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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초점/첫 걸음으로부터 먼 길까지의 충실/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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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문제작, 문제인물, 이 시간의 한국문학
첫 걸음으로부터 먼 길까지의 충실
맹문재(시인, 경희대 강사)
김충규,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다층
최영규, {아침 시집}, 문학아카데미
백인덕, {끝을 찾아서}, 하늘연못.
남혜숙, {칼날도 아프다}, 문학세계사
문동만, [종묘에서 명동까지]({노동자문예 삶글}, 삶이 보이는 창)
최창균, [노천탕] / 이향지, [불가능한 꿈]({리토피아},리토피아)
"우물을 아홉 길을 파 내려갔다 하여도 샘솟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면 우물을 포기한 것과 같다"([掘井九 而不及泉.猶爲棄井也],盡心·上). 그렇다. 우물을 아무리 깊이 파 들어갔다고 해도 샘이 솟아오른 데까지 이르지 못하면 파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첫 시집을 낸 시인들에게 또 창간된 문학지들에 맹자의 이 말을 전하고 싶다. 기대를 안고 시집을 내어도 워낙 많은 기성 시인들이 있어 자신의 뜻을 세우기는 대단히 어렵고, 또 새로운 문학잡지의 경우에도 고급 독자층이 두텁지 않은 우리의 현실에서 그 틈새를 파고들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맹자가 말한 충실(充實)을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충실이란 자각적인 노력을 통하여 자신 속에 내재하는 선한 본성을 확충하여 외형적으로 넘쳐나게 함이다. 이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시초를 계발하는 것이다. 즉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인의 시초이고,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의의 시초이며, 사양하는 마음이 예의 시초이고, 옳고 그르게 여기는 마음이 지의 시초인데([惻隱之心,仁之端서也.羞惡之心,義之端也.辭讓之心,禮之端也.是非之心,知之端也],公孫丑·上) 충실을 기하여 그것들을 나타내야 한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과 사양하는 마음과 옳고 그르게 여기는 마음으로써 약한 토대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김충규,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다층
김충규 시인의 시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표상은 '어둠'이고 공간의 표상은 '죽음'이다. 어둠은 밤·저녁·달빛 등으로, 공간은 무덤·죽음·물 속·우물·늪·사막·도시 등으로 대치되거나 확장된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에는 고양이와 새와 물고기와 낙타 등이 시적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길을 가고 있는데 '환한 곳'에 도달하고자 한다. 현재의 어두운 상황에서 벗어나 이상향으로 삼고 있는 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시세계는 단적으로 말해서 '환한 길'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곳은 쉽게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시인은 불안을 느끼고 망설이고 또 절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찢고 있다
새끼들이 어딘가에서 떨며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의 눈은 터널처럼 깊고 그 속엔
어둠이 고여 있다 그 어둠을 파내어
내 눈에 바르면 나도 저것처럼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슬픈 아비가 될까
마흔이 내일 모레인데 자식들은 겁도 없이
가시로 내 생을 쿡쿡 찌르며 자란다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 폐결핵에 걸린 나는
한동안 붉은 각혈을 하다 아침마다 한 줌씩 알약을 먹으며
헉헉거린다 거울을 보면 내 눈빛은 차츰 흐릿해져간다
손톱으로 거울을 찢고 거울 속의 나를 끄집어내어
눈을 후벼파고 싶은 나날들 (중략)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에서
작품에서 "고양이"가 시인의 자아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고양이. 고양이는 문학의 상징에 있어서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독립성이 강하고 발걸음이 조용하고 그 어두운 색깔과 응시로 공격적이고 잔인한 대상으로 그려져 왔다(장영수 역,{문학의 상징, 주제 사전},청하). 시인이 이 공격적인 고양이를 자신의 자아로 내세운 것은 고양이와 같이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시인의 삶이 그만큼 어둡고 침울한 것으로, "마흔이 내일 모레인데"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 폐결핵에 걸린 나는/ 한동안 붉은 각혈을 하다 아침마다 한 줌씩 알약을 먹으며/ 헉헉거"리는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현실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아프게 토로하는 "슬픈 아비." 그리하여 시인은 쓰레기봉지를 찢는 고양이를 무심히 지나치지 못한다. 고양이의 그 행동을 어디에선가 기다리고 있을 새끼들을 위하는 지고한 모습으로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있어서 고양이는 거울과 같은 존재? 甄? 자신의 어두운 삶을 공격적으로 헤쳐나가는 본보기로, 그 거울을 지닐수록 희망이 쌓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방금 수면 위로 뛰어오른 물고기가 물고 간
달빛. 그러나 달빛은 물고기의 몸 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배설물과 함께 강 밑바닥에 쌓일 것이니
그렇게 쌓인 달빛들 수북할 것이니
비오는 밤이거나 달뜨지 않는 밤이 와도
강은 제 속에 쌓인 달빛들로 환해지리
그 환함으로 물고기들 더듬지 않고도 길을 가리니
내 한 줌 강물을 마신다 내 몸 속도 환해져서
캄캄함의 세월이 와도 더듬지 않을지니
신발을 벗어놓고 정중히 강을 경배함이
어찌 사람의 할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
---[강] 전문
"달빛"이 강바닥에 쌓여 길을 환하게 만들 것이라거나 물고기들이 그 길을 통해 제 길을 잘 갈 수 있으리라는 상상은 뛰어나다. 시인이 그 강물을 마시면 자신의 몸 속도 환해질 것이라는 것 역시 그러하다. 그만큼 시인의 세계인식은 울림을 주는 것이다.
