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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호
댓글 0건 조회 3,424회 작성일 02-06-14 19:32

본문

초점
50, 60년대의 丘庸시
 김동호
                      
                       1
  구용시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50년대 60년대의 시를 특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시가 그의 시 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40년대까지의 시가 잔잔한 서정이 기뜨는 종교 철학적 명상시가 주종을 이루는 靜的 시였다면 한국전 이후 십년간의 시는 과거의 틀을 크게 깨는 動的 시, 진통의 시였으며 다음 십년간의 시는 새로운 틀이 짜여지는 큰 움틈의 시라 볼 수 있다. 한국전이 그의 내면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거의 관념적이라 해도 좋으리만큼 조용했던 그의 의식의 세계에 큰 지진을 이르킨 것이 바로 이 동족상쟁의 비극이다. 때문에 그의 복잡 난삽의 시와 당시의 그의 어지러운 심층심리를 연결시켜 생각해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난해시를 서구의 초현실주의 영향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그의 난해시는 그의 '난해한'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仙佛的 구토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시[消印]이다. 해서 이 글에서는 [消印]을 통해 그의 난해시의 근거를 추적해보고 [消印] 이후의 시가 어떻게 발전되고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九曲] [九居]등 長詩로 갈 수 밖에 없는 그의 시의 무한지평적 성격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2
  [消印]은 우선 독자를 난감하게 한다. 끊일 것 같지 않은 난해한 문장의 지속이며 당혹스런 은유들이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풀롯이며 시도 아닌 소설도 아닌 애매한 장르의 문체가 목적도 없이 결론도 없이 우리를 지루하게 끌고간다. 전체적 모습이 구용이 당시 격고있는 정신의 암담한 상황을 반영하고있는듯 하다. 이런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전체적 조감과 함께 세밀히 파고들어가는 인내가 필요할 것 같다. 군데 군데 살을 떼어서 조직검사를 해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우선 서두 부분을 떼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머리위를 똑바로 쳐다보며 기묘한 꽃무늬의 천장지天井紙에 붙은
       거미를 비짜루로 후려치려는데 그 거미가 황금의 조상품彫像品으로 변하였다.
       내 동정同情이 그러한 작용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황금을, 즉
       그러한 스스로의 주저를 후려갈겼다. 뜻밖에 진한 진물이 책상에 떨어진
       거미 배에서 내밀었다. 고름 같은 진물이 전기 코일 처럼 세밀히 감겨있을,
       햇빛에는 오색이 영롱해야 할, 그러란 견사絹紗가 아님을 알고 나는 배반당한
       공허를 느껶다.            

