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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문화/일본 애니매이션의 문화적 저력/장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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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매이션의 문화적 저력 -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매이션
장원재(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 일본 애니매이션 공식 개봉의 의미
2001년 상반기에 개봉된 일본 애니메이션은 <인랑>과 <무사 쥬베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모두 세 편이다. 세 편 모두 주목할만한 흥행 실적을 거두지 못한 채 비교적 단기간 내에 간판을 내려야 했지만, 일본의 극장용 애니매이션이 공식 경로를 통하여 한국에 수입되고 한국의 관객들과 만난 첫 번째 경우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 의의를 논하기에 앞서, 이 세 작품이 개봉될 당시 각각의 기대수익이 현저히 달랐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초 개봉일로부터 미처 2년이 경과하지 않은, 비교적 신작이라 할 수 있는 <인랑> 및 <무사 쥬베이>와는 달리,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일반에 공개된지 17년이 지난 '옛날 영화'이다. 게다가, 영화 평론가들의 추정에 의하면, 2000년 겨울 현재 불법 복제본을 포함하여 약 170만개 내외의 비디오/CD/LD가 한국 시장에서 팔려 나갔거나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매우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다시 말해서, '극장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제대로 된 화면을 감상하고 싶다'는 매니아적 수요를 제외하면, 신규 수요를 창출할 가능성이 처음부터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서울관객 7만을 포함, 이번 개봉을 통해 전국적으로 1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그렇다면, 이같은 흥행상의 불리를 인지하고서도 다소 무리하여 개봉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사측의 발표에 따르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이 시점에서 서둘러 개봉한 까닭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 일본 대중 문화의 개방 여부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의 정책 기조가 일관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 2001년 현재, 한국 정부는 일본 애니매이션에 대하여 한국 시장을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이 말은, 한국 시장에 작품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에서 정한 기준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 애니매이션의 경우, 이 기준은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세계 유명 영화제의 선정 기준이 다소 임의적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정부가 공표한 '세계 유명 영화제'의 경우, 애니매이션을 위하여 따로 한자리를 할애한 영화제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업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 애니매이션을 수입할 수 있는 경로는 공식적으로는 '제한적이나마' 열려있으되 실질적으로는 교묘하게 닫혀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1985년 칸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중에서 한국 정부의 기준을 충족시킨 유이한 작품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이웃의 토토로>)
2. 선택적 개방의 의미와 영화사의 전략
'선택적 개방'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면 문제는 다소 복잡해진다. 특정한 기준을 정하여 이 기준에 합당한 특정한 영화만을 수입할 수 있다고 하면, 이같은 규제를 통하여 반사적 이익을 취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문제는 그런 개인이나 집단이 영화계 전반의 이익을 도모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증대하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규제라는 제도 자체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존속할 가능성이 생각보다 작지 않으며, 제도가 존속하는 한 규제의 내용이 강화될 가능성도 상존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시장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판권을 확보하고 있는 영화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영이 가능한 시점에서 영화를 개봉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시적인 이익은 기대하기 힘들지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개봉을 통하여 영화사 측에서 취할 수 있는 이익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에 관한 한 세계 영화시장에서 최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대한 논의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무시 못할 매력이다. 영화 자체의 흥행은 실패하더라도, 개봉 자체를 둘러싸고 언론 및 방송 매체의 주목을 끌고, 이를 바탕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문화 브랜드를 대중의 뇌리속에 착근시켜 장기적인 관점에서 향후 사업을 전개해 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문화 상품으로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니고 있는 폭발력은 어느 정도인가. 