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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특집/여성의 성이 의미를 획득하는 방식/민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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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가영
댓글 0건 조회 3,219회 작성일 02-06-1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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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여성의 성이 의미를 획득하는 방식
--성담론으로 읽는 백지영 사건
민가영(여성과인권연구회)


1. 담론의 각축장으로서의 성

어떠한 것도 본질적으로 의미를 달고 태어나는 것은 없다. 특정한 시, 공간 속,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은 자리를 부여받고 의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어떠한 것에 의미가 부여되는 방식을 살펴본다는 것은 결국 그 시, 공간을 관할하고 있는 중요한 논리들을 역추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80년에서 9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사회는 갑자기 '성'을 둘러싼 많은 말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 말들의 생산자는, 성을 상품화 해서 한 몫보려는 장사꾼들도 있었고, 계급과 노동운동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문화이론으로 넘어온 맑스주의적 문화논객들도 있었고, 여성의 성에 대한 자율성과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며 성폭력, 성희롱등의 전에 없던 새로운 전복적 개념을 만들어 낸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도 있었고, 국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성이라는 지점을 새롭게 포착해낸 정부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렇듯 어느 시점부터 성 이라는 것은 많은 말들이 만들어지고 입장들이 경합하며 권력이 충돌하는 전쟁터가 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입장들만큼이나 성은 일관된 방향성을 띠지 않는다. 소녀들의 원조교제를 둘러싼 많은 입장들을 보자. 여성의 몸이 매매되는 것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비판하는 여성주의자들,  '청소년 보호' 와 '청소년 섹스반대'의 차원에서 비판하는 어른들, 원조교제를 보호받아야할 개인적 애정관계인 사생활로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법관들까지. 성에 관한 하나의 이슈를 둘러싼 입장들의 지형을 그려보면 현재, 지금 이 사회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는 서로 다른 입장과 그들의 이해관계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성은 특정한 context와의 연관하에 의미를 부여받고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대 위에서 공연되고 있는 성이 아니라 그 뒤에서 공연을 기획, 관리하고 있는 연출가인 셈이다.

