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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기획/새로운 작가들의 반역적 모험/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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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남석
댓글 0건 조회 3,287회 작성일 02-06-1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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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새로운 작가들의 반역적 모험
- 동성애와 새로운 문학적 흐름 -
김남석


Ⅰ. 성을 넘어서, 편견을 넘어서       : 남자가 된 여자 이피스와 동성애를 바라보는 소설가들
Ⅱ. 가려진 삶의 한 구석              : 박상우의 「붉은 달이 뜨는 풍경」과 하성란의 「당신의 백미러」
Ⅲ. 한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 윤대녕의 「수사슴 기념물과 놀다」와 전경린의 「다섯 번째 질서와
                                      여섯 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 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Ⅳ. 사랑에 대한 차분한 물음의 자리   : 송경아의 「송어와 은어」
Ⅴ. 남은 작품들과 남은 과제들        : 우리의 삶 속의 동성애


Ⅰ. 성을 넘어서, 편견을 넘어서 : 남자가 된 여자 이피스와 동성애를 바라보는 소설가들

너 자신도 속이지 말고, 남들도 속이지 말고, 네가 무엇으로 태어났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보고, 여자인 네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여라.

오비디우스 신화집 『변신이야기』(이윤기 역, 민음사 판)를 보면, 이피스에 대한 신화가 소개되어 있다. 이 신화를 요약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크레타 섬에 릭도스와 아내 텔레투사 살았는데,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아내 텔레투사가 임신을 하자, 릭도스는 먹여 살릴 일이 난감하니 아들인 경우에만 살려두겠다고 공표한다. 텔레투사는 비록 딸을 낳았으나 신들의 게시를 받들어 아들을 낳았다고 속이고 아기를 살려낸다. 릭도스는 태어난 아이에게 이피스라는 남자 이름을 지어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에게도 두루 쓰일 수 있는 이름임으로 텔레투사는 만족해한다. 텔레투사는 이피스를 사내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무수한 거짓말을 하지만, 혼인 문제로 그만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릭도스는 이피스가 열 세 살이 되자 이안테와 혼인을 서두른다. 이안테는 크레타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처녀였고, 어릴 적부터 이피스의 단짝으로 지내온 처지였다. 이안테는 이피스가 자신의 남편이 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고, 이피스 역시 동성의 처지였지만 이안테에게 마음이 끌렸다. 소녀의 몸으로 소녀를 사랑하게 된 이피스는 착잡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신들에게 기도를 드리지만 뾰족한 해결방안이 마련되지 않자 그만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한다. "이피스여! 정신을 차리고 이 어리석은 생각, 쓸데없는 생각일랑 털어 버려야 한다. 너 자신도 속이지 말고, 남들도 속이지 말고, 네가 무엇으로 태어났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보고, 여자인 네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여라. 사랑에의 욕망을 낳고 이 욕망을 살찌우는 것은 바로 희망이다. 그러나 네 경우, 자연은 너에게 그런 희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화의 결말에서 이피스는 남자로 변신하여 산적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래도 신화에서나 가능하고 기대할 만한 결말인 듯하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로 여겨지던지 삶의 어떠한 측면에 대한 가르침이 내재된 이야기로 읽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90년대는 이 신화적 결말에 일정 부분 도전해 가는 양상이다. 황당한 이야기의 측면으로 보면 적어도 남자가 여자가 되는 물리적 수술이 드물지 않게 시행되고 있으며, 가르침이 내재된 이야기의 측면으로 보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남녀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탈피하여 새롭게 정의하려는 움직임-게이나 레즈비언이나 양성애자-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전환 수술로 주어진 성을 바꾸던가, 동성애자임을 천명하여 성적 성향의 소수자임을 공개하던가. 그 어떤 쪽이든 90년대는 이러한 발언과 선택을 보다 존중하는 시기인 것 같다.
이러한 존중의 경향은 문학에서도 폭넓게 발견되고 있다. 사실 우리 근대 문학 초기에도 이러한 도발적인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광수는 「윤광호」라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소설을 쓴 바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봉산탈춤에서도 〈비역〉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러한 사례들은 돌발적이고 예외적인 측면이 강했는데, 90년대는 이러한 돌발적이고 예외적인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부여받는다.
차별성의 근거로 동성애의 다양한 양태를 다룬 문학작품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를 지적할 수 있겠다. 내가 기억하는 범위에서, 90년대 작가군에 포함될 수 있는 작가 중에 이 문제에 처음으로 도전한 작가는 장정일이다. 장정일은 충격적인 소설 「아담이 눈뜰 때」에서 턴테이블을 얻기 위해 남색가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을 그려낸 바 있다. 이후 90년대의 새로운 소설적 경향을 주도해 온 신진 작가에게서, 동성애에 대한 관심은 유행처럼 증폭된다. 90년대 소설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윤대녕, 김영하, 전경린, 박상우, 하성란, 백민석, 송경아, 이윤기 등은 앞다투어 동성애를 다룬 작품을 자신들의 소설 목록 속에 마치 참고문헌처럼 끼워 넣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증폭된 관심은, 일차적으로 개방된 성의식에 편승한 하나의 모험적 시도에 해당할 터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편견을 넘어서 나아가려는 확대된 문제의식의 발로로 이해된다. 보다 견실한 독법을 통해 그 공과를 철저히 따져야 할 일이지만, 일단은, 이러한 소설적 작업에 대해 〈소외된 인간계층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내려질 수 있을 듯하다.

