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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기획/영화의 시선과 섹슈얼리티 - 로망스의 경우/박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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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명진
댓글 0건 조회 8,223회 작성일 02-06-1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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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영화의 시선과 섹슈얼리티 - <로망스>의 경우
박명진


1.
카메라 렌즈를 통과하는 사물의 풍경들은 인간의 시각 체계에 충격을 가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카메라의 눈을 '광학적 시선'이라 칭하자. 카메라는 무모할 정도로 대상 시간과 대상 공간을 단절하고 접합하고 뒤섞어 놓는다. 또는 인간의 시신경이 포착할 수 없는 미세한 부분이나 원거리를 마이다스의 손처럼 주무른다. 피사체는 스크린 위에서 끊기고 섞이고 이어지면서 영화적 내러티브를 생산해 내고,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카메라의 욕망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장악력을 부추긴다.
그리하여 근대 과학의 새로운 '아들'인 영화는 대상을 탐욕적으로 포착하고 이에 따라 대상은 인간의 시선에 온전히 점유 당한다. 자연과 도시, 인간과 동물, 시간과 공간은 '광학적 시선'에 의해 새롭게 재편성되고 재해석되며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무성생식한다.
1887년 독일인 오토마어 안쉬츠는 고속촬영기(Electrotachyscope)로 여성 서커스 단원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에드워드 제임스 뮤브리지는 1872년에 말과 낙타와 침대로 들어가는 나부(裸婦)의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제 자연의 움직임은 더 이상 인간의 시선 밖에서 진행되는 신비의 영역이 아니었다. 카메라는 움직이는 기차, 에펠탑 광장을 거니는 시민들, 공장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찍어댐으로써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볼거리'로 변형시킨다. 카메라는 인간의 보고자 하는 기본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피사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여성의 은밀한 육체 또한 여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청각과 촉각에 비해 시각이 대상에 대해 탐욕적이고 일방적인 소유 욕망을 지니고 있다면, 영화는 애초부터 대상을 폭력적으로 점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무의식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발견과 탐색과 점령으로서의 근대성. '테크노 시대의 푸른 꽃'으로서의 영화는 근대의 얼굴을 한 채 앞으로 돌진한다. 거칠게 말해서 근대는 남성의 역사이고 남성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거대한 내러티브이다. 도시와 자연 풍경은 여성들의 육체에 의해 스크린의 공간을 빼앗겼고, 여성들의 육체는 도시와 자연 풍경을 내밀고 스크린의 안방을 차지하고, 여성의 육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체계를 탄생시켰다.
말하자면 영화의 역사란 풍속의 역사, 더 정확하게 말해서 풍속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인간의 시선의 역사라 할 수 있으리라. 이는 여성의 육체를 관찰하는 관객의 역사이기도 하고 그 여성의 육체를 감싸고 있는 성 이데올로기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여성의 육체와 성 담론에 대한 남성중심적 시선의 권력 변천사로 읽히기도 한다.

사진과 화폐는 19세기 사회 권력과 일치하는 형식이 된다. 이 둘은 모두 가치 판단과 욕망의 단일한 전지구적 네트워크 안에 있는 모든 주체를 엮고 통합하기 위해 체계들을 통합하고 있다. … 사진과 화폐는 모두 개인과 사물간의 추상적 관계들을 새로이 설정하고 그 관계들을 실제에 부여하는 마술 같은 형식들이다. 전반적인 사회상이 기호로서 배타적으로 재현되고 구성되는 것은 바로 서로 별개의 것이긴 하지만 서로 스며드는 화폐와 사진의 경제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사진 또는 영화는 마르크스가 "태어날 때부터 평등주의자이며 냉소주의자인 상품은 정신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교환할 용의를 항상 가지고 있다"고 말한 상품이나 화폐와 겹쳐진다. 화폐나 상품처럼 사진과 영화는 대상과 가치를 재현한다. 그리고 이 재현 양식은 사회 체제나 물적 토대의 변화 양상에 거의 정확하게 조응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영화와 성의 관계는 근대성과 시각체계와의 관계와 같다.
근대 과학이 종교적 신비성을 벗겨내고 가시성의 범위 안으로 대상을 호명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세적 금기에 대한 전면적 거절로 읽힌다. 존재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 또는 감히 볼 수 없는 - 것을 프레임 안에 배치하는 것, 공개하거나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 문서를 펼쳐 놓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궁극적인 공포와 불안의 기원으로서의 타자, 무의식, 금기를 카메라 앞으로 불러 세우는 것, 이런 것들이 여성의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영화가 말걸기를 시도하는 배경이 아니겠는가.
2.