인간이 한 방울의 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시인이 강에 달빛을 담은 것은 의미가 깊다. 강 속에는 이 세계의 琉꼭湄湧?즉 온갖 바람과 흙과 꽃과 새들과 그것들의 색깔과 냄새와 소리와 향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작품의 배경인 강물은 이 세계와 동떨어진 어떤 장소가 아니라 시인이 살아가는 이 세계를 의미한다. 결국 시인이 강 속에 달빛이 쌓이길 희망하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도 그러한 빛이 비춰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삶의 결과보다도 과정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달은 완전하게 정착하거나 안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날마다 그 모습이 변하는 것이어서 마치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시인이 달을 추구하는 것은 삶의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달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면서도 현재의 자신을 지키면서 나아가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잘 조응된다. "물고기"는 그 강물 속에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결국 시인은 그 물고기와 같이 환한 세례를 받고 싶은 것이다.
시인의 그 바람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마지막 행에서 "강을 경배함"을 "사람의 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시인이 달빛 담긴 강물을 떠 마시겠다는 행동은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려는 행동이다. 시인이 자신을 긍정할수록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최영규, {아침 시집}, 문학아카데미
최영규 시인의 시적 대상은 주로 식물이다. 제1부에 실린 15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채송화, 곰취, 원추리, 참나물, 나뭇잎, 포플러, 버드나무, 참나무숲, 나팔꽃, 피사리, 옥수수, 풀섶, 꽃씨 등에서 그 사실이 여실히 확인된다. 그리하여 작품의 공간적 배경 역시 강물이나 바다보다 산이나 들이 많다.
그런데 시인은 그 식물들을 관찰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찾아 나선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것은 뒷길로 가거나([부의]), 완행열차를 타거나([곰취와 함께]), 버스에 오르거나([신복리에 가려 하네]), 야간산행을 하거나([야간산행]), 밤차를 타는 것([봄, 창죽리 멍바우골 이용진 씨와 밤차를 타다]) 등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그 길을 자신의 길로 여기고 적극성을 띠는 것이다.
봉투를 꺼내어
부의(賻儀)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 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중략)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부의(賻儀)]에서
언뜻 보기에 "부의"는 죽음을, "꽃씨"는 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꽃이나 사람이나 모두 시간적 존재이므로 꽃씨는 삶과 죽음 중에서 후자에 해당된다. 한 인간이 출생하여 성장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듯 꽃 역시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끝내 꽃씨로 남는 것이다. 따라서 꽃씨는 부의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그 죽음은 이 세계의 끝이 아니라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듯이 부의나 꽃씨는 삶의 의미를 갖는다(big-bang설을 믿는다면 죽음은 결코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별을 낳는 재료가 된다). 즉 모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더욱이 부의의 대상이 할머니와 꽃씨로 연결되어 있어 여성을 나타내기에 그 의미는 심오하다.
