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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단편소설/섹스를 위한 변명/이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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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섹스를 위한 변명
이일경
1997년 '상상' 봄호에 '시간의 풍요' 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그를 위해 새로운 것을 준비해 두고 싶다. 투명한 고무로 만들어진 누우렇게 미끌거리는 제품은 슬며시 밀쳐두고 오돌토돌한 무늬가 들어있거나 분홍색 연두색 등의 밝고 현란한 것들을 마련해 그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것들이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으나 그를 위해 내가 하고픈 방식대로 무어든 시도해 보고 싶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늦잠의 흔적이 비추이고 있다. 푸석하게 구겨진 이불과 침대 머리맡에 놓인 리모콘과 방바닥의 비디오 테입과 빈 맥주캔이 값어치 없는 정물화처럼 빛 속에 나른하게 흩어져 있다.
휴일의 늦은 아침 나는 행복하지 않다. 치직거리는 비디오 화면에 머리 속을 찔리며 마지막 방울까지 입 속에 털어놓고 젖어드는 술기운에 잠들었을 때처럼 나는 여전히 혼자이기 때문이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의 물방울이 벌거벗은 몸으로 튀어올랐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물줄기는 몸의 선을 따라 타일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차가운 물기운에 남아있던 잠이 달아나면서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오늘 그를 위해 외출할 것이다. 별다른 의미 없이 방바닥을 뒹굴던 평소의 휴일과 달리 오늘은 목적이 뚜렷한 하루의 일과를 갖고 있다. 그를 위해 쇼핑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남은 더위가 여름의 뒷덜미를 끈적하게 물고 늘어지던 보름 전의 어느 밤이었다.
"콘돔 주세요!"
유리 문을 밀고 들어온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말투는 어색하지 않았지만 다소 주춤거리는 듯한 태도에는 타인의 마음을 잡아끄는 수줍음이 배어있었다.
세 개의 콘돔이 들어있는 작은 갑을 카운터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가 지폐 한 장을 내려놓고 콘돔갑을 집어들었다. 거스름돈이 그의 손으로 넘겨지자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콘돔을 사가는 남자들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다. 약국에서는 아스피린과 드링크제와 비타민과 바퀴벌레약을 팔았다. 식염수도 팔고 생리대도 팔았다. 여자들은 경구용 피임약을 사고 남자들은 콘돔을 샀다. 대학생도 콘돔을 사고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지 않은 아저씨도 콘돔을 샀다. 길게 잡아도 열여섯살이 넘어보이지 않는 남학생이 '콘돔 주세요' 하고 돈을 내밀었고 도로변에 차를 정차시킨 젊은 여자가 콘돔을 사러 들어오기도 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시선만을 내게 주었다. 불공정 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들은 내 기억에서 비껴 서 있길 바랬고 나도 그들에게 기억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예외였다. 보름 전의 그 날 이후로 매일 비슷한 시간에 콘돔을 사러 왔기 때문이다.
연속으로 며칠째 그가 나타났을 때 그에게 열 개 짜리 한 갑을 내주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콘돔갑을 받아들었다. 나는 '당분간은 그를 볼 수 없겠군!' 하며 유리문 바깥의 어둠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콘돔 주세요!"
단정적인 기대를 자르듯 다음 날 그가 다시금 유리문을 밀었다. 의외의 출현에 둥그렇게 열리는 눈동자를 수습하며 또 한번 열 개 짜리 한 갑을 내밀었다. 그는 전 날과 같은 가격을 지불하고 몸을 돌렸다.
열개 짜리를 그에게 건네준 이유의 절반은 그의 발걸음을 아껴주기 위한 배려였다. 나머지 절반은 열개짜리를 가져간 그가 며칠 만에 얼굴을 다시 보여줄까 하는 의도적인 장난이었다. 절반짜리 유치한 수작을 간파한 듯 그는 다음 날 똑같은 방식으로 나타났다. 만만치 않은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연달아 사흘째 열 개짜리 콘돔을 내준 이후로 나의 머릿속에는 숯검댕이처럼 불순한 상상이 피어올랐다.
그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는 그에게 마음의 전부를 주지 않고 몸만 허락한다. 굴곡진 육체만큼은 너의 품 안에서 닳아버려도 좋다고 그에게 던져버린다.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자는 여자의 몸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는 육체의 통로를 통해 그녀의 심장으로 다가가려 몸부림치지만 그녀의 정신적 힘은 완강하다. 하룻밤 세번의 관계에도 그 이상의 접촉에도 그녀는 굳은 돌처럼 돌아눕는다. 그의 영혼은 말 없는 집착으로 피폐해지고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는 육체는 허수아비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그는 키가 작았다. 아주 작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른 몸집과 기운 없어 보이는 발걸음 때문에 몸의 기운이 바닥을 향해 무너지는 것 같아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눈높이보다 더 작아보였다. 얼굴에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표정이 어려 있었다. 긴팔 체크무늬 셔츠와 연한 빛깔의 면바지차림은 그를 학생처럼 보이게도 하지만 다소 우울해 보이는 뺨과 투명한 상처의 빛이 고여있는 눈동자는 그의 서투른 외양을 내면의 깊이로 보완해 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변함없는 얼굴로 콘돔을 사가는 걸 보면 그는 결코 어린 나이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축적된 세월 만큼 얼굴에 두께를 갖기에 그가 만약 스물몇 살의 나이였다면 지속적으로 콘돔을 사가면서 내면의 비밀 한 귀퉁이쯤은 들킬 수 있게 한번쯤 낯을 붉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했다. 나도 역시 덤덤한 척 했다. 아마도 우리는 비슷한 연배인 듯 싶었다. 그는 서른살 쯤 된 것 같다.