          이 작품은 끊임 없는 물음으로 파들어가야할 작품일 것 같다. 표현에 있어서나 풀롯에 있어서나 상징인물들이 무수한 물음을 갖고 나타난다. 그 만큼 갈등과 방황 무의미, 무의미와의 싸움이 깊이 배여있는 작품이다. 어쩌면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이 작품의 목적인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묘한 꽃무늬의 천정'은 무엇일까. 거기에 붙은 거미는 무엇이며 비짜루로 후려치려는데 그 거미가 황금 彫像으로 보였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同情이 그를 황금으로 보게 한 듯 해서 황금, 즉 '나 스스로의 주저를 후려갈겼다'는 것은 무
엇일까. 뭉개진 거미에선 전기 코일 처럼 세밀히 감겨있을 오색이 영롱한 견사가 아니라 진한 진물이 터저나온 것을 보고 배반당한 공허를 느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것은 시인이 직접 경험한 것일까 아니면 상상의 이야기일까. 불과 8행에 불과한 시행에서 이렇게 많은 물음이 쏟아져나온다. 그렇다면 800행에 가까운 이 시 전체는 얼마나 많은 물음을 불러이르킬까. 조곰만 더 읽어보자. 나와 하숙집 소년은 무슨 관계일까. 내가 죽인 거미와 소년이 밟아버린 나비는 어떤 관계일까. 내가 죽인 거미는 실제 죽인 것일까. 꿈속에서 죽인 것일까. '개성적인 권태로 보이는 불과 규격의 물과 저변의 영상'은 무엇일까. 마음의 바탕을 핏빛으로 흔들어버린 의식속에서도 止水面鏡엔 여자의 死顔이 나타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여자의 넋도 거미의 부르짖음도 나의 목소리도 나비의 호소도 아닌, 취조관이 나를 부를 때 마다 속삭인 일종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취조관의 팔목에서 태양과 함께 시침이 돌아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려는 것일까. 이렇게 묻다보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중요한 물음 몇만 더 묻고 이 작품의 진단 결과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녹빛 외투의 여자와 거미와 소년과 나비와 나의 인형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 특히 나는 무엇일까. 살인범으로 오해를 받아 취조를 받다가 끝내는 囚人이 되는 나, '모든 애정을 죽인 살인자'라고 자책하며 옥고를 스스로 기다리는듯한 나, [죄와 벌]의 주인공 같기도 하고 [이방인]의 주인공 같기도 하고 [날개]의 주인공 같기도 한 나는 무엇일까. 녹색 외투의 여자는 무엇일까. 부유한듯한 여자인데 한밤 마지막 전차에서 전차표가 없어 운전수와 실갱이를 버리다가 내가 대신 내준 차표로 난처한 입장을 모면하고 그것을 계기로 나에게 지나친 호감을 보이려했던 여자.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날밤 그 여자는 죽고 나는 전차표 하나 대신 내준 일로  살인범에 몰리게 되는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의 인형은 무엇일까. 이 작품속에서 많은 부분에 걸쳐 언급되고 묘사되는 나의 인형의 본질은 무엇일까.  
  녹색 외투의 여자는 전작품속에서 봐야 하겠지만 편의상 그녀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묘사되어있는 한 부분을 보기로하자.

       그러나 나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목소리가 있었다. 동굴에서 또아리를
       풀고 전등불 밑으로 나온 것은 언제 전차에서 나렸는지 녹빛 비단 암컷
       뱀이였다. "아까는 실례했군요." 나의 오만하던 여자는 앞까지 오자 썩은
       능금 냄새를 풍기며 말하였다. "---바쁘지 않으면 차나 한 잔 들까요."
       녹빛 외투 여자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앞서 간다.    

       ----녹빛 외투 여자의 예의는 나를 께름직하게 하였다. 녹빛 외투 여자는
      자랑스레 "댁의 주소 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사람을 좀 보낼까 하는데....
      신세를 졌으면 으레 인사쯤 있어야 하니까요. 비록 전차표 한 장이지만" 하고
      종알거렸다. 나는 戱 的인 혼란을 느꼈다.  

  이 대목을 읽으면 마치 라스크로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노려보는듯한 눈길이 느껴진다. 모두가 거지 처럼 살아가는 전후의 빈곤속에서 윤기 흐르는 녹색 외투를 입은 여자. 전차표가 없다며 '전차표의 근 백배나 되는 고액환 지폐'를 내놨던 여자. 전차표 한 장 내준 꾀죄죄한 청년에게 분수 이상의 선심을 쓰려했던 여자. '나의 자존심을 짓밟은 여자. 무례한 여자. 뱀 처럼 영리하게 살아가는 여자---'. 이렇게 보는 나의 속눈초리를 눈치라도 챈듯  취조관은 집요하게 나를 살인범으로 몰고간다.
  나의 인형도 작품 전체의 맥락속에서 보아야 하겠지만 집약적으로 묘사되어있는 부분들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전차 앞창으로 가도가도 두 줄을 긋는 궤도에는 '나의 인형'이 원시적 본능의
       율동으로써 용하게 치어죽지 않고 나타나 내 얼굴을 비친 유리에서 한 송이
       꽃으로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나는 많은 손님을 상대하여 먹고 사는 '나의
       인형'을 버리지 못하며, 왜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 '나의 인형'은 나에게 수속
       이라던가 의무라던가 책임을 요하는 일이 없었다. '나의 인형'이 도달한 자유를
       마법이라고 생각하였다. 화사한 손꼬락에는 언제나 새빨간 손톱이 독하게도 천
       하지 않었다. 아름다웠다. 그녀는 가끔 나를 멸시하며 변화 많은 모습으로 설교
       하였다. "내겐 과거가 없어요. 고마워요. 미래는 알 수 없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난 언제나 새로워요. 지금 이렇게." 이렇게 말하며 달라붙어 안기고 또는 옷을
       훌훌 벗으며, 마음대로 동작하였다.