Ⅱ. 가려진 삶의 한 구석 : 박상우의 「붉은 달이 뜨는 풍경」과 하성란의 「당신의 백미러」

빛과 그림자처럼 각이 있는 모든 곳에는 사각지대가 생기게 마련이다.

박상우나 하성란은 동성애의 비밀을 폭로하는 절차와 방식과 시기에 상대적으로 과도한 비중을 둔다. 먼저 박상우의 경우를 보자. 박상우는 「붉은 달이 뜨는 풍경」에서 초점화자로 하여금, 여성간의 동성애 현장을 목격하게 한다. 초점화자인 남자는 잡지사에 취재기자로 근무하던 중, 한참 인기가 폭등하던 시나리오 여작가와의 인터뷰를 맡게 된다. 인터뷰의 상대가 된 여자는 오만하고 천박하고 허영기로 가득 찬 인물이었지만, 그녀와 동행한 여자는 청순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남자는 여자와 정열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역시 시나리오 작가였던 이 여자가 대본 작업을 위해 모종의 장소에 칩거하자,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일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 말자는 애초의 약속을 무시하고 여자를 찾아 나선다. 소설은 한 여자를 찾아 길을 떠나는 남자의 모습을 추적하면서 시작되고, 그 남자의 회상 속에서 여성의 면모가 차차 드러나면서 진행된다. 여자는 돌아가 달라고 거듭 애원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작업 장소에 몰래 방문하여 숨겨진 사생활을 엿본다. 남자가 찾아 나섰던 여자는, 취재차 만난 적이 있었던 시나리오 여작가와 동성애를 나누는 사이였던 것이다.
이 소설은 남자가 두 여자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알게 된다는 결말을 꽤나 중시한다. 소설 여기저기에 동성애의 비밀이 밝혀질 것을 대비한 복선과 암시를 깔아두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 복선과 암시를 자연스럽게 풀도록 유도한다. 가령 초점화자의 생모가 집을 나가게 된 이유가 동성애로 제시된 점, 여자가 둘 사이의 관계를 〈수정 고드름〉에 빗댄 점, 남자의 사랑 행각에 의미심장한 전언을 남긴 점 등은 여자의 동성애 성향이 밝혀질 경우를 대비한 소설적 배치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비 장치가 이 소설의 의의와 가치를 전적으로 담보하지는 못한다. 이 작품이 결정적으로 두 가지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흐름이 작위적이라는 점이 첫 번째 결함이다. 우선 남자가 여자를 만나러 가는 이유가 부족하다. 초점화자의 생모의 사연이 끼여드는 대목도 부자연스럽다. 초점화자의 연인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의미있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초점화자 생모의 사연을 설정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러한 소설적 전략은 두 이야기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결 방식을 찾지 못함으로써 자연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이야기를 그럴 듯하고 흥미진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이야기의 요소들의 도입을 정당화하는 방식〉인 동기화motivation의 측면에서 생각해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상황적으로 동떨어진 레즈비언 커플의 사연들은, 이 소설에서 의미있는 구조적 중첩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두 번째 문제점은 이러한 구조적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에 해당한다. 동성애 문제로 자식을 버린 어머니와, 역시 같은 이유로 연인을 버릴 것으로 예상되는 여자가 화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이 소설의 초점화자는 두 경우로부터 피해를 입게 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이러한 상처를 입은 남자를 그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해보면, 이 작품은 이러한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어느 누구도 사랑해보지 못한 남자에게 비수처럼 들이밀어진 여자의 질문-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는, 여자의 질문이면서도 동시에 독자들의 질문이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박상우의 대답은 없다고 해야 옳겠는데, 굳이 대답이 될 만한 것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사실을 밝힌 적이 없었으므로 진실은 어차피 남자의 몫이 아니었다. 오로지 유추와 연상만이 남자의 몫일 뿐이었다. 자기 혼자 되풀이하는 숨바꼭질, 그것이 남자에게는 진실 찾기 게임이었다. 진실은 자기 안에도 있고 또한 자기밖에도 있었다. 안에 있다고 단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밖에 있었다. 밖에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진실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도 또한 있는 것이었다.(105면)

