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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단편소설/어느 한 자해단원의 운명/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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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호
댓글 0건 조회 3,528회 작성일 02-06-14 19:47

본문

단편소설
어느 한 자해단원의 운명
이기호


  <개별법인 : 자연으로의 해체와 공동체의 갈락토오스적 단상>의 지도부 멤버들이 모여 긴급 대책 회의를 열었다(그들 법인의 이름은 너무 길고 발음하기가 버겁기 때문에 대외적으론 단어의 앞글자만 따서 불려지고 있다). 원로급인 삼베저고리를 입은 L과 보험회사 사고평가 담당자인 K, 중견급이자 단체 내 물내리기의 일인자인 Y, 찍새미이자 유일한 여자인 S, 그리고 이제 막 신인 티를 벗기 시작한 전진만(全眞滿)이 참석했다. 회의실은 늙은 이발사의 날 갈이용 가죽밴드를 닮은 갈색 소파세트가 전부인 다섯 평짜리 방이었다. 벽은 흰색과 회색 페인트로 위아래가 이등분되어 있었으나 그것 또한 세월의 풍화에 닳고 닳아 그 경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측 벽 상단엔 금테를 두른 '자동차 보험 약관'이 액자에 끼어 걸려있었다. 전체적으론 금테 액자가 너무도 도드라져 보여 회의실의 무게 중심이 우측으로 쏠려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그 놈이 그 짓을 하면서 차에 뛰어들었다 이거지?
  K가 침통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콧방울에 걸쳐 쓴 두터운 돋보기가 그의 얼굴을 한층 더 어둡게 침잠시키고 있었다. 좁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는 손수건엔 조급함이 배여있었다.
  -걔가 원래 백댄서 지망생이었다가 이쪽으로 업종을 바꾼 애잖아.
  L이 부채를 부치며 말을 이었다.
  -백댄서? 그게 뭔데?
  -왜 있잖아, 딴따라들 뒤에서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는 연놈들.
  L의 부채는 좀전보다 거칠게 파닥거렸고, K는 돋보기를 벗고 두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을 문지르는 엄지와 검지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어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러다간 우리 모두 망해버리고 말거예요.
  Y와 S도 뒤질세라 입을 열었다. Y의 얼굴은 사뭇 상기되어있었다. 그는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직접 자신의 손에 벽돌을 내려찍어 탈골시키는, 묵직한 신음이 새어 나오기 마련인 물내리기 작업을 할 때에도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그런 손을 가지고 질주하는 자동차 앞에 뛰어들 적에도 그는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Y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태는 그만큼 심각했다.
  진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간간이 곁눈질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막막한 일이 생기거나 암담한 기운이 느껴질 때마다 높은 곳을 곁눈질로 바라보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것은 그의 가족사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버릇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차후에 언급하기로 하자. 진만이 함부로 말을 못하는 이유는 신인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지금 이 사태의 근본적인 책임이 그에게 일정 정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금 얼마 전에 새로 가입한 이시봉(李時奉)의 기행(奇行)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봉에게 단체를 소개하고, 또 그의 가입을 도운 것이 바로 진만이었다. 진만은 고개를 숙인 채 윗입술을 깨물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춤을 추면서 차에 뛰어드냔 말이야!
  -더 큰 문제는 그가 내뱉는 공갈에 있습니다. 그걸 공갈로 봐야 할지……
  -그게 무슨 공갈이에요! 이건, 뭐 얘들 장난도 아니고……
  S 또한 평소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단체의 대표적인 찍새미인 S는, 망을 보거나 사고 타이밍을 정확히 잡아내는 자신의 역할에 걸맞게 목소리가 작았다. 찍새미 목소리가 크면 주위 사람들에게 당연히 작위적인 사건이라 의심받게 된다. 단원들에겐 사건의 개연성과 전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얼리티가 생명이었다. 때문에 단원들은 평상시에도 자신의 역할에 맞는 성격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허나 지금 S는 다분히 감상적이며 돌발적이었다.
  -경박하고, 저질스럽고, 유치하고……
  S는 말꼬리를 흐리며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에게서 귀동냥 해 들은 시봉의 공갈이 저도 모르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단원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은 일종의 감정상의 합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모두 태풍의 눈 속에 잠시 머무르는 상태, 그 눈의 협소한 공간이 지난 후 발생될 사태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상황.
  -그런 놈을 누가 데려온 거야?
