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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신작시/변종태/구림(九林) 프로젝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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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변종태
구림(九林) 프로젝트 외 1편
― 백제사연구서설(百濟史硏究序說)·3
프롤로그
인간의 고향은 어디인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인간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라." 황토, 그 순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안다.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서 땅을 보고 하늘을 보고 자신을 본 사람은 안다. 대상으로 존재하는 형상의 부질없음을. 부질없음의 부질없음을.
Work 1.
황토를 쌓아놓은 고분(古墳)에 TV 한 대가 묻혀 있어. 모니터에서는 눈동자만 꿈뻑거리고. 시벌건 황토(黃土)는 붉은 눈물을 흘리며 너희들을 쳐다보고. 인간아, 흙은 너희가 저지른 일들을 모두 다 알고 있어. 하늘은 몰라도 땅은 알고 있어.
Work 2.
나선형(螺旋形) 미로(迷路) 속에 심어진 감나무 한 그루. 선사시대의 할머니가 감 한 알 따내어 옷섶에 쓰윽 쓱 문질러 허물어진 이빨 사이로 고운 웃음을 흘리면서 손주에게 건네주던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아직 채 잎이 돋지 않은 감나무가 붉은 흙 속에 깊은 사념(思念)을 박고 서 있어.
Work 3.
애벌구이 개떼들이 무더기로 흙에서 솟데. 무너진 기와 공회당 마당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물고. 개떼들이 공회당 빠진 마루청에서 짖어대고 있데. 한 마리는 바깥채에서 몸에 묻은 벌건 황토를 털어내고 있데.
Work 4.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적에 배를 띄운 호수, 그 남쪽 가에 성혈(性血)바위가 있어. 동심원을 그리는 나이테, 마디마디 잘린 나무 위에 깨진 토기 조각. 한복판으로 붉은 성혈(性血)이 뚝뚝 떨어지네.
Work 5.
아름드리 정자나무,
느티나무 작은 가지가지가지가지가지가지가지가지가지에
도자기로 구운 자기종자기종자기종자기종자기종자기종자기종
그 실가지에 이는 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는 종소리종소리종소리종소리종소리
Work 6.
정자에 올라설 수 없던 수많은 아낙들
꽃신이 동심원을 그리며 한없이 걸어가네.
수십 켤레 꽃신이 정자 위를 걸어가네.
정자를 잃은 난자들이 정자 위를 걸어가네.
난자가 꽃신을 신고 동심원을 그리며 걸어가네.
꽃신에 차고 넘친 정자가 개울을 이루고 있네.
Work 7.
백자(白磁) 사이보그가 옹관(甕棺) 안에 들어가 있었어.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이보그, 전시실 안에는 사이보그의 몸체가 진열장 유리 안에 들어가 있었어. 나도 저 옹관 안에서 사이보그처럼 오랜 잠을 자고 싶어. 옹관의 금간 틈으로 햇살이 비치고 그대의 눈동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난 천 년의 오랜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
Work 8.
도시에 건물은 하나도 없고 마이크로 칩만 꽂혀 있었네.
내 머리 속에도 칩이 꽂혀 있나봐.
길은 회로(回路)처럼 이어져, 전류가 끊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식은 과거로만 향하고,
햇살 한줌을 꺾어 그대의 황토마당에 꽂아두고 싶어.
햇살이 황토꽃을 피울 때 그대가 내게로 와 줬으면 해.
Work 9.
배가 뜬다.
육지를 가로질러 배가 뜬다.
기와집 무너진 울타리를 벗어나
막힌 둑방을 열고
배가 뜬다.
에필로그
내 고향은 어디인가. 태초의 말씀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쟁쟁(錚錚)……나는 정말로 흙이었을까. 내 어머니도 내 어머니의 어머니도,……쟁쟁(錚錚)……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도 정말로 흙이었을까.……쟁쟁(錚錚)……나도 애벌구이한 딸 하나만 낳고 싶어. 어머니의 그 어머니들처럼 참구이를 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딸아이를 하나만 낳고 싶어.……쟁(錚錚)……황토 한 줌만 훔쳐오고 싶었어.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서 ……쟁쟁(錚錚)…….
화투(花鬪)
지난 설에 나는 몇 번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곤 했어.
창밖엔 때아닌 장대비가 쏟아지고, 난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어.
옆에서는 자꾸 죽으라고 하는데, 때로는 죽기 아까워 한참을 망설이곤 했어.
그러다가 인연의 끈을 놓고 물러나 앉아 있기도 했지.
이따금 내가 죽은 뒤에도 고성(高聲)이 오가고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어.
내가 죽고 난 뒤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기도 하고 벚꽃이 피기도 하고,
모란이나 국화가 만발하기도 했어.
그러다가 이따금 방향을 잃은 새들이 어디론가 날아가기도 했어.
피 터지게 싸우다가 된통 얻어맞은 사람들은
발기한 남근(男根)같은 지폐를 세곤 했어.
아이들은 세뱃돈을 헤아리고
저들끼리 윷가락을 던지기도 했어.
바닥에 떨어진 윷가락을 좇아 푸른 벌판을 돌아
집으로 힘차게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면
말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거야.
아이들이 말을 달리는 벌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내가 살던 곳으로 다시 살아오곤 했어.
그 곳에는 다시 매화가 지고, 벚꽃잎이 한들한들 떨어져 내리고,
모란도 국화도 시들시들 떨어져 내렸어.
날아가던 새들도 날개를 접고 수풀 속에 내려 앉아버리는 거야.
그런 다음 또다시 죽을까 살까를 고민해야 했어.
설날에 피 튀기며 다투는 싸움터에서 몇 번이고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또다시 죽을까 살까를 고민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하늘을 날으는 말을 잡아타고 까마득한 곳으로 떠나가곤 했어.
달[月]이 없는 초하루 하늘을 열고 멀리멀리 떠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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