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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특집/성의 역사적 담론: 여성의 성역사/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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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성의 역사적 담론: 여성의 성역사
조영미(단국대 여성학 강사)
1. 역사, 성 그리고 여성
인간에게 있어서 성이 정확하게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마도 성이란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던 순간부터 인간의 삶과 항상 같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성과 관련된 행위들이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성을 일종의 생물학적 본능과 같은 것으로 보게 하였을 것이다. 즉 남녀가 만나서 성교를 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것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능에 의한 것이고 이를 따르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은 어떤 시기에 혹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던 간에 성적으로 동일할 것이며 유사할 것이라는 전제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에 대한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견해들은 옳지 않다는 것이 발견된다. 성에 관한 행위 규범이나 규칙들은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르고 동일한 사회 내에서도 성별이나 지위, 계급, 인종에 따라서 다양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성적 욕망의 충족방식이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다양하다는 것은 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나아가 사회 내 집단간의 이해가 충돌하는 영역, 즉 권력이 작동하는 영역임을 인식케 해준다. 따라서 성에 대한 역사적 담론들을 살펴본다는 것은 성에 대한 사회 문화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며 다양한 성적 관행들과 규범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가를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의 역사에서 보면 남성의 성과 여성의 성은 차별적이었음이 발견된다. 동일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성적 욕망은 철저하게 봉쇄되었으며 남성의 성적 이해에 종속되어왔었다. 여성이 어느 시기에 살았느냐 혹은 어떠한 계급에 속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는 순결과 정절이 엄격하게 요구되었고 이를 벗어날 경우 가혹한 처벌이 따랐다. 반면 남성들 특히 지배계층의 남성들에게는 축첩이나 매매춘 등으로 자유롭게 욕망을 분출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남성에 의존하고 종속되었고 그 결과 여성의 성은 남성들에 의해 억압되고 착취당하였다.
물론 오랜 기간 동안 모든 여성들이 이러한 남성지배에 순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해 도전하고 여성의 성적 자율성을 구가한 여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 규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러한 여성들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서 보면 그러한 사실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여성들 스스로가 말하는 성적 욕망이나 성적 경험에 관한 기록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역사 혹은 성의 역사가 항상 남성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들에게 있어서 여성의 성적 경험은 무시해도 좋은 것이었으며,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 도전하는 여성들은 사회적 일탈자-매춘부 혹은 마녀 후에는 정신병자-로만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서구 역사에서 여성들의 성이 어떠했는가를 다루고자 한다. 특히 여성의 성이 왜 남성에게 지배를 당하게 되었는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여성의 성이 침묵 당하고 규제를 받게 되는지, 이에는 어떠한 권력들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 속에서 여성의 성을 탐구하여 이에 작동하고 있는 성 정치학을 밝히고자 한다.
2. 자유로운 성에서 성적 종속으로
바흐호펜의 이론에 따르면 초기의 인류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여성의 성이 자유롭고 통제 받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수렵과 채집이 주를 이루는 사회였고 여성의 임신,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특징으로 인해 남성이 수렵을 담당하고 여성들은 채집을 담당하였다. 때론 여성들도 사냥에 참가하기도 하면서 공동체 생존에 기여를 하였다. 여성들은 채집을 통해 공동체에 필요한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되었고 이는 개별소유가 아닌 공동체가 소유 및 분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성관계는 남성과 여성이 배타적인 일 대 일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난교로 이루어졌다. 즉 성관계의 대상을 자유스럽게 선택하고 바꾸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였다. 원시인들은 생식에 있어서 남성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모계 관계만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러한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는 여성이 부족생활을 조직하고 남편은 여성의 가정에 거주하였으며, 지위나 재산, 토지, 공적 신분은 여성을 통해서 상속이 되었다.
이 시기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면서 자유롭게 성행동의 방침을 정하고, 성적 신뢰의 전제조건들을 결정하고, 자식들을 양육하는 의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신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를 보면 어머니-여신을 찬양하는 그림과 조각이 많았다는 것이나 생명을 창조하는 힘을 가진 여성 신을 숭배했다는 점에서 여성의 지위의 높음과 그로 인한 성적 자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여성들의 이러한 성적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B. C. 9000년경부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게 되고 사회는 이를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인정해주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사회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라는 계급이 형성되었다.
