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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단편소설/봄내음/김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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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봄내음
김기우
0.
여기, 이발소만 들어오면 왜 그 시절이 떠오르는지요. 박정희 정권 때 말입니다. 누님도 함께, 누님의 첫사랑도 동시에 생각나고요. 아, 아, 커트보 좀 느슨하게 해주세요. 언제나 이 보자기를 씌울 때는 목덜미가 따갑군요. 예, 됐습니다. 그냥 단정하게 깎아주세요. 이발소 냄새, 여기 냄새는 박정희를 떠오르게 합니다. 사람의 기억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 저장되는 게 냄새라고 하잖아요. 저는 사람의 체험이 대부분 영상으로 기억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냄새도 마찬가지지요. 이발소 냄새, 포마드 냄새 같기도 하고 다이알 비누 냄새 같기도 한, 이곳 향기를 맡으면 박정희의 단아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양복 윗도리 소매하고 바지 기장이 늘 짧았잖아요. 그리고 머리는 늘 기름으로 세워 깎아지른 듯 넘기고요. 작은 체구를 크게 보이려고 그랬겠지요. 그가 탤런트만큼 텔레비전에 자주 나와 축농증 걸린 사람처럼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할 때면 여지없이 이발소 냄새가 풍기더군요.
그 사람이 있던 시절을 향수하는 사람이 꾀 많습디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그가 제물로 바쳐졌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이에요. 정말 근대화를 이뤄냈나요? 혹시 근대화를 꺼리는 것은 아닐까요? 부모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아이의 불안처럼 근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는지요.
우리는 늘 게으르고 의타심만 있어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악스럽게 몰아치면서 일을 만들어내는 돈 키호테 같은 인물을 기대하고 있는지도요. 그 시절은 그래도 긴장했었다, 싸울 대상이 있었다,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주경야독하는 학생도 많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던가요.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유신체제가 돌입했지요. 신민당이 너무 막강해서 박정희가 개헌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어도 박정희, 그 사람 결국 유신헌법을 만든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았지요. 개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누님도 첫사랑이 이뤄졌을지 모르지요. 이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마다 그림이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시절, 국회의원 선거, 누님, 책방 아들, 시장 골목…….
1.
이윽고 하얗게 먼지 쌓인 이발소의 아크릴 간판에 깜박깜박 형광등이 켜집니다. 함께 놀던 아이들도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시장 노인네들이 피우는 담배연기처럼 땅거미가 스멀스멀 머리 위까지 올라오면 저는 이발소의 미닫이문을 덜컹거리며 엽니다. 이쯤 되면 손님이 거의 빠져나가 따분하게 기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위로만 짧게요. 지난번엔 엄마한테 혼났단 말이에요. 학교에선 또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
겨울방학전 시원스레 박박 깎은 떡집아이의 머리가 예쁘게 빚은 송편 같아 저도 그렇게 깎아보았지만, 제 머리는 털 빠진 암탉 궁둥이 모양 온통 흉한 상처 투성이였습니다. 며칠 후 저는 시장 건물 이층 난간에 숨어 허옇게 일어나는 비듬을 떨궈내며 이발소 문이 열리길 기다렸습니다. 투명한 초겨울 햇살이 저의 박박머리를 꾹꾹 눌러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발소를 내려다보며 손바닥 안에 햇빛을 모았습니다. 마침내 이발소 문이 열리고 꼬마 이발사가 수건을 들고 나왔습니다. 손님이 없는 이발소 안엔 옛주인이 난로를 끼고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빛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투명한 선으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제가 손을 들어 하나, 둘, 셋하고 숫자를 끝낸 순간, 손바닥 안의 거울에 모아진 빛이 반쯤 열린 이발소 문을 통해 거울에서 거울로, 구석구석까지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거울뿐 아니었습니다. 빛을 반사시키고 연결시킬 수 있는 모든 물체가 하얗게 웃고 있었습니다. 조용하던 이발소가 미친 듯한 웃음소리로 술렁거렸습니다. 저는 바지에다 오줌을 찔끔찔끔 흘려가며 그러한 빛의 웃음소리를 오래도록 들었습니다.
"가위로 짧게라 . 이번에도 깨끗이 밀어줄 테니, 걱정 말아라."
저의 어깨 위로 하얀 커트보가 씌워졌습니다.
"쥐톨만한 것이 벌써부터 멋이나 내려고 ."
이발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음험하게 웃었습니다. 커트보를 집고 있던 집게가 목덜미를 따갑게 했습니다.
"가위질도 못하면서 무슨 이발쟁이라고 그러세요? 이빨쟁이가 더 어울리겠네요."
저는 지지 않을 새라 혀까지 끌끌 차며 쏘아댔습니다. 다시 이발소 안은 커다란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발소를 나오니 밖은 벌써 캄캄해졌고, 이발소 왼편으로 빨간 등을 켜놓고 줄줄이 앉아 있는 매미들이, 어깨를 웅크리고 지나가는 사내들을 노래부르듯 부르고 있습니다. 낮에 걸려 있던 여자 속옷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벌거벗은 여자의 사진이 너풀너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추웠습니다. 라디오에선 막바지 추위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끝나가고 있을 무렵에는 언제나 바람이 매섭게 불어댔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먼지를 피하려고 고개를 숙이자 향긋한 냄새가 났습니다. 이발소 냄새. 머리 위에 뿌려지던 그 분가루 냄새였습니다. 가끔씩 야근하고 돌아와 잠도 청하지 않고 몰래 빠져나가곤 하던 누나의 냄새와 비슷했습니다. 누나가 빠져나간 쪽문 주위에 맴돌던 그 냄새 . 먼지가 일지 않는데도 저는 자꾸 고개를 숙여 냄새를 오랫동안 들이마셨습니다.
