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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초점/시적 순결 속에 깃드는 원초적 아름다움의 세계/김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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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시적 순결 속에 깃드는 원초적 아름다움의 세계
김문주
언제부터인가 우리 곁을 떠나간 어휘들, 이를테면, 순수, 동심, 추억, 그윽함, 우정, 존경, 믿음, 한결같음, 고귀함 등, 이러한 어휘들은 우리 삶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제는 복고라는 문화적 기호 속에 흔적으로 남게된 이 목록들 앞에서 생(生)은 한없이 누추해진다. 보이는 것 말고는 보여줄 것이 없고 보일 수 없는 것들은 한결같이 시시해져버린, 덕목이 사라진 우리 시대는 삶을 모두 비슷하고 빤한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것 아닌 나의 시간들, 그로 인해 실종된 그윽한 기쁨들, 어느덧 우리의 삶은 저마다 살아가는 어떤 것이 아닌, 살아내야 할 과제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예술이 이러한 시대의 구원이 될 수 있다거나 아니면 그러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계몽적이거나 낭만적이다. 시대가 전혀 불러낼 수 없는, 망각 저편으로 가버린 것들을 이곳으로 불러올 수는 없다. 우리가, 예술이, 문학이, 그리고 시가 할 수 있는 일들이란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덕목들이 삶에 베풀었던 은혜들을 돌아보게하는 일일 터이다. 그래서 그 덕목들이 발산하는 매력들을, 오늘 이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자리에 부려놓는 일일 것이다. 그 매력적 향취를 언어를 통해 전달하는 문학은 매체 자체가 갖는 반성적 기능으로 인해 삶과 세계에 대한 자기 교정을 간접적으로 수행한다. 주로 현재적 감각에 집중하는 영상매체에 기능의 일부를 이양한 문학에 있어서, 예술의 자기반성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되었으며, 반성적 기능 자체가 실종된 현대 사회에 있어서 현실적으로도 그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어휘들 가운데 하나인 '순결'은 세계와 자아의 소통, 그리고 삶의 태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자유분방하고 탈권위주의적인 오늘날의 문화 풍조 속에서 의도적으로 거부되고 있는 '순결'이라는 덕목은 앞에서 일별했던 어휘들의 목록과 한 맥락에 놓여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정신사의 근간을 이루는 의식의 한 핵심이다. 특히 문사적(文士的) 전통이 지배적인 시 장르의 경우, 아직까지 작품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시인의 삶을 판단의 준거로 삼는 것은 시와 '순결'의 관계를 밀접한 것으로 보는 의식의 관성이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을 넘어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고 갱신하게 하는 소통의 힘으로서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지향하고 보존해야할 가치를 타협없이 지지한다는 점에서 순결의 매력은 충분히 향유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음의 작품들은 그 매력의 중요한 지점을 시사해준다.
김형영의 [고해](문학동네2001·여름)는 시적 여백의 깊이와 그 깊이 속에 내재한 성찰의 진지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 진지함이 행간에 담겨 있는 시인의 내면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해준다.