불행히도 농경과 목축에서 남성들이 주 생산자가 되었고 이를 토대로 사회적으로 권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무렵 남성들은 가축을 기르면서 생식에서 남성의 씨의 역할을 알게되었다. 그러자 자신들이 부족과 가족의 우두머리가 되고 가족 내에서 부계를 통해 지위와 부를 상속할 수 있는 사회체계 즉 가부장제를 확립하게 된다.
모계제에서 부권제로의 이양은 여성들을 남성들에게 종속시켰고 여성의 성 역시 남성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여성의 성통제는 부와 권력을 획득한 남성들은 자신의 자식에게 부와 지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남성들은 일부일처제 결혼을 공고히 했고 이를 통해 여성의 생계를 보장하는 대신 여성에게 정절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여성들에게는 이전 시대에 누렸던 혼전의 성적 자유나 혼외 관계 등이 엄격하게 금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이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성들에게는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충족시켜 주기 위해 축첩이나 매춘이 허용되었다. 여성에 대한 성통제는 새로이 확립된 부권제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기능을 하였으며 이로써 남성들은 가족 내에서나 사회에서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공공연하게 확보하게 되었다.
3. 국가와 성적 종속의 제도화
부권제가 확립되면서 하락한 여성의 지위는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더욱 공고해진다. 농경사회로부터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가 발생하게 된다. 상품생산을 통한 무역의 발달, 군사 엘리트의 등장, 왕권 등장, 노예제의 제도화 등과 함께 국가가 형성되었다. 국가의 생성은 친족 지배의 사회에서 계급 지배의 사회구조로 이전하게 됨을 의미한다.
고대 국가는 여성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국가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을 묵인함과 동시에 법으로 제도화하게 된다. 이는 국가가 남성 지배층에 의해서 구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지배 종속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곧 국가와 남성의 지배 종속관계에까지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절대 왕권의 보장을 위해서 여성과 노예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이전의 여성의 성이 가족 내의 가부장권에 의해 종속되었다면 국가는 가정 내 여성 종속을 법으로 명문화하고 제도화하므로 써 국가 가부장제를 확립하게 된다. 이로써 여성들의 지위는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하고 이에 대한 저항도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여성의 성 소유화
여성의 성은 국가의 법에 의해 소유될 수 있는 재산 혹은 판매가 가능한 상품이 된다. 함무라비 법전에 보면 남성들은 빚을 대신하여 자식이나 아내, 첩, 노예를 갚을 수 있었다. 남성들은 여성을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여성의 성은 하나의 재산품목으로서 물화 되었다. 여성의 간통이나 강간이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를 소유한 남성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B. C. 1800년에서 17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 법에서도 가부장의 권리는 절대적이며 여성들은 가부장의 지배를 받았다. 귀족계급의 여성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신랑과 신부의 아버지의 이해에 따라 결정되었고 아내들은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하였다. 아내들은 결혼 생활에서 어느 정도의 재산권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지참금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였으며, 이혼을 하거나 재혼을 할 때도 아내들이 지참금을 가지게 된다. 유산계급에 속하는 아내는 제한적이나마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경제적 권리를 가졌지만 성적인 권리는 엄격하게 제한을 받았다.
하층계급의 결혼은 이와는 달랐다. 시민권이나 경제적인 권리는 물론 보장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자녀를 돈을 받고 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하층계급의 결혼에서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이 되었다. 딸들을 팔려서 첩이 되거나 가내 노예 혹은 매춘부가 되기도 하였다.
이중적인 성규범
여성은 어떤 계층에 속하느냐에 따라 시민권과 경제권의 차이는 있었으나 성적으로는 모든 계층의 여성들이 남성에 종속되어 있었다. 남성의 여성의 성지배는 이중규범을 제도화하므로 써 가능하였다. 즉 여성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는 성규범이 남성들에게는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은 한 남성에게만 속해야 하지만 남성들은 첩을 두거나 노예의 성을 유린하거나 매춘부와의 관계를 통해서 성적 쾌락을 즐길 수 있었다.
여성의 간통은 사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의 의사에 따라 사형을 당할 수도 아니면 살수도 있었다. 여성의 생사여탈권을 남성이 모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을 강간하는 것도 법적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여성의 성적 권리를 침해해서가 아니라 그 여성의 남편이나 아버지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자의 근친상간은 사형이었지만 부녀의 근친상간은 추방에 그쳤다. 강간범의 처벌은 여성의 강력한 저항이 있어야만 가능했고 강간에 대한 보상은 여성의 아버지에게 강간한 남자와 결혼하거나 아니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데 필요한 정도의 벌금만이 징수되었다. 만일 강간범이 결혼한 남성이고 강간당한 여자와 살게되면 그의 이전 아내는 매춘부가 되어야만 했다.