  침묵을 깨고 K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진만에게로 모아졌다. 진만의 고개는 더욱더 수그러졌고, 허벅지에 대고 있던 양손이 주먹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잠깐, 시봉과 진만이 약칭<자해공갈단>에 가입하게 된 과정과 좀 전에 미루어두었던 진만의 습관에 얽힌 이야기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시봉이 단체에 들어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안방에서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이전에 약간의 고혈압 증세를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별 다른 잔병치레 한 번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에게 더욱더 급작스럽게 다가왔다. 가족 중에서도 특히 시봉이 받은 충격이 컸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시봉을 때리다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스물 세 살, 공고를 졸업한 뒤 현재 백댄서 양성 학원인 '데몬스트레이션'에 다니고 있음. 이것이 그때까지의 시봉 약력의 전부였다. 시봉이 춤에 빠지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무겁고 암울한 얼굴 표정에 대한 반발이라는 예측 정도만 가능할 뿐이다. 시봉의 아버지는 근 삼십 년 간 경기도 근처 어느 화장터에서 일해왔다. 그의 아버지가 하는 일이란, 시신을 망자의 유품과 함께 섭씨 천 사백 도가 넘는 불구덩이 속으로 집어넣는 일이었다. 그 일은 언제나 유가족 앞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시봉의 아버지는 항상 우울한 낯으로 시신을 집어넣고 수습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생활 전반으로 이어졌다. 시봉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죽음에 근접해있었고, 그런 자신의 기운을 가족에게까지 전파하려 노력했다. 엄숙함이란 이름으로, 거의 반강제적으로. 그러나 우리의 시봉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러한 아버지의 자기 편의주의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일에도 이름 모를 망자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대해 탄식하는 아버지, 사촌동생이 태어난 날도 우울한 낯빛으로 작은어머니를 대했던 아버지, 시봉은 아버지의 그런 투철한 직업정신이 싫었다.
  그런 그가 우연한 기회에 접했던 춤은 아버지가 주었던 기운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안겨주었다. 살아있다는 느낌, 아버지에 의해 한쪽으로 치우쳐졌던 자신의 생활이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신명을 느꼈던 것이다. 시봉은 미친 듯이 춤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춤만 추면서 평생을 살고 싶었다. 춤을 추면서 밥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백댄서가 되기로 결심했다. 예상된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시봉이 백댄서 되는 것을 반대했다. 수차례의 구타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언, 그리고 몇 차례의 단식으로 반대했다. 그의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댄서들의 춤이란, '대가리가 가벼운 놈들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발광하는 미친 짓'이었다. 그럴 때마다 시봉은 잦은 가출과 춤으로 단련된 탄탄한 맷집, 그리고 수차례의 단식으로 아버지에 맞섰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죽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시봉을 때리고 있었다.
  -이 배라먹을 놈아, 춤을 추려면 나부터 죽이고 춰라! 나부터……!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늘 죽음과 밀접해있던 아버지, 그러나 정작 자신은 어떠한 예감과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몰랐던 것이다, 죽음이란 주위사람들에게나 엄숙한 것이지 당사자에겐 때론 솜털 같이 가볍게 다가온다는 것을.
  시봉은 깊은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좋아 시작했던 춤이 도리어 아버지를 죽였다는 자책, 살아있음이 죽임과 대결해서 죽임을 죽였다는 모순. 시봉은 자신의 춤에 대해서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괴로운 회의의 나날 끝에 시봉은 춤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엄숙한 삶을 경험해보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죽은 아버지에 대한 자책을 일정 정도 덜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간 이가 바로 그의 초등학교 동창생이자, 한 동네에 살고 있으면서 근래에 엄숙한 직업을 얻었다고 동네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한 전진만이었다.
  이제 진만의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부득불 진만 또한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겠다. 그의 아버지의 정확한 직업 명칭은 기상청 야간 전담 당직 관리인이었다. 이십칠 년 간 준(準)공무원이었으며, 기상청 내에서의 일반적인 명칭은 '전 야간수위'였다. 진만 또한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지금의 성격이 형성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무척이나 자연에 두려움을 지닌 채 성장하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기예보가 틀렸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경우, 동네사람들은 기상청에 다닌다는 진만의 집으로 몰려와 항의하곤 했기 때문이다. 만취한 주민이 찾아와 대문을 부술 기세로 두들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학교에서도 진만은 날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급작스럽게 비가 내린 날, 친구들은 하나같이 진만을 노려보며 빗 속 하교길을 뛰어갔다. 때문에 그는 예보와 틀리게 하늘이 점차 흐리게 변해 가면 곁눈질로 연신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이 버릇이 발전해 그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질 때마다 곁눈질로 위를 쳐다보게 된 것이다). 그는 항상 자연과 운명, 우연에 대해서 함구했으며, 엄숙하려 노력했다. 그것은 두려움의 한 표현이었고,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될 수 있는 한 엄숙할 것, 날씨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은연중에 그의 생활 전반을 점령하게 되었고, 그것이 곧 그가 삶과 인생을 바라보는, 생활의 지표가 되어버렸다.