원수 같은 놈
원수 같은 놈 죽어나 버리지
되뇌듯 미워했는데
오늘 세상 떠났다는 소식에
내 눈을 덮으며
하얗게 쌓이는 쓸쓸함이여
내 마음이 허공이구나
- 김형영, [告解] 전문
불과 7행, 20여개 어휘밖에 되지 않는 이 작품에는 한 인물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교차하는 감정들이 새겨져 있다. 4행을 중심으로 앞부분에는 대상이 죽기 전의 화자의 내면이, 뒷부분에는 죽음 이후의 심정이 담겨 있다. 감정을 공격적인 방식으로 해소하지 않고 내적으로 응축시키는 우리의 정서 속에서, 원수(웬수)라는 말은 단어의 지시적인 의미보다는 애증(愛憎)을 내포한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원수 같은 놈/원수 같은 놈>. 동일한 표현을 반복할 정도로 대상을 향한 화자의 감정은 골이 깊지만, 이 구절을 단순히 적대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원수같은 '죽일 놈'이 아니라, '죽어나버리는' 것이 낫은 '원수 같은 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수 같은 놈'을 향한 화자의 감정은 순전히 개인적이고 적대적인 증오라기보다, 다른 사람들이나 '원수 같은 놈' 본인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따라서 '원수 같은 놈'이라고 '되뇌듯 미워했다'는 화자의 고백은 대상이 죽고난 다음에 보이는 화자의 심정과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이 시가 단순히 미워했던 감정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내용이 아니라 보다 복합적인 정서의 얽힘, 나아가 죽음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담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3행의 '되뇌듯 미워했는데'와 시상의 계기가 된 그의 부음 소식 사이, 언어적 표현으로 말해서 3행의 연결어미 '-했는데'에는 대상을 향한 죄스러움과 언어의 주술적 효능에 대한 서늘함, 그리고 끝내 자신의 잘못을 정리하지 못하고 떠난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연민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6행의 '쓸쓸함'과 '허공'은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화자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5행의 <눈을 덮으며>는 고백성사를 하는 화자의 죄책감을 의미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인간의 모든 행위나 가능성을 덮어버리는 죽음의 막막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에서의 눈은 <眼, 雪>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하얗게 쌓이는 쓸쓸함'을 2행의 '원수 같은 놈 죽어나버리지'와 연관시켜 본다면, 시적 화자의 '쓸쓸함'은 유한자적 존재로서 대상에 대한 근원적 연민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격언처럼, <告解>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행위로서, 죽은 자란 고해할 수 없는 자를 의미하며 그것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고해'의 가능성이 절멸된 대상에 대한 연민과, 결국 죽고말 대상을 향해 가졌던 부정적 감정에 대한 속죄를 함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함축과 생략에 기초한 이 글의 서술 방식은 간결한 시적 표현 속에 복합적인 정서를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데 적절한 시적 형식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김형영의 [고해]에서 참회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시인의 내면을 만나게 된다. 적대적이기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까웠던 한 인간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참회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연민을 보여준 시인의 태도에서 우리는 시와 시인이 기초할 정신적 토양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품었던 감정에의 성찰을 보여준 [고해]와 달리, 이선관의 [십 분만 생각해 봅시다 독자 여러분](당대비평2001·여름)은 더 이상 고해가 불가능한 자에 대한 평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전략)
미당 선생이 일제 때 그 유명한 친일시 [송정오정 송가]를
쓸 때에 아들을 기꺼이 군대에 보내 놓고 얼마 후
전사 통지서를 받아 본 조선의 어머니 그 많은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은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온 민족혼의 상징이었으며
천둥의 울음과 소쩍새의 울음 속에 개화한 내 누님같이
생긴 한 송이 국화꽃과 다름없었던 이승만을 찬양하는
시를 쓸 때
사일구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삼일오에 그 날 희생된
열사들의 죽음은
그리고 새로 나갈 길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오직
베트남뿐이라고 베트남 찬전을 독려하는 시를 쓴 미당
지금은 고엽제에 의해 고통받아 죽어 가는 대리 전쟁의
희생자 참전 용사들
한강과 겨레와 나라의 이름 위에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라고
전두환의 오십육 회 생일에 바친 축시
그리하여 죽음을 마다 않고 희생된 광주의 아들 딸들이여
무등산의 십자가여
병 든 수캐모양 헐떡거리면서 일찌감치 뉘우침을
거부하면서까지 자기는 시대가 낳은 종이다 하시며
팔순이 넘게 사시다가 가신 미당 선생
우리 다 같이 십 분만 생각해 봅시다
이쪽과 또 다른 한쪽을 잠시 묵념하듯 말입니다
- 이선관, [십 분만 생각해 봅시다 독자 여러분] 부분
최근 몇몇 일간지와 문예지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미당에 대한 평가는 그동안 존중되어왔던 시 장르의 정신사적 의미를 엄격하게 보존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 환원시켜 생각할 수 있다.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에 있어서 작가의 삶을 중요한 근거로 인정해온 우리의 전통 속에서 시와 시인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러한 사회적 인식 속에는 시인을 우리 정신사의 한 축으로 인정하고, 삶에 대한 가치 기준의 한 모범으로서 존중해온 문화적 관습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시적 표현에 역행하는 사회적 행위를 예술가의 특이한 정신 구조 속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최근의 주장에는 예술 작품의 창조성을 보다 중요하게 평가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시와 시인의 비분리 전통은, 글은 도를 싣는 도구라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문학관에서 연유한 것으로서 글은 삶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바탕이 되어 있다. 그동안 시적 순결함의 정신적 근거가 되었던 삶과 글의 일치에 대한 존중은 우리의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해왔다. 윤동주, 한용운, 이육사 등의 시인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찬사는 이들 시인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후광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참된 시인이란 말이 시와 시인을 평가하는 한 기준으로 통용되고, 이러한 평가가 특별히 시 장르에 국한된다는 것은 시 장르에 부여된 정신사적 역할을 시사한다.