두 가지 실례를 들어 이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발표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대한 한국 내 판권을 획득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작품에 대한 한국 내 판권이 이미 모두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 판권이 팔려나간 시점이다. 일본 애니매이션의 수입 및 일반 상영에 대한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던 시기에 모든 작품의 판매가 끝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가능성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던 권리를 획득하는 일에 대하여 숱한 영화인들이 경쟁적으로 달려들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작품성과 완성도에 관한 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매이션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걸작이며, 영화 흥행 및 캐릭터 상품 판매 등의 연관 사업을 통하여 막대한 이득을 창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적어도 여러 명의 전문가가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우리 나라의 흥행업자들만이 이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초청하려는 부천, 부산, 전주 등 각 영화제 조직위원회의 여러 차례에 걸친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초청 허가가 나지 않은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입국이 사실상의 경제 활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현행 출입국법은, 한국 내에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제반 행위에 종사하고자 하는 자는 사전에 이 내용을 서면으로 신고하고 입국 전에 현지 한국 대사관에서 입국 사증을 발급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결정의 배후에 미국 메이저 영화사들의 강력한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은 영화계 내에서는 공지의 사실이다. 미국 메이저 영화사들은 현행 법규를 최대한 확대 해석하여, 잠재적 경쟁자의 시장잠식을 원천봉쇄하는데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영화를 상영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관객들과 무대 인사만 나눌 예정이라는데도 이를 결사적으로 저지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도대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물이 세계 애니매이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일본 애니매이션 문화와 일본 애니매이션이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3. 애니매이션의 태동/애니매이션 문화의 태동
오늘날에는 어느 누구도 애니매이션의 예술적 산업적 잠재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애니매이션이 어린이 및 청소년이라고 하는 한정된 시장에서 벌어지는 제한된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애니매이션이 '어린이 취향의 가족용 영화'에서 벗어난 시점은 어디부터인가. 1974년 마츠모도 레이지 원작의 애니매이션 <우주전함 야마토>(한국 번역 제목: <날으는 전함 V호>)는 50회 방영 예정의 삼분지 일을 채우지 못한 시점에서 방송사로부터 방송 중단 명령을 받는다. 매회 일정한 스토리가 매듭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이야기가 전편에 걸쳐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극화스타일식 전개가 텔레비젼 만화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 작품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과학 지식이 너무 전문적인 까닭에 일반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제작진들이 사장된 아이디어들을 되살리고, 미처 전파를 타지 못한 뒷부분의 플롯을 재구성하여 이를 영화관용으로 편집/제작해 내어놓은 작품이 <우주전함 야마토 극장판>(1977)인데, 이 작품이 바로 애니매이션의 문화적 위상을 바꾼 영화사적 기념비이다. 개봉 전날, 첫날 첫 상연을 보기 위한 인파가 극장 매표구 앞에 장사진을 쳤는데, 그 대부분이 대학생 이상 연령층의 관객이었던 것. 문제는, 방송사나 문화계 관계자, 심지어는 제작자조차도 이같은 현상을 전혀 예기치 못했다는 사실이다. 영화 사회학자들은, 이 날 이후 애니매이션의 사회적 위상이 극적으로 달라졌다고 진단한다.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하수로 복류하던 거대한 흐름이 마침내 당당한 실체를 드러내며 지표면으로 분출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같은 현상이 왜 일본에서 벌어졌는가. 주지하는바와 같이, 애니매이션의 종주국은 미국이다. 이 말은, 장편 만화 영화를 처음으로 제작하고, 이를 극장에서 상영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화 영화 시장이라는 미답의 세계를 개척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디즈니사가 3년간의 제작기간을 거쳐 1937년 12월에 공개한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가 최초의 본격적인 애니매이션 영화라는데는 대부분의 영화사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제작비를 투입했던 탓에 무모한 시도라는 세평을 들었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는 흥행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파산 직전이었던 디즈니사의 재정 상태가 일거에 흑자로 돌아선 것은 물론, 향후 다섯 작품의 제작비까지를 확보했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있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는 최초의 장편 만화 영화라는 점 이외에도 비극적 요소를 작품에 끌어들인 사상 최초의 애니매이션이라는 점, 멀티플랜 촬영기법을 사용하여 영화적 원근표현의 새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의를 갖는다. 