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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기획/김동훈/현대소설교육의 몇 가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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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훈
댓글 0건 조회 3,919회 작성일 02-06-1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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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현대소설교육의 몇 가지 과제
김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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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 시절을 지내면서 우리는 국어(문학)시간에 많은 문학 관련 책을 읽고 작품을 분석하고 외운다. 그리고 그 교육과정에 훌륭하게 적응하여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대학에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훌륭한 교과과정을 우수하게 통과한 대학 신입생들이 대부분 문학 관련 교양수업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호소한다는 사실이다. 교육 현장의 목소리는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공부 잘한다는 중고생에게도 국어(문학 포함)는 너무 어려운 과목이다. 두터운 참고서와 문제집만 반복해서 보았을 뿐 인문사회과학과 관련된 동서고금의 고전이나 세계명작, 한국명작들을 폭넓게 읽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언어와 논술의 미묘하면서도 다양한 문맥을 짚어내는 것은 꾸준한 독서를 통한 사고력과 독해력의 뒷받침 없이는 지난한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대학 교양수업에서 학생들이 중고생 시절에 이미 읽었을 것을 전제하고 문학 강의를 진행하다 보면 아차 싶을 때가 적지 않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든가 <햄릿> 같은 셰익스피어 대표 희곡, <적과 흑> <죄와 벌> 같은 세계명작, <삼대> <태평천하> 같은 한국명작 등도 거의 모르더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리얼리즘의 전형이론이나 이미지를 설명할 때 예로 드는 것이 <춘향전>, <흥부전>, 김소월 시 같은 전국민적 공유 텍스트밖에 없는 정도이다. 놀부라는 캐릭터가 초역사적인 악인의 전형으로 평가되기보다는 18,9세기 신분제가 동요하는 시대에 평민부농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형이라는 설명도 그리 재미있게 듣지 않는다. 

문제는 또 있다. 대학 강단의 국어학자나 문학연구자들이 자기만 아는 지식을 자기만의 언어로 가르치려 든다는 점이다. 교육 현장, 특히 교사의 요구와 학생의 눈높이와는 동떨어진 서구 문학이론을 도입하여 학자들의 지식 자랑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이 난해하고 우리 실생활과도 잘 맞지 않는다. 중고등학교나 대학 교양과정이나 문학 연구와 별로 다르지 않은 내용을 문학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데, 이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지 근본적인 고민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소설교육이란 과제도 다시 정리해보았으면 한다. 소설 교육이 소설에 대한 문학적 지식과 이론을 학생들에게 학습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소설을 통해 인간교육을 시킨다는 교육적 측면을 강화해야겠다는 말이다. 이 글은 현재 교육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설 교육의 방법론을 개괄하고, 이런 교육방식이 현실 제도 속에서 어떻게 작용할 수 있나를 원론적인 차원에서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이론 소개보다는 실제로 활용가능한 바람직한 문학 수업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아울러 소설 교육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과 대안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2

소설 교육은 도대체 '무엇'을  '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소설 감상 교육의 이상적인 모델은 무엇인가? 소설을 잘 가르치려면 먼저 문학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원리적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문학연구자, 문학교육전공자, 문학교사들의 연구 성과와 실제 경험을 종합할 필요가 있다. 즉, 작품 해석 - 교육방법 - 실제 교수법이 긴밀하게 통일되어 교육현장에서 활용하기 좋은 모델로 제시되어야 한다.    

교사들에게는 문학전공자들의 연구성과와 실제 작품 해석이 지속적으로 버전업되어 제공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교사 자신이 비평적 안목을 갖고 주체적으로 해석·감상하여 지도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실제로는 문학연구자들의 작품 해석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들의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눈높이' 수준의 해석이 다양하게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들 성과물이 교사용 지침서나 참고서 형태로 일방적으로 전달된다는 데 있다. 교사들조차 연수를 받을 때 눈높이 교육을 받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상호반응적인 교육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그 어려운 대입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해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필자 이름을 뺀 시나 소설 한편을 읽혔을 때 어떤 반응을 얻을 수 있을까? 놀랍게도, 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학생 대부분이 시나 소설 한 편을 온전히 자기 영혼으로 느끼고 자기 말투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왜 그럴까? 무슨 작품을 어떻게 배웠길래 그런 것인지 생각해보도록 한다.  

