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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기획/텍스트 확장을 통한 古典文學 교육/권순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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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텍스트 확장을 통한 古典文學 교육
권순긍(세명대 국문학과 교수)
1. 古典의 문제를 삶의 문제로
고소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이 단순한 질문으로부터 명쾌한 답을 얻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고소설은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그것을 해독해 내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작품의 주제나 형상화가 혹은 작품에 내재해 있는 사상적 기조가 오늘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소설의 교육은 '학교'라는 닫힌 구조 속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입시용 밖에 없어 감상에는 도달하지 못하기 일쑤다.
더욱이 여러 출판사에서 찍어내는 아동용 고소설인 이른바 '전래동화'도 고전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데 한 몫을 한다. 아동용으로 전이되면서 원 작품이 지니고 있는 사회성이나 역사성, 또는 풍부한 디테일들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말하기·듣기』 교재에는 <흥부전>의 내용이 모두 4장의 그림으로 제시되는데 놀부 박에서는 조선 후기 천민 군상들이 나타나 놀부의 돈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깨비가 나와 혼을 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림책이나 동화책 등 <흥부전>의 아동용 텍스트들은 모두 이런 식이다. 말하자면 일반인이 알고 있는 고소설은 곧 전래동화의 수준이니 여기서 어떻게 고소설의 품격이나 맛을 기대 하겠는가.
말하자면 우리에게 고소설은 대중성이나 전문성을 지닌 진정한 대중용은 없고 난수표 같은 입시용이나 유치한 아동용 밖에 없는 셈이다. 이러다보니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토대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고전문학 교육이 시작된다.
흔히 고전문학 교육에서 널리 통용되는 방법론은 "메마른 고증학과 지식주의의 압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김흥규), 그러면서도 고전문학의 역사성이 학습자의 문학이해와 성장에 의미있는 요소로서 체험하도록 하는 것 ― 이 두 가지 사이에 소통과 대화를 하는 역사적 이해의 원근법이다(김흥규). 이는 결국 고전문학 작품이 지금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고등학교 국어과 6차 교육과정해설에도 "고전문학 작품의 지도에서는 훈고주석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며, 당대의 삶과 정서를 이해하고, 오늘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문제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가르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학 곧 소설의 문제를 삶의 문제로 환치시키는 일이다. 소설은 우리들 삶을 총체적으로 문제 삼고 이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기에 문학교육은 단순히 문학만의 문제가 아닌 삶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돼야 한다. 흔히 학교교육에서 문학교육의 목표를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한다."로 규정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삶의 문제를 아우른다면 총체적으로 이해만 할 것이 아니라 삶을 고양시키고, 풍요롭게 함으로써 창조적인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문학 작품이 삶을 위해서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물론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연구가 아닌 문학교육의 입장에 선다면 당연히 삶의 문제를 핵심적 위치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학습자의 문학 이해와 성장에 의미있는 요소로서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작품이 어떤 작품이다가 아니라 어떻게 삶의 문제로 환치시키느냐가 핵심적인 과제로 대두된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학생들이 작품에 개입하는 텍스트 확장을 시도해 보았다. 이는 고전을 오늘 우리들 삶의 문제로 환치하여 유용한 텍스트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와 현재의 소통 혹은 대화라고나 할까.