  그런 진만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우연히 도로에서 중형차에 치이는 Y를 목격하게 되었다. 운전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에서 뛰어내렸고 주변사람들이 걱정 어린 눈길로 쓰러진 Y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Y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일어났다. 그리곤 운전사의 연락처 한 장만을 달랑 손에 쥔 채 절뚝거리며 사라졌다. 그 모습은 진만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자신이 여태까지 찾아 헤매었던 모습, 자연의 재해에도 엄숙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 진만은 Y의 뒷모습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본 것이었다. 진만은 서둘러 Y를 따라갔다. 그리고 Y에게서 약칭 <자해공갈단>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바로 가입하게 되었다.
  -세상은 갈수록 경망스러워지고 있어. 그게 다 자연을 무서워할 줄 몰라서 생기는 일이지. 우리 단체는 엄숙한 거짓말을 세상에 던져주는 것을 그 업으로 삼고 있어. 거짓말을 창조하기 위해 깊은 고뇌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만 모여있고. 자네도 나중에 회원들을 만나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엄숙한 사람들 뿐이야. 창작은 늘 엄숙함을 동반하는 법이거든. 우리 단체는 그 엄숙한 창조를 위해 회원들을 받고 교육도 시키지. 세상을 재창조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말이야. 자네도 엄숙한 돈벌이를 하고 싶거든 가입해도 좋아. 자네는 얼굴 자체가 엄숙하기 때문에 우리와 잘 맞을 것 같군.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 단체 약관에는 제명 조치란 게 없어. 스스로 탈퇴하는 건 있어도. 그게 다 단체를 엄숙하고 고결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던 여러 선배들의 뜻이지.
  그럼, 이제 시봉과 진만이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보자. 시봉은 진만에게 찾아가 자신도 엄숙한 직업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봉의 전직(前職)을 알고 있었던 진만은 쉽사리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시봉의 뜻은 완강했다.
  -네가 날 받아주지 않으면, 넌 평생 우리 아버지 원혼에 시달리게 될 거야.
  진만은 그렇게 사흘 밤낮을 시달린 뒤(그의 집엔 사흘 동안 십분 마다 한 번씩 귀신 울음소리 전화가 걸려왔다), 시봉을 단체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날로 바로 시봉은 가입원서를 내고 정식 회원이 되었다. 면접을 보았던 Y는 그의 이름에서 왠지 프랑스 냄새가 난다며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러나 시봉은 가입 첫날부터 심하게 한 쪽 다리와 어깨를 들썩거리며 강의를 들었다. 몸은 비록 <자해공갈단>에 가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데몬스트레이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죄책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체질개선이란 그렇게 인위적인 장소와 직업의 변경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의 사태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점점 더 가라앉아만 갔다. 누구 하나 쉬이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보험회사 평가원인 K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만 해도 회원들이 사고를 내면 그가 중재에 나서 운전자로부터 돈을 받아내거나 보험회사로부터 보상비를 받아냈다. 그러면 회원들도 얼마간의 돈을 수고비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고의 개연성과 리얼리티를 회원들의 입장에서 운전자에게 주지시켜주는, 일종의 바람잡이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봉이 운전자와 직접적인 협상으로 돈을 받아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수입은 갈수록 줄어들어만 갔다. 시봉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운전자로부터 소액의 돈을 받아냈고, 운전자들도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제 갈 길을 갔다. 몇몇의 회원들이 암암리에 이런 시봉의 방법을 따라 했고, 그에 따라 K의 입지는 나날이 하한가를 쳤다. K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올해 삼재(三災)가 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앉아있었다.
  Y가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회원들에게 그런 경망스러운 풍조가 전염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단체의 엄숙한 목적의식도 사라지게 되고, 존립 자체까지도 위협받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시봉이 하도 돌아치는 바람에 경찰에서도 우리 단체에 대해 낌새를 챈 것 같습니다. 벌써 내사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회원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윗입술을 깨물었다. 불안감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얼굴들. 그들은 지난 수년간 자신들이 쌓아온 지위가 일순간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몸을 떨었다.