열 개 짜리를 연달아 다섯 번 팔고 난 후 다시금 두 개나 세개 짜리를 내놓았다. 그와의 적정한 거래로 되돌아선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그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면 나는 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가 콘돔갑을 집어들었다. 그가 '콘돔 주세요' 라고 요구하기 전에 콘돔을 내준 적은 없었다. 구매자의 요구도 들어보지 않고 선수를 치는 행위는 의약품을 제공하는 이의 본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고 한편으로는 내가 먼저 익숙하게 콘돔을 내밀었을 때 그가 두통약이나 소화제를 사러 왔다고 딴청을 피우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변두리 동네의 약국일은 지루했다. 낯익은 이웃들 중 변비나 소화불량의 고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대개 찡그린 얼굴로 자신들에게 지속적으로 필요한 약품을 요구했다. 술기운에 몰려 두통을 호소하는 이들은 카운터 탁자 너머로 구토물을 욕지기처럼 쏟아낼까 불안해 보였다. 열너댓살의 소녀들은 턱을 수평으로 들고 임신 진단 시약을 요구했다. 진단약의 가격을 확인한 후에는 갑자기 울 듯한 얼굴이 되어 얄팍한 지갑을 털어냈다. 어느 아기 엄마는 열이 올라 온몸이 붉어진 아기를 두꺼운 포대기로 동여매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해열 시럽을 요구했다. 대낮의 무료한 시간을 견디지 못해 동네를 배회하는 할아버지는 운지천과 영지천과 영비천의 차이를 궁금해 하고 약국과 이웃한 부동산 아저씨는 파스가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물으러 나타났다. 그들은 몸의 고통과 정신의 상처를 호소하고 약품으로 해결방법을 구하거나 심심풀이 말상대를 원했기에 그들과 대면하며 하루를 보내는 일과는 짜증과 피곤의 언덕을 넘어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오직 콘돔을 구하러 오는 이만이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콘돔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내가 일 터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은행의 자동화 코너에서 엄마의 통장으로 얼마간의 돈을 넘겨주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는 통화 내용이 기억 나 전산망을 통해 여비를 보태주었다. 지폐의 일부가 다른 통장으로 건너 뛰었지만 내 통장의 잔고는 여전히 길다란 숫자를 과시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가 시립병원 조제실에 근무하던 시절에는 저축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다. 아버지의 사업은 국가의 경제 위기상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변함없이 잘 짜여진 수지타산을 맞추고 있었기에 나는 차 한 대를 구입해 여행을 다니고 서핑 보트를 타고 강물 위를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소도시에서의 목적 없는 생활은 오래된 먼지처럼 단조롭고 권태로왔다. 부모님의 반대를 잡초처럼 뿌리치고 서울로 다시 올라온 나는 외숙부가 구해 준 상가 건물에 작은 약국을 열었다. 개업 후 2년 반 동안 꾸준히 손님이 들어 수입은 은행 금고처럼 쌓였지만 벌어들이는 돈을 소모할 시간의 여유를 갖기는 힘들었다. 약국은 아침 열시에 문을 열고 밤 열시에 닫았다. 두 주에 한번씩 정기 휴일을 맞이하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모자란 잠을 보충하거나 오랜 친구를 만나 영화 한편을 보고 저녁식사를 했다.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을 만한 취미를 갖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는 힘들었다. 일상은 나날이 건조해졌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비상구를 찾아 나설만큼 낯선 세계에 호기심이 일지도 않았다. 잡지를 제외하고는 책도 몇 권 읽지 않았다. 장 보러 나갈 시간이 부족해 아침식사는 우유나 쥬스 한잔으로 해결하고 점심과 저녁은 인근의 식당에서 배달시켜 먹었다. 가끔 친구가 시간을 내어 약국에 들르면 피자를 주문했다. 엄마의 성화로 두 번 맞선을 보기는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호텔 커피숍에 나타난 남자 중 한 명은 너무 계산적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내가 찻잔을 비우기도 전에 스포츠 센터의 주말 강습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예기치 못한 태도는 내게 피해의식을 입혔고 그 미묘한 실패를 계기로 그동안 팽개쳐 두었던 자의식이 비 그친 아침의 푸른 풀줄기처럼 살아났다. 결혼을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까 두려워 나이에 쫓겨 사는 이들과의 만남은 젊음의 소모전에 불과했다. 나는 외로움이라는 어둠의 그림자에 맞서기 위해 누군가와 교류를 하고 싶었고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이어지길 바랬지 결혼에 쫓겨 남자들과 결합하고 싶지는 않았다. 본질적으로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의 교류는 불가능했다. 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직업으로 일상을 버텨가고 있지만 그 이상의 속물은 되고 싶지 않았기에 미련 없이 그들과 결별했다.