이러한 시인 인식은 "할머니"와 "나"와의 관계로 다시 집중된다. 시인은 할머니가 이 세상에 없지만 아주 소멸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즉 손자인 내가 남아 있다는 사실로 당신이 살아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당당히 간다. 시인 자신도 그 길을 언젠가 가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죽음과 삶이 다른 세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시인은 이처럼 "길"을 통해 꽃(식물)에 다가간다. 주어진 꽃을 단순하게 바라보거나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이는 꽃같이 아름다운 삶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그 아름다움의 대상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봄나물을 팔기 위해 짐 보따리를 들고 완행열차를 타는 사람들, 연둣빛 씨앗들을 안고 있는 신복리 사람들, 홀홀 단신이었지만 당당했던 山집 할머니, 묻지도 않은 자식 얘기를 끝도 없이 하는 삼공리 민박집에서 만난 할머니, 뒷산 고사리밭을 고되게도 뜯고 다니던 봉수 어머니, 매캐한 연기에 눈물을 닦으며 논두렁에 불을 놓는 아이들, 돌아가신 어머니, 위아래가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흙물이 그대로 배어 있는 운동화를 신은 창죽리 멍바우골의 이용진 씨 등이다. 그들은 모두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고 밀려난 존재들인데, 시인은 그들을 꽃같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존재들로 보고 함께 하려고 하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善)하다고 보고, 개개인의 자각적인 행동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중국 미학의 권위자인 이택후(李澤厚)와 유강기(劉綱紀)가 편한 {중국미학사}(권덕주·김승필 공역)에는 맹자의 미학과 공자의 미학을 비교한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공자는 개인 인격의 능동성과 독립성을 충분히 강조하였으나 그 이상적인 토대는 온유돈후(溫柔敦厚)여서 온화하고 겸손하며 엄숙하되 다투지 말고, 한데 모이되 무리 짓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맹자는 일체의 나쁜 세력에 항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맹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를 선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호변(好辯)이라고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공자와 마찬가지로 천명(天命)을 말하였으나 일종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기고 두려워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자세를 갖는다면 시인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훨씬 더 품을 것이다.
백인덕, {끝을 찾아서}, 하늘연못.
백인덕 시인의 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 즉 "그대(너)"이다. 그대는 만해의 '님'처럼 다양하게 읽히기보다는 에로스적 대상으로 와 닿는다. 시인은 그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성취할 수가 없다.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의 원칙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이룰 수 없어 포기한 것이다. 즉 시인 자신이 에로스와 같은 신화적 인물이 아닌 점을 인정하고 현실원칙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운명이다. 어머니의 몸 속으로부터 분리된 인간 존재이기에 누구나 욕망의 결핍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기를 마음속으로 부정하고 괴로워한다.
나, 그대의 살 날로 뜯어먹는 송곳니
두려운 짐승이어야 했는데, 뼈를 씹으며
골수에 맺힌 아픔 함께 앓아야 할
단순한 식욕의 짐승이어야 했는데,
오래 길들여진 내 위장은 부드러웠고
턱뼈는 약해, 나 그대를 먹지 못했네.
황량한 들판 쫓고, 쫓기지 못했네.
--- [첫사랑- C에게]에서
첫사랑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움은 아련한 감상에 젖어있는 기존의 연시들과는 매우 달라 "뜯어먹는 송곳니", "두려운 짐승", "뼈를 씹으며", "골수에 맺힌 아픔", "식욕의 짐승" 등 직정적이고 본능적이다. 이 공격적인 시어들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잃어버린 사랑을 놓칠 수 없다는 시인의 욕망의 표증이다. "단순한 식욕의 짐승"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시인의 그 욕망.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타협하고 있지만, 시 속에서는 끝까지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시들은 모두 욕망의 기표들이다. 무의식의 본능을 현실적으로는 조절하고 변경하여 갈등을 최소화시키고 있지만 사랑하는 대상을 보다 지각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머니의 몸과 합치될 수 없기에, 시인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른 기표들을 통해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시인의 그러한 심정은 내리는 "비"에 의해 한층 절실하다. "그늘에 내리는 비,/ 거울가게 앞 금간 남자"([回歸-오후의 비]), "비오는 골목 끝에서/ 뒤집힌 우산이 홀로 춤춘다."([꽃이 버려진 골목]), "비오는 텅 빈 네거리, 신호등과 마주선/ 우체함 앞,"([물]), "늦은 여름 비 내리는 저녁, 닫힌 창들을 두드리며 내가 무지개 되어 사라지고 있다."([내 사랑의 변증법]), "온 땅을 적실 만큼/ 크고 무섭게 쏟아지는 비"([G. 아이히의 비]) 등에 시인은 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빗속에 갇히지 않고 사랑을 찾아 나선다. 실패할 수밖에 없겠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는 것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엽서를 쓰는 것도 그 행동이다. [겨울 봉함엽서] 연작시 10편과 [우표와 엽서] 연작시 6편. 사랑의 답변을 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지향하는 것이기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지순지결하다. "당신이 잠드는 땅, 거기 아직도 절망은 겨울비로/ 내립니까. 황혼이면 빈 나뭇가지 사이 웅크려 떨다가 추위로 내몰린 짐승처럼 길을 나섭니다"([겨울 봉함엽서·2]). 이 짙은 사랑의 호소.
