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제2호/젊은시인조명/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1 외9편/조말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조말선
댓글 0건 조회 3,079회 작성일 02-06-14 11:00

본문

젊은시인조명
조말선
199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대시학 등단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1 외 9편



삼월에는 정원을 내버려두세요 텅 빈 나무 가지에 음모가 득실거려요 사방에 눈인지 입인지 숨어 있어요 욕설인지 칭찬인지 듣게 될 거에요 누군가의 막 벌어질 입을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의 막 벌어질 눈을 생각해 보세요 정원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나는 멀어졌거든요 내가 가지 않은 길에서, 정원이 깊어질수록 내 발목은 쇠뭉치를 달았어요 두 개 세 개 늘어났어요 받아낼 욕설과 비웃음이 늘어났어요 나무는 갈라지는 것이 숙명이에요 나무는 반어법이 유일한 화법이에요 보세요 허공 깊숙이 높아지려고 땅 속 깊숙이 낮아지잖아요 실수가 꽃을 피워요 꽃잎의 의견이 일치한다면 꽃이 어떻게 활짝 피겠어요 삼월에는 정원을 내버려두세요 내가 마음먹은 것을 모조리 부정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어제의 꽃은 그제의 꽃의 부정이고 올해의 꽃은 작년의 꽃의 부정이에요 내가 당신을 거절한다고 화내지 마세요 우리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를 보세요 나와 당신은 하나의 꽃잎이에요 더욱 더 멀어져야할 원수지간이에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2


선목사제관에서 금정산주유소까지는 네블럭이다
한 블럭에는 네 개의 전봇대와
스물 일곱, 여덟 그루의 벚나무 가로수와
세 개의 가로등이 서 있다
전봇대는 끝없이 오른쪽 왼쪽으로 손가락을 기르고 있다
벚나무는 끝없이 위로 아래로 발가락을 기르고 있다
가로등은 끝없이 밝아지고 어두워지고 있다
나는 이제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의 보도블럭을 세기 시작했다
인도에 걸터앉은 노인이 신발을 벗어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있다
거기 누군가의 얼굴이 있는 것처럼
그는 선목사제관 쪽에서 왔던 걸까
금정산주유소 쪽에서 왔던 걸까
 나는 지금 노인을 막 스치고 있다
 노인에게는 사제의 근엄함이 없다
 주유소에서 불어오는 불온함도 없다
휴식도 산책의 일부인 듯
가만히 앉아 지나온 길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인의 얼굴 가득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다
 나는 또 새고 있던 보도블럭의 갯수를 놓쳤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3 



보르헤스씨댁은 어디입니까?
 현관문을 열자 미로가 있다
보르헤스씨댁은 어디입니까?
오른쪽으로 돌던 길이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진다
 보르헤스씨댁은 어디입니까?
벽이 없는 낭하를 돌고 돈다
보르헤스씨댁은 어디입니까?
 나무가 빽빽한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연다
보르헤스씨댁은 어디입니까?
벽이 없는 낭하에 거울들이 마주보고 있다
보르헤스씨댁은 어디입니까?
거울속에 있는 거울, 속에 있는 거울, 속에 있는 거울, 속에 있는 거울, 속에 있는 거울, ......, 속에 있는 거울이 질문을 복제한다
보르헤스씨댁은 어디입니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4


그 꽃집은 피고 있다 지고 있다 그 꽃집의 통유리창은 피어 있다 꽃다발 하나가 유리문을 밀고 나온다 그 꽃집은 활짝 핀다 새로 들여 온 보랏빛 스타티스가 고무 바께스에 가득 꽂혀 있다 그 꽃집은 가득 피고 있다 지고 있다 통유리창을 타내려가는 아이비 덩쿨들 그 꽃집은 축축 늘어지고 있다 쭉쭉 뻗어가고 있다 꽃집 앞에서 해를 쬐는 모종 컵들 나는 노란 줄리앙 모종 컵을 열 개 산다 열 개의 노란 줄리앙 모종 컵은 피고 있다 지고 있다 장미꽃다발들이 꽃집을 빠져나간다 그 꽃집은 꽃들을 떠나보내며 피고 있다 지고 있다 오늘은 엔젤램프 화분에서 일곱 개의 램프가 켜지고 세 개의 램프가 꺼졌다 밤 열 시에 셔터가 내려진 그 꽃집은 캄캄하게 피고 있다 지고 있다 그런데 그 꽃집의 꽃들은 오래 전에 죽었다 그 꽃집은 목이 잘린 꽃들이 피고 있다 지고 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6