은행의 모퉁이를 돌아 전철역의 입구로 들어갔다. 15분 동안 지하굴을 달려 계단을 올라서자 도심의 차량들이 길거리에 다닥다닥 밀리고 있었다. 도로의 양편으로는 대규모의 도매 약국들이 직사각형의 커다란 간판을 이마에 붙이고 있었다. 약국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어깨에 가로로 엇갈려진 가방이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세 군데의 약국을 돌며 두개 짜리, 세개 짜리, 열개 짜리, 열두개씩 세 세트가 들어있는 한달용을 각 회사별로 한 갑씩 샀다. 기본적인 물품은 제약회사에 전화 한 통이면 구입할 수 있지만 도매상에 들르면 보다 다양한 제품을 고를 수 있었다. 더우기 전문 성인용품점에는 기발한 성적 상상력의 세계가 오색 장난감처럼 펼쳐져 있었다. 도매 약국 뒷편에 있는 비좁은 전문점에서 빗살무늬와 바둑판 무늬의 콘돔을 구입했다. 포장을 뜯기 전에는 모양을 짐작할 수 없는 제품도 몇 갑 골랐다. 그것들은 검은빛의 불투명 비닐봉지에 쌓여 내게로 건네졌다.
"오늘 뭐했어?"
두 주 건너 한번씩 찾아오는 정기 휴일을 기억하고 있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쇼핑' 이라고 대꾸하자 '무얼 샀느냐?' 고 물었다.
"콘돔!"
"뭐?"
친구가 되물었다. 분명히 알아들었을 텐데 다시 한 번 확인하려 드는 것 같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끊어진 대화의 연결고리를 친구가 먼저 이어갔다.
"그거 약국 진열대에 있는거 아냐?"
"약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걸로 샀어!"
"뭐에 쓰려고? 설마…"
"설마… 뭐?"
"요즘 그게 필요한 상황이야?"
"아니란거 알잖아!"
친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대학시절에 어느 선배한테 들었다는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3학년 때이던가 졸업한 선배를 만난 적이 있었어. 그녀가 근무하는 무역회사는 라텍스 제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는데 주요 수출품이 수술용 고무장갑과 콘돔이라고 하더라구. 고무는 말레이지아에서 많이 나지만 고무품 제조는 우리나라 기술이 좋다면서…… 그녀는 바이어들을 상대로 수출품을 설명하면서 제품이 얼마나 질긴지 양손으로 주욱 늘여보기도 하고 주전자의 물을 따라 물이 새는지 안새는지 시범을 보여주기도 한댔어. 스물 댓살 밖에 안된 처녀가 커피숍 한복판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연신 콘돔 콘돔 하면서 콘돔의 사이즈는 세 종류인데 작은 것은 대개 동남아로 중간 크기의 것은 일본이나 중국, 유럽 등지로 가장 큰 사이즈는 주로 아랍권으로 팔려나간다고 알려주는 거야. 난 아직 학생이었던 때라 누가 엿듣기라도 할세라 얼굴이 화끈거리는데도 그녀의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싶지는 않더라구. 그래서 남몰래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얼마나 열심히 귀 기울였는지 몰라!"
전화선처럼 길게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서로의 심심한 밤과 어둠을 위로해 주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토막낸 이야기처럼 웃음이 터지지 않는 우스개 소리와 자극에 면역된 뉴스기사를 번갈아 한번씩 언급하고 전화를 끊었다. 창 밖의 밤은 여전히 어두운 옷자락을 드리우고 있었다. 맞은편 신축 건물인 다세대 주택의 이층 창문에는 병아리색 커튼이 허리를 양 옆으로 잘룩하게 묶고 실내의 일부를 드러내 보였다. 컴퓨터가 놓인 책상…… 벽에 붙어있는 국내 가수의 대형 사진…… 인형을 껴안고 잠들기에 적당한 작은 침대…… 불빛 속에 잠겨있는 방에는 방주인의 움직임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창 가로 다가간 나는 타인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엿보는 위험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 창문의 가장자리에 손을 대고 블라인드의 밀도를 촘촘하게 잡아당겼다.
유리문 가득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었다.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거리는 메마르게 굳어있고 계절을 거스르는 더위 속을 걷는 행인은 드물었다. 몇일 전인가 읽었던 활자들이 부서지는 먼지처럼 기억의 표면으로 피어올랐다. 이·금·빛·의·9·월·타·인·이·내·게·품·고·있·는·모·든·환·상·을·털·어·내·버·린·다·면·나·는·도·대·체·누·구·란·말·인·가…… 누구란 말인가……
'존재' 라는 단어에 막혀 자신을 응시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기억의 부채살이 심장과 폐부를 저릿하게 만든다. 머릿속으로는 구슬처럼 까르르 넘쳐나던 일곱살 무렵의 웃음 소리와 화해할 수 없었던 사춘기의 우울증과 마주 보고 술 마신 후 토해버린 첫사랑의 편지들과 증명사진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맞선 상대자들의 신상명세서가 타임머신의 속도로 뒤엉켜 들었다. 신화 속의 죄인이 되어 존재의 불멸을 견디는 이들은 반복되는 노동과 고문으로 되돌이표 같은 시간의 힘에 맞서 싸우는 것이리라. 바위를 굴리고 밑바닥 없는 독에 물을 따르고 심장을 파먹히며 험난하고도 영광스러웠던 기억의 그물을 뜯어내고 있으리라. 나는 존재의 순간을 증명하는 의식을 억누르고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을 잊고 무거운 원죄처럼 타고난 삶의 고단함을 걷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만 타인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존재하고 있는 이로서 존재감을 저버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깍고 종교에 귀의한다해도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산사에 갇혀 목탁을 두드린다고 삶의 몫을 요구하는 세상사의 인과관계에서 자유롭게 풀려날 수는 없었다. 길 가던 타인들은 나의 손님이 되어 신경 안정제를 찾고 다이어트 약품을 요구하고 관절염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들로 인해 현실을 자각당하면 지폐 한 장에 유혹 당한 거리의 여자처럼 거짓 친절의 진통제를 집어들고 그들의 아픈 부위를 달래주어야 했다.
