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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특집/다시 몸을 생각한다/정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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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다시 몸을 생각한다.
정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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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주춧돌을 놓은 근대 합리주의 철학은 이성으로부터 몸을 분리해내고 몸을 타자로 억압하고 배제했다고 말해진다. 백인 남성 부르주아로 표상되는 서구의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이, 자신과 동일화되지 않는 타자들인 여성, 비서구인, 민중을 소외시켰음도 알려진 바다. 헤겔이 '절대정신'으로 극찬해마지 않은 근대적 이성의 독보적 지위는 자연을 정복하고 비서구권으로 눈을 돌려 약탈에 여념 없더니, 결국 광기 어린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귀결되면서 잿더미로 변한 흉물을 드러내고 만 것도 누구나 아는 바다. 근대의 난간을 통과한 인간이, "내 몸은 곧 내 것이다."라는 오만한 태도에서 "내 몸이 곧 나다." 라는 겸손한 통찰에 이른 것은 몸에서 주체성과 능동성을 발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몸의 등장은 아무래도 근대에 대한 발본적 반성이라는 측면보다 전후의 사회 변동에 힘입은 바 크다. 후기자본주의가 가져온 물적 풍요와 폭발적으로 팽창한 소비산업은 쾌락과 성욕의 진원지로서 개인의 몸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권력이 개인의 몸과 성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압해왔다고 본 라이히, 마르쿠제 등 순진한 프로이트 좌파들의 관점으로서는 성욕을 끝없이 조장하는 현대사회를 요령있게 설명하기 힘들어졌다. 바야흐로 논의의 한계에 봉착한 종래의 몸에 대한 기계적 사고는, 몸을 권력의 억압이 아닌 관리에 의한 측면에서 본 푸코에 이르러 비로소 수정될 수 있었다. 푸코는 인간의 몸이 물리적 실체임을 넘어 정치 사회적 관계가 가로지르는 역동적 장으로 본 사람이다. 이를테면 공장의 시계에 맞춰 노동자의 몸이 움직일 때, 권력은 개인의 신경과 핏줄에 이르기까지 삼투하여 고분고분한 몸으로 바꾸어내는 '생체권력'으로 기능한다. 즉 권력은 단순히 외부에서 강제하거나 지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몸에 틈입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기능하는 새로운 몸으로 작용하는 것. 따라서 몸에 가해지는 억압을 단순하게 파악할 것이 아니라, 권력의 필요에 따라 통제나 배려의 지능적 관리가 몸에 작용하고 있다는 관점을 취할 필요성이 있다. 후에 푸코는 더 나아가 종래에 부정적으로만 치부되던 권력을 전복적으로 사고함으로써 권력의 작용에 의해 몸이 주체로 호명될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몸 해방의 가능성을 몸 내부에서 찾음으로써 그 인식 지평을 확장시켰다. 한편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대사회는 더 이상 코드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는 대담한 가설의 설정 하에, '탈영토화'되거나 '탈기관화'된 몸에서 욕망과 몸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지난 90년대, 몸 담론의 활성화에 관한 한 우리 사회 역시 역시 이러한 세계적 움직임에서 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90년대에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는 소비문화의 팽창과 더불어,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데 따른 여파와 민간 정부의 출범으로 거대 담론이 뒤로 물러나면서, 여성을 비롯한 소외된 타자들의 가려진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등 부분적이나마 탈근대사회의 징후를 보이게 되자, 자연스럽게 몸 담론이 소개되고 논의에 불이 지펴졌다. 이 자리에서는 한때 우리 문화 전반에서 부각되었으나 지금은 기왕의 축적된 논의가 현실적으로 가시화되기보다는 다소 한물 간 유행인 듯 보이는 몸 담론이, 그동안의 논의 과정에서 고찰 또는 극복되었어야 할 점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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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튼이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운용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이다." 라고 단언했을 때, '자연'은 근대인의 이성이라는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몸을 비롯한 타자들을 말함이었다. 문제는 이성에 의해 '운용'된 몸의 가치를 복권시키려고 하는 탈근대적 담론 중엔, 그것이 극복하고자 했던 이성과 몸의 분리나 차별의 근원으로 지목된 본질주의적 시각의 위험성을 여전히 탈피하지 못하거나, 때로는 그에 기대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자에서 급진적 페미니스트까지 두루 망라하는 그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양상은 구체적으로 이성과 몸을 각각 남성과 여성, 서양과 동양에 유비시키는 시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몸에 관한 담론이 '남성주의'에 대한 대항담론임을 말할 때, 간과하기 쉬운 심신이분법적 위험성이다. 