2.
꽃샘추위가 몰려올 즈음이면 시장 사람들은 한가했습니다. 매달 정기적으로 들였다 내보냈다 하던 배추도 사람들이 겨우내 먹을 김치를 미리 해놓아 보이지 않았고, 정신없이 바쁘던 구정, 대보름 대목도 훌쩍 지나 모두가 한가롭게만 보였습니다. 이제는 사람들 모두가 꽃 피는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썰렁한 시장 구석에는 그래도 날마다 시끌시끌한 곳이 있었습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고 아저씨들이 술내기 윷판을 벌이는 대폿집 마당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남자들의 굵직굵직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들은 종일 공치는 날이라도 가게문을 열어놓고 연탄불을 쬐며 앉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하루 종일 연탄불에 손을 녹여가며 가게를 지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갖은 애교를 떨고 나서 백원 동전을 타낸 다음, 곧장 호떡집으로 달려가거나 책방으로 스며들어 배가 고파질 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른 아이들처럼 팽이나 구슬을 사서 추위에 떨며 놀고 싶지 않았습니다. 봄이 오면 중학생이 된다는 설렘 때문에 어른스러워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놀이는 이젠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십 원으론 호떡을 사먹고 나머지 오십 원으론 책을 뒤졌습니다. 책이라야 만화와 무협소설이 전부였지만, 만화나 무협소설도 봄이 오면 교복을 입게 된다는 부푼 마음에 {사랑이 물결칠 때} 라든가, {청춘열차}와 같은 성인용으로만 골라 보았습니다. 밤마다 책방에서 읽은 만화와 소설 줄거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 머리를 어지럽히며 잠을 방해했지만, 다음날엔 또 책방에서 가슴을 졸이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날이 어두워진 줄도 모르고 책에 열중해 있다가 어머니에게 손목을 잡혀 끌려나올 즈음이면, 책방에는 아무도 없고 책방 아들만이 꺼져 가는 연탄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잘 가요."
어느 날엔 알은 체를 하려는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곱살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저에게 인사하는 그의 모습은 만화책에서 본 그 주인공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엄마, 책방 아들 몇 살 먹었어? 꼭 계집애 같아."
저는 어머니의 손에 잡힌 손목을 빼면서 툴툴거리곤 빈 깡통을 힘껏 찼습니다.
"아버지한테 혼난다, 다시 책방 들락거리면."
깡통이 튀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서 꿀밤을 몇 대 먹었어도 저는 다음날에도 책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어제 읽다 놓아둔 책도 궁금했지만, 왠지 책방 아들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텔레비전 앞에 엎드린 저를 사이에 두고 나눈,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상찮은 대화가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그 녀석 아버지가 자유당 때 칼을 맞았다지?"
숨이 막히도록 계속 담배를 피우시며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텔레비전 수상기를 통해 메아리처럼 들려옵니다.
"그 집 아주머니가 고생이에요. 애비 없이 자란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고 쉬쉬하고 냉가슴만 앓고 있으니 . 며칠 전에도 경찰서에서 빼왔다죠?"
어머니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따라 책방에는 손님이 없었습니다. 건성으로 만화책을 하나 골라보고 있는 저에게 책방 아들이 다가와 만화책 위로 군고구마 하나를 던지다시피 놓고는 실쭉, 웃어 보였습니다.
"맛 좀 봐."
가느다란 몸집에서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더욱 여자 같았습니다.
"이젠 만화책 그만 보고 이런 책도 볼 때가 됐을 텐데 ."
그는 무협소설 위칸에 있어 보이지 않던 책들을 내려주었습니다. {세계 문학선}, {한국 단편소설}, 그가 표지를 읽으며 책을 들춰 보였습니다. 깨알같은 글씨가 빼곡이 들어차 있어, 저는 읽어보지도 않고 벌써 눈이 침침해 왔습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 한다면서?"
그의 입가에 자상한 미소가 올려집니다.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읽어 두는 게 좋을 거야. 소설책 말고 위인 전기 같은 것도 보고 싶으면 얘기해. 빌려 줄께. 방에 책이 많아."
저는 그가 자기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그보다 그가 빌려줄 책에 더 관심이 갔습니다. 가게 안쪽으로 커튼이 반쯤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안엔 어둠이 뭉글뭉글 고여 있었습니다. 어둠 속엔 과연 책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 책을 전부 읽으면 볼품없이 거들먹거리는 담임 여선생보다 많이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마지막 권을 읽는 순간엔 머리가 펑, 하고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그럼 우선 소설책으로 하나 골라 주세요."