"콘돔 주세요!"
그가 나타나자 당황스러웠다. 그가 올 때를 기다리며 사람의 그림자가 비칠 때마다 유리문 밖으로 시선을 던지곤 하다가 잉게보르크 라는 이름의 독일 여자 때문에 잠시 다른 생각의 굴로 빠져들고 있을 때 그가 불쑥 내 앞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기다리는 것들은 기다리고 있는 그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눈을 감거나 기다림을 포기하고 낡은 책을 뒤적거릴 때 불현듯 존재를 알려왔다. 그도 그랬다. 그가 오면 노란 상자 속에 들어있는 형광색 콘돔을 내주어야지 하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는 바람에 손에 닫는대로 늘상 그에게 건네주던 평범한 세 개 짜리를 집어들고 말았다. 그의 몸 한가운데서 야광 콘돔이 번쩍거릴 수 있는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어졌고 그는 말없이 내게 등을 보였다.
이제 그를 기다리는 일은 하나의 습관, 설레임이라는 감미료가 들어간 달콤한 습관이 되었다. 그가 콘돔을 요구하면 나는 준비해 둔 콘돔을 팔고 그는 떠났다. 그는 이미 형광빛 연두색 콘돔과 삐에로 고깔 모양의 빨간 콘돔을 받아갔다. 정교한 아라베스크 무늬의, 재질이 비닐보다 얇고 질겨서 보통 콘돔의 여섯 배가 되는 값비싼 콘돔도 그의 소유로 넘어갔다. 아라베스크 무늬에 그가 지불한 가격은 보통 콘돔의 것과 같았지만 불만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어 좋았다. 콘돔은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그는 오직 콘돔만을 요구했고 나는 그에게 최상의 것을 지급하고 싶었다. 비용은 충분했다. 한두번 최고급품을 저가로 판매하긴 했지만 그가 한달 동안 구입한 양이 있기에 손해는 아니었다. 업종을 불문하고 판매대에 서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손익계산서를 작성할 줄 안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책 몇 권의 지식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이들의 계산서는 더욱 치밀하고 빈틈이 없다. 나는 때때로 그런 내 모습이 싫지만 그 정도의 능력이나마 잃지 않고 살기위해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그가 가버린 후 의자에 주저앉았다. 의자에서 털썩 한숨 소리가 났다. 기다림의 시간은 너무 짧게 마무리 되었고 남아있는 하루의 일과는 석양처럼 긴 호흡을 늘이고 있었다. 다림질이 덜 된 셔츠와 조금 무거워보이는 가방을 든 남자는 약국을 지나쳐 주택가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고 나는 유리상자에 갇혀 사선처럼 움직이는 거리를 지켜보았다.
그는 학생일 수도 있고 실업자일 수도 있었다. 무수한 가능성 중에 그 두 가지가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사회 조직에 편입되는 과정이 불운으로 점철되어 국가가 제공하는 의자 하나를 차지해 보기 위해 공무원 시험이나 자격증 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는 오후 늦게나 저녁 여덟시 이후에 약국에 들렀다. 약국은 전철역이 있는 도로에서 주택가로 향하는 길목의 중간에 있었다. 그는 학교나 도서관에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콘돔을 구하러 들르는 것 같았다. 그의 손에는 가방이 들려져 있을 때도 있고 아닐 적도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나의 눈빛과 마주치기를 꺼리는 듯 주춤거렸으나 그의 관심은 내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육체의 느낌으로 전달되어 왔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나 혼자만의 정신적 유희에 불과한 것이었다. 콘돔을 매개로 우연히 눈에 띄인 남자를 상대로 다섯살 먹은 여자애가 인형놀이를 하듯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정해놓고 '이제는 불을 꺼야지' 하며 관념의 유희를 펼치고 있었다. 현실이 내게 행복감을 전해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기에 어린애처럼 일인극을 벌이고 있었다. 콘돔이라는 성인의 장난감이 상상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다.
옛날 옛적에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었다. 남자는 나무꾼이고 여자는 공주였다. 두 사람은 매일 밤 숲 속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 사이에는 콘돔이 없었기에 공주는 임신을 하고 말았다. 아버지인 대왕마마는 군주의 법을 어기고 신분을 초월하는 관계를 맺은 두 남녀를 나라 밖으로 쫓아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고생 좀 했다. 공주는 남의 나라 숲 속에서 아기를 낳느라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랐다가 살아났다. 나무꾼은 공주와 아기를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의 나라 숲 속에 있는 무수한 나무들을 불법으로 베어내야 했다.
이젠 참을 수가 없다. 그 많은 콘돔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궁금증을 가눌 길이 없어진 것이다. 정기 휴일 두 번을 빼놓고도 그는 서른 번이 넘게 콘돔을 사갔다. 갯수로 따지면 100개가 넘었다. 도대체 그 여자는 생리도 하지 않는단 말인가.