인용문은 대단히 복잡하게 진술되어 있지만, 〈진실〉이라는 단어를 〈동성애〉로 환원하면 간단하게 풀린다. 즉 〈진실〉이라는 거창한 용어는 〈동성애〉라는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는 화려한 관념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실의 실체가 동성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별다른 인식 상의 전환을 꾀할 수 없었다. 문제의식이나 작가의 세계관을 발견할 수도 없었다. 다만 약간의 표피적 놀람이나 유희적 차원의 이야깃거리를 얻을 뿐이다.
그렇다면 박상우는 우리 사회에서 그리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는 동성애에 대한 호기심에 편승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구조적 중첩 효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서로 비슷한 이야기를 배치하거나 비밀의 누설을 지연시키기 위해 거창한 용어로 포장하는 노력은 모두 얄팍한 호기심을 부풀리기 위한 속셈에 불과하다. 이러한 소설 창작 의도는 대단히 실망스럽다. 동성애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한낱 화재거리로 전락시키는 이러한 작가의식은 동성애에 대한 오류와 폄하를 가중시킬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성란의 경우도 박상우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신의 백미러」는 구조적 틀이 더욱 비틀린 작품이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전반부는 의류매장에서 손님들의 도둑질을 감시하는 남자의 시선으로 꾸려진다. 이 남자는, 28일 주기로 매장에 들러 사소한 물건을 훔치고 눈도장을 찍은 원피스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가는 여자에게 주목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자의 간과하기 힘든 도둑질이 적발되자, 남자는 여자와 대면하게 된다. 여자는 돌아가면서 연락처를 남기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러 연락처가 명시된 유흥업소로 찾아간다. 여자는 유흥업소에서 마술을 하고 있었고, 남자는 자연스럽게 여자의 조수로 나서게 된다. 소설의 후반부는 여자의 마술 조수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 남자의 행적으로 이어진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일자리를 찾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 현장에서 여자인 줄 알았던 파트너가 실제는 남자였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이 소설은 여장 남자의 이상 심리를 그려내는 데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다. 28일 주기로 매장을 찾는 습성, 여성 원피스에 눈독을 들이는 태도, 여성을 연상시키는 자태와 피부의 촉감, 심지어는 마술사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남녀사이여야 한다는 진술 등을 늘어놓아 독자들을 현혹시킨다. 독자들은 마지막에 남장여인의 흔적이 제시되기 전까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최순애를 여자로 인지하는 것이다. 아니 교통사고 현장에서 최순애의 비밀-남성 성기의 흔적-을 직접 엿본 남자조차도 좀처럼 자신의 목격 상황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밀을 엿본 독자들도 마지막까지 어리둥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남자의 기억은 퍼즐을 맞추고 있다. 어제는 난데없이 '최순애'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퍼즐 조각과 맞닿아 있는 다른 퍼즐 조각들을 구할 수가 없다. 떨어지면서 의자의 쇠다리가 남자의 이마에 내리꽂혔다. 기억나지 않는 건 머리에 받은 충격 때문이고, 개인 차는 있지만 자연스럽게 온전한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의사는 말했다. '깨진 백미러 속으로 보이던 두 다리'가 선명히 떠올랐다. 이번에는 낱말이 아닌 선명한 그림이다.(295면)