  나의 인형은 관음의 거울 같은 것이다. 몸을 팔며 천하게 살아가지만 마음이 맑고 착하기가 지순한 꽃 같다. 해서 나의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이 주변에는 숫하게 많지만 나의 인형을 생각하면 다 걷혀버린다.  

         손님이 있는 밤이면 '나의 인형'은 다른 방에 나를 감춰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놈팽이를 잠들여놓고 와서 내 곁에 눕는 '나의 인형'의 아량은
       비할 바 없었다. '나의 인형은 비가 오거나 눈보라가 휘몰아치거나 같은
       악곡이 장치된 장난감이었다. "내겐 과거가 없어요. 미래는 행복하게끔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난 언제나 새로워요. 지금 이렇게." 어느 조물주가
       이렇게 읇조리는 여자를 빚어냈을까 나는 의아스럽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
       온 태국, 필리핀, 미국, 영국, 이디오피아, 프랑스, 십육 개 나라  UN군 등
       모든 인종이 예방禮訪하고 간 실내의 몸과 동작은 무한 가능을 내포한 인류와
       사랑의 전당이였다. 시종侍從도 수위守衛도 흑인도 석고 흉상 하나 없는
       사랑의 양철집엔 여왕과 나만이 있었다. 여왕의 신과 같은 주문呪文에는
       계시와 설법과 창조가 있었다. 나의 무극無極에 하늘과 땅을 조판肇判하기까지는
       녹빛 외투 여자가 간헐적으로 생각났다. 사조思潮를 굽어보는지대地帶에
       과학, 법률, 경제, 일반 예술 등 문화가 전개하였다. 그러나 나의 여왕은
       "벗어버려요. 위선과 허영으로 만든 습관을 다 벗어버려요. 어리석은 짓을
        버려야 참된 품안에 들어올 수 있어요" 하고속삭이었다. '나의 인형'이 되풀이할
        적마다 나는 복종하는 감격을 새로이 하였다. 문제의 전차표라던가 강박 환상
        이라던가 사형수라던가 초면인 녹빛 외투 여자라던가 시간안으로 들어가는 전차
        라던가 환송회의 천박한 향내라던가 그 외에도 내가 세상에 태어난 뒤의 아집과            기억을 죄 벗어버렸다. 서로가 대상에서 거리와 시간도 없는 기쁨이 이루어졌다......          '나의 인형'은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였다. "죽고 싶도록 기뻐요". 나는 웃었다. 중합          重合한 영영映影의 힘이었다. 백주의 꿈이 있었다. 나무가지들 사이에는 혹한에 얼          지 않는 goal海味의 정열과 호심湖心을 노래하는 백조들이 놀고있었다. 몸은
        '나의 인형'인 여인과 함께 내명內明한 꿈속을 헤엄쳤다.    
      
  온갖 구름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해주는 여자, '內明한 꿈속을 함께 헤염치는' 여자, 그는 나의 고향이며 나의 마음의 거울이며 관세음보살이다. 해서 구름은 적이 아니라 맑은 거울을 인식시키는 逆行보살로 작용하게 된다. 함께 전체로 있는 본질이 된다.