  L이 결심한 듯, 소리나게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별 수 없어. 그 놈을 근본부터 다시 가르치거나 스스로 나가게 만드는 수밖에……. 내가 직접 나서겠어.
  단체의 창립멤버로 지난 수십 년 간 뛰어난 사고의 리얼리티와 빛나는 거짓말을 창조해 왔던 L, 이제 기력이 달려 후진 양성에만 힘을 쏟아오던 그가 다시 전면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마만큼 시봉은 모두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L과 시봉은 도시의 변두리 편도 4차선 도로 옆에 서있었다. 도로에는 거무틱틱한 중형차 몇 대만이 세워져있을 뿐, 달리는 차량은 거의 없었다.
  -이곳은 변두리이지만 돈 깨나 있는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이야. 저 차들 좀 봐. 소형차가 거의 없지. 이 도로의 특징은 행인이 별로 없기 때문에 운전자들이 방심하고 차를 모는 데 있어. 조금 있으면 저쪽에서 진만이 행동개시 할거야.
  L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 진만이 서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손톱을 깨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진만은 검은 정장 차림에 검은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L은 가방에서 소형녹음기를 꺼내들며, 진만의 몸에 소형 마이크를 부착시켜놓았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L이 특별 개인지도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시봉은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는 나이 든 사람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봉은 거부할 수도 없었다. L의 제안을 거부했다가는 단체에서 제명당할 수 있다는 진만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지만 단체의 약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시봉은 L과 함께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봉은 얼마 전부터 춤과 자신이 단체에서 하는 일 사이에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시봉이 춤을 좋아했던 이유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인식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어서였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죽음에 대항하기 위해 추었던 춤, 그래서 시봉은 신명이 났고 생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차에 뛰어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수 있는 상황을 직접적으로 흉내낸 후, 다시 그 상황을 자신의 거짓말로 되죽이기. 마치 그것은 삶을 옥죄고 못 살게 구는 살을 지어낸 후, 거기에 대결하고 쟁투하면서 그것을 퇴치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된 살풀이춤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때문에 시봉은 단체에서 하는 일에서도 신명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 그의 거짓말은 단순하고 직설적일 수밖에 없었다. 신명은 우회적일 때보다 직접적일 때 더 강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시봉은 될 수 있으면 단체에서 오랫동안 머물기를 원했다.
  불법주차된 검은 외제 중형차에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올라탔다. 진만은 손톱 물어뜯기를 멈추고 서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구름이 태양을 가려 사위가 어두워졌을 뿐, 도로의 풍광은 변함이 없었다. 반대편 차선에 리어카 행상 한 명이 나타나 핸드마이크로 배추를 사라고 악을 쓰며 걸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던 진만은 차가 출발하자마자 그 앞으로 몸을 날렸다. 날카로운 브레이크 파열음과 경적음이 동시에 한적한 도로를 뒤덮었다. L이 들고 있던 녹음기에서도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진만의 서류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새하얀 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며 차 위로 떨어졌고, 리어카 행상은 마이크에서 입을 뗀 채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타이밍 한 번 죽이지. 뛰어들 때에도 저렇게 일정한 법칙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L은 시봉의 얼굴을 살피며 녹음기의 볼륨을 높였다. 시봉은 좀 전과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저편 도로를 바라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차에서 뛰어나올 때까지 진만은 계속 차 앞에 쓰러져있었다. L이 들고 있는 녹음기에선 이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머, 괜찮으세요? 아이, 난 어쩌면 좋아…… 차도만 보고 있다가……
  진만의 작은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예전과 달리 낮은 중저음으로 변해있었다.
  -괜찮습니다. 허리만 약간 다친 것 같군요.
  -일단 제 차를 타시죠. 병원에 가봐야 될 것 같은데요.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진만을 부축해 차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차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녹음기에선 별안간 끈적끈적한 트럼펫 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스테레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진만이 여전히 저음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 암스트롱이군요.
  -어머, 아세요?
  -트럼펫을 불기 위해 작은 입술을 칼로 찢었다는 인물이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이에요.
  여자의 목소리는 좀전보다 한결 안정을 찾은 듯했다.