남자는 평소에 잘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사실에, 사각지대가 엄연히 존재했음을 감지한다. 즉 최순애가 실제로는 남자였다는 사실을 시야의 사각지대를 비추는 백미러로 보았다고 무심결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백미러의 기능은 삶의 진정한 구석자리를 비출 정도로 이 소설에서 완성도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앞서의 박상우처럼 하성란도 상대의 비밀을 눈치채고 추적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지만, 그래서 밝혀진 사실은 한낱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박상우나 하성란에게 요청해야 한다. 우리는 한쪽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멀어져야 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소설들이 헤어지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애절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도 있고, 이몽룡과 성춘향처럼 언젠가 다시 만날 가능성을 담지한 이야기도 있으며,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처럼 무어라 선뜻 말하기 어려운 곤란한 관계를 다룬 이야기도 있다. 이들의 헤어짐은 그 속에 내재된 필연적인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들의 삶의 한 구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문의 대립, 신분의 격차, 운명의 장난 그리고 이러한 장벽들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박상우와 하성란이 동성애를 다룬 소설에서는, 동성애자이니까 헤어져야 하고 그러니까 장벽을 넘어서려는 노력도 거의 소용없다고 말해지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소설의 주요 관심사가 동성애를 통해 삶의 한 구석을 조명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구석에 위치한 다소 보기 드문 풍경인 동성애자들의 행태를 엿보는 것에 머물고 말았다. 이는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동성애는 소재적 측면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생의 가려진 한 부분으로 인정한다면 말이다.

Ⅲ. 한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 윤대녕의 「수사슴 기념물과 놀다」와 전경린의 「다섯 번째 질서와 여섯 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 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고통과 위험이 닥칠 때마다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 주는 위로자

윤대녕과 전경린의 경우는 앞서 박상우나 하성란의 경우와 전혀 다른 소설적 경향을 보인다. 가장 큰 외형적 변별점은 동성애자의 비밀을 드러내는 소설적 시기와 그 목적이다. 박상우나 하성란은 동성애자의 비밀을 소설의 말미까지 숨기고 있다고 폭탄선언처럼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런데 윤대녕과 전경린은 소설의 초입에서 동성애자의 비밀을 공개한다. 이것은 이들의 소설적 목적이 동성애를 이용하여 단순히 독자들의 놀람을 꾀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이들의 소설적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대녕과 전경린의 소설 세계를 간단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윤대녕은 공통된 서사 문법을 지니고 있다. 이 문법은 한 여자가 사라지거나 다른 여자가 나타나는 기이한 만남으로부터 촉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윤대녕 소설에는 헤어지는 여자와 만나는 여자가 동시에 등장한다. 여자가 사라지는 자리에 다른 여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윤대녕에게 여자가 삶의 부차적인 표상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만, 그녀들이 윤대녕이 읽어내야 할 세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시될 뿐이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삶의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사라지거나 잊혀졌다가, 뜻밖의 경로를 통해 부재를 알려올 때, 무의식의 한 켠에 외면해두었던 삶과 세계의 의미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대녕의 소설 문법은 그 자체로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소설적 패턴은 일종의 매너리즘으로 빠져들었는데, 이는 윤대녕 소설의 의의와 가치를 상당히 퇴색시키곤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수사슴 기념물과 놀다」는 하나의 탈출구로 고려될 만한 작품이다. 