       "나는 당신만을 사랑해요." '나의 인형'은 한 번 도 말한 일이 없는 소리를
       비로소 하였다. "내가 바로 너다" 하고 대답하자 눈물이 웬지 흘러내렸다.
       녹빛 외투 여자와 운전수와 '나의 인형'과 살인범이 종렬縱列로 직립하여,
       보기에는 한 몸 같으나 각각 얼굴을 좌우로 내놓고 '동同' '이異'를 일시에
       구성하였다. 취조관의 지휘를 받고 경관과 의사와 중절모와 간호부와 택시
       운전수와 다방 레지들이 겹겹으로 둘러 앉아 나에 대한 '찬송'을 연주하고있었다.
       '고오', '스톱'의 삼색 신호등이 비치자 그들은 나를 축복하는 천사로 변화하였다.
       나는 '본질'이었다. 동시에 모든 '인자'였다. 나는 그들과의 '전체'였다. '세계'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것을 결론으로 주자는 것이 아니다. 갈등과 좌절 방황 등 삶의 내용들, 고뇌의 과정, 미궁에 빠진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들을 진실되게 보여주자는데 더 목적이 있다. 이 작품의 제목 消印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제 정리이면서 문제 제기가 아닐까.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예민한 감성의 시인이 견지하고 찾아야할 진리의 모습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어떤 단정이나 긍정도 금새 그것을 뒤엎는 부정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속의 숫한 표현의 반전이며 경색이며 꼬임이며 지루함 난해함은 자아발견의 과정이 그 만큼 힘들고 어려웠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 작품을 올바르게 이해할려면 그 작가가 처했던 시대상황과 작가의 내면 세계를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 이 작품은 [죄와 벌]을 쓸 당시의 도스토엡스키의 심리상태, [이방인]을 쓸 당시의 까뮤의 내면적 고뇌, [날개]를 쓸 당시의 李箱의 아픈 가슴 등과 연계해서 읽어야할 작품일 것 같다.


             3
  그러나 구용시는 이러한 난해에도 불구하고 밑바닥에 흐르는 사상은 분명하다. [消印]에서 나의 인형이 암시적으로 일부 보여주고있지만 그의 시를 관류하는 기본사상은 관음사상이다. 외형상으로는 회의와 무의미 갈등 고뇌가 회오리치고있지만 조금 깊이 내려가 보면 평화와 사랑, 아름다운 생명 파동이 한결같이 일고 있다.  
            
       관세음보살, 이제 당신은 연좌連坐에 없다.
       나는 배고픔에 외치는 음광音光에서 당신을 본다.
       선율은 슬픔 없는 눈물이 되어 골목과 창에 번지고
       당신의 영락瓔珞들로 드리워져 빛난다.
       구슬은 투명하게 정각精刻한 어둠의 실상이었다
       지난날 전화戰火에 타오르면서도 변하지 않던 관음의
       미소가 나타난다.


       어떤 사고思考도 소용 없는 종국을 파벽破壁에서 보듯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본성이여. 녹음綠陰의 모발이
       소沼를 안고, 슬픔의 발끝까지 노래로 애무한다.
       염원의 딸기밭은 더러운 하늘을 장식하고
       그대의 품으로 귀향하는 무적霧笛이 앞을 열었다.  
        ------
        당신은 죽음의 형성에서도 깨어지지 않는 식기.        
        동시에 허무가 근접할 수 없는 나의 연꽃을 피워 올렸다.
                                    (觀音讚 11) 일부

   관세음보살은 절간에서 읽는 불경속에만 있지 않다. 이론적으로 피어올리는 연꽃속에 있지 않다. '배고픔'속에 있고 '슬픔 없는 눈물'속에 있고 고뇌와 어둠속에 있다. 어둠을 투명하게 精刻한 것이 구슬이다. 파벽에서 관음의 미소가 나타나고 녹음이 沼를 안고 노래로 슬픔의 발끝까지 애무를 한다. 염원의 딸기밭이 더러운 하늘을 장식하고 霧笛이 앞장서서 큰 품으로 나를 인도한다. 녹음도 沼도 염원도 霧笛도 다 관음이다. '죽음의 형성에도 깨지지 않는 식기, 허무가 근접할 수 없는 연꽃'이 관음이다. 관음은 관음을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나에게 있어
       스님은 표훈사表訓寺.
       설명 이전의 자비이다