여성의 이분화: 베일 쓰기와 매춘
남성들은 상류층 여성들의 순결과 정절을 보장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충족시킬 수 있는 여성들을 확보하기 위해서 여성을 이분화 하는 전략을 고안해 낸다. 여성의 이분화란 아내로 맞이할 정숙한 여성과 쾌락의 대상인 정숙하지 못한 여성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서열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전략은 정숙한 여성들이 타락한 여성들에 대해 비교우위를 갖게 하여 스스로 이분화를 수용하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여성들 스스로가 여성을 억압하는 장치를 받아들이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종교적 의식에서 이루어졌던 사원매춘에서 상업적 매춘이 성행하는 과정으로 변화하게 된다. 여성노예나 가난한 농민층 여성들이 매춘부로 유입되는 것이 증가하였고 동시에 남성들이 혼외관계를 통한 성적 욕구 충족이라는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매춘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여성들에게 베일을 씌움으로써 여성들의 서열을 매겨 여성의 성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남성의 보호를 받거나 혹은 한 남성에게 성적으로 속한 여자들-결혼한 부인, 귀부인의 딸, 결혼한 첩 등-은 베일을 쓸 수 있게 한 반면 남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상업 매춘부, 노예, 미혼의 사원매춘부 등-은 베일을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국가는 여성의 성적인 지위로 여성을 구분하고 이를 어기면 해당 여성뿐만 아니라 이를 묵인한 남성들까지도 처벌하였다. 국가가 여성들의 성을 통제하는 것이 가부장 권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부장과 어린이/여성의 권력관계는 왕권/남성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는데 기능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제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여신의 몰락
여성의 지위의 하락과 그로 인한 여성의 성에 대한 통제의 강화는 여성의 성의 신비함과 생명창조의 상징으로 찬양되던 여신의 몰락을 동반하였다. 이전까지 여신들은 생식과 창조의 신으로 숭배 받았고 때로는 왕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졌었다. 아프리카의 여신 다호메이와 마우는 산과 계곡을 창조하고 하늘에 태양을 만들고 땅에는 생명을 창조했던 신이었다. 석기시대의 종교 예식에서는 달의 여신을 숭배했는데 이 신은 남성들이 여성에게 영적으로나 성적으로 존경할 것을 요구하는 신이었다. 멕시코의 코트리쿠라는 여신은 구름에 덮인 높은 산에 거주하면서 달과 태양 그리고 모든 신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제 여신은 전지전능하며 엄격한 남성 신으로 대치되기 시작한다. 국가가 발전하고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종교적인 믿음과 상징의 세계에도 영향이 미친 것이다. 여신들은 제우스나 쥬피터와 같은 우두머리 남신으로 대치되고 남신의 아내로서만 남게된다.
4. 기독교와 침묵하는 여성의 성
법제화를 통해 여성의 성적 종속이 제도화되었다면 기독교의 등장은 종교적인 교리와 도덕적인 규율로서 여성의 성을 침묵하게 만들어 버린다. 기독교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엄격한 성적 도덕을 강요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성에 대해 억압적 규율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들이 억제하기 위한 육체적 욕망을 규제하므로 써 신과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가 개인의 성이라는 일상적 삶까지도 감시하고 규율하면서 기독교의 권력이 전 사회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가 성에 대한 규율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은 영혼과 육체를 극단적으로 이분화해서육체는 영적인 타락으로 이끄는 죄악 덩어리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육체는 영혼의 전지전능함 혹은 영원불멸성으로 도달하는데 방해물이라고 죄악시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육체와 관련된 욕망을 규제하는데 정당성을 확보한다.
육체에 대한 경멸은 성에 대한 강한 금기로 이어졌다. 성적 욕망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속물적인 죄로 비쳐졌고 성교행위는 불결하고 음란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있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장려되었고 실제로 사제들에게는 독신을 강요하였다. 결혼은 육체적 정욕을 극복할 수 없는 경우에 하는 차선책이었다.