비록 문학적 완성도가 정련되어 있는 작품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참조할 사항이 많다. 먼저 소재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의 구도에 상당한 변주를 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윤대녕의 비슷비슷한 작품과 어느 정도 변별된다. 이러한 구도의 변화는 단지 남녀 이성애자 커플을 남자 동성애자 커플로 만들었다는 외형적 변화에만 있지 않다. 윤대녕의 소설은 대게, 여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남자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주인공이 항상 남자이고 여자들과의 만남 혹은 이별의 과정이 소설의 커다란 틀로 일정하게 설정된다는 관점에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혹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는, 삶의 강제성에 대한 반영으로 판단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남자/여자, 수동/능동, 소극/적극의 태도를 변화시켜 놓고 있다. 이 작품의 화자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배우자-수사슴 기념물씨-를 찾고, 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의 강제성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상실감에 빠져버리는 인물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신의 거처를 양보하고 감추어진 사연을 거리낌없이 털어놓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인물로 거듭난다. 이는 자신의 거처에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 가는 인물이 아니라, 삶의 반경을 나누고 적극적으로 개척할 줄 아는 인물임을 뜻한다. 이러한 변화는 고무적이며 장려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주는 위로자〉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90년대 이후의 소설에서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관심사에 지나치게 함몰하는 소설을 다수 목격해왔다. 타자나 집단의 문제는 이제는 더 이상 관심의 중심에 놓이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성향을 앞장서서 주도해 온 윤대녕이 그 완고함을 거두고 있다는 점은 주목된다. 사실 「천지간」이나 「그를 만나는 봄날 저녁」에서도 바람직한 변화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동성애자의 범위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되집어볼 만한 구석이 많다고 하겠다. 이 소설에서 동성애자의 고민은 약한 자의 그것과 동일하게 이해될 수 있다. 즉, 동성애자라는 상황적 특수성이 단순히 구체적인 측면으로 머물지 않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제유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소설 안의 한 삽화를 보면, 윤대녕이 겨냥하는 목표가 어느 정도 짐작된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방에서 시네라리아를 꺼내 온실로 가지고 갔다. 불을 켜자 어둠 속에서 제멋대로 떠들고 있던 꽃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꽃을 키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온실에 들어설 때 발소리를 조심하는 일이다. 짐승만큼 식물도 소리에 민감하다는 것은 3년 전 온실을 갖고 나서 곧 알게 되었다. 요컨대 전희와 애무가 없으면 때가 돼도 그 은밀한 부분을 절대 벌리지 않는다. 나는 물뿌리개를 들어 시클라멘과 산호수와 첼리에 적당히 뿌려 준 다음 온도계를 확인하고 라벤다 향의 허브 화분 하나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지붕의 기왓장을 핥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차츰 거세 지고 있었다. 오늘은 꽃들이 밤새 숨을 죽이고 있겠다. (254~255면)

