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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제1회 인터넷청소년문학상 입상작/꿈공장 공장장/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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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인터넷청소년문학상 입상작
꿈공장 공장장
(산문부문 우수상)
민구
교실 벽이 유난히도 깨끗해 보인다. 특히 고개를 조금씩 들어가며 가장 하얀 곳을 찾아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노라면 4절지 규격을 넘기지 않는 도화지 한 장이 절로 완성된다. 그리고 세월을 조금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미처 스케치북을 준비하지 못해서 허둥지둥 대다가 인정 많은 짝에게 얻은 한 장의 하얀 도화지. 도무지 구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워하다 당황해서 흘린 땀방울이 겨우 구한 낱장의 도화지에 무겁게 떨궈졌을 때, 그렇게 떨궈진 방울방울마다 촉촉이 스며들어 원이라고 말하기엔 조금은 불규칙한 동그라미를 그려가고 있을 즈음 난 문득 생각했었다. 결코 내 안에서 지워낼 수 없었던 그것.
만약 내가 도화지 위에 찍힌 몇 방울의 땀을 자연적으로 생성된 순수 미술품이라고 내세워 선생님께 보여 드린다면 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하지만 이내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말라버리면 더 이상 내 작품이 아닌 그냥 단순한 도화지로 전락해버린다는 상반됨에서였다. 그 땐 일주일에 단 두 번뿐인 미술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가장 자신 없는 회화시간엔 늘 그저 그런 점수를 받기 일쑤였지만 내겐 하얀 도화지 한 장이 있어 행복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선 8절지 도화지 두 장을 묶어서 백 원에 팔았다. 늘 백 원이 아까워서 짝이 사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난, 염치없고 귀찮은 인물이었다.
"네 거 한 장 가져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넌 이 고무줄이나 가져"
도화지 두 장을 묶고 있던 고무줄은 소년기의 무료함을 달래는 장난감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난 팔딱팔딱 뛰고 늘어져서 별도 되고 아톰도 만들 수 있고 심지어 에펠탑까지 가능한 고 탄력의 노란 고무줄을 주물럭거리길 좋아했다. 때문에 선생님들로부터 적지 않은 눈초리를 사야했지만 고무줄은 여전히 내 손을 잘 떠나지 않았다. 고무줄은 내게 소중한 존재였으며 난 그것을 짝에게 넘겨주기가 내심 배아팠던 게 사실이다. 어쩌면 고무줄과 함께 했던 시간이 도화지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을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호기심의 촉발과 그것을 토대로 형성해 나가려 했던 꿈. 나에게 있어 도화지는 꿈이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얀 도화지 위에 눈으로 볼 수 있는 특정한 형체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위엔 향료를 탄 색색의 물감만이 올라서야 할 자리였을 수도 있다. 그게 도화지의 의무이고 붓을 든 손의 권리였을 것이다. 난 붓으로 뭔가를 그려 넣는 것보다 한참동안 도화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일을 더 좋아했다. 그 위에 기억 저편에 희미하게 잠든 추억들과 얼룩을 들추어 옮겨 그려봄은 더 할 나위 없는 작은 행복이었다.
특히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 관한 기억을 되짚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옆집 할머니네 개가 새끼를 나서 날마다 그 강아지들을 안아보고 뽀뽀하고 했던 기억이 도화지를 스쳐가곤 했다. 동네에서 있었던 강아지와의 추억을 그림으로 옮긴 적이 있었는데 코흘리개 손에서 나온 따끈한 작품의 제목이 바로 '첫 키스'였던 걸로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엔 작품의 제목으로 인해 학급 안이 떠들썩했다. 동네 무당아주머니가 굿하는 모습을 무서워서 본 적은 없지만 애써 그런 모습들을 지면에 그리며 으레 겁먹는 표정의 내 모습을 추가로 넣기도 했다. 어렸을 적 나의 우상이었던 변신 로봇 메칸더V를 도화지 위에 그려놓고 여러 방법으로 작동하는 일도 꽤나 흥미롭던 놀이중의 하나였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 집을 친구들과 경쟁하며 그리기도 했다. 하얀 공간 속에 한량없는 희망을 싣고 뭔가를 그려 넣는 일은 어릴 적에 했던 놀이치곤 참 괜찮았다. 내겐 환한 미소를 지을만한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담긴 작은 꿈이 있었다. 지금에 와선 도화지를 사러 곳곳에 추억이 서린 학교 앞 문방구에 갈만한 기회가 없어졌지만 난 아직 그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작년 이맘때쯤 축제 홍보를 위한 포스터를 만드는데 재료로 쓰일 색 도화지가 내 손에 쥐어진 적이 있었다. 옛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조금은 흥분되는 상태에서 포스터를 제작하기란 희망이 실린 내 생각의 장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식상한 말들로 그럴 듯 하게 표현하긴 싫었다. 내겐 참 의미 있는 일이었기에 나와 생각을 같이 하여 작은 공감대를 형성케끔 하는 다리를 잇고 싶었던 것이다. 고심 끝에 색 도화지의 중앙을 크게 뚫어버렸다. 그걸 보던 동료들은 모두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정말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시원하게 뚫어진 곳을 통해 난 진정으로 보고자 하던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을 직접 보여주진 못할지라도 보여주려던 노력만은 어떻게 해서든 남기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이 정말 보고자 했던 일종의 '가능성'일는지도 모른다. 결국엔 그 포스터가 제 역할 한 번 못해보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것만으로도 대 만족이었다. 그걸 통해서 옛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으니까 말이다.
하루가 지나면 그대로 구석에 처박혀 하루살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조간신문에게도 꿈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 어시장에서 방금 건져온 새우들이 멀리 튀지 못하게 받침이나 되어주는 신문 낱장이 아니라 소식을 전하는 일 외에도 중대한 역할을 해낼 수도 있다는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절실했으며 즐겁기까지 했다. 여기는 6층,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오른쪽 눈을 가까이 대고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동그랗게 응축된 세상을 감상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리 삭막하지만은 않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신문지 한 장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의 눈엔 꽤 익숙한 하루살이 신문지 한 장에게서 생명의 티끌조차도 찾아내긴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희망을 지닌 우리의 손을 거치는 것이니 만큼 그것들도 희망의 냄새 정도는 그리워 할 것이다. 혹시 꿈을 꾸기 위한 준비는 아닐까.
꿈이란 자격요건을 갖춘 자에게만 적용되는 자격증이 아니다. 불씨를 키워낼 수 있는 작은 희망과 절실한 마음가짐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희망, 그것은 꿈을 꾸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대 형성의 장이 될 것이다. 자유로운 공간에 대한 신념이 꿈공장을 만들고 스스로 공장장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꿈공장 공장장은 버려지고 흩날리는 것들을 이해하고 힘을 북돋아 주어 희망의 씨앗을 골라낸다. 씨앗은 지나가는 바람의 속삭임, 시냇가에 울려 퍼지는 미세한 소리 등을 귀담아 들어서 이미 세상이 등돌려버린 사소함과 정을 쌓고 비로소 희망으로 성장하게 된다.
배달부의 온기가 남아있을 조간지로 본, 내일 아침의 세상은 과연 어떨까.
작품명 : 꿈공장 공장장
성 명 : 민 구 (男) 담임교사 : 김 원 근
집주소 : 402 - 025 집전화 : ( 032 ) 213 - 5889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5동 동아아파트 6동 608호
소속학교 : 인항고등학교 3 학년 1 반
학교주소 : 402 - 025 학교전화 : ( 032 ) 885 - 3302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5동 627 - 456 인항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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