육체와 성에 대한 혐오적 태도는 일부일처제적 결혼 내에서 생식을 위한 성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 이외의 쾌락을 위한 성은 모두 엄격하게 규제했고 간통과 같은 경우는 사형으로 처벌하였다. 남성과 여성 모두 순결이 강조되었고 혼외정사는 금지되었다. 그 외의 생식의 목적을 벗어나는 성행위들, 즉 자위행위나 남색, 몽정도 처벌의 대상이었고 영아살해나 피임, 낙태 등도 규제하였다.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쾌락을 위한 성행위나 애무, 다양한 체위 등은 참회를 했어야만 했었다.
7C 경 사제들이 고해성사 때 사용한 벌칙들은 기독교가 성에 대해 얼마나 심하게 규제를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독교는 개인들의 사소한 일상적 성행위까지 침투하여 종교가 가진 권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였다. 키스의 경우 단순키스는 6일의 특수단식을 해야 하고 사정 또는 포옹이 수반된 키스는 10일의 특수단식을 해야 했다. 자위 역시 20-40일의 참회를 해야 했고, 두 번째 위반 시는 100일의 참회, 상습적일 때는 1년의 참회를 해야 했다. 대퇴부 섹스는 2년의 참회를, 구강섹스는 4년의 참회, 항문섹스는 7년의 참회라는 처벌이 가해졌다. 심지어 주중 일요일, 수요일, 금요일, 부활절 전의 40일, 성탄절 전의 40일, 성찬식 전 3일 동안의 성도 모두 위법이었다. 고해 실에서의 성과 관련된 참회들은 교회의 권력이 성을 통하여 얼마나 일상적인 삶에 관여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기독교가 남성과 여성의 성 모두에 엄격하기는 하였지만 여성들의 성에 대해서는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성적 억압을 하였다. 기독교 역시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를 공고하게 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은 국가가 남성을 지배하는 것과 나아가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 교회와 인간들의 엄격한 위계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 및 세속의 세상에서의 모든 위계관계를 인정하고 이를 유지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여성의 열등 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한 전략은 성서에서 여성의 열등성과 연관되는 부분을 확대하여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여성은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졌으므로 남자보다 열등하고 남성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한다' 혹은 '이브가 아담을 유혹했고 그로써 원죄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여성들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라는 원리가 여성들에게 적용되었다. 이로써 여성들은 침묵해야 하고 남성과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기독교가 형식적인 차원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성을 함께 규제하였지만 실제생활에서는 남성의 축첩과 매춘을 묵인하는 이중성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여성을 이분화 하여 분할 통치하는 전략도 지속되었다. 기독교 시대의 여성의 이분화는 성서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순결과 성스러운 어머니의 상징인 성모 마리아가 이상적 여성상으로 등장하였고 그 이면에는 매춘으로 더렵혀진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여성들의 성을 억압하고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상반된 두 마리아의 이미지가 교묘하게 이용되었다.
성에 있어서 여성들은 육체와 연관되면서 악마와 죄악으로 이끄는 통로로 인식되었다. 기독교는 여성들은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죄 많은 존재로 부각시켰다. 이는 여성들에 대한 성적 억압을 정당화해 줌과 동시에 남성들의 성적 타락을 여성에게 책임 전가할 수 있게 했다. 기독교는 남성의 성적 욕망이나 몽정조차도 여성의 몸 속에 숨어있는 악마 때문이라고 여성에게 탓을 돌렸다. 이는 성에 대한 강한 금기와 억압에서 오는 남성들의 불만이나 공포를 여성에게 뒤집어씌우는데 효과적이었다.
기독교는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면서 순결을 지키게 하는 데로까지 몰고 가기도 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데는 마리아 숭배가 한 몫을 하였다. 처녀성과 동정임신으로 상징되는 마리아를 본받기 위해 여성들은 스스로 신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장치들을 고안해 냈다. 여성들은 날카로운 못을 박은 벨트로 허리를 단단하게 동여맨다든지 기와 조각을 넣은 침대에 눕든지 하는 행위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억제했다. 때로는 자신을 심하게 구타하거나 단식을 하면서 순결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교회는 공식적으로 매춘을 반대하였지만 매춘을 금지하는데는 주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교회는 매춘부가 없다면 정숙한 여성이 색정으로 더럽혀지고 남색이 성행할 것이라고 우려하거나, 가난한 여성들의 생계수단으로 매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교회는 한편으로는 다수의 여성들에게 성모 마리아를 숭배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의 여성들은 계속 막달라 마리아로 남기를 원하였다.