인용된 이선관의 시는 미당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고려할 시인의 역정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죽은 자에 대해 너그러운 우리의 문화적 관습 속에서, 미당의 치욕스런 과거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풍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시인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적어도 우리의 문화적 관습 속에서 죽은 자를 용서하는 것은 비판하는 것보다 쉽고 덕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죽은 자의 잘못을 낱낱이 꺼내 놓는다. 시의 제목과 어조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뚫고 솟아오르는 강렬한 비판 의식과 분노가 독자를 직접 향하고 있다는 점은, 이 시가 역사적 평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경종을 가하려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오를 덮어버리는 죽음에의 전통을 부정하고 적당히 타협하려는 의식을 거부하는 이러한 태도는 역사적 평가가 고려해야할, 죽어도 문제될 것이 없었던 민중을 평가의 한 축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평가 기준에서 소외되었던 사회적 약자들과 역사적 희생자들에 대한 인식의 환기이자, 미당의 행위들을 작품 평가와 별개로 보려는 것이 얼마나 허위적인 것인가를 강조한다. 한 인간의 죽음 저편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름없는 민중의 희생, 그 희생을 간과한 너그러움과 특정인을 존중하기 위한 또다른 기준의 고안들이 참으로 올바른 것인가하는 질문 속에는 용납할 수 없는 불의에 대한 염결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단죄할 것은 죽음을 넘어서도 단죄해야한다는 시인의 준엄한 태도는 바로 타협과 적당주의를 배척하는 시적 순결 의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실에 대한 순결함이며, 삶에 대한 엄격함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타자를 향한 이러한 윤리적 염결성은 우리 정신사의 한 맥을 형성해온 시적 원천이었다.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현실적 이로움을 초월한 진실에 대한 의지는 시 장르의 현실적 존재 근거의 하나이다. 다음에 인용할 안도현의 작품 [도둑들](문학동네 2001·여름)은 이러한 시적 순결함이 존재론적 성찰로 전개되는 것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딱 한 번이었다
내 열두어 살쯤에 기역자 손전등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푸석하고 컴컴해진 초가집 처마 속으로 잽싸게 손을 밀어넣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밤 내 손 끝에 닿던 물큰하고 뜨끈한 그것,
그게 잠자던 참새의 팔딱이는 심장이었는지, 깃털 속에 접어둔 발가락이었는지, 아니면 깜박이던 곤한 눈꺼풀이거나 잔득잔득한 눈곱 같은 것이었는지,
어쩔 줄 모르고 화들짝 내 손끝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던,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사다리 위에서 슬퍼져서 한 발짝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허공을 치며 소리내어 엉엉 울지도 못하고, 내 이마 높이에 와 머물던 하늘 한 귀퉁이에서 나 대신 울어주던 별들만 쳐다보았다
정말 별들이 참새같이 까맣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울던 밤이었다
네 몸 속에 처음 손을 넣어보던 날도 그랬다