매일 보는 남자와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혹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여자를 향해 솟구쳐 오르는 마음을 누르고 그를 기다렸다. 그가 나타나면 물어보려고 하나의 질문을 이빨 사이에 꽉 가두어 놓았다. 며칠 전부터 벼르고 별러온 물음을 탄산수처럼 그에게 뿜어낼 작정이었다. 당신은 사는게 행복하냐고……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시간의 속도감을 더하기 위해 부채질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시간의 존재는 광대무변의 우주공간처럼 무한정이고 그것들은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 게 하루 스물네시간이라는 똑같은 시혜를 베풀어 주었다. 시간에 쫓기는 순간이 되면 그것들은 투명한 귀신처럼 등짝으로 달라붙지만 막연한 기다림의 순간에는 넉넉한 바닷물처럼 한 존재를 이리 저리 흔들어 버리곤 했다. 나는 시간의 품에 안겨 부드러운 유영으로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거품처럼 허허롭게 떠밀리며…… 엿가락처럼 끈끈하고 나른한 집착으로……
"콘돔 있어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잡지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로 졸고 있던지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볍게 훔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운터 앞에 허리를 펴자 낯선 남자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키가 크고 몸집이 우락부락한 젊은 남자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지 안면 근육이 튀어나올 듯 얼굴 전체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나는 열두개 짜리 한 갑을 카운터 탁자에 올려놓았다.
"몇 갑 더 줘요!"
툴툴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인채 빙긋이 웃고 말았다. 그는 수줍음을 타고 있었다. 신혼의 신랑인 듯 쑥스러움이 온 몸과 목소리에서 열꽃처럼 터져나오고 있었다.
남자에게 다섯갑의 콘돔을 내주고 의자에 앉았다. 괜스런 웃음이 실자락처럼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나를 미소 짓게 만드는 남자들…… 그들은 모두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이들이었다.
열시가 가까와 약국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는 오지 않고 있었다. 이제 곧 그를 볼 수 있겠지 하며 준비해 둔 질문을 입 속에 묶어두고 몇 시간을 보냈는데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홉시가 넘으면서부터는 곤란한 질문 따위는 모두 가슴 속으로 삼켜 버릴 터이니 얼굴만은 꼭 보여주었으면 하고 바랬건만 그는 오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건지 더 이상 콘돔을 살 일이 없어졌는지 그녀가 정말 생리를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지나가는 이의 기척이 거리에 느껴질 때마다 눈길로 어둠 속을 더듬었지만 그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늘상 찾아주던 사람과의 만남이 무산되고 있었다. 그가 내게로 오지 않음으로 인해 나는 그를 볼 수 없었다. 하루의 의미가 공중으로 흩어지고 나는 의자에 놓인 껍데기처럼 쓸쓸해 졌다.
닷새가 지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림의 일과로 하루 해를 보내고 약국의 셔터를 내릴 때면 가슴이 지친 풍선처럼 꺼져들었다. 그가 찾아주지 않는 한 그와의 만남에 다른 통로는 없었다. 우연으로 마주치거나 그가 다시금 약국문을 열고 발걸음을 들이밀기만 기다려야 했다.
전화도 없이 불쑥 친구가 찾아왔다. 그녀를 위해 카운터 탁자를 들어올리자 털어놓고 싶은 비밀이라도 있는 듯한 얼굴이 슬그머니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에게 조제실 옆의 빈 의자를 권하고 오렌지 쥬스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작은 유리병을 받아들며 그녀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서관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첫장을 읽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
"무슨 책?"
"논어!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유붕이 자원방래면 불역락호아"
"새삼스럽기는……"
"근데 책장의 모서리에 간단한 해석이 나와있는거야. 익히 알고 있는 구절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읽고 나니까 느낌이 조금 다르더라구!"
"뭐라고 나왔는데?"
"불역열호의 열은 혼자서 잦아드는 기쁨이고, 락호아의 락은 더불어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그게 바로 열락이로군!"
우리는 잠시 웃었다. 오렌지 빛깔의 쥬스병이 반쯤 비워지는 동안 웃음의 여운이 분산되고 대화는 멈추었다. 모처럼만에 찾아온 친구와 무르익은 가을빛이 흘러내리는 호숫가로 산책을 가고 싶었다. 가게문을 철커덕 내려닫고 '금일휴업' 이라는 플라스틱 팻말을 내건 후 작은 챙이 둘러친 모자를 쓰고 택시를 잡아타고 싶었다. 인스턴트 피자를 시켜먹는 대신 상추쌈에 바베큐를 먹으며 호숫가 정경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친구는 한달에 두어번 찾아와 일탈의 충동을 부추겼지만 나는 한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예고도 없이 가게문을 닫게되면 직업인으로서의 신뢰도는 동네의 경사도를 따라 조금씩 미끄러지게 되었다. 아침 나절 열려진 문을 본 누군가가 점심식사 후 복통을 느끼고 약국을 찾아왔을 때 그는 철제줄이 차르르 내려진 셔터 앞에서 배신감이 더해진 고통을 느낄 것이다. 매상이 좋지않다고 투덜거리는 길 건너편의 옷가게 여자는 '먹고 살만하다 이거지!' 하며 동네 여자들과 나의 간극을 심화시키는 심심풀이 험담을 이웃들에게 늘어놓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가게를 닫고 휴식을 취하는 일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언젠가 한 번 엄마가 대학병원 진료를 받기위해 서울에 왔을 때 엄마와 동행하느라 예고된 휴일이 아닌데도 약국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하루의 영업을 포기한 나는 종일 맘이 편치 못했다. 대학병원의 접수실 입구에서 세월에 절은 소독약 냄새를 맡는 순간 약국의 약상자들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지 걱정스러웠다. 약국은 내가 그곳을 비우고 있는 내내 나의 뒷자락을 잡아당겼다. 장보러 가는 엄마에게 매달리는 아이처럼 두고올 수 없는 불안과 근심으로 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직업은 삶의 업보였다. 공부를 손에서 놓고 싶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평생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전공을 바꾸어 대학원에 진학한 친구에게는 단 며칠이라도 책을 팽개쳐버리면 가시가 돋는 삶이 그녀의 업이었다. 그같은 업보로 인해 친구와의 단촐한 나들이는 번번히 포기되었고 나는 과일 쥬스를 마시며 삶을 지탱해주는 업이 내게 달라붙어 있다는 걸 존재의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두어시간 대화를 나누고도 친구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문 앞에서 지켜보았다. 그녀는 큰길로 향하는 내리막길로 키를 낮추며 사라졌다.