화자는 같은 직장의 남자 동료를 사랑하게 되자, 사표를 써야 했다. 그리고 온실에서 꽃을 가꾸며 숨죽인 삶을 영위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따가운 눈총과 타인의 배타적 시선에 의해 외부 세계의 반응에 민감한 식물 같은 삶을 종용당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발소리를 조심해서 식물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이 사회에 필요한 이유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와 애정없이는 진정한 소통을 이루어낼 수 없다. 마치 식물에 대한 애정없이는 꽃의 개화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화자의 이러한 태도는 〈수사슴 기념물씨〉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자신의 고장난 삶을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고 싶어하는 욕구와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함께 체감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공존은 삶의 조화로운 풍경을 이룬다. 이것이 내가 윤대녕이 동성애라는 사안을 흥밋거리나 특이한 소재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근거이다. 윤대녕은 동성애라는 소재가 지닌 한계를 넘어 삶에 대한 식견과 문제의식을 담은 소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전경린의 경우를 보자. 전경린의 소설 역시 일정한 패턴을 구가하고 있다. 초점화자는 여자인 경우가 많은데, 여자들은 대개의 가정 주부가 그러하듯 평온한 가정을 꾸려 가는 일상인이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편이 있고,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으며, 적당한 사회적 지위와 상당한 교양을 지니고 있다. 평범하지만 건강한 자식들을 키우고 있고, 대외적으로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면 이러한 가정 생활이 실제로는 허위와 기만에 기반했음을 알게 된다. 이를 알려주는 사건이, 남편의 외도이다. 이로 인해 여자들은 독자적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열망을 품게 되고 남편과 가정에 종속된 현재의 처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차츰 증폭시켜 나간다. 그러다가 더 이상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기 어려워지면 트렁크를 들고 집을 나서게 된다. 이처럼 전경린의 소설은 훼손된 삶과 떠남의 전조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떠남의 구도를 변주하여, 피폐한 현실에 지친 여자는 떠날 수밖에 없다는 간단한 줄거리를 엮어낸다.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염소를 모는 여자」,「밤의 나선형 계단」,「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여자는 어디서 오는가」는 떠나는 여자들로 부적거리는 작품이다.
그러나 단호하게 떠나는 여자들의 뒷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혐오스러운 남편과 가정을 떠난 여자가 진정한 삶을 과연 찾을 수 있는지. 이러한 질문에 전경린은 허점을 드러낸다. 그녀의 소설 속에는 떠나는 여자들의 단호한 모습만 있지, 떠난 이후의 삶에 대한 주목할 만한 대안이 없다. 대안이 없다면, 그 떠남은 아직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무모하다거나 낭만적이라는 다소 좋지 못한 평가도 제기될 만 하다. 이것은 아무래도 일상과 결혼과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용기를 보이는 것만으로, 여성의 정체성과 독자적 삶이 완성된다고 잘못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성이라고 여성으로서의 입장과 열망만을 고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남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조화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비록 고리타분하고 시시한 전시대의 유물처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투적 결론처럼, 그래서 새로운 방식을 주장하는 90년대 소설적 주류 안에서 예외 항목이나 미약한 참고 사항처럼 취급된다고 해서, 보잘 것 없고 가치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삶의 논리보다 한결 타당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는, 남성과 여성의 가름을 넘어 공동의 관심사를 다룰 때 가능해진다고, 나는 믿는다. 진정한 소설의 문제 의식은 여기서 발원해야 하지 않을까.
「다섯 번째 질서와 여섯 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 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담하게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금주〉는 두 가지 면에서 앞서의 다른 가출 여인들과 다르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다시 떠날 수 있다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타인을 배척하기보다는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생의 넉넉한 힘을 보여준다. 그녀가 남편을 떠났던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든, 그녀는 남편을 떠나 타인에게 왔을 때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생의 철학이 아닌, 남과 함께 살 수 있는 생의 철학이 예비되어 있다. 따라서 그녀가 사랑했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동성애자 〈이환〉은 혐오스러운 족속으로서의 특별한 인종이 아니라, 우리의 주위에서 엇갈려 가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 된다. 이 소설은 이환에 대한 금주의 사랑과, 이 사랑을 간직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길을 빗겨갈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는 조화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전경린이 무작정 떠남의 미학을 강조하다가, 그 떠남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로 유효하다.
지금까지 윤대녕과 전경린의 경우를 살펴보았다. 이 두 경우는 박상우와 하성란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다. 후자가 동성애를 별종의 삶으로 다루고 이를 발견하는 것에서 소설적 재미와 목표를 삼았다면, 전자는 동성애를 삶의 주변으로 포섭하고 그들의 아픔을 상세하게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감행하고 있다. 자신의 집을 비우고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상대에게 맞는 삶을 빌어주는 행위, 이것은 〈고통과 위험이 닥칠 때마다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 주는 위로자〉의 길이 동성애자에게도 똑같이 존재하고 또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이미 동성애자의 삶을 내 바깥에, 그래서 우리 사회의 변경에 자리잡은 예외적 삶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고 우리 이웃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문학적 의도와 주제 면에서 긍정적이고, 또한 자신들의 문학 세계 안에서도 의의를 갖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Ⅳ. 사랑에 대한 차분한 물음의 자리 : 송경아의 「송어와 은어」

