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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문화/2001년 상반기 한국영화 리포트/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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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성률
댓글 0건 조회 3,278회 작성일 02-06-1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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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01년 상반기 한국영화 리포트
강성률



  상반기 한국영화는 분명 선전했다. 영화인회의 배급개선위원회에서 산출한 공식 집계에 따르면 상반기 자국 영화 시장점유율이 39%라고 한다. 39%! 말이 좋아 39%이지, 이 수치는 그야말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수치이다. 할리우드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 자국 영화 시장점유율이 30%를 상회하는 나라조차 몇 안 되는 상황에서 40%에 거의 육박했다니. 상반기 자국 영화가 40%에 육박한 나라는 프랑스를 제외하면 한국이 유일하다. 그런데 프랑스는 침체의 길을 걷다가 오랜만에 자국 영화가 선전한 결과임에 반해, 한국 영화는 꾸준히 상승했다. 한국영화가 단연 돋보이는 이유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평자마다 다른 이유들을 들겠지만, 작년의 상승분위기와 연관시켜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기도 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성공, 완전히 정착한 투명한 배급구조, 디지털 영화라는 새로운 영화의 등장. 그러나 올 상반기만 놓고 보면 이 모든 진단이 일정 정도 빗나갔음을 알 수 있다.
  2001년 상반기에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상반기 흥행 순위 20위 안에 든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단 한 편도 없다. 순제작비만 30억 이상이 투입된 <천사몽>이나 <광시곡>은 서울 관객 각각 16,000명, 14,000명을 모으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99년의 <쉬리>나 2000년의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폭풍을 몰고 온 블록버스터가 없었다는 말이다. 블록버스터 전략을 이쯤에서 한번쯤 짚어봐야 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 할리우드와 차별되는 '한국적'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상반기에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블록버스터가 하반기에는 줄을 이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상품으로 생각하는 블록버스터 전략은, 상반기에 국한하면 분명 문제가 있다. 작년의 경우를 들어 좀더 원론적으로 보자. 작년에 개봉된 한국영화 가운데 정말로 이윤을 남긴 영화는 과연 몇 편이나 될까.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어 은행 이자 주기에도 빠듯하거나 사무실 운영비도 건지지 못하는 영화들을 제외하면 불과 대여섯 편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80% 가량은 투자한 돈을 겨우 건졌거나 아니면 막대한 손해를 봤다. 냉정하게 보자면, 영화 산업 자체는 성공 확률이 그리 높지 않은 산업이다. 지금은 시중 은행의 이자 금리가 단군 이래 최악의 상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분위기도 좋고 회수 기간도 빠른 영화계로 펀딩하고 있지만, 상반기 같은 블록버스터 실적이 계속된다면 이 돈들은 곧 빠져나갈 것이 뻔하다. 후반기에 개봉될 많은 블록버스터들, 심지어 순제작비만 80억에 육박한다는 영화가 개봉되는 후반기는 한국영화 산업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위험한 도박인지, 산업 기반이 안정된 것인지는 후반기를 지켜보고 난 후에 내릴 일이다.
  완전히 정착한 투명한 배급구조가 자국 영화 시장점유율을 높혔다는 주장에도 이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영화에서 배급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80년대 말만 해도 배급은 거의 보따리 장사 수준이었지만, 1990년대 초반에 대기업이 대거 영화에 뛰어 들면서(지금은 모두 나갔지만) 배급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시네마서비스나 CJ 엔터테인먼트, 튜브 같은 메이저 배급사가 충무로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면서 영화 흥행의 열쇠는 배급이라는, 일종의 '배급전쟁'이 벌어지는 형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배급이 투명해지고 강해졌다고 해서 좋은 일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시내 극장에 나가 보라. 멀티플럭스 극장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 극장당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18개까지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지만 상영되는 영화는 거의 똑같다. 전국 어딜 가도 같은 영화를 볼 수 있다. 극장 자체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6개의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는 한 극장은 장사가 될 만한 영화만 상영하다 보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신라의 달밤>이 2개관씩 차지해서 결국 상영되는 영화는 4편밖에 없는 실정이다. 작은 영화는 개봉할 수조차 없는 형국이 벌어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꽤나 흥행한, 정말로 재미있는 영화 <타인의 취향>은 개봉관이 없어, 기하급수적으로 스크린이 늘어나는 이 풍부한 멀티플럭스 극장 시대에 단관 개봉을 했다. 스크린이 늘어난다고 개봉 편수가 더불어 늘어나지는 않는다. 이 모두는 돈이 될 만한 영화만 선호하는 배급이 극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상반기에 개봉된 영화 가운데 저예산 영화이지만 볼 만했던 영화들은 여지없이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제는 꽤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김기덕의 <수취인불명>은 197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우울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날것 그대로의 폭력이 난무했던 전작과는 달리 이 영화는 단아하면서 환상적인 화면도 볼 만하지만 그것보다는 아픔과 상처로 찌들어 있는 남한에 미세한 현미경을 들이댄 구조가 더 볼 만했다(물론 '극단적' 폭력으로 치닫는 후반부가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저마다 상처를 지니고 서로를 괴롭히면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결국 폭력의 장으로 빠져들고 마는 모습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준 <수취인불명>의 서울 관객은 고작 8,900명에 그쳤다. 잘 나가는 영화의 주말 관객이 통상 150,000명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슬픈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을 특유의 구성과 저예산의 생기로 표현한 <7인의 새벽>이나, 남성 중심의 한국 사회를 비판한 <고추 말리기> 역시 같은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 영화들이 가을로 개봉을 미루고 있는 지금, 매주 박스오피스 결과를 내려고 해도 개봉되는 영화가 채 10편이 되지 않아 7위까지만 순위를 매길 수 있는 지금, 강력한 배급력이 좋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 아닐까.
