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제3호/초점/추억, 익살, 이야기/이택권
페이지 정보

본문
초점
추억, 익살, 이야기
―차오원쉬엔의 성장소설, {빨간 기와}
이택권(문학평론가)
1. 문학의 특수성과 보편성
다른 나라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마치 나의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힐 때의 즐거움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경험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그 작품이 생산되는 공간과 역사가 특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작품이 토대로 하고 있는 공간과 역사가 특수하다 하더라도, 시간은 그러한 특수성을 가로질러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어낸다. 그 보편성을 살려내는 데 문학은 최전선에 있다. 문학이 특수성에만 함몰될 때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민족감정이나 타자에 대한 편견만을 강화할 우려가 있는 반면, 추상적인 보편성에만 집착할 때, 구체적인 사람살이의 냄새와 결이 사장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항상 역동적일 필요가 있다.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체험과 구체성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감성을 제시하려는 노력. 거기에 어떤 개념이 덧붙여질 필요는 없다. 가령 한때 지구 전체를 휩쓸고 간 세계화라는 바람, 그리고 또 다시 고개를 드는 민족주의와 같은 개념은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방해물로 작용할 확률이 높다. 문학적 풍토를 이루는 구체적인 토대는 분명히 특수한 지리적 환경과 역사성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긴 하지만, 문학은 그 토대를 넘어서서 인간 그 자체의 심성을 자극하고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출간된 {빨간 기와}라는 중국 성장소설은, 위에서 말한 문학의 특수성과 보편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시금석이 될 듯하다. 지금은 상당히 불식되긴 했지만, 제도 교육 속에서 서구 중심적으로 교육받아온 우리에게 문학에 대한 이미지는 알게 모르게 서구의 그것으로 내면화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한동안 동아시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되기도 했었지만, 그것이 서구인의 거울을 통해 본 왜곡된 모습은 아닌가 하는 우려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으며, 오히려 폐쇄된 민족주의적 감정만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낳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우리가 바라보는 서구에 대한 문제는 그것대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었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동아시아는 과연 제대로 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자신있게 답하기 어려운 처지였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개념틀로는 일본이나 중국, 그 밖의 국가들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개념틀을 섬세하게 분절하고 개별화한 단계를 거치지 않는 한 제각각의 특수성이 사라진 그럴 듯한 '보편성'의 미망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령 최근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도 과거의 역사에 대한 섬세하고 치밀한 개별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허울뿐인' 화해만이 손쉽게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월드컵 공동개최도 좋고, 문화개방도 좋지만 그러한 교류를 튼튼하게 밑받침할 만한 역사의 재정립과 제대로 된 개별화가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 한 그러한 노력들이 공염불에 그치고 말 확률이 높다.
마침 중국소설에 대한 소개의 자리이고, 문화개방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더 첨가해야겠다. 적어도 일본소설에 관한 한, 하루키 열풍을 필두로 하여 우리의 이해폭은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이에 비해 중국소설에 대한 우리의 이해폭은 그야말로 미미한 것이 아닐까? 필자의 과문인지 모르지만, 문학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루쉰' 이외의 작가를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을까?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가장 큰 이유는 중국소설에 대한 어떤 선입견과 팔리는 책 위주로 진행되는 출판마케팅의 흐름이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다 보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의 공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의 다양한 공존을 꿈꿔온 사람이라면 작금의 불균형한 출판시장의 논리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터라 {빨간 기와}가 번역된 것에 대해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고, 최근의 우리 소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몇 가지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서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그 흥미로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제부터 그 이유를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소설의 뿌리 혹은 이야기의 복원