먼저 무슨 작품을 배웠나 보자. 고등학교 국어 국정교과서에 실린 현대소설을 보면, 김성한의 <바비도>, 김유정의 <동백꽃>, 염상섭의 <삼대>, 하근찬의 <수난 이대>, 김유정의 <메밀꽃 필 무렵>,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 박경리의 <토지> 등이 있다. 이는 한국근현대소설사의 대표작 중에서 중등교육과정의 목표에 걸맞는 작품 다수를 수록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 선정에는 문학사적 가치편향이 일정 정도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절대적 권위를 감안하면 보수적 우익 이념의 문제가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사회와 역사, 현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순수하고 더욱 문학의 본질에 가까우리라는 인식을 암암리에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가치관과 역사의식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영향의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학생들에게 이미 완결된 지식체계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주입식 교수법도 커다란 문제이다. 가령, "위에 인용한 현대시의 주제로 알맞은 것을 고르시오."란 문제가 있다고 하자. 답안 보기로, '(1)번 첫사랑에 실패한 사춘기 청소년의 실연의 고통 (2)번 불륜으로 점철된 가족사의 비극 (3)번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의 고통과 광복에의 의지 (4)번 정의의 평화를 위협받는 인류애적 위기' 등이 예시되었다고 하자. 학생들 대부분은 주저 없이 3번을 정답으로 '찍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작 시 텍스트의 내용을 이야기해주지도 않았는데,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첫사랑에 실패해서 한창 실연의 고통에 빠져있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영혼에는, 그 사랑이 진정한 것이었다면 어떠한 시를 읽더라도 비관적 세계인식이라는 엇비슷한 해석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작품에 나오는 어둡고 부정적인 언어 이미지에서는 실연의 고통이, 밝고 긍정적인 진술에서는 다시 찾은 사랑의 기쁨이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실연의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중이라도 대한민국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1)번 답을 고르지 않는다. 그게 솔직한 자기 마음이라도 그렇다.

그렇다면 국어선생님들은 문학을 가르치면서 왜 망국의 설움과 광복에의 의지를 역설해야만 하는가. 풋사랑에 빠져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 속에 성장하는 청소년들을 독립투사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났을까? 

중고등학교에서 충실하게 문학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도식적이고 강력한 방법을 암암리에 터득하고 있다.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배우지 않은 시나 소설 중 작가의 성향이나 시대적 배경이 모호한 작품을 제시하였을 때 그들은 맨 먼저 그 텍스트가 식민지 현실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어둠' '밤길' '겨울' '눈 서리' '오두막' 등의 단어가 중요한 시어로 나타나면 '나라를 빼앗긴 일제 치하의 암울했던 상황에서...'라는 말로 작품을 해석한다. 궁핍한 생활이 전개되거나 억울한 상황이 묘사된 소설의 한 부분을 제시해도 마찬가지이다. 일제의 가혹한 통치 아래 신음하는 민족의 생활상이라는 해석의 틀과 어떻게든 작품을 관련시키려 든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의 고통과 광복에의 의지'이라는 주제사상은 대한민국 중고생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현대문학 작품 해석의 틀로 작동한다, 게다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감상이나 현실 비판은 허용되지 않고 독립이나 통일에의 의지라는 공동체의식만 절대시되며 강력한 규범으로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교육 현장에서 당대에 대한 올바른 현실인식, 역사의식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친일'이라는 문제는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그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후 해방후 분단시대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문학사를 통해 레지스탕스문학을 중요한 미적 가치로 배운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남북한 교과서의 분단이데올로기 탓에 상당 부분을 빈 칸으로 남겨놓는다. 일제 치하 우리 조상들이 그처럼 우국충정을 보이고 독립투쟁을 벌였다면 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는지 만족할만한 설명이 따르지 않는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위해서는 친일과 항일, 분단과 통일에 대한 다양한 문학 작품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감각을 기를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나온 대부분의 문학작품을 천박한 역사주의적 해석으로 오로지 하는 주입식 교육과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학생들이 정말 독립운동하겠다고 나서거나 자유를 쟁취하겠다고 나선다면 말리는 것도 국어선생님 몫인 것처럼 생각된다. 진정 현실비판적 시각이 중요하다면 교과서에서 프로문학이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쟁문학을 강화하거나 친일 문학 작품을 폭로하고 역사적 재평가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프로문학, 비타협적 민족주의문학, 친일문학 중에서 어느 것이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 판단하는 문제는 현재적 역사인식과 맞물려 간단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문학이 우리의 지난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진보적 문학의 흐름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분단으로 인한 이념적 갈등,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반쪽의 문학사를 가르치고 있는 점은 인정해야만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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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학생들에게 시나 소설을 가르칠 때, 올바른 역사의식과 비판적 현실인식을 배제하거나 반대로 독립투사라는 단 한가지 역사주의적 해석만 강요하는 것은 둘 다 문제가 많다. 그렇다면 교육방식에는 문제가 없었을까 반성해보도록 한다. 수업 시간이 아닌 사적 대화의 공간이나 인터네 상의 사이버토론에서 학생들과 작품을 논하다 보면, 학생들의 영혼이 판에 박힌 듯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너무나 다양하게 파편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수업시간에 시나 소설을 읽은 느낌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입을 다물거나 예상되는 답만 되뇌는 것일까? 아마도 학생들은 대입시험을 준비하는 그 고단한 과정에서 문학작품을 자기 힘으로 느끼고 솔직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고 알게 모르게 길들여져 온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국어(문학)시간만큼은 '정답 찾기를 위한 외우기, 베끼기'가 없었으면 한다. 학교 교육에서 문학작품 감상을 통해 인생과 사회에 대해서 공부하는 시간만큼은 정답 찾기를 해선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정답이란 말 대신 사용하는 '모범답안 만들기'란 것도 마찬가지이다. 모범답안 역시 정답의 변형일 뿐이다.