2.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새로운 논의를 만들어가기 위하여 원전을 읽고 기존의 논의를 참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형식적 틀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 즉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처럼 참신하고 독창적인 논의를 만들기 위해 발표의 형태를 바꿔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주제로 선택한 것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한편, 약간 색다른 과제를 내주고 발표를 해보도록 했다. 대개 조별로 한 작품을 강독하고 정해진 주제를 발표하도록 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 과제는 이론적 틀이 아닌 형상적 언어로 작품을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왞ケ役오花뵌ケ役오? 가출 일지
왗簫袖花봤簫袖? 옥중 서한(혹은 유서)
왞浙括花뵌浙? 옹호론 혹은 놀부 옹호론
왙牙♣花뵀牙♣? 용궁 기행
왍濚鳧花봤돎括? 양반 거부 이유서
다소 엉뚱할지 모르나 이런 과제는 작품의 핵심에 접근해 들어갔을 때 가능하다. 작품의 구체성을 이론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으로 제시해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작품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고전 문학 강독' 시간에 <심청전>을 강독한 다음 학생들에게 '심청의 유서'를 써 보도록 했다. 학생들이 직접 심청이 되어 죽기 전날 밤 유서를 써 보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심청전>의 문맥대로 "나 죽기는 서럽지 않으나 내가 죽으면 눈 못 보는 우리 아버지 누굴 믿고 살란 말이냐" 식의 유서를 써냈다. 순진하게도(!) <심청전>에서 자신의 억울한 죽음보다 아버지의 장래를 걱정하는 데 착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일부 학생은 이 젊은 나이에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어감을 원통하다고 서술했다. 심청의 인간적 고뇌가 드러난 것이다. 15살의 어린 소녀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어찌 갈등이 없겠는가. <심청전>의 진정한 주제도 자신의 몸을 바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터무니없는 효(孝)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심청이가 죽은 후 심봉사의 행태를 보면 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 편의 발표문이나 과제를 통해 작품의 실상에 얼마나 접근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바로 여기서 열린 텍스트로서의 고전 문학이 가능해 진다. 물론 국문학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은 문제 제기로 그칠 수밖에 없다. 영화, 연극, 음악, 미술 등으로 텍스트를 확장하면 한 학기가 아니라 몇 년이 걸려도 부족하다. 하지만 일단 그런 길도 제시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1) 홍길동의 진정한 고민은 무엇인가? ― <홍길동전>
<홍길동전>의 핵심은 신분적 제약 속에서 자기 실현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활빈당 행수가 되고 병조판서를 제수받으며 율도국 왕에 이르는 것도 그런 과정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길동이 겪어야 했던 고민들은 작품에 드러나 있지 않다. 텍스트가 고전 소설이라 내면 묘사가 간략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학생들이 보완하려 했다. 이를 통해서 진정한 길동의 고민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했고, 봉건 저항의 실체와 그 한계를 가늠해 볼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오늘은 아버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다. 이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나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똑같은 능력을 갖고도 누구는 본부인의 아들로 태어나 출세를 하고, 누구는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도 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으니 이 세상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버님께서는 나보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시지만 그 공부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세상의 이치를 공부하는 것도 다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그 이치에 따라 일을 해서 부모님과 가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 아닌가? 나와 같은 신세가 어디 있단 말인가? (중략) 차라리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마음대로 뛰어놀고 어머니께도 마음대로 가서 놀 수 있건만, 이건 양반 아닌 양반으로 태어나서 양반도 아니요, 상놈도 아니어서 내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지를 모르겠으니 이 아니 원통한가?(김영주)
설혹 내가 정실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첩의 자식을 박대하는 제도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고, 서자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정실 자식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은 어떻게 보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하늘의 뜻, 서자들이 느끼는 참혹한 현실을 내가 깨닫고 바꿀 수 있는 기회를 하늘이 주신 것은 아닐까? 만약 그것이 진정이라면 나는 과연 어떤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이 땅에서 나라의 주인을 바꾸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이 원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쉽게 일을 벌인다는 것은 더욱 안 된다. 혹시 거사를 했다가 실패하는 날이면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가문은 삼족지멸을 당할 것이며, 그것은 남의 자식 된 도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그냥 집에서 호부호형하며 조용히 글 공부나 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조금은 후회가 된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다. 누가 나에게 길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같은 글)
80년대 학번 학생들이라면 이 사태를 어떻게 보았을까? 90년대 신세대 학생들이라서 그런가? 적어도 그것은 아니다. 서자로서의 자기실현 문제는 봉건 지배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지만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연륜을 앞세운 공세에 스스로 항복하는 것이나 율도국으로 대변되는 '왕도 정치에 대한 환상'이 그것이다. 홉스바움이 『의적의 사회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점이 한계이면서 동시에 의적의 존재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가 살던 시대의 가치관(그것이 비록 낡았다 하더라도)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의적으로서 추앙받을 수 있겠는가.
'충효장군'과 '인륜장군'이 등장하여 길동을 무릎 꿇게 만드는 학생의 재기 발랄한 보고서는 이 점을 명쾌하게 지적했다.