이는 "'이성'은 남성적이고 '감성'은 여성적이다."라는 언술에 집약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감성은 몸과 동의어이다. 이 언술은, 그동안 이성의 횡포에 억눌렸고 가치가 낮은 것으로 치부되어왔던 감성의 복권을 당당히 자리매김하면서, '감성'과 '여성'에 대한 재래의 경멸적인 언술을 전복적으로 해석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 발언이 원래의 부정적 의미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자리가 바뀌어졌다 하더라도, 그 맥락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분법적 사고는 근본적으로 뒤엎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남성(이성)중심주의의 언술을 반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이 논리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영역이 서로 확연하게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으며, 몸을 그 두 가지의 복합적 산물인 것으로 보려는, 보다 진전된몸의 사유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성이 남성의, 감성이 여성의 전유물임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도 없는 일이다. 이성과 몸, 감성을 서로 상극인 것인 양 대치해놓고 몸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은, 근대의 이성우월주의에 날리는, 그러나 결국 논자 자신에게 되돌아올 부메랑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시각은 여성주의자들, 특히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며, 페미니즘 내부에서는 이들이 여성의 몸을 특화시킨다는 비판과 함께, 몸의 차이성에 대한 강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여성들이야말로 몸 담론의 실질적인 주체일 것이다. 사회의 중층적 모순이 부하된 전장터와 같은 여성의 몸에 대해서는, 일찍이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자신의 몸을 대중에게 드러낸 해방노예 소저너 트루스에 의해 그동안 자연물로 간주되던 여성에게 당대의 인종과 계급 같은 첨예한 문제가 어떻게 침윤되어 있는지 증언된 역사가 있다. 이런 문제 의식을 거쳐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기존의 여성적 몸에 대한 개념이 남성들이 품고 있는 환영이나 환상이라는 사실에 반발해왔다. 이들은 남근중심적인 왜곡이 가해진 몸의 의미를 거꾸로 뒤집으면 여성의 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가령 여성의 몸은 그동안 침묵을 지킨 것이 아니라 남의 말을 열심히 들어준 것이라는 경쾌한 반박도 이런 사고의 일환이다. 사실 페미니즘 운동 초기에 여성주의자들은 '오염된' 자기 몸을 교정하는 것에 시큰둥해 하다가, 몸 자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면서 본질주의자들이 아무렇게나 규정해버린 몸을 반성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윈을 비조로 하여 프로이트, 라깡 등 남근주의자들이 생래적으로 열등한 생물로 못 박아버린 여성의 몸을 새롭게 보는 데 앞장선 사람들은 정신분석학 페미니스트들로서, 여성의 몸에 대해, 제인 갤롭은 생물학적 열등성을 강조하여 가부장제를 회복하려는 남근주의적 기도에 저항하는 장소로 보았으며, 뤼스 이리가레는 심오한 사회적 의미가 아로새겨진 장소로 보았다.(39) 그들은 남성의 단일하고 폐쇄적인 몸에 대응하는 여성 몸의 복합성과 개방성에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이리가레는 여성 '몸의 다산성'에서 이성과 몸을 분리시키려는 남근 지배적 전략의 극복 가능성을 본다. '다산성'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들이 여성 몸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는, 타자를 임신하는 여성의 고유 역할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여성 몸의 열등적 근거로 제시되던 기존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에서는 벗어났지만, 그것 역시 생물학적 본질주의라는 혐의를 모면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여성의 몸이 가진 분산된 성욕과 리비도의 다중성에서 '전신적 기쁨'(jouissance)을 발견한 '신체페미니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방도를 글쓰기에서 찾고자 한다. 엘렌 식수, 뤼스 이라가레 등이 데리다의 이론에서 힌트를 얻어, '여성적 글쓰기' 또는 '몸으로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정초한 이 이론은, 글쓰기가 가진 수신자(타자) 중심, 발화와 수신의 비동시적 성격, 기표와 기의의 해체 가능성으로부터 전복적인 의미의 글쓰기를 끌어온다. 데리다는 이성과 동의어인 말(logos)이 가진 위계적인 '음성중심주의'에 대립하여 글쓰기의 가치가 부각될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식수 등은 글쓰기가 남근적 질서를 전복시키는 도구이자 여성의 무의식, 잠재적 리비도, 억압된 양성성 등을 드러내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성과 관련한 여성의 육체적 자질을 탐색하고 긍정하는 그들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남녀의 성차를 본질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사회와 역사로부터 독립된 고유의 영역으로 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네 자신을 쓰라. 