소설 읽기의 재미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얻어질 수 있다. 가끔 '재미' 하면, 가볍고 재기발랄한 것만을 염두에 두곤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재미를 꼭 그렇게 협소하게 한정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재미는 좀더 포괄적이어야 한다. 존재론적 고민이나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윤대녕이나 박상륭 등의 소설이 재미있을 것이다. 능청과 발랄한 문체에 매혹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석제나 김종광 등의 소설이 재미있을 것이다. 고즈넉함, 어떤 알 수 없는 그리움과 동경,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근원적인 슬픔 등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이균영 등의 소설이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미는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위치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고 일단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관점에서의 다양한 재미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재미를 말해야 한다면,그 특징으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어렵지 않고, 정서가 통하고, 곳곳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의 극대화가 아닐까? 아무래도 {빨간 기와}의 재미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밑바탕에 깔려진 이야기의 확인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소설의 본령은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를 지혜와 관련시켜 말하기도 했지만, 꼭 그렇게 연관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야기는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자극하는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갇힌 사람들에게, 아주 먼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란 얼마나 매혹적이고 궁금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시절의 형식이 되어가고 있다. 정보화, 세계화, 탐사 공간이 달나라를 넘어선 상황에서 무슨 이야기가 끼어들 소지가 있는가. 그러니 최근의 작가들 상당수가 앙상한 '머리'의 조작으로 수사적 탐닉에 몰두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게다가 변화없는 메마른 일상과 사이버 공간의 전면화 또한 이야기의 죽음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옛날에는 다른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이야기 자체가 될 수 있었지만, 오지가 파괴되고 공간과 공간의 차이가 무화되어가고 있는 현시점에서는 이야기란 공간을 넘어선 상상의 영역으로 발을 뻗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좀 다른 차원일지 모르겠지만, 해리포터 시리즈의 '마법'이 그토록 위상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대중들의 상상의 영역에 대한 어떤 갈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풍토에서 이 소설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복원해내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미래의 상상의 영역으로도 나아가지만, 과거를 복원하는 데로도 나아간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의 복원은 바로 미래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지름길과도 같은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만큼만 미래의 지도를 그릴 수 있으며, 상상력의 공간을 확장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로의 도피나 회귀가 아니다. 아직 설계되지 않은 미래를 탐구하기 위해 과거라는 '광맥'을 파헤치는 행위라고나 할까? 가령 작가가 "나는 이성적으로는 현대주의자이면서, 정서적으로는 고전주의자입니다"(p. 7)라고 했을 때 그것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갈등할 수밖에 없는 분열적인 상황을 직시하고서 한 말일 터이다. 이성적으로는 현실을 분석하고 산적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비어져 나오는 탄식, '그때가 좋았어', '요즘 세상은 너무 차갑고 삭막해'와 같은 말들을 무의식적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위태로움에 직면한 현대인의 고뇌를 그 말은 지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둘의 적절한 배치와 조화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3. 긴장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몇 가지 요소들
{빨간 기와}는 북경대학 현대문학 교수이면서 현재 중국에서 촉망받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차오원쉬엔의 작품이다. 이 소설은 김유정의 해학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동시에 떠오를 만큼,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질성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어 더욱 흥미롭다. 철부지 아이들의 장난질에 한바탕 크게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가 하면(2장 [백곰보]와 6장 [혁명적 대연계] 등을 참조), 섬세한 내면의 묘사가 탁월하여 한동안 잔잔한 감동에 젖게 하기도 한다(8장 [다락방] 등을 참조).
총 11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중국의 한 시골마을에 위치한 '빨간 기와'(정확히는 '유마지 중학교')라는 중학교를 배경으로 사춘기적 설렘과 갈등을 통과해 나오는 소년·소녀들의 순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 장이 매우 완성도가 높아 어느 장을 읽어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단편소설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다음 장에 대한 호기심과 긴장을 끊임없이 유발한다. 그렇다면 긴장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요소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첫째,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을 아련한 옛 추억을 풍부하게 살려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아련하기만 한 옛 추억을 더듬어 보면 거기에 무엇이 숨쉬고 있을까? 지지리도 가난해 끼니를 굶을 때도 많았지만, 지금은 없는 설렘과 사랑과 꿈이 있었던 시절. 산으로 들로 강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이 유일한 오락거리였고, 밤이면 더 먼 곳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 나날들. 이미 굳어버린 기억은 딱딱하지만, 추억은 마치 저녁연기나 뭉게구름을 볼 때처럼 살아서 꿈틀거린다. 기억은 과거의 영역이지만, 추억은 현재를 함께 살며 어느새 미래로 훌쩍 날아가 있다. 한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추억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추억이 살아서 그대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면, 그대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추억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우울하고 갑갑하다. 예컨대 '대장간'에서의 경험을 '수공예'와 '시'에 연결시키는 화자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보라. 추억은 죽어 있던 감각을 살리고 꿈을 부풀린다.