멀티플랜 촬영기법이란 카메라로부터 각각 다른 거리에 위치한 복수의 배경을 설정한 뒤 그 중 하나의 배경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법을 말한다. 초점을 맞춘 배경을 제외하면, 나머지 다른 영상은 흐리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이용하여 평면의 스크린 위에 입체적 원근감을 구현하는 테크닉이다. 실사 영화에서는 오손 웰즈 감독의 <시민 케인>이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 최초의 경우인데, <시민 케인>은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보다 4년 늦은 1941년에 제작되었다. 디즈니사는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이후 <피노키오>(1940), <판타지아>(1940), <아기 코끼리 덤보>(1941), <아기사슴 밤비>(1942)등을 연이어 발표, 만화 영화 왕국의 입지를 굳힌다. 그러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와 같은 대박 흥행은 다시는 터지지 않는다. 가장 훌륭한 애니매이션 영화의 하나로 언제나 거론되는 <판타지아> 조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종전 후 제작한 <신데렐라>(1950),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1951), <피터 팬>(1953), <강아지 이야기-숙녀와 건달>91955) 등도 애당초의 기대만큼 흥행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1959년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내어놓은 야심작 세계 최초의 70밀리 애니매이션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관객들로부터 참담하게 외면당한 이후, 디즈니사는 실사영화와 다큐멘타리 제작, 놀이 공원 건설 등으로 경영 다각화에 나선다. 최고 경영진들이 애니매이션만으로 경상경비를 마련하고 이득을 창출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4. 미국 애니매이션의 쇠퇴와 일본 애니매이션의 융성
그렇다면, 만화 영화에 대한 폭발적 반응이 그토록 빠른 시일내에 가라앉은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사학자들은, 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미국 만화 영화의 흥행 수익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이유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한다. 첫째, 만화 영화 관객의 감상 포인트가 이원화되어 있다는 점. 관객들이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 제1감상축이라면, 만화 영화에는 애니매이션의 테크닉을 은연중에 고구하는 제2감상축이 존재한다. 만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동물들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혼자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가상의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임을 구현하는가, 실재하는 생명체의 동작을 얼마만큼 모방하는가에 관객들의 관심이 쏠리게 마련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애니매이션의 마술효과(Magic Effect)이다. 같은 기법들이 거듭 사용됨에 따라, 마술효과의 대 관객 효용성이 체감하고, 테크닉에 대한 열광은 필연적으로 줄어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만화영화의 투자 효용성이 점진적으로 감소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만화 영화는 제작 특성상 철저히 수공업적인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등장 인물/동물들의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초당 24매 내외의 그림들이 필요한데, (디즈니사는 보다 부드러운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하여 초당 30매 내외의 그림을 사용하였음) 이를 일일이 사람 손으로 그려 주는 외에 달리 제작 환경을 개선할 재간이 없다. 이같은 상황은, 1996년 최초의 컴퓨터 그래픽 애니매이션 <토이 스토리 1>이 나올때까지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애니매이션의 제작비가 상영 시간이 비슷한 실사 영화에 비해 몇 곱절 이상 소요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제작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애니매이션은 손실 위험부담이 비교적 높은 장르였다. 기본 제작비가 워낙 많이 들고, 제작 기간도 길어 자금을 회전시키는데도 불리했기 때문이다. 디즈니사가 다른 장르로 눈을 돌려 안전운행 전략으로 회사 방침을 수정한 일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60년대 이후 애니매이션 제작에 전력을 기울인 일본의 제작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였는가. 그렇다고 볼수는 없다. 일본의 제작자들도 이같은 애니매이션 제작상의 난점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지만, 양국의 영화계 전반의 패러다임이 철저히 달랐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일본의 제작자들은 실사영화로는 세계 시장에서 미국 영화와 경쟁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틈새 시장 개척에 역량을 집중한 것이다. 이같은 모험적인 전fir이 성공을 거두면서, 60년대 후반 이후 일본 애니매이션이 전세계 텔레비전 시장을 사실상 독점해 버린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극장용 애니매이션도 예외는 아니다. SF 애니매이션으로부터 역사물, 순정물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소재가 다양해지고, 청소년 이상의 나이든 관객을 대상으로 한 성인 취향의 애니매이션이 제작되기 시작한 곳도 일본이다. 말하자면, 만화 영화가 미국에서 처음 태동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만화 영화가 엔터테인먼트의 틀을 넘어서 문화 현상으로 격상된데는 일본 애니매이션의 공로가 지대하다는 말이다.