디지털 영화라는 새로운 영화의 등장은 한국영화 흥행에 도움을 주었을까? 상반기만 놓고 보면 절대 '아니올시다'이다. 상반기 극장에서 상영한 장편 영화 가운데 디지털 영화는, 제목이 무척이나 긴 <대학로에서 매춘하다 토막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과 임상수의 역작 <눈물>이 전부이다. 작년 한국영화의 가장 큰 화두는 디지털 영화였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디지털 영화라는 대안을 모토로 출발했고, 각종 TV나 신문은 연일 디지털에 관해 떠들었으며, 새로운 영화를 소개할 때는 웬만하면 디지털 영화라는 용어를 사용해 소개했다. 유행에 유난히 민감한 나라여서 그런지 몰라도 같은 영화라도 디지털 영화라고 하면 더 세련된 영화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영화가 정말 한국영화를 발전시켰는가. 냉정히 따져보면 이것 역시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반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최고의 클릭수를 자랑하는 류승완의 <다찌마와Lee>는 인터넷 영화의 한계, 즉 별다른 수입원이 없다는 것 때문에 비디오로 다시 출시되어야 했다. 극장에서 개봉된 두 편의 흥행은 어떠했던가. 말 그대로 참담할 지경이었다. <눈물>은 서울에서 25,000명 정도를 모았고(참고로 이 영화의 홍보비만 10억 가량이라고 한다), <대학로…>의 경우 극장 생긴 이래 최악의 관객 동원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디지털 영화를 논하기에는 아직은 이른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영화가 그토록 선전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분명 지금 한국영화는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고 한다. 어디에 가도 영화에 관한 담론이 무성하며, 영화에 대한 지원정책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더 물을 것 없이 집계된 상반기 흥행 결과를 보자. 자국 시장점유율 39%를 차지한 영화들을 통해 그 원인을 찾도록 하자. 상반기 흥행순위 20위 안에 든 한국영화는 1위를 차지한 <친구>를 필두로 무려 9편이나 된다. 놀랍게도 절반이 한국영화인 셈이다. <선물>, <인디언 썸머>, <번지점프를 하다>, <신라의 달밤>, <자카르타>, <하루>,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파이란> 등이 20위 안에 포함되었다. 순위에 든 영화 가운데 <선물>, <인디언 썸머>, <번지점프를 하다>, <하루>,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파이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 멜로드라마이다. 이제는 좀 지겨운 얘기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2001년 한국영화계에도 여전히 멜로드라마가 강세라는 사실이다. 멜로드라마가 충무로를 먹여 살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멜로드라마를 폄하하는 시선은 유난히 한국에서 강하다. 일제의 산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둥, 1960년대 고무신 관객이라는 둥,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둥, 뻔한 내용을 스타만 바꿔서 포장한다는 둥의 수식어가 멜로드라마를 따라다니는 말들이다. 물론 이에 반해 멜로드라마야말로 수용자 이론의 대표적인 케이스라며 전복적 독해를 시도하기도 하고, 1990년대 후반 이후의 멜로드라마는 1960년대와는 달리 한층 성숙되었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상반기 개봉된 멜로드라마 가운데 주목할 것은 전형적인 신파조의 영화(가령 <하루>, <선물> 같은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영화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일상의 세세함을 잔잔한 톤으로 다룬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격정적인 슬픔이나 가슴 어린 동조가 없지만, 영화가 끝나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연유한 잔잔한 울림이 있는 영화이다. <번지 점프를 하다>는 또 어떤가. 전반부와 후반부의 급격한 시간 전개와 예상치 못한 사랑의 아픔으로 보는 이를 이전의 멜로드라마와는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3류 인생의 피폐한 한 인간이 자신보다 더 못한 처지의 여성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우쳐 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린 <파이란>도 빼놓을 수 없는 상반기의 수확이다. 멜로드라마가 신파의 한심한 장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반기 영화는 확실히 보여 주었다.