네가 찬찬히 머리칼 쓸며 사라져간 바람 속으로 늦은 여름 비 내리는 저녁. 닫힌 창들을 두드리며 내가 무지개되어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슬픔으로도 만나지 못한 세월, 거역하지 않는 강은 낮아지고 때로 가깝게 솟구치며 내 낡은 病迹을 덮어 흐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저의 찢어진 손금을 펼쳐 하늘을 가리지만 나는 가 까운 곳에서 너를 잊으며, 사랑하며, 껴안으며, 떨치며 어떻게든 숨어버리고, 깊게 패이지 않는 기억의 흉터들을 가슴으로 받으면 너는 그래도 멀리 있는 사람이 된다. 차라리 없는 사람이 된다. (중략)
가만히 숨죽여 가자. 머리칼 한낱 흩뜨리지 말고 발꿈치로만 가자. 너를 만날 때까지 나는 내 죽음을 더 가까이 두어야겠다.
----[내 사랑의 변증법]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시인의 열정은 이처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변증법적 사랑을 믿으며 즐거워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바따이유(G.Bataille)가 말한 '가벼운 죽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도, 한 인간이 인간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모습을 시인은 진정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남혜숙, {칼날도 아프다}, 문학세계사
남혜숙 시인의 시세계는 백인덕 시인이 첫 시집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당신(사랑)을 지향하고 있다. 시인의 사랑은 갑남을녀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이별과 원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비에 젖고 있는 그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고 아프고 그립다. 비를 맞고 있는 시인의 사랑. 그리고 달빛을 받고 있는 사랑. 시인은 "사랑은 더 원하는 쪽에서 먼저 행동한다"([사랑법·1])는 것이나 "달콤한 것에의 탐닉은/ 두려움을 앞서간다"([사랑법·2])는 것 등을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소극적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더 넓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상대를 일방적으로 소유하거나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이해하고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사과를 깎다가 베인 손가락
아프다고 소리치다가
언뜻 칼을 보았다
파랗게 질려 있는 칼의 아픔
---[칼날도 아프다] 전문
"사과를 깎다가" 손을 베면 "아프다고 소리치"며 "칼"을 원망하는 것이 일반적인모습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물의 가치를 지극히 자신의 관점에 따라 매긴다. 그리하여 방해를 하거나 손해를 주면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기보다는 그 대상을 탓한다. 따라서 사과를 깎다가 손가락을 베었을 때, 자신을 탓하기보다 칼에 책임을 지우는 것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관습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파랗게 질려 있는 칼의 아픔"을 이해한다. 아픈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칼도 마찬가지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에로스적 사랑은 헌신적이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내가 너에게 보낸/ 화살은 언제나/ 나에게로/ 다시 되돌아"([화살])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이 자세가 사랑의 열정을 약화시키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열렬한 사랑이 자신의 삶을 지키는 힘이 되는 것을 잘 알고 불태우는 것이다.
문 밖에서 불타는 소리 들린다
후박나무 잎 태우는 불꽃
한걸음에 창문을 넘어와
내 자궁에 불을 지피고
비는 끝내 내 안에서
아름다운 불꽃이 되었다.
----[비·1] 전문
문동만, [종묘에서 명동까지]({노동자문예 삶글}, 삶이 보이는 창)
한 계절에 한 번쯤은 종묘공원에서 명동성당까지
걸어봐야 한다. 예기치 않게 비가 내리는 날이
많은 여름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리라
발목까지 적시는 물바다 속
신발과 옷을 아끼지 않고 걸어봐야 한다
신발과 옷을 아끼는 자가 세상을 덮을 수 있을까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봐야 한다.