  -저 또한……
  한동안 녹음기에선 트럼펫 소리만 흘러나왔다. 리어카 행상은 다시 배추를 사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고, 시봉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도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녹음기에선 조금 변한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병원에 가서 별 탈이 없으면 사죄하는 뜻으로 자신이 맥주를 사겠노라고 했다. 진만은, 진단서는 나중에 자신이 떼어 볼 테니 먼저 맥주집에 가서 루이 암스트롱 얘기나 계속 해보자고 했다. 여자는 흔쾌히 동의했고, 차는 바로 미끄러지듯 도로를 빠져나갔다. L이 녹음기를 끄며 말했다.
  -자, 잘 들었지? 공갈은 저렇게 치는 거라고. 최대한 엄숙한 목소리로, 최대한 우울한 얼굴로 말이야. 그래야 사람들이 공갈을 공갈처럼 여기지 않거든. 그리고 어떤 한 대상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게 효과적이야. 루이 암스트롱 같은 거 말이야. 너도 알지, 암스트롱?
  -댄스가수는 많이 알아요.
  시봉이 무덤덤하게 답변하자 L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L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계산은 항상 진만이처럼 나중에 하는 거야. 보험회사 평가원을 통해서 말이지. 운전자들이란 보험회사 평가원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뢰하는 경향이 있거든. 그래야 나중에 더 많이 긁어낼 수 있는 거라구.
  -전 그렇게 복잡한 것 잘 몰라요.
  시봉은 참았던 하품을 길게 하며 말했다. L의 얼굴은 서서히 상기되어갔다. 시봉의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L의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 L이 물었다.
  -넌 엄숙함을 배우려고 우리 단체에 들어왔다면서?
  -물론이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없어요. 전 이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는걸요.
  -뭘 깨달았는데?
  -무언가를 신나게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엄숙한 삶이라는 걸요. 그렇지 않아요? 어쩌면 전 이 일을 평생직업으로 삼을 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재미있고 신명나는 일인 줄 몰랐거든요.  
  '평생직업'이란 말에 L은 허청, 다리가 꺾였다. 시봉의 그 말은 L에게 <자해공갈단>을 분해시켜버리겠다는 위협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L은 한동안 가로수를 짚고 서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시봉은 새로 배운 춤이라며 왼쪽 허벅지를 땅에 붙이고 전신을 회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시봉의 표정은 좀 전과 달리 사뭇 진지했으며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L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으로 일을 할 순 없니? 진지하고 엄숙하게 말이야.
  -에이, 그건 선생님이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모든 춤에는 그것에 맞는 표정이 있는 거예요. 얼굴 표정도 하나의 춤인 거죠. 지금처럼 과격한 춤일 경운 표정도 진지해야 돼요. 또 반대로 가벼운 탭댄스 같은 경운 그렇지 않거든요. 얼굴만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 과격한 춤은 아니죠.
  시봉은 자세를 바꿔 머리를 땅에 박고 물구나무 선 자세에서 전신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L은 심한 현기증에 머리를 가로수에 기대었다.

  <자연으로의 해체와 공동체의 갈락토오스적 단상>은 창립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중견 보험회사 평가원인 P가 시봉의 공갈을 의미있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어느 한 성질 있는 운전자가 시봉의 사고를 보험처리하기 위해 P를 부른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보험처리를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시봉은 P의 앞에서도 변함없이 히죽거리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킥킥, 전 분명 반바지를 입고 가게에 갔는데 주인 아줌마가 '왜 빤스차림으로 싸돌아다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전 '반바지입니다' 그랬죠. 그랬더니 아줌마가 '그게 트렁크 빤스라는 거다. 왜 빤스 위에 빤스를 입고 지랄하느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반바지 위에 '트라이'라는 상표가 붙어있지 않겠어요. 하도 창피해서 눈을 질끈 감고 집으로 뛰어가다가 이렇게 된 거죠, 낄낄낄…….
  묵묵히 시봉의 말을 들은 P는 회사에 '운전자 전방주시 소홀'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시봉은 일정액의 보험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P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단체 회원들에게 시봉을 옹호하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그의 공갈도 어느 면에서는 충분히 인정해줘야 할 가치가 있다는 거야. 냉소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고, 기존 권력에 대한 야유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 어쩌면 그가 웃는 이유도 전략적인 한 방편인지도 몰라.