친구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를 기다리는 마음은 다소 진정되었다. 그의 출현을 배제한 채 삶의 뒷장을 넘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연찮게 다른 페이지의 길목에서 그를 만나게 되면 잔잔하게 배어나오는 기쁨을 미소로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의 여과장치를 제거하고 지금 당장 눈 앞에 마주하게 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흥분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조명등의 스위치는 내려졌다. 비디오 가게에 들러 비디오 두 편을 빌리고 동네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한 통과 담배 한 갑을 샀다. 끊으려고 열댓번 시도했다가 실패한 담배였다. 보통은 이삼일 만에 다시 피우게 되었고 두 달 동안 손을 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여섯달만 넘기면 성공이라는데 스물 두 살 이후로 담배 없이 석달 이상 버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너와의 인연을 완전히 단절하리라' 다짐하며 하루에 두어 개비 혹은 대여섯 개비를 손에 대곤 했다.
"너 그거 다 팔았어?"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TV와 비디오 리모콘을 집어드는데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지나간 오후의 예감처럼 그녀에겐 미처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처럼 콘돔에 관한게 틀림없었다.
"아직 남았어! 근데 왜?"
친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궁금증이 한 보따리로 밀려들었다. 혹시나……
"실은……"
친구는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전화선을 통해 한참을 더듬거리다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며칠 전에 우연히 아는 남자를 만났어. 대학 졸업 무렵 같은 학원에서 공부하던 사이였으니까 거의 7년만에 다시 만난 셈이지. 어쨌든 퍽 반갑더라구! 그쪽도 마찬가지로 보여서 우린 저녁 삼아 술을 한잔 마셨어! 소주 몇 병을 주고받다 보니까 시간이 꽤 늦어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 남자가 내 손을 쓰윽 잡는거야! 그러면서 뭐라는지 알아? 글쎄… 자기 지갑 속에 콘돔이 들어있다는 거야!"
나는 친구의 목소리에 숨을 죽였다. 책을 읽어주듯 차근차근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이 남자가 무슨 수작을 거나 싶어 술기운은 달아나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더라구. 그래서 그냥 시큰둥하게 그를 내려다 보는데 그 남자 얼굴 표정이 퍽 진지해 보이는거야. 의자에 도로 앉아서 그를 지켜보았더니 그 남자가 그러더라구. 석 달 동안 콘돔 한 개를 지갑에 넣어가지고 다녔다구! 우연히라도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사용하고 싶어서……"
친구로부터 울적한 기운이 전해졌다. 그녀가 원한다면 술병을 사들고 달려가 나머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전화를 매개로 한 대화를 더 편하게 여기는 그녀는 내가 무어라고 입술을 열기도 전에 남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자를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건 처음이었어. 스물 몇살이란 나이 적에는 대개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기분이잖아. 근데 서른살이 되니까 달라져 있더라구. 결국 그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어. 그날 밤 우리의 관계가 사랑이었다고는 말 못하겠어. 그의 체온과 나의 체온이 서로의 외로움을 녹이고, 그의 고독과 나의 고독이 맞닿은 자리에 콘돔이 있었을 뿐이지. 그가 석 달 동안 가슴에 지니고 다니던……"
별빛이 가물거리며 멀어지듯 친구의 목소리가 총총 사라져 갔다. 대화의 여운은 이불 자락으로 몸을 감싸고 남은 밤의 어둠을 더듬게 만들었다. 나의 곁에는 자신의 반쪽인양 입맞추고 껴안아줄 남자가 없었다. 이불을 좀 더 차지하겠다고 토닥거릴 이유도 없고 잠결에 언뜻 깨어나도 살결이 맞닿아 있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혜택도 누릴 수 없었다. 규칙적인 박자에 맞추어 다시 잠들 수 있게 숨소리를 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애정어린 포옹이 어찌나 그립던지 하마트면 자기 목을 조를 뻔 했다는 어느 프랑스 여자의 이야기처럼 나는 혼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가 나타났다. 열흘만의 일이었다. 미처 그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그동안 궁금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한채 얼떨결에 콘돔 한 갑을 집어주었다. 그는 말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이 근처 사세요?"
다음 날 그가 나타났을 때 그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잡아올렸지만 얼굴빛은 은연중에 상기되었고 눈동자는 공중에서 허둥대었다.
"네!"
남자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콘돔갑을 집어들었다. 약국문을 향해 몸을 돌리기 전 그가 덧붙였다.