충효장군:네 이놈! 너는 어찌하여 사람의 탈을 쓰고 이 같은 짓거리를 하는고? 너 때문에 고통받는 주상과 너의 아비는 생각했는가?
길동:(벌벌 떠는 목소리로) 주…주…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어찌 주상과 아비의 은혜를 잊으리오.
인륜장군:네 이놈! 말은 잘하는구나. 네 죄목을 낱낱이 들어주겠노라. 첫째, 주상 전하의 심려를 끼치며 나라를 어지럽힌 죄. 둘째, 아비 속을 썩여 병이 나게 한 죄. 셋째, 근본이 천한 것이 주제도 모른 체 날뛴 죄. 네 아무리 날고 긴다 할지라도 이 조선의 거대한 바위를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넷째, 철 모르는 도적의 무리를 끌고 돌아다닌 집시법 위반죄, 살인죄, 방화죄, 국가보안법 위반죄…….
(중략) 세월이 지나 길동의 나이 이순에 접어드나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항상 걱정하더라. 이를 불쌍히 여긴 옥황상제 길동의 몸에 태아를 잉태시켜 왕위를 잇게 하였더니 첫째 왕자의 이름은 '실학(實學)'이요, 둘째 왕자의 이름은 '근대(近代)'라. 실학과 근대의 나이 팔 세 되매 총명함이 길동보다 더한지라 길동, 생각하는 바가 커 그 둘을 다시 조선땅으로 보내고자 한다.
길동:실학과 근대는 듣거라. 이 아비 미천하지 않았으나 미천한 취급을 받아 사회에 불만을 품은 지 오래나 그 '당신들의 천국'을 깨뜨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도망치듯 '나만의 천국' 속에 갇혀 있구나. 허나 너희는 아비의 실패담을 잘 보았다가 꼭 '우리들의 천국'을 이루도록 하여라. 가거라, 조선으로. 이 아비의 고향으로…….(손현승)
결국 이 학생은 <홍길동전>은 봉건 체제를 문제삼았을 뿐이지 새로운 대안은 그 다음 시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실학'과 '근대'라는 두 아들을 통해 제시해 준다.
(2) 사랑, 그 멀고도 험난한 여정 ― <춘향전>
<춘향전>의 주제는 '신분 해방'이라 한다. 양반의 노리개임을 거부하고 당당한 주체적 여성으로의 자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알아보기 위하여 학생 스스로 춘향이의 입장이 되어 '옥중 서한'(혹은 유서)을 작성해보도록 했다. 내일이면 죽게 되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춘향의 고민과 갈등을 편지 형식으로 써보는 것이다. 명문 대가의 도령을 사랑했던 죄로, 그리고 자기에게 강요된 신분적 족쇄를 풀어헤치고 한 주체적 여성으로 태어나기 위해 죽음까지도 각오했던 춘향은 자신의 심사를 어떻게 풀어갔는가.
불을 켜고 싶어요, 도련님. 밤은 또 찾아들고 있습니다. 어둠은 적막 헤치는 소릴 안고 곡조 없는 노랠 부르며 가만히 쇠창살을 하나하나 지나오고 있습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살이 찢기도록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고문이 서러운 것이 아닙니다. 태형 맞아 부은 다리, 옷 위로 배어나오는 끈끈한 핏방울이 서러운 것이 아닙니다.
(중략) 그대여, 당신을 본 것이 죄라면, 그토록 아름다운 당신을 만난 것이 죄라면 그동안의 아픔으로 그 벌을 다하겠습니다. 그대와 내가 사랑한 것이 죄라면 나는 기꺼이 그대를 보내지요. 그리고 평생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면서 살겠어요.