우리는 늘상 문학작품을 통하여 통념적으로 알고 있었던 세상일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트이게 되길 기대한다. 어려운 철학 책이나 논문을 해독하지 않고서도 흥미를  찾아 나서면서도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즐겁게 작품 줄거리를 따라 읽다가 문득문득 "아하, 이런 인생도 있구나!"라고 감동에 빠지거나, "그래, 나도 그랬어, 나도 이런 생각을 했어!"라고 공감하는 순간은 참으로 유쾌할 것이다. 더구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우연히 자신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설령 의견이 다를지라도 토론을 통하여 얼마든지 다양하게 작품을 느낄 수 있는 만큼 더욱 대화를 늘릴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자기 느낌을 이야기할 때는 다른 유명한 사람의 권위 있는 평이나 책 뒤에 붙은 해설 등에 힘을 빌려 '남의 느낌을 거짓되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뭔가 따로 '정답'이 있을 텐데 그것과 내 느낌이 틀릴까 두려워서 자기의 솔직한 의견을 숨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좋은 작품이란 모든 사람이 똑같은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읽은 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삶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작품이야말로 진정 좋은 문학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답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인생의 문제를 던져주는 문제집이라 할 수 있다.

문학교육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같은 작품을 두고 다양한 의견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개개인의 영혼 하나하나가 중요하듯이 문학을 통하여 인생의 진면목을 새롭게 발견하고 자기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척하는 일은 어차피 다양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 점은 지난 10여년간 국어 강의시간에 만난 학생들과의 토론과 대화를 통해서 터득한 진실이다.

여기서는 지난 몇 해동안 국어 강의시간에 만난 학생들과의 토론과 대화를 소개하기로 한다. 오랫동안 현대소설을 가르치면서 좀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 늘 고민했고, 그 과정 속에서 문제제기와 토론식 수업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작품을 읽고 의견을 발표하며 질문과 답변을 교환하고 논평을 덧붙이면서, 언젠가는 이 과정 전체를 소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글쓴이가 낸 책이 학생들과의 소설 토론모음인 『교실에서 세상 읽기』와 『우리 소설 토론해 봅시다』이다.

우리는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고원정의 「사랑하는 나의 연사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때로는 교사가 소설에 관해 문제를 내고 학생들이 풀기도 하고, 때로는 발표조를 짜서 자기들의 토론내용을 보고하고 동료들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보려고 애썼다. 어떤 경우에는 교사와 학생들의 의견이 맞지 않아 적잖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교사의 문제 제기와 토론 진행방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토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토론 수업의 예로, 박지원의 「허생전」과 최시한의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을 예로 들었다. 최시한의 소설은 고등학교 교실에서 소설 한 편을 놓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나아가 자기의 삶까지 연결시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는 우리가 하려는 '소설 읽기를 통한 세상 배우기'에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그를 통해 문제제기-토론식 소설감상법을 터득한 후에는 이인직의 「혈의 누」부터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소설사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을 다음 순서로 토론 진행하였다. 