커피를 쏟았다
카페트가 커피를 삼킨다
얼룩같이 생긴 꽃무늬 때문에 얼룩이 보이지 않는다

물을 쏟았다
카페트가 물을 삼킨다
얼룩같이 생긴 꽃들이 싱싱해진다

카페트는 카페트보다 무거운 것을 삼킨다

유리창이 햇빛을 통째로 쏟았다
카페트는 햇빛을 통째로 삼킨다

탁자가 카페트에서 자라난다
의자가 카페트에서 자라난다
탁자 위에 꽃병이 자라난다

꽃병을 쏟았다
카페트가 병을 삼킨다





수박요리


초록바탕에 까만 줄무늬, 수박통이 조리대에 놓여 있다 미용사는 양념을 친 초록바탕에 까만 줄무늬를 뒤섞어 비닐 랩을 씌운다 모든 요리는 비닐 랩 속에서 신선도를 높이죠 바몬드 쏘스를 친 사과요리로 할까요 타르타르 쏘스를 바른 오렌지샌드위치로 할까요 미용사는 습관적으로 벽에 걸려있는 플러그 하나를 내려서 요리접시에 연결한다 잠시 후 수박통이 미용사를 부른다 이 뿌리는 너무 뜨거워요 미용사가 비닐 랩을 조금 벗겨서 수박통을 호호 불어준다 잠시 후 수박통이 미용사를 부른다 랩 속은 너무 고요해요 미용사가 면도칼로 랩 위에 두 개의 귀를 그려 준다 오후 세 시가 되자 수박통이 있던 자리에 랩을 씌운 오렌지 샌드위치가 놓여 있다 플러그를 뺀 미용사는 요리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점심을 먹는다




오해


입을 벌리자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다
입을 벌리자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입 냄새를 풍기며
입술을 쫘악 벌린다

인후통을 앓으며
입술을 쫘악 벌린다

바람이 불자
입술이 쏟아진다

바람이 불자
종양이 굵어진다

바람이 불자
다이얼이 돌아간다

보도블럭 위에 떨어진 목소리가
발에 콱 밟힌다





매우 불온한 담론


비교문학시간,
시집과 광고지가 주제로 떠올랐다

둘 다 아이콘이 생명이다
하나는 유료이고
하나는 무료다
하나는 고급하다고 하고
하나는 더욱 고급해지고 있다
둘 다 항문에서 배설된다
하나는 거짓말이고
하나는 거짓말의 모방이다
둘 다 독자가 빵이다
둘 다 감각적 기교가 예각적이다
 하나는 수줍게 읽기를 권하고
하나는 슬쩍 끼워서 읽히고
 꽃잎처럼 흩뿌려서 읽히고
 두 장 세 장 겹쳐서 읽히고
 지하도 입구까지 따라와서 읽힌다
 둘 다 점점 늘어나고 있다
둘 다 점점 닮아가고 있다
 둘 다 재활용 봉투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둘 다 불온하면 할수록
 분리수거가 가능해진다







염소와 말뚝


그러니 염소여 말뚝과 친하지 마라
하나밖에 없는 길을 돌고 돌지 마라
말뚝이 네 목을 매달 것이니!
썩어 가는 식탁을 다 비워라

말뚝을 박은 풀밭은 파산하기 시작한 집구석이다 부패하기 시작한 식탁이다 염소와 말뚝 사이에 냄새가 피어오르는 풀밭이 있다 노오란 민들레가, 말라 가는 이슬이, 염소와 말뚝 사이에 가득한 햇빛, 가득한 빗물, 가득한 바람 염소와 말뚝 사이에 오해가 있다 어지러운 발자국이 있다 떨리는 울음이 있다 염소와 말뚝이 가장 멀어졌을 때 풀밭은 가장 풍성해진다 가장 빳빳해진다

염소는 말뚝을 벗어나기 위해 풀밭을 뜯어먹는다







하농


누군가 벽지 속에서 피아노를 친다
누군가 벽지 속에서 계단을 올라간다
 나는 벽지를 찢는다
누군가 벽 속에서 못질을 한다
누군가 벽 속에서 흐느낀다
 나는 벽을 깨뜨린다
 누군가 벽지 속에서 피아노를 친다
누군가 벽지 속에서 계단을 내려간다
나는 벽지를 찢는다

누군가 벽지 뒤에서 벽지를 찢는다







<시작메모>
  저리 가,


너 때문에 내가 까맣게 보인다
너 때문에 또 내려가야 한다
너 때문에 또 올라가야 한다
네가 웃으니까 나는 울어야 한다
 네가 우니까 나는 울어야 한다
 네가 뛰어 가니까 나도 뛰어가야 한다
 네가 휴가니까 나는 뛰어야 한다
 네 모가지가 기니까 꺾고 싶다
네 얼굴이 예쁘니까 분탕질하고 싶다
네가 침묵하니까 떠들고 싶다
네 머리카락이 너무 기니까 자르고 싶다
네 옷이 너무 예쁘니까 난도질하고 싶다
네가 큰 길로 가니까 돌아가고 싶다
네가 오지 말라니까 들어가고 싶다
너 때문에 내 이름이 들통났다
너 때문에 내가 벌을 선다


추천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