(중략) 저의 모든 부분을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기억해 주신다면 내일 그가 저를 내려친다 해도,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이 숨이 잦아진다 해도 의식이 희미해져 당신의 얼굴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한 나의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어요.(서도영)
<춘향전>의 핵심은 사랑이다. 가슴 저미는 절절한 사연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생각해 보라. 기생의 신분(<춘향전>은 주류가 기생계 이본이다)으로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한 죄로 죽게 되는 그 절박한 순간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그 사랑은 중세 봉건 사회의 근간이 되는 신분에 의해 저해되기에 문제가 된다. 양반과 천민의 신분상 격차는 이들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춘향이는 양반의 노리개로 만족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을 거부하고 춘향이는 당돌하게 목숨을 건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어느 학생은 춘향이의 행위를 '왕조 보안법' 위반 사례로 재판정에 세우기도 한다. 공소 사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 공소 사실은 요컨대 피고인이 왕조의 존립과 안전이나 중세 봉건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신분제 문란을 목적으로 사대부댁 자제를 유혹하여 정을 맺은 후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을 도모했다는 것이나, 피고인은 이 법정에서 피고인이 사대부댁 자제와 정을 맺은 것은 사실이나 신분제 문란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과연 피고인이 어떤 목적으로 사대부댁 자제와 정을 맺은 것인지에 관하여 살피건대, 피고인은 남원 광한루에서 그네를 타다가 어떤 도령을 만났는데, 그 도령이 집으로 찾아와 어머니 월매에게 딸과 혼인시켜 달라는 말을 하여 어머니 월매는 신분 차이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으나 그 도령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아며 수차례에 걸쳐 혼인시켜 줄 것을 요구하여 월매는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피고인과 그 도령은 결연하여 첫날밤을 보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도령은 과거에 급제해서 돌아오겠느라는 말만 남긴 채 한양으로 떠났다는 것이나, 형방 및 사법 포졸 사무 취급 작성의 피의자 신문 조서 및 피고인의 법정 진술 등을 종합하면, 피고는 광한루로 그네를 타러 갈 때부터 물좋은 도령을 헌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아주 요염한 자세로 그네를 타서, 잘 생기고 집안 좋은 도령 한 명을 홀리는 데 성공하고 그 도령과 의도적으로 정을 맺어 남자 잘 만나 양반으로 한번 떵떵거리고 잘살아 보자는, 그리하여 신분제를 문란케 하고, 궁극적으로 중세 봉건 왕조 체제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는 형방의 공소 사실에 부합하므로 왕조 보안법상 범죄를 구성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 공소 사실을 왕조 보안법 제1조와 신분법에 의하여 피고인에게 구형대로 징역 20년을 선고한다.(전승정)
어쨌거나 춘향이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분의 벽을 넘어야 하지만 자신을 노리개로 취급하는 변학도와의 대결도 피할 수 없어진다. 변학도에 대한 수청 거부는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행위가 되지만 춘향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겐 그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변학도가 누군가? 탐관오리의 전형이 아닌가.
“남원부사 말을 마오. 욕심이 어떠한 도적놈인지 민간 미전, 목포를 고래질하여 백성이 모두 거상지경(居喪之境)”이며“원님은 노망(老妄)이요, 죄수는 주망(酒妄)이요, 아전은 도망(逃亡)이요, 백성은 원망(怨望)”이라 한다. 자연 춘향에 대한 수청 강요는 민중 수탈의 한 양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다소 무리는 있지만 춘향에게서 투사적 면모를 확인하기도 한다.
천기의 자식이라 저를 부를진대 절행에 어찌 상하가 있으리오만, 늘 똑같은 자리에 서 있는 세상, 늘 고개 숙여야 하는 사람들. 절행도, 애정도, 좋은 이름일랑 다 양반만의 것이옵니까? 아니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누구의 자식인가는 다르나 그것이 어찌하여 그의 일생을 쥐고 흔들 수 있단 말입니까?
(중략) 누군가를 짓밟고 아프게 할 권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짓밟혀야 할 것은 저 사또 같은 자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싸우겠습니다. 어머님, 이것이 큰일이 아니라 하여도 저의 자리에서 싸울 수 있는 만큼 싸우다 죽겠습니다.
만약 서방님 한 번 못 보고 간다 하여도 후회하지 않으리다. 절대로 슬퍼하지 않으리다.(김은경)
이 글은 마치 민주화 운동이 치열했던 80년대, 감옥에서 쓴 양심수들의 옥중 서한 같은 느낌을 주지만 <춘향전>의 정치적 지향을 잘 포착해냈다. 하지만 소설의 사건 전개와는 무관하게 춘향의 내면에 도사린 살고 싶다는 욕망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그런 인간적 고민들이 작품에 충분히 드러난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한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춘향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도 유익하다.