원론적으로 말해 영화에 각인된 섹슈얼리티가 매력적인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도 될 수 있고 늙은 여성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와 관객은 프레임 안으로 젊은 여성, 특히 이 여성의 터질 듯한 섹슈얼리티를 소환하는 데 동의한다. 이는 카메라가 남성 중심적 시선이라는 유전인자를 지속적으로 건네 받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영화가 전적으로 여성을 관음의 대상으로 붙잡아 두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페티시로 몰아대는 것만은 아니다. 놀랍게도 영화는 여성에 대한 남성적 시선을 전복시키거나 해체하기까지 한다. 또는 포르노적 영화 양식은 부메랑이 되어 텅빈 관음의 공간을 가르고는 돌아와서 바라보고 있는 자들의 욕망을 베어버린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Salo le 120 Giornale di Sodoma >(1975),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1972),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1971),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의 <감각의 제국;In the Realm of the Senses>(1976), 장선우의 <거짓말>(1999)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들 영화는 여성을 관음의 대상으로 설정하기보다는 육체와 성을 통해 모순에 찬 사회와 체제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들 영화 속에서 과도한 섹슈얼리티는 특정한 정치적 발언을 위한 풍경으로 등장한다. 남성적 시선에 의해 점유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 육체, 그리고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에 의해 재구성되는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는 어떤 의미에서 도전적이지 못하다. 적어도 이들 영화에서 피사체로서의 여성의 육체는 스스로 말문을 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카트린느 브레이야의 <로망스>는 영화가 여성의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전면에서 심문할 수 있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여성의 육체와 섹슈얼리티를 다른 어느 것으로도 환원시키지 않고, 여성이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고 자신의 성을 이야기하도록 부추긴다.
까트린느 브레이야 감독의 <로망스>는 영화가 여성의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어떻게 심문할 수 있는가를 발언하는 도발적인 작품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여주인공 마리(카롤린 듀세)는 애인 폴(사가모르 스테브넹)의 아파트에서 그와 동거한다. 모델 일을 하고 있는 폴은 나르시즘에 빠져 있는 이기적인 성격의 남자이다. 수많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섹슈얼리티가 지극히 매력적임을 즐기면서 여성들을 유혹한다. 마리는 폴과 섹스를 나누고 싶지만 그는 육체적 접촉마저 완강하게 거부한다. 벽지와 침대 시트까지 온통 하얗게 꾸며진 폴의 아파트는 '몸'이 삭제되어 버린, 또는 '여성'이 삭제되어 버린 '남성'의 공간이다. 마리에게 있어서 육체적 접촉은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차라리 그것은 가장 강력한 '존재 증명'이다.
교사이면서도 문법에 서투른 마리, 혼자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이 취미인 폴. 따라서 흰색으로 도배한 폴의 아파트는, 이른바 '데카르트'적 사유 공간의 창백함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마치 포르말린으로 하얗게 표백된 내장 같다. 그녀는 '몸'에 대해서 사유한다, 아니, '몸'을 통해서 사유한다. '몸'이 박제된 폴의 공간 안에서 마리의 사유는 그 자체로 고문이다. 이때, 성욕에 몸부림치는 마리의 육체는 흰색 침대 시트 위에서, 불온하게 떠다니는 기표가 된다. 이 기표로서의 몸은 이성의 햇살에 하얗게 말라비틀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이 흰색은, 몸을 향한 마리의 순수한 욕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마리는 폴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창백한 흰색은 오히려 슬프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흰색 드레스만 입고 나오는 마리는, 다소 위험하게도 '마리아'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폴이 마리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하자, 마리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지. 내가 동정녀 마리아인 줄 알아?"
폴과 몸을 섞지 못한 마리는 따라서 '살아있는 시체'일 뿐이다. 그녀는 술집에 가서 낯선 남자 파올로(로코 시프레디)를 만나 외도를 시도한다. 그와 함께 정사를 나누는 호텔방은 어두운 청색을 띠고 있다. 불온하고 도발적인 섹스, 그러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열정. 마리는 파올로에게 콘돔을 사용하는 남성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 또는 남성의 성기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이야기한다. 마리에게 성적 육체는 신비로운 휘장 뒤에 숨겨진 금기의 솟대가 아니다.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일상의 물질적 대상일 뿐이다. 성적 환상은 휘발되고 일상의 까칠한 껍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포르노 전문 배우 로코 시프레디를 캐스팅한 감독 까트린느 브레이야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원작 <로망스>의 도발적인 내용에 기름을 붓는 무모함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감독은 마리와 파올로를 철저하게 포르노그라피의 앵글 밖에 배치해 둠으로써, 세상의 성급한 선입관과 오해로부터 그를 피신시킨다. 마치 육수를 고아낸 후 건져낸 고깃덩어리처럼 그들의 섹스는 퍽퍽할 뿐이다.