수공예란 정말 기가 막히게 매혹적인 것이다. 수공예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타고난 본성인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분해와 조립을 하거나 작은 도구를 가지고 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공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알 수 있게 하고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본질을 알게 한다. 내 학생 소채는 시인을 수공예인으로 보았다. 그것은 시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히 있어야 할 위치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직업적인 의식과 심미감을 더욱 확고히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소채는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 진정 시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대장간을 떠올리면서 나는 소채의 이런 현대주의적 해석이 정말 절묘하다고 느꼈다(2권, pp. 53∼54).
둘째, '임빙'이라는 어린아이의 내면을 섬세하게 드러내면서 그의 눈에 비친 세계의 익살스러움을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6장 [혁명적 대연계]에서 '도희'의 옆에 눕게 된 임빙의 설렘은 곧바로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우리의 기억을 돌려놓을 것이고, 2장 [백곰보]에서 '백곰보'와 '시교환'의 관계를 목격하자 임빙이 시치미를 뚝 떼고 백곰보를 위기에 빠뜨리는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키득거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장면들은 읽어보지 않고는 그 재미를 느낄 수 없으므로 좀 길더라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아마도 조금 더운 듯 손으로 이불을 끌어내렸고 그러는 사이 그녀의 두 팔이 소매 밖으로 나왔다. 분홍색 꽃무늬가 있는 그녀의 블라우스를 보는 순간 내 숨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사람들에게 들릴까봐 난 곧바로 입을 크게 벌렸다. 내 심장은 펄떡펄떡 힘차게 고동쳤다. 이불 밑에서 뭔가 쭉쭉 내뻗는 주먹처럼 아랫도리가 자꾸만 불거져 올라와 이불을 들썩였다. 나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1권, p. 233).
난 계획된 동작을 완성하려고 가지밭에서 벌떡 일어나 돌로 만든 기념비처럼 우뚝 섰다.
"임빙, 너……너, 거기 서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백곰보는 몹시 궁색해 보였다.
난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우물우물하다가 멍청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둘……둘이서……뭘 하고 있었는데요?"
백곰보도 나와 똑같이 멍청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침대 위에서 장부를 맞춰봤어."
그는 아차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우물우물 다시 말을 했다.
"사무실에서……장, 장부 정리를 했어. 식료품비 계산 말야."
시교환이 문 앞으로 와 섰다.
시교환의 머리가 헝클어진 채 얼굴이 빨개져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1권, pp. 94∼95).
셋째, 우리에게 낯익은 생생한 표현이 읽는 맛을 더해준다. 초등학교 때 시험성적이 떨어졌다고 아버지한테 한 방에 걷어차여 문지방 밖까지 내동댕이쳐지자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악을 쓰는 임빙의 한마디; "어느 개새끼가 공부라는 걸 만들어 낸 거야!" 일자무식인 '빠딴'이 어린아이한테 글자도 못 읽는다는 말을 듣자 내뱉는 소리; "이 새끼가?! 내가 글 못 읽는 거에 뭐 보태준 거 있어?" "니미 주둥이나 닦아라 새끼야!" 임빙이 배로 여행할 때,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강가로 달려오면서 고함치는 욕설; "씨팔놈의 배!" 이 소리를 듣자 배 안에 있던 한 남자가 다른 사람을 향해 하는 말; "배가 누구랑 씹을 한다고 저래요?" 이러한 표현들은 일차적으로는 생동감을 살려내는 작가의 재능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지만, 옮긴이의 세심한 배려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겠다. 김용옥은 외국의 버터가 한국의 된장과 같은 식으로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번역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니와, '제 2의 창작' 혹은 '뛰어난 오역'으로서의 번역은 옮긴이의 성실성과 재능이 동시에 겸비됐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리라. 물론 여기에서 번역 대상의 구체적인 맥락과 그것이 생겨난 풍토에 대한 선이해는 당연히 전제되어야 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넷째, 문화혁명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흐릿하게 깔아놓음으로써 그것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무리없이 읽힌다는 것이다(옮긴이가 이러한 점을 배려해 필요한 정보들은 역주 처리를 해놓았기 때문에 읽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정신적인 산물은 그것을 있게 한 물질적인 조건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발생론적 뿌리는 역사적 상황과 어떤 식으로든 결합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지해 두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고등학교의 한 남학생이 물리 선생님의 대머리 위에 씌워진 모자를 벗겨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개 같은 자본주의 대머리 새끼!'