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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신작시/박남희/문장이 나를 부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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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남희
문장이 나를 부를 때 외 1편
나는 지금껏 단어 하나의 숨소리로 숨어살았다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깃든다는 이슬방울의 추억도
내게는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물총새의 몸으로 냇가에 나가면
물소리에 섞어 말을 만들려 했으나
내 속의 말은 끝끝내 파편이 되어
또 다른 말의 피안 쪽으로 도망가고
나는 그냥 ㄱ,ㄴ같은
형상의 언어로만 살아있었다 밤마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무수한 내 안의 의미들이
꿈틀거리며 자꾸만 밖으로 튕겨나오려고 했다
나는 그 때마다 내가 어둠임을 깨달았다
어둠인 내 몸이 쏟아내고 싶어하는
내 안에서 무수하게 반짝이는 별들,
저 별들의 언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그 때서야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누군가 풀어놓은 이야기의 숲 속을 걸으며
나무들과 나무들이 중얼거리는 말들 속에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 있음을 보았다
그 숲 속에서는
내 작은 몸짓도 그냥 문자의 형상이 되어
나무들의 언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그 때마다 문장이 나를 불렀다
그래, 나는 이제 그의 형용사나 또 다른 형태의
부사가 되기 위해 그에게로 간다
내 일상의 해와 달과 별보다도 더 환하게
기꺼이 그의 살과 뼈가 되기 위해
지금껏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말의 고향을 찾아서,
담쟁이의 길
바람 속으로
짝발을 딛고 걸어갔지요
내 발에 닿아 있는 무수한 심장들은
두근거리고 있었지요
내 몸엔 발이 너무 많아
기우뚱거릴 때가 많았지요
때로는 바람을 막기 위해 세워 놓은 것들을
길인 줄 알고 타고 올라가기도 했지요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내 몸이 길이었음도 알았지요
내 몸에 덕지덕지 매달려 흔들리던 것이
바람인 줄도 알았지요
나는 문득
너무 멀어진 내 뿌리에게 인사하기 위해
몸을 돌이켜 보았으나
내 몸은 이미 너무 많은 곳으로 뻗어나가
내 눈빛과 이미 하나 될 수 없는
몸뚱이의 분열을 보았지요
내 몸은 끝내
내가 세우지 않은 집들을 덮고
그 집들이 바라보던 하늘을 덮어버렸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내 삶의 흔적으로 지은 집들조차
내 몸으로 하나씩 덮고 있는 것을 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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