이는 기독교에 깊숙이 내재해 있는 가부장적 성격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매춘을 통해서 교회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적인 이해도 함께 작동한 것이었다. 1287년 세인트 폴 성당의 참사회 주임사제는 소유지를 매춘 굴에 임대했고 독일의 마인츠 주교는 1457년까지 매춘 굴에서 수입을 얻었다. 윈체스터의 주교는 1649년 최종적으로 매각하라는 강압을 받을 때까지 런던의 사우스워크에 있는 매춘 굴에서 수익을 챙겼다고 한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기독교 성규범에서 벗어난 여성들은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간통을 한 여성들은 처형당했고 규범에서 벗어난 성생활을 한 여성들은 이혼 당하거나 매춘부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마녀사냥은 그 중에서도 악명 높은 처벌방식 중의 하나였다. 홀로 사는 여성이나 성생활이 문란하다고 소문난 여성 혹은 논쟁거리가 될 만한 의견을 감히 입밖에 내는 여성, 소위 앙알거리는 여자들은 마녀로 색출되어 화형 당했다.
5. 자본주의의 등장, 과학, 그리고 성욕이 없는 여성
자본주의 등장으로 경제, 인구학적 사회적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성에 대한 통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하게 된다. 경제체제가 농업과 장인노동에서 상업과 산업노동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등장하게 된다. 자본가들은 핵가족이라는 새로운 가족형태를 구성하게 된다. 이는 산업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자녀 양육과 교육을 위한 투자가 증대하여 다산의 필요성이 쇠퇴하였기 때문이자 산업자본을 따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소규모 가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새로이 등장한 중산층 핵가족은 성과 출산이 동일시되던 전통적인 규범에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국가에 있어서 여성들의 출산은 인구라는 측면에서 중요하였다. 맬더스의 인구론이 발표된 이후로 개인의 건강은 이제 국력과 연관되었고 국가는 적절한 수의 후세 생산 및 양육의 문제를 중시하게 되었다. 빈민의 수를 줄이고 관리하는 것에서부터 인구문제는 국가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자본에 있어서도 생식의 문제는 중요했다. 노동력을 착취하여 이윤을 남겨야 했던 자본가들은 적절한 수의 자녀를 낳아서 양질의 산업 노동력으로 양육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한 의도에서 결혼 관계 내에서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성이 규범적인 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생식과 무관한 남성들의 자위행위나 동성애가 강력하게 금지되었으며 아동과 여성의 성은 침묵 당하게 되었다. 여성의 성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양질의 인구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가정이라는 장소를 여성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동의 성을 침묵시키는 것은 미래의 노동력이 될 아동들에게 교육을 통해 순응적인 국민과 노동자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과학의 발달은 성에 대해서 과학적 이론들을 생성하였다. 18세기 들면서 과학자들은 성교를 통해 어떻게 생명체가 태어나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현미경이 발명되자 그래프는 난자를 발견하였으며 그것이 난소에서 자궁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후 밴 레벤후크는 현미경으로 정액을 관찰하고 미세한 올챙이 모양의 생명체를 발견하였다. 1854년에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을 관찰하여 생명 창조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에 이른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창조를 설명하던 관점은 이제 사라지고 성과 생식의 영역을 새로이 등장한 과학이라는 학문이 점유하게 된다. 특히 과학은 객관적인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지식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진리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과학이 성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기존의 지배적인 성규범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였다. 자위행위나 동성애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규정되었고 도착적인 성 혹은 일탈적인 성으로 다루어졌다. 의학자들은 남성의 자위행위는 체력을 허약하게 하고 지능을 둔화시키게 된다는 연구결과를 들어 위협을 가했다. 소년의 자위행위는 남성의 성기의 성숙에 장애가 된다고 강력하게 저지를 하였다. 성과학자와 성의학자들은 결국 지배규범에서 벗어난 성은 모두 비정상적인 성으로 규정하여 여성, 아동, 동성애, 매춘부 등의 성적 소수자를 침묵시켜 버렸다.
상업과 산업자본의 발달로 새로이 등장한 중산층 계급에서 여성의 역할은 아이를 낳아서 잘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여성, 밖에서 임금을 벌어오는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로 규정된다. 생산이 일어나는 공적영역과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이 분리되면서 여성들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영역으로 국한되고 임금소득자인 남편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된다.