너는 네 몸의 말에 귀 기울어야 한다."라는 식수의 외침에서 드러나듯, 다분히 여성의 무의식과 본능에 호소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인종과 계급에 따라 차이를 드러내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87) 어쩌면 정신분석학페미니스트의 복잡한 이론보다는, 태어나면서 몸이 없이 살아왔다고 절규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외침, 자신은 '몸이 없는 여자'이자 남들에게 '공유된 몸'이었노라고 울부짖는 여성의 육성이 훨씬 더 '몸으로 글쓰기'의 첫걸음을 내딛는 일에 부합되는 것이 아닐까. 비록 여성 몸에 대한 탐색과 해체적 글쓰기를 남근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전락으로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식수나 이리가레의 글은 여성 일반에게는 언어유희를 방불케하는 난해하고 비대중적인 글쓰기로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여성의 무의식과 본능적 욕구에 호소하는 식수, 여성의 신체적 조건을 자기성애적으로 본 이리가레, 출산과 양육의 모성적 몸을 고찰한 크리스테바 등의 급진주의적 여성들은, 여성의 개인차에는 눈을 감으면서 생물학적 차이를 특권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성차를 강조하고 여성성을 우월하게 보는 관점 만으로는,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한층 더 교묘하게 관리되고 왜곡되는 여성의 몸에 대한 복합적 의미를 헤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해, 성차를 수용하지 않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모니끄 위띠그는 페미니즘 역사 초기에 여성 몸의 열등성을 부정하지 않았던 페미니스트들이 이제는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을만큼 자신의 영역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자, '차이 속의 평등'이라는 '여성의 신화'로 노골적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논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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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성차를 근원적인 것으로 가르는 이분법적 위계적 사고체계는, 몸 담론을 '동양 정신의 복권'으로 바라보는 일군의 동양철학자들의 관점에도 대입해볼 수 있다. 이들은 동양에서는 서양과 달리 몸은 존중되었으며, 몸과 정신은 분리되어 사유되지 않았다고 단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대로라면, 몸이 존중되었다는 유가적 전통에서 사대부들이 왜 육체노동을 '상것'들의 몫으로 경시했으며, 성을 억누르고 금기시했는지 설명하는 것은 요령부득일 것이다. 이들이 보이는 논리적 난점은, 우선 단순히 경전의 자구에 집착하는 태도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문구에서 '수심(修心)'이 아닌, '수신(修身)'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들어, 동양적 전통이 몸을 존중한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아직 그들 스스로 불식하지 못한 오리엔탈리즘적 사유와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동양 철학이 서구와는 궤적이 달랐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신이원론의 '동일자철학'을 서구의 것으로만 몰아부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비록 역사적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어떤 현상에 대해서 서양적이다, 또는 동양적이다고 못 박는 데는 그대로 동의하기 힘들다. 이는 '근대'를 서구 사회의 전유물로만, 그들 역사의 특수한 경험으로만 보는 것 만큼 위험한 시각일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유가전통에서 몸이 자아와 세계와의 교통방식" 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탈근대적 시각과도 가까운데 그러한 풀이가 과연 타당한지도 적잖이 의심스럽다. 실제로 유가 전통에서 이성과 몸에 대한 사유가 분리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양자를 통합된 시각으로 보는 탈근대주의적 사고로 풀이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미분화되었던 근대 이전의 역사적 배경과 연관된 것으로, 즉 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과학을 발전시킴으로써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이 대두하기 이전의 전근대적 상황을 읽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이성과 몸의 분리적 시각이 근대 시민계급의 대두에서 필연적인 현상이라면, 둘을 분화하지 못한 철학적 전통은 오히려 후진적이라는 혐의를 면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메를로퐁티는 동양과 서양을 각각 어린이와 어른으로 비유한 바 있다. 