"서울슈퍼 뒷집에 살아요!"
그의 뒷모습이 유리문으로 가로막힌 후에도 볶은 콩들이 튀어오르듯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붙이고 있기 벅찰 만큼 세찬 에너지가 솟구쳐 실내를 오락가락하게 만들었다. 긴머리를 늘어뜨린 스무살 남짓의 여자가 들어와 무슨 약인가를 요구했다. 설사약인지 변비약인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손가락을 멈칫거리다가 '뭐라고 하셨죠?' 하고 다시금 물었다. 배앓이가 심하다는 그녀에게 약을 건네주고도 의자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녀 이전에 다녀간 그의 모습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는 드디어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말을 꺼내자마자, 대화를 나누어야 겠다고 마음 먹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나의 요구에 응답했다.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되길 바래왔다는 듯 그가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내게도 대화를 공유할 남자가 생긴 것이다.
꿈을 꾸었다. 발이 푹푹 빠져드는 모래 사장을 거닐다가 수평선을 뛰어넘는 거대한 파도를 보았다. 파도는 백사장 전체를 덮칠 듯이 엄청났다. 나는 파도의 아가리로 휩쓸려 들것 같았다. 몸을 피하고 싶었지만 모래바닥에 파묻힌 발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려해도 목소리가 터져나오지 않았다. 나는 파도를 향해 입을 벌린 채 파도 소리에 삼켜지고 있었다.
캄캄한 밤의 한가운데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뒤척였지만 다시 잠들기는 쉽지 않았다. 언젠가 남자친구와 나란히 누워있을 때,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상태로 이 밤이 영원하길 바랬던 적이 있었다.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운동 법칙을 정지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그 힘을 약화시켰고 나는 빛이 바래는 기억을 넘어 세상의 법칙에 순응했다.
귀한 손님 맞이하듯 잠을 청하며 이불자락을 턱으로 잡아끌었다. 암흑의 공간을 함께 갈라놓을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밤에는 차라리 죽음과도 같은 잠이 포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은 이불처럼 나를 덮쳐주지 않았다. 사슬 같은 의식의 고리들만 연이어 살아나 그의 존재를 불러일으켰다. 콘돔을 집어들 때의 기운 없는 손과 구겨진 바짓자락과 자신감이 허물어진 뒷모습을……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은 온전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빛이 흰 편인지 가무잡잡한지, 눈이 조금 작은지 새우처럼 많이 작은지, 머리 모양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느낌들은 몸의 감각으로 정확하게 되살릴 수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분명한 시선을 두었던 적이 없는 듯 떠오르는 윤곽이 불확실 했다. 얼굴 뿐만 아니라 나이와 직업도 몰랐다. 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매일 콘돔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그가 동네의 어느 구석에 기거하고 있는지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서울 슈퍼 뒷쪽으로 늘어선, 경사진 지붕의 오래된 이층집들과 그에게 팔았던 갖가지 콘돔들을 생각하며 잠을 불러들였다. 빨간 콘돔 파란 콘돔 파라솔 콘돔…… 옷을 벗은채 콘돔만 걸치고 있는 남자…… 그의 곁에 누워있는 여자…… 여자 때문에 괴로운 남자…… 남자 곁에서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는 여자…… 그녀는 바로 나……
밤 열시 반이 넘었는데도 그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지난 며칠동안 그가 내 앞에 서면 내가 한마디 묻고 그가 대답하고 혹은 그가 묻고 내가 대답을 회피하며 콘돔을 사고 팔았다. 서로의 입가에 묻은 웃음을 손 끝으로 쓰다듬어줄 듯 다정하게 마음의 일부를 주고 받았는데 오늘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또 한번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열시 사십오분 이었다. 조금 늦더라도 꼭 나타나겠지 싶어 셔터를 내릴 수 없었다. 십오분만 더 기다려보자 하며 다시금 시간을 세었다. 거리에는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른 땅으로 스며들기 전에 어둠에 먼저 흡수당하는 나약한 물방울들이었다. 우산 없는 행인들이 빗줄기처럼 거리를 스쳤다. 그들 중에 그가 있어 사선처럼 유리문으로 들이닥치길 바랬지만 그는 기다림의 시간을 외면하고 있었다.
진열대 아래에 놓인 콘돔 한 갑을 집어들고 조명등을 내렸다. 마음의 문을 닫듯 셔터가 철커덕 내려앉았다. 소리 없는 빗방울들이 머리 위로 달라붙었다. 머리카락과 뒤섞이지 못한 습기들은 안개처럼 희뿌옇게 얼굴 주위를 감쌌다.