  이제 <친구>를 논해야 한다.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 이렇게 말하고 나니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 말이 전국 800만 명이지 이 수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치이다. 부산이라는 지역성에 기반을 두었기에 타지방에서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고, 남성들만의 우정을 얘기하면서 여성을 속화했기에 가장 큰 소구대상인 20대 여성이 배척할 가능성이 많았고, 과도한 폭력으로 인해 18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았기에 흥행에 치명타까지 받았다. 그뿐인가. <쉬리>처럼 액션에 멜로를 가미한 것도 아니고,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확실한 스타가 나오거나 시대 분위기가 도와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친구>는 이런 상황을 모두 이겨냈다. 왜 대단한지 수치상으로 한번 따져보자. 한국 전체 인구가 4,500만 명인데, 이 중 18세 이하가 대략 2,000만 명이라면 <친구>를 볼 수 있는 인구는 2,500만 명이 된다. 2,500만 명이 모두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극장이 없는 농어촌이나 오지에 사는 사람(계속해서 늘어나는 스크린은 도시에만 집중된 현상이다. 요즘 웬만한 읍 단위에도 극장이 없다)을 제외하고, 일년에 극장 한 번 가지 않는 50대 이상의 '연로한' 분들을 제외하면 남는 인구는 아마 1,000만 명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 가운데 800만 명 이상이 봤다는 것은 20대에서 50대 사이의 인구 가운데 극장에 갈 수 있는 여력이 되는 사람은 '모두 다 갔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이게 가능한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로 나타남으로써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친구>에 열광했는지 알아봐야 한다. 기본적이면서 가장 큰 원인은 <친구>가 1980년대의 정서를 잘 재현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30대 이상의 남성이 <친구>를 보고 느낀 것이 대부분 "옛날 생각나네"였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의 완성도나 예술성이 아니라 리얼하게 '재현'(표현이 아니라)된 시대분위기였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배우의 연기도 빠뜨릴 수 없다. 특이하게도 지방 관객이 서울의 관객보다 3배나 많았다는 것(통상 2배)도 시대분위기를 제대로 재현했다는 점에 크게 기인한다. 그렇다면 또다시 물어야 한다. 왜 관객들은 1980년대를 스크린으로 보려고 하는가, 또는 보고 동감을 표하는가 라고. 그것도 광적으로. 1980년대의 경제 성장을 욕망하는 마음이 영화 한편으로 표출되었다고, 또는 무너진 가부장제의 권위를 남성의 우정과 의리만을 중시하는 영화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낀다고 평할 수도 있다. 영화 한 편이 신드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영화가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화의 흥행 요인은 다양하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성 관객은 오로지 장동건을 보려고 <친구>를 보기도 하고, 극장 출입을 연중 행사로 여기는 이들은 <친구>를 보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마지못해 봤을 수도 있다. 장르의 규칙을 철저히 지킨 점이나, 홍보사의 철저한 마케팅 전략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영화를 본 관객들의 욕망은, 공통 분모는 있겠지만, 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친구> 신드롬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이런 수치는 불가능한 수치라는 것과, 사회가 경직되어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어 두렵다는 정도이다.
  글을 쓰고 보니 지나치게 흥행성에 염두를 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흥행 성공 여부에 따라 영화를 평하는 것은 많은 평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2001년 한국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과 한국영화 자체를 '존립'시키는 것이다. 화려한 수사를 동반한 세계화가 결국은 미국화일 따름이며, 이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죽이는 것이라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자국 영화점유율이 20%를 넘는 나라가 열 손가락을 미처 채우지 못한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자국 영화를 살리는 것이다. 자국 영화 시장이 없으면 한국영화의 존립 자체가 무너진다. 지금 한국영화의 흥행성이 중요한 지표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한 영화를 많은 관객이 본다는 것은 그 영화가 관객과 그만큼 소통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많은 사람과 소통한다는 것은 동시대 관객의 심리를 읽는 바로미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1970년 경북 안동 생
서울시립대 국문학과 졸
동국대 대학원 영화학과 석사 졸
웹진 {씨네포커스} 편집장 역임
2000년 월간 {민족예술}에 영화평을 쓰면서 평론 활동 시작
현 호서대, 한국기술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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