물론 그의 발언은 동양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한 것이지만, 만약 그 언사를 동양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한다면, 몸 담론에 관한 한 동양의 철학적 전통을 성장기 이전의 유아나 어린이에 비유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유가 전통에 탈근대적 해석을 가하려는 일부 논자들에게서 성장기 이전의 유아와 성장기를 지난 노인의 감성을 동질적으로 규정하는 우를 범하는 모습이 비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처럼 이성과 몸을 남성이나 서구, 여성이나 동양에 접목시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타자성의 철학'-부정적 의미에서- 을 면치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근대를 극복하고 몸을 복권시키려고 노력하던 논자들이 스스로 거부한 덫에 치이는 모순을 보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 몸과 이성의 이항대립적 사고에 대해 거론한 앞의 논의와는 별도로 몸을 물질적 측면으로만 고찰하지 않는 푸코 이후의 조류에 대해 언급할까 한다. 가령 메를로퐁티 등이 주체와 세계가 상호작용하는 거점으로서 몸을 정립하거나 그것을 주체로 호명하는 등, 포스터모던 시대의 몸은 더 이상 근대의 기계적 몸은 아니다. 그러나 몸에 대한 이러한 심화된 태도와는 별도로, 아니 어쩌면 그것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몸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구체적 물질적 실체임을 간과할 염려가 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몸은 물론 피와 살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몸이 그 자체로 정치 ·사회· 역사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함의의 뿌리인 물질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좋은지는 의문이다. 몸의 물질성에 발을 디디고 있지 않는 외연의 확대는 현실에서 여성 등의 타자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외면할 위험성을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여성의 몸에 특권을 부과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식수가 반박한 발언을 들어본다. 그녀는 자신의 텍스트에 드러난 몸은 실체의 몸이 아닌 '텍스트화된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로 그녀의 발언은 생물학적 결정론의 혐의를 해명하기 위함이 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에게 몸이란 살아있는 구체적 실체로서의 여성의 몸과는 거리가 있음을 실토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철학이 몸에서 주체성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근대의 폭력이 상흔으로 남은 몸에서 당대를 극복해낼 원동력을 찾아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간의 몸에는 근대와 탈근대, 자아와 타자,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 동양과 서양, 물질성과 사회성 등이 켜켜이 중첩되거나 서로를 가로지르며 운동하고 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새로운 인간의 몸이 출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지 모른다. 멀지 않은 장래에 가상의 육체인 사이보그의 등장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권력에 의해 '맞춤된 특성'을 가진 사이보그의 등장 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근대적 사고 체계가 낳은 것이기도 하다.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날 어쩌면 인간의 몸과 정신에 대한 사유틀은 원점에서 다시 짜여져야 할지 모른다. 우스꽝스럽게도 이원론의 극단적 추구가 이원론을 해체하는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 셈인데, 그러나 아직은 이 사회에서 사이버 운운하는 논의는 현실을 모르는 배 부른 소리일지 모르겠다. 몸은 철학서에선 주인 자리에 올라섰지만, 이 땅의 현실에서 숨 쉬고 있는 우리 몸은 주인 노릇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괴롭다. 지금 우리의 몸과 살은 권력이 설계한 고도의 관리를 받으면서 한층 더 뒤틀려져버렸다. 특히 여성은 공식적으로는 성적 쾌락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받았으면서도 실제로 그 몸에 새겨진 것은 자신의 쾌락이 아닌 남자의 시선과 관음증적 쾌락이라는 화인이다. 그러한 몸에 대한 제도적인 학대에 한동안 순응하지 못했던 여성 코메디언의 몸이 받은 능멸과,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한 미술교사의 '음란한' 몸에 가해진 폭력은 '비천한' 살의 지위로 떨어진 사회적 몸을 여실히 웅변해준다.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간 몸은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한 채 흉물로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복권된 몸과 만나기까지 개인이 감당해야 할 고초는 아직 얼마나 남은 것일까. <끝>
필자약력 : 1969년 생, 여성문화동인 살류쥬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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