자, 옥에 갇힌 춘향이로 돌아가자. 기막힌 것은 내일이면 죽게 되는 절박한 심정과는 무관하게 마음 편하게 실없는 소리나 지껄이는 이몽룡의 작태다. 오매불망 그리던 낭군이 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꼴이다. 이젠 정녕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독자와 판소리의 청중들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기에, 태연한 이몽룡과 절박한 춘향이의 감정적 편차가 크면 클수록 더욱 흥미를 갖지만 춘향이가 되고 보면 사태는 달라진다. 그런 춘향의 인간적 면모를 다음 글은 충분히 보완해준다.
서방님, 보시어요.
서방님, 소녀는 이제 서방님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가려고 합니다. 소녀는 변사또에게 수청을 드느니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서방님에 대한 사랑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윤리이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이렇게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자신을 지키며 변사또와 싸웠는데 서방님은… (중략)
춘향은 붓을 떨구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외쳤다. 서방님, 살고 싶어요. 서방님과 영원토록 살고 싶어요. 저는 어떡하면 좋은가요.(박진우)
현대적 감각이랄까? 텍스트와는 별도로 현재에도 살아 있는 춘향이를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왜 이해조가 <춘향가>를 <옥중화(獄中花)>(1912)로 개작하면서 춘향이 자신을 구해준 이몽령에게 “모지도다 모지도다, 서울 양반 모지도다”하며 원망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3) 흥부냐 놀부냐, 혹은 돈이냐 인간성이냐? ― <흥부전>
'흥부가 맘에 드느냐, 혹은 놀부가 맘에 드느냐'를 묻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으나 이 질문처럼 <흥부전>의 핵심을 드러내는 대안은 없다. 대개 어린 나이의 학생들은 흥부의 선함을 지지한다. 하지만 세상을 알만한 나이쯤 되면 놀부를 선호한다. 비록 탐욕스럽지만 놀부의 억척스러움이 이 험난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기에 유용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왜 놀부가 좋으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간단하다. 돈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보쌈 체인점의 상호도 '놀부 보쌈'이지 않은가).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면 이미 결판난 것이지만 흥부냐, 놀부냐의 우문(愚問)을 던지는 이유는 그것이 <흥부전>이 태어난 시대에 이미 날카롭게 예견되었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학생들의 지지는 예상대로 놀부 쪽이 우세했다. 그래서 흥부와 놀부의 대립을 '중세 보수주의'와 '신자본주의'의 대결로 보기도 한다.
흥부 옹호론이냐, 놀부 옹호론이냐를 묻는 말은 곧 관점이 중세 보수주의적이냐, 신자본주의냐와 같다. 중세 보수적이니 흥부는 자신이 스스로의 미래를 개척했다고 할 수 없다. 근면하게 일을 했다고는 하나 그건 자신의 끼니나 간신히 이어갈 정도의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이러한 허드레 노동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를 파악하지 못했다. 노동이 돈을 부르는 것이 아닌, 돈이 돈을 부르는 사회를 말이다.(정선진)
이 학생은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설파한다. 그래서 판소리의 수용층인 민중들이 가졌던 놀부의 악마적인 이미지를 걷어낼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감정적으로 덧씌워 놓은 놀부의 악마적인 이미지를 걷어낸 실제의 부농을 포착해야 한다"는 데까지 이른다.
결국 놀부의 현실성에 주목하여, 현실에서 새로운 시민 계급으로 당당히 떠오른 것은 놀부와 같은 부농이었지, 당장 먹을 끼니조차 없으면서도 갓이며 도폿자락을 챙기던 흥부는 아니라고 한다. 더욱이 놀부의 적극성을 신세대의 그것과 일치시키기도 한다. 보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며 애써 차린 거짓된 웃음보다는, 싫으면 싫다고 솔직히 말하는 놀부적인 신세대들 말이다.