그가 처음으로 제게 빌려준 책은 {데미안}이었습니다. 그는 저를 자기 친동생쯤으로 삼아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싶다고 하며, 빌려준 책 사이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와 저는 악수를 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가 빌려준 책을 가슴에 끼고 뛰쳐나오듯 책방을 나온 저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찬바람을 가슴 깊이 들이마셨습니다. 무얼까, 이런 느낌은. 어머니, 아버지, 누나에게서는 받아본 적이 없는 남자끼리의 유대감. 그새 더욱 키가 커진 것 같은. 저는 바람을 맞아 뒤뚱거리고 있는 이발소 간판을 걷어차고, 그 옆으로 짧은 치마를 입고 줄지어 앉아 있는 매미들에게 감자를 먹이며 달려갔습니다. 마치 술 취한 어른들처럼 말입니다.
저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누나가 화장대 겸 책상으로 쓰는, 모서리가 닳아빠진 앉은뱅이 책상 앞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그가 빌려준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단숨에 읽어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았고, 어떤 내용으로 줄거리가 이어지는지도 분명히 알 수 없어도, 모두 읽고 난 뒤에 가슴이 저리는 듯한 느낌은, 그와 악수를 할 때처럼 목구멍이 물컹 메이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덮고 새벽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과 잠이 덜 깬 상인들의 하품하는 모습을 창문으로 내려다보며 그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가 서리 낀 창 위에 그려졌습니다.
그 후로 저는 매일같이 소설책 따위를 빌려 보았습니다. 더러 만화책을 뒤져보았지만 왠지 그런 것은 시시하게만 보여 몇 장 넘기다간 곧 덮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없을 때에는 그와 호떡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제가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알아듣겠다는 듯이 가끔씩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읽고 난 책을 바꾼다는 핑계로 잠이 오질 않는 밤에 그에게 찾아가면, 낯모를 청년들이 그와 소곤거리곤 했습니다. 그들과 나눈 이야기도 제가 궁금해하면 그는 서슴없이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이것저것 알고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아니,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저도 어느새 세상살이를 걱정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언제나 저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뼈아프게 일하는 농민 이야기를 하면 저는 농촌 지도자가 되었고, 밤을 새워 기계와 씨름하는 공원 이야기를 하면 저는 단숨에 안경 낀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마친 후, 그에게서 받은 책을 허리춤에 끼고 고개를 떨군 채 시장 구석구석을 생각에 잠겨 걸어가고 있노라면, 저는 어느새 고민에 빠진 {데미안}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습니다. 퇴색한 군용천막을 지붕으로 삼고 풀빵을 구워내는 아주머니, 손바닥만하게 졸아든 햇볕을 쪼이며 졸고 있는 할아버지, 연탄재를 날리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걸인들, 바람막이에 구멍이 숭숭 뚫린 포장마차, 잡음뿐인 스피커를 내놓고 양껏 볼륨을 높인 전파사 . 늘 보아오던 시장 주변의 풍경들이 문득 생소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살아가는 일이란 . 아무리 애를 써서 떠올려도 쉽사리 찾아지지 않는 적당한 낱말 하나를 끈질기게 생각하며, 저는 지칠 때까지 걷다가 집으로 돌아와 잠에 곯아떨어집니다.
3.
잠깐 졸았군요. 예, 면도해 주세요. 머리털도 그렇지만 수염은 왜 그렇게 빨리 자라는지, 변성기가 시작되면서 이성을 알게 되고, 수염을 깎기 시작하면서 사회를 알게 되잖아요. 저는 수염을 깎지 않고 무성하게 기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을 저는 오히려 어리다고 봐요. 언제나 유소년처럼 살겠다는 뜻 아닙니까. 봉두난발도 마찬가지지요. 사회부적응자들이 대개 그렇잖아요. 사회가 불안하니까 자기 안으로 들어가 사회 현실하고는 담을 쌓고 도대체 자신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그 응답을 혼자서 주물럭거리는 사람 말입니다. 당시엔 흔치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었죠.
지금은 머리에 빨갛고 노랗게 물을 들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아보이지만 그때만 해도 공무원들이 장발을 단속했잖습니까. 풍기문란이라고 기타도 못 켜게 했고, 술집에서 특정 정치인 이야기만 해도 잡아갔었지요.
사람들 관심이 그쪽에만 쏠려 있어 그랬던가요? 그 시절엔 왜 그렇게 선거가 많았던지. 제 기억엔 온통 선거 투성이였던 같아요. 딴에는 선거 만한 이벤트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겁니다. 국회의원 선거, 개헌 찬반 국민투표, 전당 대회, 신당 창당 집회……. 자고 나면 당이 생기고 선거가 있고 투표가 있던 기억입니다. 사람들도 선거와 집회에 덩달아 정신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민주화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의심입니다만, 어른들이 이발소에서 수염 깎고 머리털 깎는 횟수만큼 선거가 치러졌어도 날치기는 여전하고 지역주의는 똑같잖아요. 이발소에서 깎여나간 머리털이 아까울 정도예요. 머리 깎으면서 벌이던 고담준론도 이발소 안에서만 맴돌던 공론 아니던가요. 꿈결에서나 벌이던 불가해한 토론들……. 그래도 그때 이야기가 지금보다 훨씬 진지해 보여요. 지금처럼 표층적인 문화 현상만 쫓지는 않았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뭔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 불안을 사회 속으로 들어가 사회하고 대결을 통해서 해소하려고 했지요. 사회는 변하지 않았는데, 사람만 변해가요.