나는 오래 흐른 강물이 바다에 닿는 순간 멈칫하는 때를 생각했고
해가 달의 눈을 가려 지상의 모든 전깃불이 꺼지는 월식의 밤을 생각했지만,
세상 밖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만진
내 손끝은, 나는 너를 훔치는 도둑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뜨거워진 몸을 뒤척이며 별처럼 슬프게 우는 소리를 내던 그 밤이었다
- 안도현, [도둑들] 전문
어릴 때 새집 속에 손을 넣었던 경험과 성장한 후 연인과의 애정 경험을 적고 있는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순결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간적 격차를 가진 두 사건은 하나는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나머지 하나는 의식적인 상태에서 경험된다. '네 몸 속에 처음 손을 넣어보던 날' 내가 '월식의 밤'을 생각하는 것은, '너'의 순결함과 너를 만지는 행위에 대한 의식적 반성에서 비롯된다. 그 '월식의 밤'은 원초적 순결과 무의식적 죄의식이 혼재하는 신비의 시공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화자는 자신이 '세상 밖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만'졌기 때문에 '너를 훔치는 도둑'은 아닐까라고 반성한다. 그것은 마치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은 후에 자신들이 벗었음을 알고 숨었다>는 창세기의 내용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네 몸 속에 손을 넣어보던 날' 시적 화자가 생각한 '월식의 밤'은 인류 최초의 두 남녀가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앞에 두고서 느꼈을 호기심·두려움의 내면 상태와 유사하다.
'네 몸 속에 처음 손을 넣어 보던 날' 느꼈을 이러한 심리는, 새집 속에 손을 넣었던 그 때에 시적 화자의 손 끝에 닿았던 '물큰하고 뜨끈한 그것'이 '내 손끝을 세상 밖으로 밀어낸' 후 경험한 슬픔의 무의식적 반성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린 생명체들로부터 배척당한 데서 오는 본능적 서러움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두려운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컴컴해진 초가집 처마 속으로' 손을 '잽싸게' '밀어넣었던' 행위가, 배척의 이유임을 무의식적으로 직감한 결과이다. '사다리 위에서' '한 발짝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나 대신 울어주던 별들만 쳐다보았다'는 것은 명확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때묻지 않은 어린 생명들로부터 밀려난 섭섭함과 슬픔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때는 그 순결의 상태에 동참했을 존재의 무의식적 서러움은 기독교적 인간관에 나타나는 인간의 원죄성과 상통하는 존재감이라 할 수 있다. 어릴 때와 성년이 되어서 경험한 이 두 사건에 대한 화자의 반응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원초적 순결의 상태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태초의 순수 상태, 순결한 생명의 세계는 시의 본원적 고향이다. 모든 시는 저마다 다른 심성과 얼굴로 그곳을 향해 손을 뻗친다. 원초적 순결을 향한 시의 몸짓과 사유는 결과적으로 지금 이곳과 존재 자체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세계의 변혁을 꿈꾸며 자기교정을 간접적으로 수행한다. 그것은 시의 본성이 갖는 근원적 혁명성과 시인으로부터 시를 분리할 수 없는 이유를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그런 점에서 순결함이란 시 장르의 근원적 동력이다.