    1. 작품을 읽기 전에 - 작가와 작품 해설
    2. 작품을 읽어볼까요 - 작품 일부 인용
    3. 다들 토론해 봅시다 - 문제 제기와 토론 
    4. 제 생각은 이래요 - 토론 논평과 새로운 문제 제기

먼저, '작품을 읽기 전에'란 소제목 아래 작가 소개, 줄거리, 문학적 특징, 문학사적 의의 등 전반적 해설을 간략하게 붙였다. 가능하면 필자의 개인적 의견을 따로 넣지 않고 널리 알려진 기존 견해를 요약 압축하여 작가론, 작품론을 실었다. 이는 참고서 자습서 식의 단순한 소개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작품을 읽어볼까요'란 소제목으로 작품의 일부를 읽혔다. 장단편 상관없이 수업시간에 전체를 다 읽힐 수 없으므로, 작품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대목을 한두 부분 인용하였다. 사실 문학작품을 제대로 맛보고 느끼기 위해서는 부분 인용문이나 요약본(다이제스트)은 금물이다. 국정이든 검인정이든 국어, 문학교과서의 약점 중 하나는 소설 한편을 온전하게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 모두 원활한 토론을 위한 전제로서 텍스트의 일부만 인용한 것인 만큼 반드시 전체를 찾아 읽도록 강조해야 할 것이다. 

'다들 토론해 봅시다'에서는 문제 제기와 토론 내용을 실었다. 작품에 관련된 쟁점이 될만한 문제를 던지되 종래의 관련 논의처럼 딱딱한 논문 투를 지양하고 친근하게 가슴에 와닿는 문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를테면 김동인의 「감자」에서 복녀의 입장이 되어 그녀의 타락을 변호해 보자는 식이다. 정답을 빨리 찾기 위하여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사회역사적 의미를 직접 묻기보다는 주인공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평가하거나 주변인물의 입장에서 뒤집어 생각해 보자는 우회적인 문제 제기와 설명 방식을 택하였다. 학생들의 의견을 가능하면 논쟁적인 구도가 드러나게 정리하였다. 소설 토론의 실제 예를 몇 가지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이인직, 혈의 누 - 구완서의 부국강병책을 평가해 봅시다

(가) 광개토대왕 같은 웅대한 포부 (백희범)
(나) 당시 시대상황의 표현 (박준희)
(다) 일본을 위한 주장일 뿐 (백창진)
(라) 행동의 결여, 이지(理知)의 결여 (선은희)

이광수, 무정 - 이형식의 '교육으로 조선을 구하자'는 논리에 대하여

(가) 자유연애, 민족주의 이념의 직설적 표현(한상렬) 
(나) 소년적 감상주의(유선) 
(다) 참을 수 없는 계몽주의의 무지몽매함(정한아) 
(라) 일제 침략을 미화한 의식화소설 (허철) 

김동인, 감자 - 복녀의 타락을 변호해 보자

(가) 복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김현상)
(나) 복녀의 삶은 분명 잘못된 방식(정선진)
(다) 남자들이 더 나쁘죠(김효웅)
(라) 당신들이 가난을 알기나 해(김루리)

다음 '제 생각은 이래요'에서 토론자의 다양한 논란에 대한 교사의 논평과 해설을 달았다.  취지 자체가 정답.모범답안 찾기 아닌 생각하는 방법의 터득에 있기 때문에 모든 다양한 의견을 다양함 그대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의견들이 지닌 논리구조와 행간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혈의 누」 - 외세의존적 개화논리의 허와 실    
「무정」 - 일제 초기 계몽주의자의 이상(理想) 
「감자」 - 세계의 횡포와 자아의 타락  

여기서, 교과서적 통념을 안이하게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보다는 문제 자체를 고민하고 자기만의 신선한 주장을 내세우려 한 발상의 전환이 높이 평가되었다. 끝으로 '다른 문제는 없을까요'에서 실제 토론에서 빠진 또 다른 문제들을 떠올려 새로운 토론거리를 제기하였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교사와 학생들이 서로의 신뢰감을 바탕으로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책읽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흔히 하듯 작품집 뒤에 나오는 해설이나 남들이 쓴 참고서, 논저를 보고 작가.작품에 대해서 아는(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혼이 느낀 것을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한 후 다운 받은 관련자료를 적당히 편집해서 과제로 제출하는 끔찍한 현행 수업행태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학생들이 교사를 신뢰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수업 중에도 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자신의 자유분방한 생각을 다양하게 드러내는 계기를 만들도록 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현대소설교육을 대중문화와 연계시키는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한다. 