추위가 풀릴 듯하다가 다시 꽃샘바람이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 의젓하게 생긴 사람들의 얼굴이 여기저기 나붙기 시작했습니다. 이발소 간판 옆 담벼락이며, 영화의 프로그램 자리며, 시장아이들의 낙서판이며, 심지어는 매미들이 속옷을 널어놓는 빨래줄 밑, 좁은 판자에까지 그 얼굴들이 붙여졌습니다. 모두가 둥그스름하고 기름진 얼굴들이었습니다. 그 얼굴들 밑에는 이름 석 자와 기호 몇 번, 그리고 작은 글씨체로 많은 약력이 적혀 있었습니다. 붙어 있던 사진이 아이들의 등쌀에 못 이겨 찢겨지고, 그 얼굴들 위로 팔자 수염이 그려졌어도 시장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얼굴을 모두 외고 있을 터였습니다.
날마다 술집에서 막걸리 잔치가 벌어졌고, 기호 몇 번 누구누구, 라고 씌어진 수건이 여기저기 흔하게 나돌고 있었습니다. 대목을 보듯이 시장사람들 모두가 술렁거렸습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술에 취해 넘버 원, 넘버 투를 외쳐댔고, 어머니는 가게 지킬 생각도 않고 부인회나 자모회에 쫓아다니며, 돌아올 땐 언제나 휘발유 냄새나는 수건이나 번쩍거리는 양은 그릇을 들고 왔습니다. 어머니도 가끔씩 얼굴이 벌거니 하고 돌아와서 저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으휴, 내 새끼야 너도 빨리 커서 이 어미 호강 한 번 시켜 주거라, 하시며 막걸리 냄새를 풍겼습니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기승을 부리던 추위와 바람이 한결 누그러지자 눈이 없던 지난 겨울을 촉촉이 적셔 주려는 듯, 소담스럽게 내립니다. 증축공사가 한창인 학교로 사람들이 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내리자마자 금세 녹아버리는 눈송이가 학교 운동장을 질퍽하게 만들었고, 그 위를 사람들이 흙탕물을 튀겨가며 걷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들여놓았는지 교사 중심에 연단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연단 위엔 굵은 선으로 이어진 마이크도 세워졌습니다. 하나, 둘 모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불어나 제 주위로 어둠이 생겼고, 저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에서 이러저리 쏠려야 했습니다. 그 중에는 더러 시장사람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너도 유세 들으러 왔니? 아님, 수입 잡으러 왔니. 어른이나 애나 그저 공짜라면 ."
시장에서 부녀회 총무를 맡고 있다던가 하는, 쌀집 아주머니의 퉁퉁 부은 목소리였습니다. 웅성웅성하던 운동장은 사진의 실물이 연단에 오르자 갑자기 잠잠해졌습니다.
에 - 대한민국의 존경하옵는 유권자 여러분.
그가 연단에 엎드려 큰절을 하고 연설을 시작하려 할 때, 저는 목을 한껏 빼고 비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허둥대며 빠져 나왔습니다. 눈은 계속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고 있었고 질척거리는 학교 운동장에는 물이 고여, 해어진 털신 사이로 차가운 흙물이 스몄습니다. 발가락이 모두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책방에 가고 싶었습니다. 벌겋게 단 연탄 난로 곁에 앉아 젖은 신발을 말리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들고 내리는 눈을 받아먹으려 입을 벌린 채로 뛰었습니다. 윙, 울고 있는 전신탑을 지나고, 유리문이 하얀 약국을 지나고, 눈이 온다고 외쳐대는 전파사의 스피커를 지나고,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집을 지나고, 닭들이 털이 홀랑 벗긴 채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통닭집을 지나쳤습니다.
책방 앞에 도착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뛰어온 보람도 없이 커다란 자물쇠가 문 사이에 달랑 걸려 있었습니다. 자물쇠의 그 단단함이 저를 초라하게 만드는 기분이었습니다.
몸에서 신열이 나다가도 오한에 떨기도 하면서 저는 밤새도록 앓아야 했습니다. 온몸이 무언가에 짓눌리는 것처럼, 송곳에 여기저기 찔리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런 통증 저편엔 몸살감기약이 주는 몽롱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깼구나."
환하게 웃는 누나의 얼굴이 시계추처럼 흔들렸습니다.
"지금 아침이야, 밤이야? 엄마는 ."
바깥이 조용해서 어쩐지 불안했습니다.
"환한 대낮이야. 모두들 국회의원 후보한테 몰려갔어."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는 누나의 얼굴이 가물가물했습니다. 저는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두운 터널에서 소리치는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와 저는 잠에서 설핏 깨어났습니다.
"그 자식이 유세장에서 깽판을 놓더니 이번엔 술판에서 지랄을 해? 대갈통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들 하는 일에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설치고 다녀?"
아버지는 재떨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셨습니다. 화가 잔뜩 나신 모양이었습니다.
"미친 듯이 날뛰고 다니는 꼴이 꼭 뭐에 쓰인 사람 같아요. 책방 아주머니가 안됐지. 저런 아들 꼴 보기가 얼마나 애타겠어요."