2. 코드로서의 백지영 사건

얼마 전 한국사회의 온갖 지리멸렬한 성의 지형도를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잘 나가던' 한 여자가수가 인터넷과 비디오를 통해 만인에게 성적으로 노출됐고 언제나 이 사회의 성문화가 그렇듯 가해자가 태연자약하게 숨어있는 동안 피해자인 이 여성은 온갖 도마에 올려져 난도질을 당했다. 백지영은 이제 컴백 했고 별다른 큰 무리 없이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백지영 사건을 둘러싼 담론을 다루는 것이 뒤늦은 감이 있지 않냐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겠다. 백지영 사건은 스포츠 신문이나 일간지의 토막기사나 장식할 가쉽거리가 아니다. 여자 연예인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관한 사소한 사건도 아니다. 백지영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말들'은 현재 이 곳에서 성, 여성의 성, 공인 여성의 성이 어떠한 언어들과의 연결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지에 관해 이 사회의 성문화를 독해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적 코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백지영 사건은 그것을 둘러싼 성담론을 읽는 방식으로 다시 독해되어져야 한다.
백지영 사건은 인터넷의 속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유통방식이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 폭력적 참견하기 문화가 여성의 성에대한 이중적 잣대와 만나면서 빚어진 결과이다.
백지영의 전 매니저 이면서 문제 비디오의 주인공인 김씨가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고의로 비디오를 유통시켰다는 사실이 검찰에 의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많은 '말들'이 만들어지고 서로 경합하고 새로운 논쟁의 지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3. 백지영 사건 담론 형성의 특수성:이 사회가 어떤 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카운트 하는 방식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는 없다. 어떤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로 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은 정치적이고 분석적인 범주로 카운트되고 어떤 것을 배제시키는 것은 불평등과 억압을 문제화 하지 않고 비가시화 시키는 권력의 재생산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러한 '카운트'와 '배제'는 단순한 구별의 문제를 넘어선다.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백지영 사건이 어떤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지는가, 어떤 영역에서는 아예 카운트 되지도 않는가의 문제는 이 사회가 여성의 성을 다루는 방식을 드러내 준다.
어떤 사건, 이슈를 둘러싼 담론을 살펴보기 위해 자료를 모으는 방법은 다양하다. 개인의 상상력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정보'가 '자료'가 될 수 있다. 자료를 모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문헌검토, 인터넷과 언론검색, 사람들의 입소문, 그리고 네티즌이라는 정체성이 부여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문헌검토를 하면서 놀랐던 것은 이 사건이 시사 주간지를 비롯한 정치,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간행매체에서 제대로 논쟁에 붙여지거나 논의의 시도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연예주간지에서는 늘 톱기사를 차지하며 도배했던 문제가 이른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논쟁의 영역에 한번도 카운트 되지 않았다는 것, 어떠한 영역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담론이 전혀 생산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회에서 백지영 사건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다양한 지표들 중 하나라 생각된다.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영역에서 이 사건이 제외된 것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은 아니다. 백지영 사건이 터졌을 당시 이러한 매체들이 주목했던 섹슈얼리티 관련 사항은 일본군 군위안부의 일본법정 문제와 운동권 내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100인위원회의 문제가 주를 이루었다. 섹슈얼리티는 민족의 문제, 국가간의 권력의 문제, 남성들의 도덕성 문제와 운동권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결합되었을 때 '정치, 사회적 문제'로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중년들의 인터넷 실력을 쑥쑥키워주는 백지영 사건"(시사저널, 2000. 12. 19)과 같은 비정치적 문제로 취급된다.
따라서 오현경 사건과는 다르게 여성계에서 공식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 사건을 정치적인 것으로 연결시켜 문제화 한 것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여성주의의 역사가 끈임없이 '정치학'의 개념을 확장, 재구성하면서 비정치적 문제를 정치적인 영역으로 전환시켜 냈던 역사라는 점을 기억해 볼 때 여성의 성에 관한 새로운 사회적, 공식적 논쟁의 지점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사건이라 할만하다.
백지영 사건에 대한 담론이 가장 폭발적으로 형성된 것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였다. 12월 이후부터 안티 백지영, 백지영 살리기, 백지영인권수호위원회와 같은 이름을 단 사이트들이 개설되기 시작했다. 이 안에서 투표, 토론등이 행해졌고 근거없는 비방과 온정주의로부터 나름의 논리를 갖춘 입장들이 생산됬다. 이러한 현상은 네티즌들의 사회문제에 대한 높은 열의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이트에서는 회원가입을 해야 사용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었고 인터넷 사이트가 회원수에 기반한 광고료로 운영되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인터넷을 통한 폭발적 담론형성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만한 담론을 상품화하는 인터넷-자본이라는 '담론시장'과 익명성과 같은 사이버 공간 특성의 결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

4. 백지영 사건 담론의 지형도: 청소년 보호-여성의 인권-성적 자유주의

백지영 사건에 대한 입장들은 소제목에서 보여지듯 세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언뜻 겉으로 보기에 담론의 입장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옹호/안티. 입장의 결과가 같다고 해서 그 담론이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위한 옹호, 안티인가,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을 안티한다는 것인지 그 입장의 목적과 구체적 내용에 의해 세분화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백지영 담론은 백지영 옹호와 백지영 안티로 이분화 되어 정리될 수는 없다.

(1)청소년보호 만능주의:순결 이데올로기만으로 버티기 힘들어진 이중적 성규범, 청소년 보호와 손잡다.

이 입장은 안티 백지영 사이트에서 지배적인 입장이다. 이들의 '안티' 내용은 '감히 대담하게 섹스를 하는 여자'이며, 이들의 안티가 노리고 있는 효과는 이런 여자에 대한 마녀사냥이다. 안티 백지영 사이트에 나타난 안티들의 주장은 성상납, 문란한 성생활등을 근거로 한다. 그리고 성상납과 문란한 성생활을 문제삼는 그들의 표면적인 이유는 순결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순결이데올로기가 먹히지 않게 됬음을 감지하고 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끼칠 악영향이다. 이제 더 이상 순결이데올로기만으로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중적 성규범은 청소년보호와 손을 잡는다. 언제부터인가 청소년보호는 한국사회에서 성을 이야기 하는데 있어 일종의 만능주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무엇을 주장하고싶든지 거기에 청소년보호라는 이유만 걸치면 엄청난 힘을 부여받는다. 청소년보호는 도덕적 보수주의자들과 결합하고 있다. 이들이 보호하고 싶은 것은 청소년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이 사회의 아킬레스건인 청소년을 볼모삼아 도덕적 엄숙주의에 기반한 보수주의적 성 질서를 수호하고 싶은 것이다.