박남희의 [문장이 나를 부를 때](리토피아2001·여름)는 시적 순결이 어떻게 시의 세계와 만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나는 지금껏 단어 하나의 숨소리로 숨어살았다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깃든다는 이슬방울의 추억도
내게는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물총새의 몸으로 냇가에 나가면
물소리에 섞어 말을 만들려 했으나
내 속의 말은 끝끝내 파편이 되어
또 다른 말의 피안 쪽으로 도망가고
나는 그냥 ㄱ,ㄴ같은
형상의 언어로만 살아있었다 밤마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무수한 내 안의 의미들이
꿈틀거리며 자꾸만 밖으로 튕겨나오려고 했다
나는 그때마다 내가 어둠임을 깨달았다
어둠인 내 몸이 쏟아내고 싶어하는
내 안에서 무수하게 반짝이는 별들,
저 별들의 언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누군가 풀어놓은 이야기의 숲 속을 걸으며
나무들과 나무들이 중얼거리는 말들 속에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 있음을 보았다
그 숲 속에서는
내 작은 몸짓도 그냥 문자의 형상이 되어
나무들의 언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그때마다 문장이 나를 불렀다
그래, 나는 이제 그의 형용사나 또 다른 형태의
부사가 되기 위해 그에게로 간다
내 일상의 해와 달과 별보다도 더 환하게
기꺼이 그의 살과 뼈가 되기 위해
지금껏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말의 고향을 찾아서,
-박남희, [문장이 나를 부를 때] 전문
인용한 작품은 한 시인의 시작(詩作) 과정에 대한 겸허한 고백을 들려준다. 자신의 존재 인식과 함께 진행되는 창작 경험에 관한 진술을 통해우리는 근원적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 시인의 의식을 만나게 된다. 시창작에 대한 시인의 의식은 표면적으로는 전통적인 낭만주의적 문학관에 닿아 있지만 그 내면은 종교적인 태도에 보다 가깝다. '내 안에서 무수하게 반짝이는 별들'이 '이 세상 도처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무들과 나무들이 중얼거리는 말들 속에도/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 있음을" 보았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유기체적 세계의 한 구성요소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지금껏 단어 하나의 숨소리로 숨어 살'고 '물총새의 몸으로 냇가에 나가' '물소리에 섞어 말을 만들려 했'던 주체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내의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의 주체로서 세상을 보려했던 관점이 오히려 화자의 존재감을 위축시켰던 데 반해, 존재와 존재 밖의 세계가 일원적인 관계를 깨달은 후에 화자의 존재는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단어 하나의 숨소리로 숨어살'고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깃든다는 이슬방울'의 아름다움을 사치라고 느낄 정도로 낮은 존재감을 느껴왔던 화자가 근원적 존재의 '살과 뼈가 되기 위해' '말의 고향'을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주적 존재로 자신을 승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주체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체와 주체의 활동을 표현하는 '형용사'와 '부사'가 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제 시인의 시작 행위는 궁극적으로 '누군가 풀어놓은 이야기의 숲 속을 걸으'면서 그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 대상이 자연이든 종교적 절대자이건, 아니면 진리이건 시인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우주적 존재로서 생명 현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노래하게 된 것이다.
시적 순결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들을 수 있게 하고, 현실에서 심연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안의 원천이라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 바탕이 될 때 가능하다. 시인이 위의 시에서 "물총새의 몸으로 냇가에 나가면/물소리에 섞어 말을 만드려 했으나/내 속의 말은 끝끝내 파편이 되어"버렸다고 했던 고백은 인위와 허위와 기교적 의도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찰의 태도는 시인으로 하여금 세계가 쓰는 문장에 참여하게 하는 의식의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유의 방향이나 태도마저도 유행하고, 허위의 언어로 그것을 포장하는 작금의 문화적 현상 속에서 우리는 시가 한낱 읽을거리도 못되는 것으로 전락해버린 비천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해마다 쏟아져나오는 시인들과 그 많은 시들의 주류를 이루는 각종 포즈들은 시를 삶의 본질로부터 괴리된 허위의 언어체계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삶과 세계에 대한 진지하고도 진정한 사유가 뒷받침되지 않는 문학은 그 존재의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급변하는 현실에 적응해가려는 전략보다, 그 현실의 속도를 끌어내리는 것이 문학의 생존을 위해 더욱 적절한 대응 방법이다. 문학은 반성과 사유의 태(胎)로부터 탄생했으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지상의 현실을 끊임없이 변혁하려는 욕망에 근거한 상상력이다. 근원적 세계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꿈, 그곳을 향한 동력은 현실적 셈과 허위의 욕망을 준엄하고도 조용히 반성할 수 있는 순결한 정신으로부터 시작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약력 : 문학평론가. 2001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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