어디까지가 자유로운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그렇지 않은지,
그 경계는 어디서 지어지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상대방을 얽매지 않으며, 관습에 구애받지 않으며,
따라서 동성과 이성, 이방인과 부영시민을 가리지 않으며,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이었습니다.

송경아의 작품 세계는 이채롭고 독특하지만, 아직은 완성되어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녀의 소설은 젊고 발랄하고 그래서 때로는 정곡을 찌르는 표연함을 보이지만, 소설 자체의 미학이나 주제의식이 정심하거나 안정적이라고 판단내리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어와 은어」는 약간 다르다. 이 작품은 특이할뿐더러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안정적이고, 모험적인 영역에 도전하면서 시의적절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부영(浮影)이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부영시는 안개가 자주 끼는 도시답게 많은 비밀을 숨기고 그 속살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비밀의 중심에 카페 〈시냇물〉이 있다. 화자는 이 도시에 사업차 머물게 되었다가 우연히 이 카페에 들르게 된다. 이 카페에서 〈송어〉라는 여인을 만나고 신비한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카페에 대한 부영시민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화자는 그들의 시선에서 의혹과 만류와 두려움과 기피욕구를 읽어낸다. 이 카페는 틀림없이 실재하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의심하는 신기루같이 여겨진다. 화자는 다음날 〈송어〉를 만나, 비밀스러운 동성애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 이야기는 두 처녀가 레스보스(lesbos) 섬처럼 동성애가 전통적인 관습으로 용인되던 고향을 떠나, 동성애에 대한 터부와 혐오를 앞세우는 바깥 세상에 옮겨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성과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에 두 여인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평등한 사랑의 조건을 이행하며 화평한 삶을 살아간다. 그녀들이 행한 성교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까지 전해들은 화자까지도 이들의 사랑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화자가 묵고 있던 호텔로 돌아오자, 심한 신열을 동반한 몸살에 몇 일을 시달리게 된다. 그를 걱정하는 호텔 직원으로부터 극진한 간호를 받게 되고, 게이인 직원과 모종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와중에서 자신의 삼촌이 부영시에 자신을 구태여 출장 보낸 이유가 동성애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마련하기 위해서이고 호텔 사장과 삼촌이 과거 동성애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리기 위해서 임을 알게 된다. 다방에서 만난 동성애자 소년과, 레즈비언 부인을 둔 덕분에 미쳐버린 목사, 게이 직원, 삼촌과 동성애를 가진 호텔 사장은, 부영시를 지배하는 비밀조직의 말단과 같은 인물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며 화자는 그 비밀에 접근해 간다. 비밀의 베일을 벗기는 마지막 절차는, 〈송어〉의 이야기를 마저 듣는 것이었다. 〈송어〉는 두 여인의 사랑이 느닷없이 틈입한 남자로 인해 파경에 이르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송어〉는 자신의 파트너인 〈은어〉를 포기해야 했고 〈은어〉는 용감하게 남자를 선택했지만, 동성애의 과거 전력이 드러나는 순간 〈은어〉는 남자로부터 버림받고 〈송어〉에게 돌아오게 된다. 〈송어〉는 돌아온 〈은어〉에게 처녀막을 파괴하는 가학적인 성교를 가하여, 여태까지 둘 사이에 공존하던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훼손시키고 배타적 소유욕과 종속 관계로 변질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화자의 호기심과 체험을 따라 동성애라는 낯선 분야로 접어든다. 부영시라는 기괴한 도시는 이러한 낯선 인식을 가리키는 공간일 터이다. 그런데 이 공간은 이성애자가 바라보는 동성애자의 문제가 파생되는 곳이 아니라, 동성애자가 바라보는 사랑의 문제가 파생되는 곳이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 거리나 특이한 소재로서의 동성애가 아니라, 우리가 겪는 사랑의 본질적 속성을 똑같이 함축한 동성애가 등장한다. 부영시라는 도시는 원래 동성애자가 세운 곳이고, 따라서 이 곳에서는 동성애가 바깥 세상의 이성애만큼 보편적이고 당연하다. 그런데도 〈어디까지가 자유로운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그렇지 않은지, 그 경계는 어디서 지어지는지〉를 묻는 동성애자의 출현으로 일대 혼란에 빠져든다. 이 혼란은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던지는 질문만큼이나 파장이 크다. 동성애는 이성애의 폭력적 질서에서 살아남는 것이 지상명제이고 그 생존양태를 살펴보는 것이 문학의 임무처럼 여겨지던 일련의 흐름 속에서, 사랑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함축한 동성애자의 발언은, 우리의 처지와 자세를 새삼 반성하게 한다.
문제는 이성애냐 동성애냐가 아니다. 90년대의 신진 작가들은 동성애라는 매력적이고 이단적인 주제 앞에서, 이 기본적인 질문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송경아의 소설 「송어와 은어」는 이 기본적인 질문을 문학에, 그리고 동시대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의 횡포에 고민하고 아파하는 인류에게,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얽매지 않으며, 관습에 구애받지 않으며, 따라서 동성과 이성, 이방인과 부영시민을 가리지 않으며,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을 부르짖는 동성애자의 출현은, 이제 더 이상 동성애가 소재거리가 아닌 우리 주변의 사랑의 한 측면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깨달음의 시초가 아닐까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부영시는 현실에서 가리워진, 혹은 아직 완전히 숙지되지 못한 일상의 한 축도로 손색이 없다.

Ⅴ. 남은 작품들과 남은 과제들 : 우리의 삶 속의 동성애

성생활이란 그것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시대의 특정한 법칙뿐만 아니라
시대를 움직이는 삶의 전반적인 법칙까지도 가르쳐준다.
바꾸어 말하면 살아있는 본능의 움직임은
그 시대의 도덕행위, 도덕관, 도덕률에 나타나 있다.
-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에서