"끝까지 할려고 한다.(안티활동을). 백지영의 그 썩어빠진 부도덕한 결과지상주의를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런 파렴치한 연예인을 아이들의 스타라는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해... 이땅의 도덕성과 우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스타를 가질 수 있게끔 그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http://my.dreamwiz.com 안티위원장)

이들은 대게 saving morality!!를 기치로 내세운다. 그러나 백지영 사건을 여성단체 게시판에 와서 따지는 이들의 진심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얼마전 사이버 테러라는 신종어까지 만들어냈던 군가산점 사건에 대한 남성 네티즌들의 비판과 안티 백지영에 대한 비난의 움직임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있다. 남성중심의 질서를 흔들리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안티와 테러.
도덕성과 청소년 보호의 논리는 결혼밖의 성,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이중적 성규범을 보다 세련되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되고 있다.

(2) 사생활권, 인권침해

2년여전 오현경 사건이 일어났을때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러한 사건이 한 여자의 불운한 개인사 쯤으로 회자되던 수준을 넘어서 여성운동계를 중심으로 명실공히 정치적인 문제로 자리매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중적인 인식수준에서도 '인권', '사이버테러'의 범주로 이 문제를 접근하기 시작한다. 즉, 소수이긴 하지만 이 사건을 개인적인 사적 문제로 한정짓는 것을 넘어서서 제도와 권력, 권리라는 차원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분명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변화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사생활권 침해와 인권침해가 별 다른 차이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앞으로 계속적인 논쟁이 필요한 부분이다. 사생활의 의미가 정의되지 않은 채 사생활이 침해 받았기 때문에 인권침해라는 논의로 연결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이 '사생활'이라는 칼자루를 누가 쥐고 흔드냐에 따라서 이 개념은 소수와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도 있고,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 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원조교제를 한 남자가 ' 원조교제를 하건 매춘을 하건 내 사생활이니 참견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는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과 '공적인 영역에서 옳고 그름에 관한 가치판단이 내려져야 할 사생활'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요한 담론은 "인권이 침해 받았다"라는 선언적인 결과라기 보다는, 인권이 침해 받았다면 침해받은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인권침해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관한 언어가 개발될 수 있는 담론일 것이다.

(3) 성적 자유주의: no problem!

그리 많은 입장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다'는 의견이 또 하나의 자리를 차지한다. 언뜻 보면 위의 인권침해와 '백지영 옹호'라는 타이틀로 묶일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목적하는 바의 차이로 인해 하나로 묶일 수 없다.
백지영이 비디오를 찍은 것도, 그것이 유통되어 사람들이 보는 것도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는데 왜 문제를 삼느냐는 이 입장은 백지영을 비난할 이유도, 그렇다고 비디오를 유통시킨 가해자 남자를 비난할 이유도, 그 비디오를 본 사람들을 비난할 이유도, 백지영을 옹호하거나 지지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비디오의 여성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지반으로 이동시킨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때의 '본다는 것은' 곧 폭력이다. "난 봤지만 백지영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건 없어. 그러니 내가 잘못한게 뭐야."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문제는 사람들이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건 상관없이 그들의 '본다는 행위'자체가 모여서 그 여성을 사회적으로 다수에게 노출된 여자로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무 것도 문제삼고 싶어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논리는 결국 무엇이든 다 하고 싶지만 어떤 비판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면죄부를 획득하고 싶어하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동기에 다름 아니다.

5. 마무리 : Pleasure and Danger.

여성과 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늘 이 두 단어-쾌락과 위험- 사이를 왔다갔다하게 한다. 나는 순결이데올로기에 갇혀 조신하게 지내라는 도덕주의자들의 말을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적으로 해방되라며 '소심한' 여자들을 꼬집는 박진영의 손을 들어주기도 싫다. 마리아와 매춘여성을 구분하는 여성에 대한 이중적 성규범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여자들의 성은 매일 매일이 쾌락과 위험의 줄타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여자들에게 성적으로 자유로와 지라고 그렇게 감히 함부로 간단하게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여자들의 성에 대해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하는 부분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성적으로 자유로와 질 것이냐, 아니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버릴 것이냐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의 성이 이렇게 단순한 차원과 몇 개의 언어만으로 이야기 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관계망들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다. 여자들의 성이 어디에 접속되어서 어떻게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지, 이것이 여자들의 몸의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는지에 대한 풍부한 언어들의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 섣불리 여자의 성에 대해 결론 내려버리기 전에 해야할 것들이다.

간단한 소개: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졸업.
여성과인권연구회 회원
한국여성개발원 근무

추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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