아마도 <흥부전>에 보이는 흥부의 비현실적이고 명분주의적인 태도에 신물이 났나 보다. 흥부의 선한 마음을 감싸는 외피 중에는 분명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답답한 구석이 있다. 반면 놀부의 물불 안 가리는 성격에는 요즘의 신세대들이 추앙할 만한 적극성이 내포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외면에 드러난 성격상의 차이로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놀부의 악행을 현대의 관점에서 재단한 '놀부, 이백 년 후 옥황상제 앞에 서다.'(류하라)라는 보고서는 흥미롭다. 이야기는 죽어 지옥에 간 놀부가 이백 년 후 옥황상제 앞에 다시 서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놀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항목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부모의 재산을 독점하고 흥부를 구박한 점:자본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 적은 자본을 나누어 봐야 이익이 적고, 흥부는 셈이 빠르지 못하다. 흥부를 구박한 것은 경제적 이타심을 꼬집기 위한 것.
2. 제비 다리 부러뜨린 점:돈이 생긴다는데 제비 다리 하나 부러뜨리지 않을 놈이 어디 있으냐. 일확천금을 노리는 건 지상에 허다하다.
3. 빚값에 계집을 뺏음:계약대로 했을 뿐이다. 지상에서는 계약 문서를 조작해 남의 돈을 뺏고, 멀쩡한 처녀를 납치해 돈을 받고 판다.
4. 온갖 못된 짓을 행한 점:집에서 어릴 적부터 귀여움을 받고 자라서 그렇다. 요즘 어린 아이들을 보면 오히려 더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놀부의 악행은 오히려 애교에 가깝다. 온갖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하는 놀부가 이해도 된다.
놀부의 시대로부터 자본주의가 시작됐다고 가정할 때(자본주의 맹아론을 인정한다면) 이백 년이 지난 지금 그 자본주의는 물질 만능의 세태를 공고하게 했다. 돈에 의해 인간성이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이 시대의 황금 만능 세태는 놀부가 보기에도 비판받을 만하다. 놀부에게는 그래도 단초를 보였던 맹아기의 순수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부는 분명 18세기 사람이다. 따라서 그 시기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 시대의 가치 개념으로 보았을 때 분명 놀부는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인 인물이다. <예덕선생전>의 엄행수처럼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를 내포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된다. 이 때문에 흥부를 홍호하는 학생은‘이익 사회의 능률주의’(놀부)와‘공동 사회적 정의주의’(흥부)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분명한 건 흥부의 착한 심성과 따뜻한 인간애는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그것을 발현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냉엄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싸움은 타락할 대로 타락한 현실과 품성의 고귀함을 지키려는 이상주의간의 대결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현실은 분명 놀부 편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손쉽게 놀부 편을 드는 것 같다. 현실이 그러하므로. 어떤 학생은 '심정적으로는 흥부에게 끌리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놀부를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토로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 '박씨'는 진정 불가능한 것인가?
(4) 토끼가 본 세상 ― <토끼전>
산속에서만 살던 토끼가 자라 등에 타고 '용궁 벼슬'을 하러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말이 좋아 용궁 벼슬이지 용왕의 병을 고치는 제물이 될 뻔하다가 어렵사리 위기를 모면했다. 토끼가 용궁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병들어 신음하는 용왕이나 비린내 풍기는 신하들은 봉건 체제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토끼는 흔히 민중의 전형으로 얘기된다. 그 토끼가 용궁에서 본 것은 어쩌면 뿌리채 흔들리는 봉건 체제의 썩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도에서 '토끼의 용궁 기행'을 제시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보고서는 그 이후 토끼의 모습에 주목했다.
용궁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토끼는 산군(山君)이었던 호랑이에게 편지를 보낸다. 토끼는 이제 세상의 전부를 본 것이다. 산속에서 포효하는 호랑이가 무섭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왜소해 보이기까지 한다. 바다를 본 자에게 작은 물은 물로 보이지 않듯이. 그래서 연약하고 두려움에 비틀거리는 존재가 아닌 지혜로움과 총명함과 용기의 상징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즉 토끼의 용궁 기행은 세상을 알게 되는 성장의 계기로 작용한 셈이다. 더욱이 자신의 변화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한다.