5.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매이션의 특징
그렇다면, 일본 만화 영화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전직 의사 출신으로, 일본의 월트 디즈니가 되고자 했던 제1세대 애니매이터 오츠카 데사무를 일본 만화 영화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2세대 애니매이터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일본 만화 영화의 전성시대를 열어 젖힌 인물이다.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텔레비전 만화영화 <프란다스의 개>, <알프스 소녀 하이디>, <미래소년 코난> 등을 연출한 뒤 영화용 애니매이션 감독으로 전환,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의 토토로>, <마녀의 특급 배달>, <붉은 돼지> 등 일련의 걸작들을 연이어 발표, 거장의 칭호를 얻는다. 특히 1997년에 발표한 <원령공주>의 경우 일본 국내에서만 물경 1,200만의 관객을 동원, 일본 영화사상 흥행 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걸작이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애니매이션에는 두 줄기의 감상축이 존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강점은 먼저 이야기의 뼈대를 단단하게 구축한 연후에야 테크닉 쪽에 힘을 쏟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이야기 구조를 분석해 보기로 하자. 지면 관계상, 세가지 점만을 간략하게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첫째, 이 작품의 전반적 기조가 상당히 비관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불의 7일간'이라 불리는 세계대전으로 지표의 상당부분이 불모지로 변한 미래의 지구. 대부분의 육지는 유독 가스를 내뿜는 거대한 균과 곤충이 번식하는 부해(썩은 바다)로 변했고, 부족 단위로 살아남은 인류는 여전히 전쟁에 집착한다. 희망의 징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유독가스 방지용 방독면을 쓰고 부해를 둘러 보는 여행자를 따라 관객들에게 부해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영화의 첫 대사는, 그가 어느 폐허에서 반쯤 삭은 봉제 인형을 집어들며 '지금 또하나의 마을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 관객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도발로부터 도망갈 길을 차단 당한다. 부해의 존재와 그 유독성을 구체적으로 감지하며, 답답하고 불편한 느낌을 억누르고 스크린을 응시할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제시하며,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작품이 미국식 도식으로부터 완전히 궤도 이탈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즐거운 이야기를 달콤하게 포장한 뒤 아슬아슬한 대목을 섞어 해피앤딩으로 끝을 맺는다'는 흥행의 안전장치를 걷어내고, 이제는 진지한 태도로 애니매이션을 감상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무거운 톤으로 한시간 반을 시종일관하는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이야기 구조가 무척 단단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는, 전쟁 이야기가 작품 전편을 관통하고 있으되 전쟁의 쌍방이 등장하여 비교적 단순한 피아구도 속에서 싸움을 벌이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바람 계곡의 부족까지를 포함하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세력은 도루메키아 제국, 베지테르 시국을 포함하여 모두 셋이다. 더구나 작품에 등장하는 도루메키아 제국군은 변경파견군으로써, 작품 중간에 본국의 방침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독자적인 행동에 나선다. 게다가, 이편은 우리편, 저편은 적의 편 하는 식으로, 선인과 악인을 도식적으로 나눈 뒤, 관객들을 일방의 정서적 응원군으로 끌어들이는 장치같은 것은 아무데도 없다. 나우시카를 포함한 바람 계곡의 주민들은 모두 선한 사람들이지만, 그 밖의 등장 인물들의 선악을 구분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도루메키아 제국군의 사령관인 쿠시아나는 폭력으로 바람계곡을 점령하고, 그곳의 주민들을 노역에 동원하여 전쟁으로 내어모는 인물이지만, 부해의 곤충들을 향한 그녀의 분노의 배후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아픈 상처가 있다. 어린 시절, 부해의 곤충들에게 팔과 다리의 일부를 물어 뜯겨 불구가 된 것. 쿠시아나에게 있어 전쟁이란, 인류가 곤충들을 제치고 지구의 주재자로 복귀하기 위한 필연적인 수순이며, 거시적으로는 문명화된 세계로 재진입하기 위한 불가피한 충돌이다. 도루메키아 제국에게 공주를 인질로 바치는 등 상대적 약자로 묘사되는 베지테르 시국은 일견 평화를 사랑하는 세력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막바지에서 자국의 안전을 위해 잔인한 행위를 서슴치 않고 자행하는 세력도 바로 베지테르 시국이다. 기존의 무기로는 상대가 되질 않기에 곤충의 힘을 악용하려는 것이 그들의 주전략이다. 