  물론 우리의 시봉은 거짓말을 할 때 냉소적이다거나 기존 권력에 대한 야유 따위는 담뱃재만큼도 유념하지 않았다. 시봉에게는 팬티에서 권력을 추출할 만큼 광범위한 지적 토대가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시봉이 알고 그랬건 모르고 그랬건,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시봉에 대한 P의 이런 우호적인 평가가 회원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일부 신입 회원들이 시봉의 공갈을 모델로 자신들의 공갈을 만들어냈고, P의 의견에 동조하는 보험회사 평가원이 하나 둘 늘어만 갔다. 이곳저곳에서 엄숙하지 못한 사고가 생겨났고, 차츰 시봉을 필두로 세력화하려는 회원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회원의 필수적인 의무인 회비 납부를 거부했는데, 이것은 지도부에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회원들은 사고를 낼 때마다 받은 돈의 10%를 의무적으로 납부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정작 시봉은 변함없이 꼬박꼬박 회비를 납부하여 지도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지도부가 흔들리게 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Y의 뜻하지 않은 대형 사고에 있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지도부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던 Y의 사고는 치명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Y는 8톤 트럭에 치여 전치 26주의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대형 트럭에 치인 것에 대해 단체내에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대형 공갈로 평생을 먹고살려고 그랬던 것이다, 아니다,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구 그랬던 거다, 무슨 소리냐, 모시고 사는 노모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다, 등등. 그가 받을 돈의 액수에 대해서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집 한 채는 거뜬히 마련하고도 남을 돈을 받게 된다더라, 누가 그러더냐, 트럭기사가 돈이 없어서 트럭을 대신 줬다더라, 헛소리들 말라, 보험회사에서 치료비만 간신히 나와 홧병이 생겼다더라, 등. 그러나 막상 지도부가 Y를 찾아가 들은 얘기는 생판 다른 것이었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중, Y는 질주하는 트럭에 치였다는 것, 트럭기사는 전과 3범으로 친구의 차를 심심풀이로 몰던 사람이었다는 것, 그는 은밀히 뒷조사를 해 Y가 그 전에도 여러 번 사고를 냈던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 그리고 입원해있는 Y에게 찾아와 도리어 트럭 수리비와 그간의 일당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는 것,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경찰에 신고해 공갈범으로 처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 등. Y는 지도부 사람들에게 치료비는커녕 지금까지 벌은 돈을 몽땅 날리게 됐다며, 세상이 갈수록 무서워져 큰일이라고 했다.
  병실을 나서는 지도부들의 얼굴엔 우울이 오래된 딱지 마냥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고, 누구 하나 고개를 치켜들지 않았다. 특히 진만의 고개가 더 수그러져있었다. 좀전 병실에서 사람들은 또다시 시봉에 대해 기나긴 성토를 늘어놓았다. 회원들이 회비를 납부하지 않는 것도 그의 탓이었고, 세상에 나쁜 놈들이 많아진 것도 시봉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또다시 진만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엔 '네가 벌여놓은 일이니까 네가 책임을 져라'라는 뜻이 다분히 포함되어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진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담판을 지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았다. <자해공갈단>의 재규합이냐, 아니면 개별적 해체냐. 혹은 이시봉의 가벼움이냐, 전진만의 엄숙함이냐. 진만은 병원 정문을 나서며 시봉의 얼굴을 떠올리곤 낮게 중얼거렸다.
  -죽일 놈.

  진만과 시봉은 홍대 앞 '배드 걸스'라는 락카페에 들어갔다. 그들은 좀전 인사동에 있는 전통 찻집인 '예다원'에서 만났으나 시봉이 자리를 옮기자고 계속 생떼를 쓰는 바람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락카페 '배드 걸스'는 온통 목재로 뒤덮인 곳이었다. 바닥도 목재였고, 천장도, 탁자도, 스피커도, 하다 못해 맥주잔까지도 목재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천장에선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쉴새없이 회전하며 바닥에 오색 원을 만들어댔고, 스피커에선 이름 모를 외국 락커가 헐떡거리며 전자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초저녁이어서 그런지 손님은 없었다. 시봉은 한쪽 다리를 쉴새없이 흔들어대며 맥주를 주문했고, 머리를 길게 땋은 남자 종업원은 어깨를 일정하게 흔들거리며 주문을 받았다. 진만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굉음으로 인해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진만은 잠시, 시봉이 자신과의 대화 자체를 무산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진만은 시봉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할 얘기가 있어!
  -뭐라구?
  -말할 게 있다구!
  -춤추자고? 좋아!