최근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가는 문학교육학의 방법적 시도가 현장에서 활발하게 실천·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 교육을 문화론 차원에서 보는 것도 한 경향이다. 인문학, 문학 또는 문학 교육에서 활용되는 문화의 개념은 다원적이고, 복합적이며 중층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문학 작품의 본질을 문화적 차원의 질문을 통해 밝히는 작업이 가능하다. 이 경우 기존의 신비평적 해석처럼 작품 안의 언어형식적 요소들의 관계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경계를 벗어나 텍스트와 문화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즉 문학 텍스트 자체로부터 문학의 본질과 문학의 생산, 수용 및 문화적 유포의 조건에 대한 질문으로 관심을 바꾸거나, 혹은 문학 텍스트 자체에 대해 말할 때 그 논의의 문화적 철학적 조건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문학 작품이 사회 문화적 산물이며 우리가 공부하는 문학 작품 역시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 특히 대중 문화와 분리하여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요즈음은 대중문화가 범람하는 시대이다. 전통적인 고급문화나 주류문화, 본격문화의 존재 방식이 흔들리면서 여러 형태의 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문학의 죽음과 인문학의 위기'론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현상이다. 학생들이 본격문학 작품을 읽지 않으며 그 결과 문학의 위상과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고들 하지만 실은, 문학 창작자들이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데서 오는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본격문학을 표방하는 작품이 너무 난해하고 비평가와 학자의 해석이나 해설 또한 '강단비평'의 폐해 때문에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생활에 쫓겨 문학예술에 접근할 심정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에게 작품 해설조차 원문보다 난해하다면 더욱 문제인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학생들에게 문학이론을 설명할 때 대상의 편차에 상관없이 늘상 떠오르는 예는 고전 작품이다. 그런데 실은 <춘향전>, <흥부전> 같이 한국인 누구나 다 아는 고전문학도 제대로 된 원전텍스트를 직접 읽어본 적이 없으니 문제이다. 하지만 같은 이론을 설명하다가도 구체적인 작품 예를 <타이타닉>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영화나 <스타크래프트> 같은 컴퓨터게임, <모래시계>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들면 수강생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학생 탓만 할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가르치는 선생은 활자매체로 자기 영혼을 키워온 세대인 데 반해, 배우는 학생들은 영상매체와 멀티미디어로 무장된 신감각세대이기에 교육현장의 위기가 실감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좁은 의미의 근대적 소설보다는 넓은 의미의 현대적 소설로 시야를 넓힐 필요도 있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텔레비전 드라마, 게임시나리오까지 서사체(The Narrative)라는 묶어서 함께 다루는 문학 교육적 안목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이러한 학생들의 변화하는 요구에 맞춰 '언어 사용'으로서의 국어 교육적 활동과 '문화 향유'로서의 문학 교육을 아울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문학교육의 교수-학습 방법은 현장 교사들의 지속적이고도 열정적인 노력에 힘입어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 중 시청각 기자재를 통한 영상매체 활용 문학교육의 가능성을 얻어낸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학생들의 적극적인 수업 참여와 문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대중문화와 관련된 측면에서의 문학교육은 이 같은 방법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글쓴이가 낸 책이 『여간내기의 영화교실』과 『영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이다.

결론적으로 현대소설교육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를 골라 여러 가지 접근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교사는 학생들에게 '그건 틀렸다'는 말을 피하고 '넌 참 다르구나, 특이하구나' 라는 열린 태도를 취해야 한다. 좋은 작품이라면 읽는 이마다 서로 다른 의미도 읽어낼 수 있을 테니, 서로 다름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하여 자기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토론방식이 쌓여 자기 마음 속에 숨기고 있는 속생각을 털어놓고 고민을 함께 나누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삶의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문제제기-토론식 현대소설교육'이 바라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이 아닐까?  

이러한 토론 수업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사물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가르치고(어떤 학생들은 그것도 또 하나의 강요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거꾸로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은 늘 새로운 세대로서 끊임없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세상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지속적으로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강의 내지 교육이란 선생이 학생을 가르쳐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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