그때 내가 용궁에 갔다 와서 느낀 것은 다른 곳에 있는 다른 내가 아닌, 이곳에 있는 나를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세상을, 어디나 똑같았던 세상을 이제 변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물론 이런 생각도 최근에 하게 된 것이지만. 당하기만 하는 토끼가 아닌 골탕을 먹이기도 하는 토끼로 난 껍질을 벗은 거지. 충혈된 눈을 한 번은 하얗게 반짝거릴 필요도 있다는 것을 세월이 흐르면서 문득 깨닫게 되었어.(이유정)
여기서 토끼는 꾀 많고 지혜로운 차원을 넘어 선각자의 모습으로까지 확대된다. 토끼의 용궁 체험은 세상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거기서 목격한 것은 껍데기만 남은 봉건 체제이고, 결국 나약할 것 같은 민중들이 힘을 모으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5) 천부는 왜 양반의 지위를 거부했는가? ― <양반전>
?lt;양반전>의 생명은 풍자다. 무너지는 봉건 사회를 그토록 철저하고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1, 2차 양반 문건을 통하여 천부의 당당한 양반 거부를 보여줌으로써 봉건 사회의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을 예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학사를 역사의 발전 방향과 일치시킬 때 혹은 근대적 지향을 주시할 때 우리는 천부를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천부의 '양반 거부 이유서'를 생각하게 되었다. 왜 천부는 양반 지위를 사고자 했고, 또 천 석이나 주고 산 양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가?
조준영의 '정선 군수 전상서'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에서 양반의 지위를 사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큰딸을 시집 보낼 때 양반 사위를 얻고자 했지만 거절당하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분 상승에 대한 욕심이 생기게 된다. 당시에 가난한 양반이 돈 많은 중인이나 평민들과 결혼하는 사례는 흔히 있었다. 엄격한 신분 제도가 무너지면서 생긴 현상이지만 신분보다는 돈이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양반에게는(생업에 종사하지 않기에) 먹고 살아갈 돈이 필요하지만 평민 부자에게는 돈은 걱정 없으나 고귀한 양반의 지위가 탐낼 만하다. 결국 막내아들이 양반의 지위를 사자고 하여 환곡을 대신 갚아주고 그 지위를 사게 된다.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등 따습고 배부르니 명예를 탐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첫번째 양반 증서는 황당한 금기 사항만 나열되어 있고, 두번째 증서에는 이익이 있으나 부당함만 가득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천부는 양반들에게 늘 당했던 일을 자신이 행하고자 하니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비록 상민들이 원망은 못하겠지만 마음속으로 얼마나 욕을 하겠습니까. 소인이 이미 당했던 일이고 당했던 수모였기에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며 당당히 양반을 포기한다. 그런데 천부가 "양반이면 군자답게 상민을 돕고 이끄는 자가 되어야지 도둑 심보를 가져서는 안 된다."며 당당하게 돌아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물론 돈에 대한 자신감이다. 쓸데없는 명분에 집착하기보다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이미 돈이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됐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민송기의 '양반 거부 이유서'는 그런 천부의 자신감을 잘 설명 해준다. 천부는 아내와 대화중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말한다.
부자 : …설마하니 신선 같은 양반이 그렇게 더러운 행실이야 하겠는가. 자네도 알다시피 내 비록 진서를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 신세이기는 하나 언문으로 ‘소학’등을 깨쳐 사람 도리를 살펴 살고자 하지 않나. 하늘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동은 좌상, 우상, 영상 등 재상 벼슬을 주거나 금을 섬으로 준대도 하지 않을 것이니 과히 염려 말게.