장정일의 충격적인 소설 「아담이 눈뜰 때」는 앞에서 언급한 동성애를 다룬 소설들의 중시조 격이다. 〈내 나이 열 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는 매혹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열 아홉 살의 화자는 턴테이블을 갖기 위해 하룻밤의 동성애 체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동성 연애의 엽기적인 묘사에 있다기보다는, 희망을 버린 세대가 동성 연애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화자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거나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의지하려는 〈현재〉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결과적으로 자살을 부축이고 만다. 이처럼 초기의 동성애에 대한 문학적 관심은, 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라기보다는 희망과 약속을 상실한 세대의 자포자기의 수단으로 제기된다. 즉 동성애는 어긋난 인생에 대한 무모한 반항심의 소산일 뿐이다. 백민석도 동성애를 젊은 날의 상실감이 불러온 자포자기의 표현으로 사용한다.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이라는 탈출구 없는 공간에서,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저항과 포기의 수단으로 동성애를 이용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동성애가 천형이나 운명과 같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선택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캔디〉로 지칭되는 소년은, 대학생이 되고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남성이 아닌 여성을 맞이하여 새로운 삶을 꾸려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동성애라는 성적 기호를 방황과 혼란의 시기인 성장기에 거쳐야 할 하나의 통과의례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김영하에게서 동성애는 보다 복잡한 전략을 담은 문학적 모티프로 상정된다. 김영하는 숨겨진 동성애의 비밀을 들추어내어,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현대인의 치부를 건드리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삼류 통속물에나 어울릴 만한 불륜 뒤에, 인식의 의표를 찌르는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삽입하여 우리 시대의 허위성을 폭로하려 한 것 같다. 소설적 의도만 따진다면, 하성란이나 박상우의 경우처럼 동성애를 소설적 이슈로 삼고 있는 경향에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김영하의 소설적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따라서 동성애를 다룬 본격적인 작품으로는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장정일과 백민석의 경우도 동성애를 성장기의 혼란과 방황으로 취급하고 있어  본격적인 문제의식이 제기되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정리하면 앞의 두 작품의 동성애가 성장체험의 부속되었다면, 김영하의 작품은 미흡한 완성도로 인해 동성애에 대한 올바른 문제제기를 해내지 못하고 의도로만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에게는 다음 기회에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기회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 이것도 남은 문제라면 남은 문제라고 할만하다.

이제, 이피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현재의 동성애자들은 이피스와 똑같은 행운을 구할 처지가 아니다. 신의 가호와 도움으로 주어진 성을 완전히 변경하여 원하는 성으로 거듭날 수는 없는 것이다. 성전환 수술도 한계와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나마 일반적인 확대적용을 바라기에는 시기상조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동성애자들이 성전환을 원하는 지도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과 그들의 주변에 있는 많은 이성애자들은 어떠한 관계를 지향하고 어떠한 삶을 지향해야 하며 우리의 문학은 어떠한 목표를 지향해야 하는가. 우리의 질문에 이피스의 독백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다시 읽어보자.
〈스스로가 무엇으로 태어났는지 잘 생각하고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바로 보고 스스로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라〉. 그렇다면 동성애자는 동성애자대로 생각하고 바로 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동성애를 둘러싼 이성애자들은 이러한 동성애자들의 삶을 그 나름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면 되지 않을까.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면, 이러한 생각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가 완강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이리라. 다시 그렇다면 문학은 이러한 편견을 공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을 공격하는 작업이 넓게는 소외되고 단자화된 개인의 삶을 치유하는 단초이자 인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90년대의 문학은 이러한 편견을 공격하는 작업을 어느 정도 시행한 셈이다.
남은 문제는 앞으로의 문학이 동성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이다. 문학은 이제까지 동성애를 특이한 삶의 양태나 가려진 성의 한 측면으로 생각해왔다. 동성애라는 본능의 방식이 사회적으로 억압당해온 현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문학의 개입은 시기적으로 타당한 면이 많았다. 그리고 문학은 이러한 개입에서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을 잃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를 다루는 것 자체가 현실의 부조리한 면을 되새겨보고 그 해결책을 위한 문제의식을 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의 수준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버린 동성애를 보다 보편적인 삶의 층위로 격상시켜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을 찾을 때이다. 송경아의 노력은 이러한 고민에 힌트를 준다. 「송어와 은어」의 화자나 송어의 경우, 동성애를 편견없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보편적 사랑의 문제로 문제의식을 확대시키고 있다. 송경아는 동성애자의 고충 속에서 우리와 다른 인종의 고뇌를 구경하려 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어떤 측면을 보다 적실하게 보여주는 척도로 제시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힌트는, 동성애에 대해 발언할 기회를 찾고 있는 많은 작가들에게 두루 참조되어야 할 사항이다. 동성애의 예외성이나 특이성에 더 이상 문학의 관심사가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그 정당성이나 필요성을 따지는 물음의 방식이 제기될 수는 있을지언정, 동성애를 한낱 소재거리나 가십거리로 전락시켜서도 안 된다. 그리고 단자화된 자아의 외로운 삶 속에서 동성애가 어떠한 반성적 물음을 끄집어 낼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물음에 충실할 수 있다면, 동성애는 더 이상 이성애의 반대항목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보편적 범주의 한 하위분류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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