아내를 가정에 묶어 두기 위해 중산층 여성들에게는 숙녀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부과되었다. 숙녀의 이미지에는 모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모성찬양은 여성의 성을 드러내서도 안되고 성적 욕망 자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강요를 하였다. 정숙한 여성은 자신을 위한 성적 만족을 거의 갈구하지 않으며 오직 남편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칠 뿐이라는 규범이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만일 여성이 성적 욕망을 인정하게 되면 자신의 중요한 자산, 즉 숙녀다움을 잃어버리게 되고 체벌을 당하거나 쫓겨나거나 혹은 빈곤이라는 위험에 빠져야 했다.
이러한 규범들은 중류층 여성들 중 상당수를 우울증이나 신경쇠약, 히스테리 등의 질병에 시달리게 했다. 이들을 규제하는 것은 의사들의 몫이었다. 의사들은 이러한 증상은 자궁이 분리되어 온 몸을 떠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치료 책으로 자궁절제를 가장 자주 추천했다고 한다. 나아가 의사들은 여성의 자위를 막기 위해 클리토리스를 제거하는 것도 선호하였다. 19세기 여성들은 의학이라는 미명아래서 가장 악질적인 야만행위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숙녀의 다른 한편에는 정조관념이 없는 여자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남성들이 숙녀를 아내로 맞이하면서도 자신들의 성적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매춘부들이 있어야만 했다. 노동자계층 여성들은 과도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게 되었고 과부와 미혼모들은 빈곤한 상태에 빠졌다. 이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매춘에 유입되었고 남성들의 성적 요구와 맞닿으면서 매춘이 성행하게 된다. 심지어는 소녀들의 매춘도 증가하여 12세에서 18세에 이르는 소녀들아 비싼 값으로 매매되면서 매춘에 유입되었다.
매춘여성들은 성적으로 타락한 집단으로 범주화되었고 이는 자본가나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시켰다. 19세기도 매춘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도시에는 홍등가가 번창하자 국가는 매춘여성들을 '일탈적인 성을 행하는 자' 혹은 '사회적인 무법자'로 간주하여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869년 영국에서는 접촉감염증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성병이 만연하기 시작하자 국가가 매춘여성이나 빈민 여성들에 대한 성병을 감시하고자 만든 법이었다. 이 조치는 매춘여성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층 여성까지 검역 대상이 되게 하여 노동자 계급 여성들도 매춘으로 유입되게 하였다. 거리에서 부랑생활을 하던 노동자계급 여성들은 강제적인 성병 검역을 받게 되었고 감염된 경우는 유치 병원에 감금하였다. 후에 이들이 퇴원하였을 때는 이미 매춘부로 등록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국가는 매춘여성들을 일탈적인 범주로 만들어 이들에게 성과 관련된 문제의 책임을 전가하고 착취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국가가 정말로 해야될 일, 즉 가난한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정책을 회피하는 구실을 제공하기도 했다.
6. 나오는 말
지금까지 서구 역사에서 여성의 성이 남성 가부장과 자본가, 교회, 국가 그리고 과학자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역사에서 여성은 성적으로 욕망도 없고, 열등하며, 성적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여성의 성 역사는 이것이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이나 자연의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지배집단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관철된 결과임이 드러난다. 또한 여성들의 성적 종속은 성별관계(gender relations)와도 관련이 있음이 밝혀진다. 즉 한 사회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얼마나 평등하냐와 여성들의 성적 자유의 확보는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한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기제들-여성의 성적 소유, 이중규범, 여성의 이분화-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내용과 방식을 바꾸어 가면서 여성의 성을 억압하고 착취함에서 이를 알 수 있다.
20세기 이후로 여성들의 성에도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여성의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인정하고 여성들의 성적 자유도 확대되고 있다. 실제로 여성들은 이전에는 금기 시 되었던 프리 섹스나 레즈비언의 성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다른 편에는 여성의 성의 상품화나, 에이즈의 등장으로 인한 성적 반격의 등장, 강간, 포르노, 낙태권 규제 등의 문제가 놓여져 있다. 이것이 여성들이 성적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할 때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새로운 기제들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해본다. 여성들의 성적 주체성의 확보는 지배세력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어야 함과 아울러 여성 스스로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어떻게 발견하고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여성의 성 역사를 살펴본 뒤에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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