거대곤충 오오무의 유충을 무참히 살해하고, 이 시신을 비행선에 매달고 선도 비행을 함으로써 오오무 무리의 격분을 자아내는데, 오오무 무리의 행진을 유도하는 방향이 바로 바람 게곡이 자리한 쪽이다. 현재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도루메키아 변경 파견군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계곡 주민들의 안전과 생명 따위는 아예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관객들이 혼란에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가 옳으면서 모두가 그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든 인물들에게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관객들의 감정을 적절히 배분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품 전반에 걸쳐 교묘한 복선이 여러가닥 깔려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대표적인 것이 메시아 모티프다. 바람계곡 부족장실 벽면에는 한 남자의 모습을 담은 양탄자가 걸려 있다. 부족에게 전설을 전파하는 큰 할머니는, 이 인물이 '청색 옷을 입고 금빛 들판에 서서 세상을 구원하러 올' 메시아라고 이야기한다. 인류 사회에서 신화나 전설이 지니는 보편성에 기대어 무심한 척 흘려놓은 이 모티프는, 영화의 라스트 씬 나우시카의 환생 장면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6. 결론 - 한국 애니매이션의 문제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한국의 애니매이션 제작자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통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개봉된 한국의 애니매이션들은, 흥행시장에서 한결같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실패의 원인을 단순화시키고, 그 문제점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처럼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한국 애니매이션의 현재적 실패는 왜곡된 시장 구조, 폐쇄적인 관객의 취향, 열악한 제작 여건 등이 맞물린 총체적이며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애니매이션의 미래적 성장 잠재력이 풍부하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그리고 실천적 입장에서 개선할 수 있는 뚜렷한 방책이 있기에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발언의 수위를 높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애니매이션 제작자들이 작품 안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영화를 대표하는 부분으로 내세워 광고의 주요 컨셉으로 활용한 대목은 '어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된다'라는 것이 아니고, 어떤 기법을 써서,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어떤 특수효과를 삽입했다는 것이었다. 여기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90년대 한국 애니매이션 제작자들간에 의견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견해에 따르면, 논리적 기반이 부실한 이야기를 가지고 애니매이션을 만들거나 스토리 라인을 미처 다져놓지 않고 작업을 하게 되면, 아무리 화려한 테크닉으로 장식을 해보아야 결국은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한다. 고전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특수효과란 본질적으로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물이지 영화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스토리 라인이 단단한 영화는 특수 효과를 전혀 사용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낼 여지가 있다. 그러나, 별다른 이야기 없이 특수 효과만으로 시종한 영화는 아무런 울림을 자아낼 수 없다. 인간이란 결국,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욕구를 본능의 일부로 장착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구축된 이야기는 단단하게 지어진 건축물과 같다. 잘 지어진 집의 훌륭한 인테리어는 모든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동시에 일상 생활의 안락함을 제공하는 잘 꾸며진 삶의 정원이다. 그러나, 인테리어만 뛰어난 집은 모델 하우스와 같다. 모델 하우스는 전시용 공간이지 삶의 공간이 아니다. 모델 하우스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장원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컬리지 공연예술학과(석사)
런던대학교 로열 헐러웨이 컬리지 공연예술학과(박사)
등단: <계간 리뷰> 1995년 봄 호
저서: <증언연극사> (공저: 1990)
<Who's in the Contemporary World Theatre> (Korean Section: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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