  진만은 시봉의 말을 하나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시봉이 무대로 나가는 것을 보고 그가 의식적으로 자신과의 대화를 꺼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무대로 나간 시봉은 처음엔 가벼운 스텝과 손뼉 마주치는 것만으로 춤을 추더니 점점 빠른 발동작과 현란한 손놀림으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종업원들이 그의 춤을 보고 박수를 쳐댔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시봉은 상체와 하체를 비틀며 공중으로 치솟는 동작을 선뵈었다. 마치 온몸의 뼈가 연골로 이루어진 듯, 시봉의 몸은 유연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진만은 남아있던 맥주를 들이키고 시봉이 있는 무대로 나갔다. 시봉에게 장소를 옮기자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시봉은 자신에게로 다가온 진만의 양손을 가만 두지 않았다. 시봉은 진만의 양손을 잡은 채 스텝을 밟고 몸을 회전하며 허리를 뒤로 꺾는 고난도의 동작을 연출해냈다. 종업원들은 더 큰 박수를 보냈고, 진만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만을 웅얼거렸다.
  시봉과 진만이 락카페 '배드 걸스'에서 나온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이 흐른 뒤였다. 둘 다 하나같이 억병으로 취해있었고, 속옷에서부터 겉옷까지 모두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진만은 그 세 시간동안 시봉보다 더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도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나중엔 종아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시봉은 그가 그렇게 정열적으로 춤을 춘 이유에 대해선 일체 묻지 않았다. 그건 저 경상도 산골에 파묻혀 밤낮으로 공자만 공부하는 유학자를 데려다놓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시봉의 생각이었다. 락카페에서의 춤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유 없는 것,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그냥 너나 할 것 없이 미쳐버리는 것.
  그렇게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던 진만은, 그러나 이차로 감자탕집에 들어간 이후부터 다시 침묵을 되찾았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가셨기 때문이었다. 진만은 또다시 성난 표정으로 소주잔만 들이켰고, 시봉은 뜨거운 감자를 후후, 불어가며 먹어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진만이 말했다.
  -너, 이제 그만 우리 단체에서 나가.
  접시에 고개를 박고 감자를 먹던 시봉은 얼굴을 들었다. 입가엔 벌건 국물이 묻어있었다.
  -왜 내가 나가야 해?
  시봉은 입안에 있던 감자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처음부터 너는 우리들과는 삶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달랐어.
  -삶?
  -그래, 삶!
  진만의 목에 퍼런 힘줄이 돋았다.
  -말해봐! 넌 도대체 삶을 뭐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거야?
  시봉은 한참동안 진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젓가락으로 감자를 집어들었다.
  -삶……? 삶은……
  -말해보라구! 그 삶이 뭐냐구!
  -삶은…… 삶은…… 삶은 감자지, 뭐.
  시봉이 젓가락에 꽂혀있는 감자를 바라보며 씩 웃는 순간, 진만에 의해 탁자가 뒤엎어졌다. 시봉의 삶은 감자는 진만의 발에 밟혀 형편없이 으깨어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자정 무렵, 시봉은 비슷한 시기에 단체에 가입한 찍새미 동기생 한 명과 삼거리 모퉁이에 서있었다. 시봉은 평상시 야간작업을 하지 않았으나(그는 자신의 직업도 일반인들의 직업과 마찬가지로 출퇴근 시간이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 날은 동기생의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별수없이 나왔던 것이다. 그 동기생은 원래 주유소에서 세차일을 했던 친구였는데, 평소 주유소 업무를 방해했던 한 사내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며, 시봉에게 그 일을 부탁했다. 시봉은 동기생의 그런 간절한 소망을 몇 번의 거절 끝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그 사내가 항상 자정 무렵 지나친다는 삼거리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내가 저쪽 모퉁이에서 지켜보다가 그놈이 나타나면 신호를 보낼게. 그럼 너는 차가 코너를 돌자마자 이쪽에서 뛰어들면 돼. 내가 직접 하고 싶어도 그놈이 내 얼굴을 알거든. 수고 좀 해줘라. 나중에 내가 크게 한턱 낼게.
  시봉은 길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동기생은 반대편 모퉁이로 황급히 사라졌다.
  어둠에 싸인 도로는 가로등 하나 없이 정적에 휩싸여있었다. 드문드문 신호등을 무시하고 질주하는 차량만 눈에 띨 뿐, 행인이라곤 없었다. 한 대의 앰뷸런스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시봉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문뜩 시봉은 죽은 아버지를 생각해냈다. 춤을 싫어했던 아버지, 그래서 결국 그 춤 때문에 죽은 아버지. 왜 춤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 시봉이 단체에 가입하게 된 제일의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시봉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춤에 대한 구체적인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나 그는 그러하질 못했다. 그는 그럴만큼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지 알 수 없는 우울에 빠졌을 뿐. 그저 춤이라도 한바탕 추고 싶었을 뿐. 아아, 우리의 불쌍한 시봉…… 그는 진정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단체도, 죽음도, 삶도, 춤도…… 그때 동기생이 신호를 보내왔다.