       스님은
       중생의 괴로움을 괴로워하고
       중생의 기쁨을 기뻐하시기에
       평생 자기가 없었다

       "스님, 물러가겠습니다"
       "우리는 오랜 친구가 아닌가"
       병상의 스님에게서
       내가 들은 보물은
       한 개인의 소유일 수 없다

       자기가 없었던
       스님 몸에서
       보게나
       저절로 불이 일어나네

       불은 일만 이천 봉
       종소리는 무량수화無量壽花
                                    (圓虛大師) 일부

  圓虛大師는 구용이 머믈고있던 금강산 마하연에서 8㎞ 떨어진 표훈사의 스님이다. 이십리 길이지만 원허스님은 마하연으로 자주 찾아오셔서 구용을 표훈사까지 데리고 갔다가 다시 마하연으로 데려다 주곤 했다고 한다. 어린아이에게 스님은 표훈사 만큼 큰 분이였고 설명이 필요 없는 자비 그 자체였다. 중생이 괴로우면 같이 괴롭고 중생이 기쁘면 같이 기쁜 스님. 노스님은 열살백이 어린아이에게 '우리는 오랜 친구'라고 말한다. 병상의 스님에게서 들은 높고 따뜻한 말씀들은 아이 혼자서 갖기에는 너무나 큰 만인의 보물이다. 無我의 몸에선 만물을 덥히는 불이 솟고 그 불이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밝힌다. 표훈사의 종소리는 無量壽花가 된다. 이 시가 어찌 손끝이나 머리 굴림만으로 나올 수 있는 시인가.

       "관세음보살. 별로 소원은 없습니다. 관세음보살 하고 입 속
       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 정도로 심심하지 않다.
       비극에 몽그라진 연필만한 승리를 세우지 마십시오. 때가 오
       거든 이 몸도 가을잎 처럼 별[星]이게 하십시오"

       호생관毫生館의 애꾸눈과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귀를 가
       진 나무가 서 있었다. 그는 도시의 계단을 밟고 산으로 올라
       가, 그 나무와 함께 정처없이 바라본다. 성지聖地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혜초慧超가 갔던 곳에서 구름은 돌아온다.
       저녁 노을에 향수鄕愁의 항아리가 놓인다. 항아리 밑에서 번
       져 나간 그림자의 깊이가 백월白月의 언덕을 개항開港하고
       있었다
                        (9월 9일) 전문


  관세음보살만 입에 올려도 '심심하지 않다'. 萬有의 사랑인 관세음보살을 가슴에 담고있는 사람은 그냥 있어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만유의 생명과 같이 있는 것이다. 그 처럼 큰 보화를 안에 갖고있기 때문에 '몽그라진 연필' 같은 하찮은 문필가의 출세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 몸도 가을잎 처럼 병이게 하소서'. 원허스님이 산 길을 그도 살고싶은 것이다. 表訓寺 그림으로 유명한 英祖朝의 화가 毫生館도 樂聖 베토벤도 그에겐 나무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과 함께 혼탁한 도시의 계단을 올라 무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聖地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다시 말하면 육안에는 보이지 않지만 보인다. 혜초가 발견한 진리는 먼 나라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그가 서있는 곳에 있다. 때문에 저녘노을 바라보는 시인의 가슴은 향수의 항아리가 된다. 원허스님, 관세음보살이 계시는 고향의 항아리가 된다. 그리고 그 항아리는 어두울수록 언덕백이 달은 더욱 밝게 떠오르는 항구로 발전한다.    
    