마리는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있다'와 '가지다'의 동사형에 대한 문법을 가르친다. 마리의 내레이션. "가질 수 없으면 있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있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마리에게는 이 문법에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다. 문법이란 무엇인가. 의사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 기호에 대한 추상적 규칙, 제도, 구조가 아닌가. 문법에 미숙한 문법 교사. 이 모순어법은 마리가 이성과 합리주의의 영토에서 영주권을 획득할 수 없음을 강변한다. 폴이 그녀의 옆자리에 누워 있지만 그를 가질 수 없다. 마리가 파올로의 육체를 가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그녀에게는 없는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몸'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having)'와 '존재(being)'를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다.
마리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교장 로베르(프랑수와 베를리앙)는 심리학자이면서 뛰어난 엽색가이다. 로베르는 마리에게, 그녀의 문법 실력에 '구멍'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구멍'은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일종의 환유, 또는 결여의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법정(法定) 세례명(洗禮名)'이다. 로베르가 건네준 책을 받아든 마리는, 그에게 자신은 독서를 싫어한다고 대답한다. 그녀의 교과서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로베르는 영화 내내 붉은 색 셔츠를 입고 있고 그의 방 곳곳에 붉은 색 장식이 놓여 있다. 로베르는 그녀의 온몸을 밧줄로 묶고, 마리는 꽁꽁 묶인 자신의 육체에서 쾌락을 경험한다. 이를테면 로베르는 마리에게 있어 진지하고 유능한 지질학자이다. 그녀의 육체 속에 숨겨져 있는 욕망의 지층(地層)을 설명해 주는 고고학자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욕망을 캐내는 자는 로베르가 아니라 마리 자신이다.
마리는 자위를 하면서, 남자 없이도 여자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을 깨닫게 되고, 거울로 자신의 치부(恥部)를 비춰보면서 몸의 주인이 된다. 로베르와의 만남을 지속하면서 마리는 드디어 붉은 색 드레스를 입는다.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 폴은 드디어 마리의 육체를 받아들인다. 폴의 배 위에 걸터앉아 그와 몸을 섞는 마리는 선언한다. "이제 바꾸는 거야. 너는 여자가 되는 거고 나는 남자가 돼서 즐겁게 해줄게." 이 말에 폴은 거칠게 마리를 침대 밑으로 떨쳐버리지만, 그 와중에도 단지 '한 방울'의 정자가 그녀의 몸 속에 흔적을 남긴다. 그녀는 자신의 뱃속에 또 하나의 생명체를 키우기 시작한다. 그녀의 나래이션처럼 "한 방울의 정액으로 마리아의 기적을!"
마리는 자진하여 병원의 분만 침대에 누워, 산부인과 인턴들의 실습 환자가 된다.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인턴들의 시점에서, 누워있는 그녀의 다리 사이를 응시한다. 인턴들의 시선과 손에 몸을 맡긴 채 들리는 마리의 보이스오버(voice-over). "살덩어리 … 임신부의 다리는 의사들의 것이다 … 다리 사이를 응시하는 시선 … 씁쓸한 기쁨을 느낀다."
만삭의 몸이 된 마리를 폴은 항상 외출할 때 동반한다. 자신의 씨를 만들었다는 승리감과 자신감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남자들의 욕망. 술집에서 폴은 마리가 보는 앞에서 낯선 여자와 춤을 추며 그녀를 유혹하고, 이를 지켜보는 마리에게 저속한 질투를 느끼지 말라고 경고한다. 진통을 느껴 잠에서 깨어난 마리는, 만취한 채 그녀의 다리 쪽에 엎어져 자고 있는 폴의 모습에서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가스 렌지의 벨브를 모두 열어둔 채 마리는 혼자 병원에 가서 아이를 출산한다. 다리를 벌리고 힘을 주면서 마리는 세상 전체가 거대한 창녀촌이라는 상상을 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장면들. 어두컴컴한 골목, 상가들의 벽에 여인들의 몸이 반만 나와 있다. 허리 아래쪽만 거리 쪽으로 노출되어 있는 여인들. 지나가는 남자들이 길을 걷다가 한 여자의 다리 앞에 서서 그녀의 하체를 유린한다. 점점 많아지는 행인들. 남자들은 모두 알몸인 채 허리 아래 부분만 노출시킨 여자들의 다리 앞에 줄서 있다. 폼페이의 마지막 날을 보고 있는 듯한 환상 신(scene). 그 때쯤 폴의 아파트는 폭발하고.
<로망스>는 마리의 눈과 입으로 서술되는 영화이다. 그녀는 자신과 남성의 육체를 응시하고 관찰한다. 그리고 보이스오버를 통해 영화의 디제시스를 관장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옹호하기 위한 전투에서 마리는 잔다르크처럼 앞장서 깃발을 든다.