라고 했을 때, 모든 유교적인 유물이나 귀족, 지주, 지식인들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문화혁명의 일단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 맥락이 폐부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빨간 기와'에서의 '챠오안'과 '마수청'의 대립, 임빙과 '조일량'과의 긴장관계는 뭔가 터질 것 같은 시대적 흐름이 학교 내에도 그대로 옮겨져 지배와 복종이라는 권력 메커니즘의 축소판을 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이것을 시대사적 문제와 연결시켜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시절 질투와 시기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고, 또 그 속에서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테니까. 다시 말하면, 그 자체로서 더 보편적인 인간본성에 대한 탐구를 행하는 쪽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인간 부류의 세 종류로서 각각 '마수청'(지시하기 좋아하는 부류), '임빙'(지시당하는 것은 못 견뎌 하지만, 천성적으로 심약하거나 대항할 묘책을 찾지 못해 명령을 감수하는 경우), '유한림'과 '서백삼'(타고나면서부터 지시당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부류)을 예로 들었을 때, 그것은 '빨간 기와'라는 중학교에서의 특수성과 인간 부류의 보편성이 함께 결합되어 제시된 것이다. 문학의 특수성과 보편성은 바로 여기에서도 빛을 발한다. 성장한 임빙이(이건 작가의 말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회고투로 하는 다음과 같은 말들은 그래서 그의 경험이면서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전이된다.
'여론'이라는 것은 정말로 기가 막힌 것이다. 여론이 일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 여론을 잠재우거나 사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밝혀낼 수 없다. 여론은 바로 힘인 것이다. 훗날 내가 여론의 의의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시절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2권, p. 121).
나는 성숙한 어른이 된 후, 다른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나는 절대로 내가 한 한마디, 혹은 내가 한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곤혹스런 처지에 빠지기를 원치 않는다. 만약에 일단 무의식중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했고 마음속으로 깊이 반성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자."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서 기뻐하는 사람들을 나는 마음속으로 증오했다(2권, p. 138).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들이 아닌가. 첫 번째 인용문은 한동안 널리 퍼졌던 '음모이론'을 상기시키고, 두 번째 인용문은 유교적 덕목을 상기시킨다. 여론이 무고한 사람을 어떻게 근거 없는 덫으로 몰아넣어 희생시키는지, 그리고 유교적 덕목이 힘없고 어린 사람들에게만 강요될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를 나는 다시 한번 상기한다. 여론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풍토, 유교적 덕목이 나와 너, 약자와 강자, 어린 사람과 나이든 사람 사이에 동시에 적용되지 않고 한쪽에게만 강요되는 일방적인 풍토, 그렇기 때문에 전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회로부터 우리는 얼마만큼 자유롭게 놓여 있는 것일까? 여전히 회의적이지 않은가. 두 번째 인용문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자."―이 말은 언젠가 내가 어떤 글을 쓰면서도 인용했던 것이고, 내 자신에게도 가끔 다짐시키곤 하는 경구이다. 모든 실천과 행위는 바로 자기 자신의 성찰과 반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지나친 반성은 자기 자신을 모멸감과 비참한 몰골로 만들고 지나친 성찰은 적절한 시기에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성찰과 반성을 게을리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기 실천과 성찰의 행복한 결혼은 그래서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감나무'를 아꼈던 그리운 엄마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자란 마수청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손거울에 얼굴 비추기를 좋아했던 것이며, 우리의 귀염둥이 임빙은 어쩌다가 '까만 기와' 고등학교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일까? 깜찍한 소녀 도희도 마수청도 서백삼도 붙었는데……. 임빙의 후일담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평과전망} 창간호에 [글쓰기의 욕망의 근원에 대한 고찰-이청준론]을 발표하며 평론활동 시작. 주요 글로 [아픈 지구, 아픈 나무, 아픈 인간-박용하론]/ {이청준 소설 연구: 주체의 타자 인식 양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음
- 이전글제3호/초점/언론개혁, 문학권력, 문인-지식인/미수록 02.06.14
- 다음글제3호/초점/시적 순결 속에 깃드는 원초적 아름다움의 세계/김문주 02.06.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