침침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어머니의 혀 차는 소리가 끈끈하게 들려왔습니다.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있습니다. 무쇠 같은 다리를 가진 말을 타고 그가 눈을 맞고 있습니다. 머리엔 군인들이 착용하는 방한모를 쓰고 가슴엔 육각의 방패를 올려놓은 채입니다. 다른 한쪽 손엔 깃발을 번쩍 들고 있습니다. 빨간 깃발입니다. 가끔씩 눈보라가 칠 때마다 방한모의 귀막이가 펄럭입니다. 그의 눈동자가 깃발처럼 붉은 빛을 냅니다.
"이 놈이 열이 좀 내렸군."
아득히 들려오는 아버지의 굵은 목소리가 말 발자국을 눈 위에 찍으며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의 환영을 다시금 되살려 보려고 두 눈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습니다. 아프도록 계속 눌렀습니다.
이튿날, 점심 때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열과 오한에 시달린 제게, 어머니가 잣죽을 끓여 가져 오셨습니다. 소태처럼 쓴맛이 뱃속까지 전해져왔습니다. 저는 한참동안 벽지대신 덕지덕지 발라놓은 신문지의 바랜 활자만 멍하니 쳐다보며 잣죽을 먹는 둥 마는 둥하다가 구석으로 밀쳐놓았습니다. 한산하던 시장 안이 갑작스레 부산스러워졌습니다. 우리 가게의 엉성한 진열상품 너머로 아버지와 시장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풍채 좋은 국회의원 후보가 금니를 드러내 보이며 웃고 있습니다.
백열등 불빛을 받은 그의 금테 안경에서 차가운 빛이 발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도로에 비해 상품진열대가 너무 좁다느니, 너무 어두워서 가로등을 설치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양팔을 벌렸다 좁혔다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시장사람들이 고개를 깊이 끄덕였습니다. 후보도 눈썹을 잔뜩 좁히고 아버지의 말을 관심 있게 듣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후보는 아버지에게 불쑥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아버지의 귀에서 담배꽁초가 떨어집니다.
아버지와 오랜 악수를 끝낸 후보가 옆 골목으로 빠져나가려 할 때였습니다. 커다란 고함소리가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왔습니다.
"이 날강도들아."
고함소리에 놀라 달려온 시장 경비원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순식간에 에워싸고 사납게 내려다보았습니다.
누구일까.
저는 땀이 배어나는 손으로 문지방을 짚으며 가슴을 졸였습니다.
혹시 .
어제 꿈속에서 빨간 깃발을 들고 눈 위에서 말을 달리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주홍색 완장을 찬 시장 경비원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던 사내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너희들은 바깥에서 떨고 있는 행상 노인들만 쫓아내지 말고 저 더러운 돼지새끼부터 어서 쫓아내거라."
사내가 소리치며 다시 후보의 뒤를 쫓으려 할 때, 한 몸집 좋은 경비원이 그를 내동댕이쳐 바닥에 뉘고는 그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비명과 욕설이 번갈아 가며 사내의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후보는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양, 황급히 시장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머리 한쪽이 바늘 같은 것에 찔리고 있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가슴에 가득한 원망과 불안으로 문지방의 홈을 손톱이 벗겨지도록 긁고 긁었습니다. 그때, 멀거니 구경만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를 단정히 빗어 올린 한 여인이 울부짖으며 그들의 싸움에 뛰어들었습니다.
"제발, 그만하세요."
여인은 경비원을 밀치고 피투성이가 된 사내를 안아 일으켰습니다. 사내의 코에서 코피가 쏟아지자 여인은 정갈하게 접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코를 닦아주었습니다. 손수건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완장을 찬 경비원들 대신에 방망이를 든 경찰관이 달려오자 몰려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서 있던 자리를 슬금슬금 피했고, 아버지는 시장 천장을 우두커니 올려다보며 담배연기만 힘없이 뱉어냈습니다. 어머니가 피투성이 사내를 부축하는 여인에게 달려가 눈을 부라리며 여인을 칠 듯이 손을 올렸습니다.
"내 미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년아 이 에미가 창피하지도 않니?"
어머니는 숨을 거칠게 내뱉더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미안해요, 엄마."
누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노랫말처럼 들려왔습니다. 씨근거리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사내는 엉뚱하게도 내 쪽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주고는 경찰관보다 앞장서서 비칠비칠 걸어갔습니다. 피로 물든 손수건이 그의 한쪽 손에서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4.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제가 어릴 때 놀던 재래시장 풍경입니다. 언제나 생선 씻은 물로 질척거리던 바닥에서 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지요. 사람들이 몰리는 공간에는 여지없이 선량들이 들락거렸듯 철벅거리는 시장 바닥에도 번질거리는 입후보자들이 함박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악수를 나눴습니다. 악수를 받는 시장 사람들 손이 가장 따뜻했을 것입니다. 시장 사람들에겐 늘 현금이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물건을 신용카드나 백화점 카드로 사지 않았지요. 구청에서 거의 해마다 거둔 수해복구 모금 중 절반 이상이 시장에서 나왔다고 합디다. 하지만 그들도 마트니 백화점이니 하는 대형 유통업체가 들어오면서 사양길에 들어섰지요. 식용품에서 전자제품이 그렇다 쳐도 유통회사까지 외국업체가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경쟁이 되지 않지요. 그 시절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요. 나라를 몽땅 팔아먹는다고 했을 겁니다. 미제니 일제니 하는 물건도 몰래 숨겨놓고 썼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물건은 고사하고 외국 자본까지 유치해도 별 반발이 없단 말이에요. 외자유치, 수입개방만이 진정한 근대화인가요?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춘희}라는 소설을 두 번째 읽고 있었습니다. 책방은 보름째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먼지가 뽀얗게 덮인 자물쇠만 묵묵히 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바꿔볼 수가 없었습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숨가쁜 사랑 이야기 때문에 저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꾸만 부푸는 듯한 가슴을 베개로 누르면서 이리저리 뒤척여야 했습니다.