  -온다!
  시봉은 코너가 꺾이는 건물 옆으로 몸을 낮추었다가, 가까워진 엔진 소리를 가늠하고 도로로 몸을 날렸다. 밤에는 모든 소리가 더 깊어지는 법이다. 브레이크 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봉은 얼굴을 아스팔트에 밀착시킨 채 브레이크의 미세한 여운을 들으며 도로에 엎드려있었다. 아무래도 넘어질 때 허리를 삔 것만 같았다. 통증이 척추신경을 타고 뇌신경을 자극했다. 차 문 여는 소리, 다가서는 두 명의 구두 발자국 소리, 입맛 다시는 소리, 그리고 또 하나의 낯선 소리. 시봉은 평소와 다름없이 누운 채로 히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바보야, 차도에선 뛰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잖아……
  시봉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운전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좀전에 들려왔던 낯선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눈부신 두 개의 은빛 곡선의 부딪힘…… 수갑이었다. 제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 뒤로는 시봉이 뛰어든 순찰차가 세워져있었다.
  -이시봉, 우리가 너 잡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제복을 입은 한 사람이 시봉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말했다. 차디찬 금속성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가 시봉은 잠시 몸을 움츠렸다. 시봉은 곧바로 순찰차의 뒷좌석에 태워졌고, 경찰 중 한 사람은 무전기에 대고 상기된 목소리로 '범인 검거, 범인 검거'를 외쳐댔다. 순찰차가 막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 할 때, 시봉은 자신의 팔꿈치를 부여잡고 있는 경찰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주유소에 가서 세차원 괴롭힌 적 있어요?
  시봉의 물음에 경찰관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말했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순찰차가 사이렌에 불을 밝히고 삼거리를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모퉁이 건물 한쪽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멀어져가는 순찰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수고했어.
  -에이, 뭘요. 선배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는 걸요, 뭘.
  -이제 좀 조용해지겠군.
  -저 친구……, 오래 살지는 않겠죠?
  -글쎄, 법정에서 얼마나 법을 두려워하느냐, 그 여부에 달려있겠지.
  두 사람은 꽁초를 발꿈치로 비벼 끈 뒤, 어두운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시봉은 법정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검사가 묻는 말에만 아주 짧게 답변했을 뿐, 별 다른 반론도, 소란도 피우지 않았다. 단지 몇몇의 일간지들만이 그를 '가리봉동에 사는 이 모씨'란 이름으로 요란하게 다루었을 뿐이었다.
  <자연으로의 해체와 공동체의 갈락토오스적 단상>은 다시 정상을 되찾았다. 지도부들은 예전 그 위치를 좀더 확고히 지킬 수 있었으며, 회원들의 회비 납부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진만은 Y의 공백을 틈타 중견의 위치에까지 올라갔으며, 시봉을 옹호하던 보험회사 평가원 P는 회사에서 쫓겨나 김밥집을 개업했다. 모든 것은 예전처럼 순조롭고, 엄숙하게 진행되어갔다.
  시봉이 구속된 지 반년이 흐른 후, 진만은 수상한 행동으로 동료들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그는 매일같이 업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론가 바삐 사라졌던 것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던 동료 한 명이 그를 미행했고, 결국 진만이 홍대 앞에 있는 '배드 걸스'란 락카페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얼떨결에 그곳까지 미행해 들어간 동료는, 그곳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 진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만의 그런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동료는, 종업원 한 명을 붙잡고 진만에 대해 물어보았다. 머리를 뒤로 길게 땋은 종업원은 몹시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쟤요? 쟤, 여기 죽돌이예요. 저 새끼 때문에 우리 집 물 많이 흐려졌어요. 춤도 지랄같이 못 추는 게 여자한테 또 왜 그렇게 찝쩍대는지……. 혹시 저 새끼 아시면 얘기 좀 잘 해줘요. 저 밑에 신장 개업한 락카페 있다구요, 그 쪽에 물 좋다구요……. 에이, 고삐리도 아닌 새끼가 왜 저렇게 경망스러운지……. <※>


이기호(portlan@hanmail.net)
72년 강원 출생
99년 현대문학에 <버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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