비를 피해 건물의 계단으로 향하는 출입문 안으로 들어갔다. 여닫이 유리문에 몸을 붙이고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지난 밤 그가 내게 던졌던 질문 한쪽에 기대어 보면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니었다. '보통 몇 시에 문을 닫느냐' 고 물었을 때 나는 의미 없이 받아넘기듯 '열시가 넘으면…' 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으니 나는 그를 기다려야 했다. 열시가 넘어 열한시에 그가 콘돔을 구하러 와도 그는 잘못이 없었다. 열시 넘어 문을 닫는다고 했으니 그건 열두시 일수도 있고 열두시 반일 수도 있었다. 내가 콘돔을 들고 그를 기다릴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그가 영 나타나지 않으면 그에게 콘돔을 배달하러 갈 것이다. 서울 슈퍼 뒷집에 가서 '콘돔 왔어요' 라며 문을 두드린 후 그의 얼굴을 보고 말 것이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하루를 접으려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5분이 흘렀는지 10분이 흘렀는지, 기다림을 참아내느라 100분처럼 여겨지는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낯익은 걸음걸이가 유리문 앞을 지나쳤다. 불이 꺼진 약국 앞에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가로로 묶어진 철제선 너머로 어두운 실내를 응시하며 그는 비를 맞고 서 있었다. 건물 현관의 유리문을 밀고 나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얼굴과 얼굴 사이에 어둠과 빗방울이 흩어지고 있었다. 카운터 탁자 때문에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사이는 한걸음 가까와졌다. 그의 얼굴은 빗물에 슬쩍 젖어 있었다. 빗줄기는 나의 눈망울에 스며있던 짠 기운을 씻어내며 흘러내렸다. 나는 그에게 콘돔갑을 내밀었다. 콘돔갑이 습기에 젖어 눅눅해졌다. 나의 손을 향해 손가락의 기운을 전해주던 그가 콘돔갑을 받아들었다.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주고받던 지폐 대신 차 한잔을 나누기로 의견을 모으고 찻집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 때문인지 찻집 문은 닫혀 있었다. 우리의 걸음은 파라솔 차양이 드리워진, 서울 슈퍼 앞의 간이탁자로 옮겨졌다.
"우리 집에 갈래요?"
빗방울이 번진 플라스틱 의자를 내려다보며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슈퍼의 주인 아저씨에게 맥주와 과자와 땅콩을 샀다. 반투명 비닐 봉지를 들고 나오는 그에게 '담배 한갑' 을 부탁하자 그는 다시금 몸의 방향을 틀어 아저씨에게 담배를 요구했다.
서울 슈퍼 뒤의 이층집은 대문에서 곧바로 층계로 연결되었다. 그가 세들어 사는 이층의 절반은 경사진 지붕 아래의 부엌과 부엌보다는 높지만 천장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락방에 올라온 기분으로 방 안을 둘러보는 동안 그는 '컵을 가지고 오겠다' 며 부엌으로 나가 부스럭거렸다.
방 안에는 컴퓨터 테이블과, 커다란 영한 사전과 영영한 사전과 영영 사전과 국어사전 등 번역을 하거나 번역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면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전이 놓인 책상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서쪽으로 난 창문 아래에는 낡은 TV와 오디오 기기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적당히 개켜놓은 이불은 방 구석을 차지했고 몇가지의 옷이 벽에 걸려 있었다. 정돈된 느낌의 공간은 아니었지만 방바닥에 앉느라 장판에 손을 대었을 때 먼지가 밀리지는 않았다.
맥주는 차가왔다. 기울여진 유리잔에서 거품의 절반이 사라지고 각자의 손등이 동시에 각자의 입술로 다가갔다. 어색해지려는 공기를 저어내는 웃음이 스며나오고 입 가에서 내려진 손이 담배갑으로 향했다.
"라이터가 없군요!"
불을 붙일 도구가 눈에 띄지 않아 그를 바라보았다. '어딘가에 있을텐데…' 하며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책상 위와 책꽂이 사이를 살폈다.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라이터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그는 어딘가에 성냥이 있을지 모른다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삼단 서랍의 맨 윗칸을 열자 연필과 가위와 딱풀 등의 문구류가 보였다. 성냥과 라이터는 눈에 띄지 않았다. 두번째 서랍에는 디스켓 묶음들이 차곡차곡 들어 차 있었다. 성냥갑이 끼어들 틈은 보이지 않았다. 비오는 밤 불씨를 찾기에 초조해진 그가 서둘러 세번째 서랍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순간적인 실수처럼 서랍이 열리고 닫히기까지 2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 미묘한 시간의 틈새로 약국의 허공에서 주고 받은 손짓과 모른척 애써 외면했던 눈빛들이 키를 나란히 한 채 웅숭그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팔고 그가 사 갔던 콘돔갑들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채 서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콘돔갑 위에는 내 물건들과는 이질적이기에 금세 알아챌 수 밖에 없는, 내가 결코 그에게 건네준 적이 없는 성냥갑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는 서랍의 손잡이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을 감싸듯 나의 손바닥을 덧붙여 서랍을 열었다. 성냥을 집어들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모금을 목구멍 속으로 잡아당겼다. 희부연 연기를 공중으로 내보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섹스가 고독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줄까요?"
늘 그래왔듯이 그는 조금 주저하며 대답했다.
"한 순간 만큼은……"
그의 목소리가 안으로 말려들었다. 나는 그의 수줍고 우울한 뺨에 나의 뺨을 갖다대고 싶었다.
"한순간만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담배불을 빈 접시에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길이 내 뺨의 언저리에 머물렀다. 난생 처음 바라보는 듯한 눈길이 서로 부딪혔다. 나의 손마디에 그의 체온이 감겨들었다. 손과 손이 접혀들고 얼굴과 얼굴이 맞닿았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물이 일렁거렸다.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었다. 나의 두 팔은 그의 목으로 감겨들었다.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을 찾았다. 몸 안의 힘이 풀려나가는 듯한 입맞춤을 나눈 후 우리는 옷을 벗고 섹스했다. 그리하여 그의 서랍 안에 오그리고 있던 콘돔 하나가 사라졌다.
그날 밤, 작은 빗방울들은 거리를 적시고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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