       어린의 나라는
       어른들이 못 하는 일들을 다 하지요
       자동차는 슬쩍 날아올라 사람을 비켜요
       병아리도 배추와 악수하는 사인 걸요
       복동이는 얼굴을 교실 창 밖으로 내밀었어요. 보세요
       얼굴이 창 보다 더 크네요
       산위로 점잖이 올라오는
       햇님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純金순금이구요......
       ......................... 어린이의
       나라는 거짓말이 없어요
       그들은 기쁠 때나 힘들 때나
       새로운 발견을 해요            
                        (어린이 나라) 일부

  관세음보살은 어린이 나라와 같다. 어린이 나라는 어른들이 못 하는 일들을 한다. 자동차가 사람을 비켜가고 병아리와 배추가 악수를 하고 교실 창 밖으로 내민 복동이의 얼굴이 창 보다 더 크다. '산위로 점잖이 올라오는/ 햇빛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순금이다'. 어린이 나라는 거짓말이 없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어른 처럼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새로운 발견을 한다. [어린이 나라]를 읽고있으면 마치 마하연에서 표훈사로 원허스님과 손잡고 가며 나누는 대화를 듣는 것만 같다. 노소가 사라지고 생노병사가 사라지는 자리, 본연의 자리.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지금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다.

            4
  그의 시는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원숙되고 심화된다. 아래의 세 작품은 다 1970년에 쓰여진 것들이다. 50 60년대의 산문적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이르는 곳마다 목을 축인다

       그림자는 바다안을
       날으며 별[星]을 낳아
       위기에서 벗어나는 한 마리 새[鳥]

       녹소綠素는 발화점을 안은 채
       모순이야말로 합리적이었다
       알[卵]을 까는 허공과
       상처를 잠재우는 밤은 가난하지 않았다

       창은 서로 속삭이나
       갓난아기는 눈을 감고도 빛을 본다.
       뜨락의 구멍난 배[舟]는 꽃나무가 되고
       지나온 언덕[岸]은 꿈을
       수확하고 있었다.  (影像) 일부

  첫 두 줄은 王維의 싯귀, 江流天地外山色有無中 (강물은 천지 밖으로 흐르고 山色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네)을 연상시킨다. 둘째 연은 동서의 큰 명상
시들의 귀절을 떠올리게 하고 셋째 연은 딜란 토마스의 시, [녹색 導火線 사이로 꽃을 몰고가는 힘 (The Force That Through The Green Fuse Drives The Flower)]을 연상시킨다. 이 셋이 합쳐서 마지막 연에서는 더욱 아름다운 관음으로 발전하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연상은 지나친 연상일 수가 있다. 특히 첫 두 줄을 王維의 싯귀와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연상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용이 술 자리나 그 밖의 흥겨운 자리에서 자조 읊는 싯귀중의 하나가 이 구절이고 보면 그의 시감상에 있어서 이런 연상이 꼭 지나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세 째 연과 토마스의 싯귀와의 연결도 구용의 당대 서구 시에 대한 비교적 넓은 섭렵과 당시 우리 나라에서 많이 읽히던 토마스의 시를 생각하면 이러한 유추해석은 가능하다고 본다. 구용은 당대의 동서의 만남 뿐 아니라 고금의 만남도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가령 [杜甫]를 보자.

       그 이상 부속품일 수는 없었다.
       휴식을 만들기에 부지런하다가
       바퀴가 되어 돌아가는 황혼.

       어느 날이었다.
       빈 차들은 달려들었다.
       수육獸肉은 가게마다
       거울 안에서 춤을 추었다.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
       수화기 마다 연신 매연을 뿜었다.
       소음은 사진마다 달려 나왔다.

       하나만 먹으면 죽지 않는
       천도天桃가 익을 무렵이었다.
       누구나 한 번만 먹으면 더 이상
       죽지 않는 총알은 출감하였다.
       자물쇠가 잠긴 고향집 앞에서
       가면과 야구 방망이는 만나
       서로 뭣인가 의논하더니 없어졌다.

       어느 날이었다.
       상반신은 카인이요
       크레오파트라의 하반신을 한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앉은 이는 하나인데
       그림자는 둘이었다.
       불을 끈 유방乳房
       눈을 뜬 침묵.
       문제는 술잔에 빠져
       모발을 펴고 있었다.