이것 좀 풀어 줘, 하며 쉬운 덧셈 문제를 가지고 와 귀찮게 굴던 이불가게 순봉이가 문득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의 빛을 껌벅껌벅 바라보며, 소설과 순봉이를 번갈아 생각하고, 까닭 모를 한숨을 몇 번 쉰 다음에야 겨우 잠에 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침에 일어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저는 다시 바깥을 바람처럼 쏘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잠이 제대로 찾아와 주질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보다 잠을 더 못 이루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밤이 깊도록 계속되는 누나의 흐느낌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뭐가 그리 슬픈지 훌쩍거리는 누나는 미친 여자였습니다.
"이 미친 것아, 그만 좀 해 둬라."
아버지가 옆집 계란 가게 아저씨를 끌고 와 밤새껏 술을 마시며 떠들 때, 어머니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누나와 제가 쓰는 방으로 건너왔습니다. 어머니도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불같은 성미에도 아랑곳 않고 누나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날엔 어김없이 그가 있는 경찰서로 달려갔습니다. 먹을 것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휭 하니 쪽문으로 빠져나가는 누나의 뒷모습에서 이발소의 분가루 같은 화장품 냄새가 났습니다.
누나가 사랑이란 것을 하고 있을까?
저는 누나가 허겁지겁 어질러놓은 방을 정리해 가며 누나와 책방 아들과의 사랑을 산수 문제처럼 풀어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렇지만 답은 쉽사리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움, 진달래꽃, 내 님 계시는 곳, 행복, 따스한 님의 손길 .
방을 청소하다가 들춰본 누나의 일기장에는 열 장이 넘도록 이런 단어들만 계속되었습니다. 예쁘게 단장된 글씨체들이 밤마다 흐느끼는 누나의 울음처럼 가녀리게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혹시 경찰서에 가서도 울음을 참지 못해 경찰들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이나 아닌지. 일기장의 애틋한 문구들이 더욱 가슴을 저리게 했습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춘희}의 주인공 종말에 누나의 얼굴이 그림엽서처럼 겹쳐졌습니다.
"조금 있으면 그가 나온대. 널 보고 싶어하더라."
이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저녁 열 시만 되면 얕게 코까지 골아가며 잠을 자는 누나의 밝은 목소리였습니다.
"그 동안 책을 바꿔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더라."
야근하고 돌아온 날에도 더 이상 쪽문으로 빠져나가지 않는 누나의 손엔 털실이 감겨 있습니다.
"뭘 짜는 거야?"
누나의 빠른 손놀림 너머로 털실이 출렁거리며 춤을 추었습니다.
"조끼."
누나는 즐거운 듯 콧노래까지 불렀습니다. 저는 누나가 짠 조끼를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책방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앳돼 보이는 그의 옆구리에 누나가 바싹 붙어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누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그윽이 빛납니다.
그 즈음 시장 안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누나가 책방 아들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소문은 도둑고양이처럼 확연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건드리면 튀어나오는 놈의 발톱처럼 우리 가족을 들쑤셔 놓았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길길이 날뛰셨습니다. 그래도 당사자인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끙끙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좀처럼 수상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참을 만큼 참았으니 어디, 네 입으로 한 번 말해보라며 누나를 다그쳤습니다. 그래도 누나는 말 한 마디 속시원히 하질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손에서 머리칼이 한 움큼 쥐어져도 누나는 서럽게 울어댈 뿐, 소문에 대해서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소문은 여름철 한 때의 소나기처럼 금세 사라졌습니다.
"그를 하루라도 못 보면 미칠 것 같아."
누나는 뜨개질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머리를 손등으로 쓸어넘겼습니다. 누나의 이마가 푸르게 빛났습니다.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거야.
뜨개질을 다시 시작하는 누나의 손에서 털실이 뛰어다녔습니다.
누나가 다 뜬 조끼를 그에게 입혀 주는 날이 오면 다시는 누나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멀리 ."
누나가 뜨개바늘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습니다.
방패를 들고 빨간 깃발을 휘날리며 말을 달리는 그의 꽁무니에 누나가 바짝 붙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시장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그들을 뒤쫓습니다. 어머니는 주저앉아서 땅을 치며 울고 있고, 경찰관들이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거야."
그러나 한편 곰곰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그토록 반대할 이유가 확실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무슨 죄라도 지었단 말인가요? 잘은 알 수 없지만 그가 하는 일이 크나큰 범죄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저도 그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어 보아야 할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우리 누나를 좋아하느냐고요.