3.
우리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여성 이미지 비평, 여성 중심 비평.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형이상학적 본질론 또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반대하여, 여성을 사적(私的) 영역과 모성적 존재로 국한시킴으로써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모든 관습에 저항했다. 이것은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한다. 여성 이미지 비평은 작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특정한 여성 이미지를 문제삼는 비평이다. 여성 이미지 비평이 밝혀내는 부정적인 여성상에 반발하여 여성의 고유한 특성과 남성과의 차이에 긍정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비평 흐름이 여성 중심 비평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의 서구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여성성을 탐구하려는 백인 부르주아 여성의 관념론을 벗어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들의 페미니즘에는 '인종'과 '계급'의 층위가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로망스>를 우리가 손에 쥘 때 부스러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마리의 개인적 여성성(feminity)은 모든 '차이'들을 덮어두고, 자기 정체성에 골몰하는 모든 여성의 전형이 된다. <로망스>의 '마리'와 <아줌마>의 '삼숙'이 사이에는 본질과 일상의 차이처럼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가로막고 있다.
<로망스>는 '말하고 보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전복적인 정치학을 선보인다. 그러나 '음성을 삭제 당한' 하위주체(the Subaltern)에게까지 발언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까트린느 브레이야 감독은 여성학자 이리가라이(Luce Irigary)가 말한 '음순 담론'을 실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리가라이는 남성중심사회가 요구하는 재생산의 궤도를 벗어나는 여성의 자율적인 욕망은 음핵(clitoris)을 담론화함으로써 가시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녀는 두 입술로 표상하는 '음순 담론'을 만들어내는데, 이때 신체 일부는 계속해서 포옹하는 두 음순(입술)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자신 안에서 이미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그러나 각기 하나로 나누어질 수 없는, 둘이다. 이 음순 담론은 기존의 언어체계가 배제해 버린 여성의 몸과 여성의 욕망을 언어화함으로써, 여성성을 기존 '남성성/여성성'의 이분법이 깨진 후에나 가능한 새로운 존재성을 예시한다.
그러나 이리가라이 식의 '여성적 글쓰기'는 성적 주체가 실제로 놓여 있게 되는 사회관계들의 역사적 특수성을 간과하기 쉽다. 가부장제가 갖는 힘의 역사와 경제적으로 특수한 세부 사항들을 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물질적 모순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또한 인종과 계급이 다른 여성들이 갖는 각기 다른 역사적인 경험을 무시하고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으로부터 여성 주체성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할 위험도 있다. <로망스>는 바로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전지적 작가 시점의 계몽주의적 시선이라는 함정에 발목이 빠져 있다.

<로망스>엔 로망스도 없거니와 포토제닉한 누드도 없다. 개봉관에서 문제의 섹스장면들은 삭제하지 않고 모자이크로 가려지겠지만 적나라한 묘사에 역겨움을 느끼는 관객도 적잖을 듯싶다. 진정한 의미의 에로티시즘은 관객이 벗길 수 있도록 행위의 충족감을 불어넣어야 한다. <로망스>를 걸작으로 올릴 수 없는 이유는 너무 자주 관객들의 상상력의 길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로망스>는 프레임 안으로 육체와 섹스를 소환하여 '여성의 역사'를 구술(口述)하려 한다. 이는 '시선의 권력'에 대한 폭파 작업이다. 카메라는 여성의 눈이 되어 여성의 육체를 탐색하고 해석하고 재구축하면서 여성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그러나 메시지의 과도한 표출로 카메라의 눈은 충혈되고 부풀어오른다. <감각의 제국>을 오마주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그것은 도발적인 섹스신에 한해서이다. 우리는 다만 <로망스>에서와 같은 에로틱한 수사법의 환기가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침해와 폭력을 대신하기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에 있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더 큰 투쟁의 일부분이다. 이에 따라 영화 속의 성은 '정치의 심미화'가 아닌 '미학의 정치화'를 향해 거친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이것은 카메라의 '광학적 무의식', 관음과 시선의 점유 욕망으로 얼룩진 렌즈를 부당한 권력에게 되돌려 반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영화에는 두 가지의 성이 존재한다. 시선의 대상을 포획하고 점유하려는 성과 그 대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와 섹슈얼리티를 심문하고 역사화시키는 성이 그것이다.

<약력>
1998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희곡부문으로 등단
1998 탐미문학상 평론부문 우수상
1999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당선
<저서>
{한국희곡의 이데올로기}(보고사, 1998), {한국전후희곡의 담론과 주체구성}(월인, 1999), {리허설}(희곡창작집, 보고사, 1998) 외 공저 다수.
<현직>
중앙대, 연세대, 동국대, 서울여대 등 출강


추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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