       무수無數는 하나였다.
       시간은 시간을 부정否定하면서
       마침내 벗어나
       어느새 빛이 되어갔다.
       창마다 죽지 않는 천도天桃가 왔다.
                (杜甫) 전문

  '부속품' 처럼 움직이는 피곤한 일과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땐 부속품이아니다. 自我의 큰 바퀴가 되어 돌아온다. 온종일 먹고사는 일에 바둥대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두 사람 비슷하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한결같이 인간에 대한 성실성으로 우수에 차 살었던 杜甫. 고뇌와 갈등과 방황이 시간의 짠물속에 저려지고 져려져서 짠 시가 된 두 사람. 둘이 겪은 사회상도 비슷하다. 빈 수레가 더 요란하고 고깃덩어리가 판을 치고 사람은 많지만 참 사람은 적다. 눈도 귀도 매연과 소음에 가리워 옳게 보고 듣기가 쉽지 않다. '天桃'와 '총알'이 아이러니를 이룬다. 天桃는 자아의 脫却으로 죽지 않는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만 '한 알만 먹으면 더 이상 죽지 않는 총알'은 더 이상 죽을 필요가 없는 개죽음을 의미한다. 고뇌할 필요도 自己를 벗어날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완전 죽음. 그의 得道修鍊이 절정에서 '죽지 않는 총알'을 만난 것이다. '총알의 출감', 총알의 난무, 총칼의 무서운 감시와 함께 이데오로기의 음모속에 고향의 푸근한 인정이나 의리는 다 얼어버리고 없다. 마치 관세음보살로 드는 문이 꽁꽁 잠겨버린 것 처럼. 게다가 어둠을 타고 들어오는 야만스러운외래문명의 침투. 카인의 상체와 클레오파트라의 하체로 된, 다시 말하면 총칼과 허벅지가 야합해서 지배하는 문명앞에 乳房은 불이 꺼지고 시인의 침묵은 배로 눈을 뜨게 된다. '불을 끈 乳房/ 눈을 뜬 침묵.' 그런데도 이 땅의 주인공들은 술잔에 빠져 모발이나 펴고 있다. 완전히 문제 의식을 잃고 있다. 이 신경쇠약자의 깊은 우수를 누가 알까. 杜甫는 알리라. 해서 두보와 함께 거울을 닦는 이 시 말미는 다시 관음의 모습으로 눈을 뜨게 된다. '무수'는 결국 하나이다. 흙탕물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시간은 시간으로 벗어날 길 밖에 없다. 관음의 거울로 시간을 벗어나 '창 마다 죽지 않는 天桃'의 도래를 맞게 된다. 구용은 몰려드는 거울위의 구름을 닦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관음의 거울은 스스로를 정화하는 힘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맑고 따뜻한 본연의 마음이 관음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丘庸시의 난해는 [風味]를 잘 음미하면 가장 잘 풀릴 것 같다.  風味는 고상한 맛을 뜻한다. 음식이 맛이 있을 때 사람의 됨됨이가 멋이 있고 아름다울 때 쓰는 말이다. 고상한 맛, 아름다운 멋이 어째서 바람 맛일까. 바람 같은 맛일까.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空의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바람 같은 승리, 바람 같은 명예, 바람 같은 부귀를 내려다보는 한 차원 높은 바람의 맛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

        생기기 이전에 시작하는 잎사귀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거울로 들어간다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희생자인 향불