학기가 바뀌고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 초봄입니다. 방학숙제를 들고 시골로 내려갔던 또래의 아이들이 시장 앞 공터에 얼굴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초봄의 짧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매서운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새로운 놀이를 열심히 구상하고 있는 듯 싶었습니다. 그 중, 저와 같은 학년인 통닭집 아들, 닭살이 오들오들 떨어가며 어설프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조무래기들이 신기한 듯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오늘밤 아홉 시, 동장집 녀석들과 붙기로 돼 있다. 놈들이 선거용 볼펜을 우리가 훔쳤다고 했다. 모두들 준비하고 나와라."
저하고는 같은 학년이면서도 나이가 세 살이나 위인 닭살이 힘있게 말했습니다.
조무래기들도 힘껏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도 하겠다."
그들 주위를 맴돌던 제가 불쑥 뛰어들면서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샌님이란 별명으로 불리고 있던 저를, 닭살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저도 이 기회에 어떤 힘을, 용기를 갖고 싶었습니다.
"샌님, 넌 안 된다."
닭살이 피우다 만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서툴게 퉁기며 말했습니다.
"깡도 없는 놈이 ."
두 주먹을 움켜쥐는 조무래기들을 보며 닭살이 카악 가래를 돋워냈습니다.
"나도 아홉 시에 나가겠다. 장소를 말해 줘라, 닭살."
저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 좋다. 장소는 이발소 앞, 쓰레기 하치장이다."
닭살은 무언가 씁쓸한 듯 자꾸 입맛을 다셨습니다.
그날 저녁 아홉 시, 쓰레기 하치장에는 장작불을 피워놓고 깡소주를 마시고 있는 청소부들만 보였습니다. 하치장 건너편에는 이발소의 표시간판이 탈탈거리며 돌고 있었고, 이발소 안엔 김이 뿌옇게 서린 창 너머로 어른들이 두런두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게 소곤거리다가도 큰 소리로 탁자를 쳐가며 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누구를 찍어야 한다느니, 누구는 어떠해서 찍어선 안 된다느니 하는, 투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동장집 녀석들이 약속을 어겼다."
어느새 왔는지 닭살이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허공을 가르며 말했습니다.
닭살은 권투선수처럼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어둠 속으로 계속해서 손을 뻗었습니다. 닭살의 입에서 바람소리가 쉭쉭 하고 새어나왔습니다.
"그럼 걔들도 이제, 네 부하가 되겠구나."
닭살의 날렵한 주먹 짓을 보며 저는 맥없이 물었습니다.
"아니다. 놈들이 시일을 연장했다. 선거일, 그러니까 돌아오는 일요일 열 시로 정했다."
닭살이 허공으로 주먹질을 하며 뛰어갔습니다. 어둠 속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튀어나와 닭살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저는 허전해진 마음으로 쓰레기 하치장을 벗어나 책방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거리 구석구석에서 찬바람이 조그만 회오리로 일고 신문지 조각들이 실 풀린 연처럼 날렸습니다. 여기저기 연탄재가 빙판 위에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시장 담벼락에는 국회의원 후보의 사진들이 찢겨져 바람에 풀럭이고 있고, 어디에선가 볼륨을 한껏 올린 라디오 뉴스에선 선거일을 며칠 앞둔 후보들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책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들어서려니까 내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책방 옆을 서성거리다가 누군가 책방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얼른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누나였습니다. 목도리를 머리에 감싸고 문을 나서는 누나 뒤에 책방 아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따라나왔습니다.
"조심해서 가."
책방 아들이 문설주에 기대어 말했습니다.
"안녕히 ."
누나는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흑,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어두운 바람 속으로 뛰어갔습니다. 책방 아들이 고개를 떨구고 안으로 힘없이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성큼성큼 걸어가 책방 문을 세차게 열었습니다. 그가 놀랐다는 듯이 저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이내 쓸쓸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너 왔구나."
저는 누나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에게 따져볼 심산이었습니다.
"널, 보고 싶었단다."
씁쓰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그의 손을 건성으로 잡으며 얼굴을 들어 그를 쏘아보았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그래, 그 동안 책은 많이 보았니? 내가 없어서 바꿔보지는 못했겠구나. 지난번에 빌려간 책이 뭐지? 이번엔 무슨 책을 빌려줄까? 그렇게 섰지만 말고 이리 앉아 잠깐 기다려."
그는 수선을 떨어가며 내실에 들어가 책을 한 아름 안고 왔습니다.
"자, 이번엔 이 책을 빌려줄게."
그는 내온 책들 틈에서 사진첩 같은 것을 꺼내 몇 장 넘겨 보이더니 이내 덮어 버렸습니다. 언뜻 본 책갈피엔 사진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서양 남자와 여자가 옷을 모두 벗고 우는 듯, 웃는 듯, 모호한 표정을 짓는 사진이었습니다.
"이 책은 불란서 유명한 시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시집이란다."
그는 야릇한 사진들로 가득한 책을 손에 쥐고 빙그르 돌다가 갑자기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머리를 무릎에 박고 한참동안 일어서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슬며시 고개를 들고는 충혈된 눈을 두리번거리기도 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 연속극의 주인공이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그를 보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저는 끝내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누나를 좋아하냐고요.
5.