자본의 위력은 썩을 대로 썩은 봉건 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열었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했다. 그러기에 천부는 부를 토대로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행동을 보일 수 있었다. 바로 이들이 새로운 시대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시민 계급인 것이다. 물론 우리의 역사는 자생적으로 근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 존재가 미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천부의 존재가 자본의 위력을 떨치는 현대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박진철의 '천부, 재벌도 거부하다'와 이준수의 '현대판 양반전'은 이 문제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천부가 이백 년이 지난 뒤 지옥에서 '모범수'로 뽑혀 다시 환생하는 행운을 얻게 되고, '힘있는 사람'을 원하여 재벌로 태어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재벌의 특권을 듣던 중 천부는 재벌을 거부한다. 이유인즉 "이것이 사람의 도리요? 개의 도리요? 소생이 본래 천생이라도 이런 매족매국적인 짓은 안 하며 살았소이다. 이백 년 동안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은 모르나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성립되는 세상이라면 우리 나라도 땅을 치고 통곡을 해야 할 지경이외다. 이런 세상의 재벌보단 차라리 이백 년 전의 도둑놈이 낫"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봉건 체제를 붕괴시켰던 자본의 위력은 부르주아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는 현실적 근거였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그 독점성과 탐욕성이 두드러지면서 '물신(物神)'이 지배하는 시대를 열어 인간사의 모든 관계를 '냉혹한 현금 계산'으로 돌려놓았다. 양반의 지위를 당당하게 거부했던 천부는 시민적 단초를 보인 인물이다. 그 당시는 돈에 따르는 윤리가 확립되던 시절이었다. 연암의 「예덕선생전」을 보더라도 엄행수가 돈을 버는 모습은 건강한 노동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돈이 돈을 벌어오는, 자본의 탐욕이 두드러지는 시대로 오면 그런 모습은 찾기 힘들다.
우리는 여기서 왜 연암의 소설에 보이는 엄행수나 천부 같은 인물들이 1920, 1930년대의 근대 소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더욱이 그것이 일제에 의해 이식된 것이기에 <태평천하>의 윤직원이나 <삼대>의 조의관은 천부보다는 놀부에 가까운 인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한편 현대에 들어오면 자신이 소유한 부를 지키기 위해 정치와 결탁하게 되는데 '현대판 양반전'은 돈으로 국회의원을 사는 졸부들의 행태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돈을 많이 번 졸부가 청렴한 학자에게 돈을 주고 국회의원 공천을 받는다는 발상은 <양반전>과 별 다를 게 없으나 '국회의원 생활 지침서(현대판 양반 문건)'을 듣고 좋아라 하는 졸부의 모습은 천부와 천양지차다.
결국 졸부 왕부자는 돈을 물 쓰듯 하고 온갖 공약을 남발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결말에서 자본과 윤리의 문제가 <양반전>의 시대와 전도됐음을 목격한다. 윤리나 철학은 간 데 없고, 자본의 횡포만 두드러진 이 '글로벌 시대'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3. 열린 텍스트를 향하여
고전 문학 교육의 대안을 '텍스트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마련해 보았다. 그래서 텍스트의 비판적 읽기와 생산적 논의, 그리고 자발적인 대체 텍스트 만들기를 소개했다. 이는 결국 어떤 강요에 의해 텍스트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텍스트를 해석, 평가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고전을 살아나게 할 수 있고, 그 지겨운 암호 해독과 강요된 규정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된 것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이해' 차원을 넘어서 생산적인 단계로까지 수업을 확장시켜 보고자 한 것이다. 결국 이는 고전을 지금 여기 우리들의 삶의 문제로 환치시킨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색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춘향이가 돼보고, 심청이가 돼보며 용궁에 간 토끼가 되어 당대 삶의 문제를 부딪쳐보고 그것을 통해 오늘 우리의 삶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실상 <흥부전>의 문제의식은 시차를 넘어 우리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흥부 혹은 놀부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거기서 우리는 이 타락한 황금만능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은 그 다음이 문제다. 이런 것들이 제대로 이루어져 고전 문학을 죽은 보고(寶庫)에서 유동적인 텍스트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그 영역을 무한히 넓힐 수 있다. 영화나 연극, 음악이나 미술 분야에서 고전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검토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 예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왜 신분해방 의지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판소리 뮤직 비디오로 전락했는지를 따져볼 수도 있게 된다.
이제는 '왜'나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고전 문학을 닫힌 교실에서 문화의 광장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론적인 대안들이 고전 문학 교육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고전은 우리의 정신사나 문학사에서 무궁무진한 자원의 보고(寶庫)이고, 이를 살아 있는 텍스트로 만드는 것은 이 글로벌 시대에 정말로 중요한 작업이다. 고전을 다시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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