        분명치못한 정확과
        막연한 정확을 아는가

        녹綠빛 도피는 아름답다
        그대여 외롭거던
       각기 인자하시라 (風味 전문)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 판단 이전에 앉는 것은 무엇이며 돌이 노래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얼핏 떠오르는 것이 '實存이 本質에 앞선다'는 당시 이 땅을 휩쓸었던 실존주의이다. 돌 같은 존재, 돌 같은 현실도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닥아온다. '생기기 이전에 시작하는 입사귀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마치 '끝이 시작이요, 시작이 끝'이라고 읊어대는 황무지의 시인 에리엇트를 연상케 한다.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 이것은 규정을 거부하는 시의 언어, 물음으로 물음을 넘는 시의 모습을 떠올린다. '낮과 밤의 대면은/ 거울로 들어간다/ 너는 내개로 들어온다'. 사물의 明暗을 직관하는 사람은 自省으로 들어간다. 어떤 대상도 내 안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것은 없다. '희생자인 향불'. 희생은 향그러운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도 석가의 출가도 아름다운 것이다. 평화와 생명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분명치 못 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을 아는가'. 이것은 마치 철학적 과학적 정확 보다는 시적 막연속에 더 큰 정확이 있다는 암시로 받아들여진다. '녹빛 도피는 아름답다/ 그대여 외롭거던/ 각기 인자하시라'. 녹빛 도피는 자연불멸로 봐도 좋으리라. 불교적 사랑이 자연으로 뻗는 탈아의 큰 모습으로 봐도 좋으리라. 특히 끝 부분의 흥겨운 튕김은 선사의 콧노래 같지도 않은가
  [풍미]를 실존주의적 기독교적 불교적 그리고 엘리엇트 시의 입장에서 살펴봤다. 구용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잇는 큰 바탕에서 보면 이러한 입장들은 결국 하나이다. 그는 사석에서 실존주의를 불교적으로 언급한 일이 여러번 있다. 그리고 에리엇트 시의 불교적 요소를 수차에 걸쳐 지적했으며 기독교의 아가페적 사랑과 불교의 자비를 같은 맥으로 보는 이야기도 했다. 때문에 그의 난해시는 불교적 인식을 바탕으로한 고뇌의 궤적과 여러 사상들과의 조우를 추적해가면 상당히 풀린다고 본다. 불가의 자비사상이나 圓融사상이 현실의 가장 큰 벽에 부디칠 때 생기는 파열음, 혹은 난파되는 빛들, 모가 되고 각이 되고 혼돈이 되고 무의미와 허무를 돌아 세계의 큰 정신들과 더불어 다시 돌아오는 큰 원을 추적해가면 그의 시들은 난해를 넘어 깊고도 오묘한 즐거움의 시로 바뀔 수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1950년대 1960년대 구용시는 그의 관음 사상에 몰려드는 먹구름을 제거하는 힘겨운 싸움이라 볼 수 있다. 부조리, 무의미에서 조곰씩 벗어나 다시 옛날의 자기를 찾는 역정의 그림이라 볼 수 있다. 꿈과 현실이 멀먼 멀수록 그 부디침의 파열이나 파음 파장은 크고 복잡한 것 처럼 남달리 예민하고 날카로운 시인에게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어둠은 그의 평화로운 마음의 바다에 큰 지진을 이르킨 것이다. 그로 인한 언어의 해일, 언어의 혼미, 언어의 무정부상태를 기록한 것이 그의 시라고 볼 수도 있다. 의미의 연결을 고의로 깨는듯한 표현들이며 맞지 않는 이미지나 어휘들을 폭력적으로 결합시려드는듯한 표현들이며 흐름의 급반전, 단절, 탈문법, 생경함---등은 다 그런 근거에서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겪고난 뒤의 그의 언어, 얼마나 아름다운가. 1970년에 쓰여진 작품들[影像] [杜甫] [나무] [風味]---호두껍질 같은 殼을 깨고 들어가면 난해시의 오묘한 맛이 기다리고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작게 아물 수 없는 그의 시는 굳어지려는 작은 틀에서 다시 일어나 다시 현실과 상상의 큰 집을 지어가는데 몰두한다. [九曲] [九居]로 이어지는 그의 시가 그렇다. 구용시의 난해는 화엄경의 탑 처럼 보이지 않는 무수한 방황과 갈등이 고뇌의 불속에서 구어진 벽돌로 짓는 건축 같은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섯 살에 病弱으로 엄마품을 떠나 금강산 마하연에서 至心頂禮를 드린 이래 평생 불교적 평화와 화엄을 그리다가 가는 丘庸, 시와 시인의 일치를 나는 그에게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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