부산스럽던 시장도, 하늘을 쩡쩡 울리던 유세장도 정작 선거일이 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았습니다. 공동 유세장으로 쓰이던 학교의 교실에는 투표소가 마련돼 있어 사람들이 줄을 맞춰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맑게 갠 하늘에서 투명한 햇빛이 운동장에 내리꽂히고 있었습니다. 투표소를 구경하고 싶어 아버지를 따라나선 저는 교실 입구에서 통닭집 아저씨와 닭살을 보았습니다. 통닭집 아저씨는 교실을 들어서는 사람에게 마다 주민등록증을 받아 꼼꼼히 들여다본 다음 투표용지를 건네주었고, 그 곁에서 닭살이 침을 튀겨가며 인명부를 찾아주고 있었습니다.
"보여 줄 게 있다."
사람들 틈에서 저를 발견해 낸 닭살이 복도 끝으로 저를 끌고갔습니다.
"어떤 사람이 흘리고 간 것을 주웠다."
닭살의 손에서 찰칵하는 소리가 나더니 번쩍, 하고 예리한 쇠붙이가 튀어나왔습니다.
"칼이다."
흠칫 놀라는 제게 닭살은 보란 듯이 교실문을 꾹꾹 찔렀습니다. 번쩍번쩍, 칼에서 반사되는 빛이 따가웠습니다.
"이제 동장집 녀석들은 모두 겁먹고 도망가겠지."
눈부셔하는 저를 보고 닭살은 실룩실룩 웃으며 날을 접었습니다. 날이 접힌 칼이 닭살의 손에 착 달라붙었습니다.
그날 저녁, 투표를 마친 어른들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개표현황을 보며 한 마디씩 떠들어댔고, 닭살과 저는 조무래기들을 몰고 쓰레기 하치장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찢겨진 국회의원 후보의 사진이 바람에 날려왔습니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놈들이 와 있을 거다."
쓰레기 하치장에 다다랐을 즈음, 손가락을 가죽장갑에 집어넣으며 닭살이 말했습니다. 그때, 별안간 하치장 맞은편에 있는 이발소에서 함성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누군가 당선이 확정된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동장집 녀석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둠 저쪽에서 양복을 입은 대여섯 명의 커다란 남자들이 야위어 보이는 한 남자를 질질 끌고 와 소리 없이 구타하고 있었습니다. 야윈 남자의 몸에서 둔탁한 소리만 날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숨을 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야윈 남자는 그들에게 힘겹게 대항하는 듯 보였지만 몇 차례 비명을 지르고는 쓰러졌습니다. 한 번 쓰러진 남자는 다시 일어서질 못했습니다. 쓰러진 남자를 타 넘으며 양복 입은 남자들이 어둠 속으로 빠르게 빠져들어갔습니다.
"가 보자."
이를 부딪히며 떨고 있는 우리에게 닭살이 말하고는, 성냥불을 켜서 쓰러진 남자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모두 빨리 와 봐라."
닭살이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쿵쿵 울리는 서로의 가슴 뛰는 소리를 들으며 닭살에게 달려갔습니다.
"칼에 맞았다."
누군가 짧게 말했습니다. 파르르 떠는 성냥 불빛 아래 사내가 피거품을 물고 엎어져 있었습니다. 옆구리에 칼을 맞았는지 피가 허리춤에 흥건히 고여 있었습니다. 성냥 불빛을 받아 사내의 옆구리에 박힌 칼 손잡이가 빛을 냈습니다. 빛이 건너편 이발소의 유리문에 반짝, 하고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곧 사그라져버렸습니다.
"움직이질 않아."
사내의 콧등에 손을 가져가던 닭살이 소스라쳐 말했습니다.
"도망이다."
슬금슬금 뒷걸음치던 닭살이 쏜살같이 달아남과 동시에 우리 모두는 아악, 비명을 지르며 이발소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뛰면서 제 뒤통수에 매달려 있는 사내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떨어버리려고 머리를 마구 흔들었고, 소매 끝에 달라붙은 사내의 손수건을 떼어내려고 손목을 자꾸 털었습니다. 느닷없이 이발소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하치장 쪽으로 쏟아져 나와 메아리쳤습니다.
흑백 텔레비전이나 컬러 텔레비전에서나 드라마에서의 첫사랑은 90%는 이뤄지지 않더군요. 누님도 그렇고요. 이듬해, 유신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붙이던 날, 누님은 반대 란에 도장을 찍었답니다. 그리고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보란 듯이 반대표를 펼쳐보였다나요. 동장이 누님의 행동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쳤어도, 그래서 아버지한테 꾸중을 들었어도, 누님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지만, 국민투표는 91.5% 찬성으로 결판났지요. 첫사랑의 종국처럼 말입니다.
누님은 오십 줄을 넘기도록 아직까지 독신입니다. 시골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뜨개질로 생활하십니다. 저도 이제 마흔이 가까워옵니다. 제 아이가 초등학교 신입생입니다. 제 아이는 15층 아파트 허공에서 종일 컴퓨터 공간에서만 시간을 보냅니다. 아이는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남북 정상 회담이 이뤄지고 이산 가족이 만나 울며불며 통곡을 하는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런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지 않으려 합니다. 저도 우리 지역 지방자치단체장이 누군지도, 국회의원이 누구이고, 여당과 야당 의석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다. 조금 전에 머리 감은 샴푸거품 처럼 부풀어졌다가 스러지는 생활, 그 생활을 위해 한 달 한 달 벌이에만 관심 있습니다.
저기, 장 프랑소아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 아래 씌인 푸시킨의 시는 아직도 선명하군요.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는 것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워지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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