종로에서 귀금속가게로 물이
쳐들어오면 몇몇이 뛰어가 모래주머니로 막아주기도 하고
다만, 앞에 젖은 깃발을 놓치지 말 일이며
토요일 오후의 행인들이 처마 밑에서들 한마디씩 중얼거리면
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스크럼을 짜고
뛰어가 보라
---문동만, [종묘에서 명동까지]에서
지난 4월 10일, 대우자동차 해고자들에 대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아마 대부분의 국민들도 그러했으리라). 우리 사회에 아직도 야만적인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화가 났고 씁쓸했고 부끄러웠다. 정부는 해당 경찰서장을 직위 해제하고 경찰청장이 사과하고 치료비 보상과 책임자 처벌을 약속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진정, 법이 주먹보다 앞서는 날이 언제 오겠는가.
지금은 그 전망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권력자들이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정책을 만들고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한 힘없고 학력이 없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손해보기 마련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인간적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나서는 행동은 당연한 것으로, "한 계절에 한 번쯤은 종묘공원에서 명동성당까지/ 걸어봐야 한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거세게 몰려들었던 지난 역사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자세는 진정 필요하다. "신발과 옷을 아끼는 자가 세상을 덮을 수 있을까"와 같은 자세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보려는 것은 아직 혁명의 낭만성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노동자 문예 삶글}은 그 동안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활동하던 노동자 문학회가 하나로 통합되어 창간된 문학지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면서 글을 쓰고 노동을 하고 남는 시간에 책을 만들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문학지가 정기간행물로 등록되어 서점에서 계절마다 볼 수 있고 또 사이버(www.tong.or.kr)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대견스러운 일이다. 1987년 노동자들의 대투쟁 이후 인천, 부천, 성남, 마산·창원, 천안, 부산, 대구, 울산, 서울 동부, 영등포, 구로 등에서 키워온 역량을 결집시킨 것이기에 그 기대가 자못 크다.
최창균, [노천탕] / 이향지, [불가능한 꿈]({리토피아},리토피아)
우렁이도 스멀 솟고 미꾸라지도 몸 흔들어 흙때 벗긴다 개구리는 좌욕하듯 한 자세로 알을 뭉클하게 쏟아 놓는다 알몸 냄새 진동하는 노천탕 그런데 보아라 천하에 비린 것 좋아하는 저 사람들 바지 걷어부치고 첨벙첨벙 들어간다 이제 탕은 위험하다 이내 물이 찢어진다 기척에 놀란 듯 개구리는 둑섶에 숨어서 욕조를 들었다 놓았다 울어댄다 아주 여러 날 그 울음소리 들으며 올챙이들 수면을 찢고 개구리가 된다 하나의 생명이 잘 닦여져 나오는 노천탕, 게으른 사람들이 그때서야 소를 몰아 논을 갈아엎는다 이제 어린 모가 꽂힐 참이다.
--- 최창균, [노천탕]에서
이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서 이 답답한 빌딩 그늘에서 이 텁텁한 공기 속에서 앞만 보고 질주하는 네 바퀴들 틈에서 백 년 전의 오십 년 전의 흙 길을 달리는 두 바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헛간 구석에서 한 바퀴는 이쪽에 한 바퀴는 저쪽에 퉁그러져서 누워 꾸는 허구헌 날의 꿈
도란도란 흙 길을 달리는 바퀴 한 쌍의 꿈
---이향지, [불가능한 꿈]에서
최창균 시인의 작품은 흙과 그 흙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고, 이향지 시인의 작품은 "도란도란 흙 길을 달리는 바퀴 한 쌍의 꿈"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시 세계의 중심에 흙을 놓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최창균 시인은 흙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있고, 이향지 시인은 흙의 상실을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 시인은 흙을 자기 작품의 모태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지향하는 거울로도 삼고 있다. 최창균 시인은 "하나의 생명이 잘 닦여 나오는 노천탕"을 유토파아로 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희망을 질박한 농부처럼 갖고 있고, 이향지 시인은 딱딱한 아스팔트와 답답한 빌딩 그늘과 텁텁한 공기 속에서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있는 현실도 중요하고 있어야 할 현실도 중요하다. 있는 현실이 가치 있는 것이라면 잘 보존해야 하고, 이루어야 할 현실이 필요하다면 포기하지 말고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두 시인 모두 그 필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새봄에는 또 하나의 문학지 {리토피아}가 창간되었다. 리토피아란 문학(literature)과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로, 자본주의의 사용가치와 효용가치로 치닫고 있는 우리의 삶을 현실과 밀착된 구체성의 언어로써 반성하고 성찰하여 진실한 유토피아를 지향하고자 함이다. 희랍어 유토피아(Utopia)는 U(not)와 topos(place)의 합성어로 완전히 평등하고 평화롭고 궁핍하지 않고 자유로운 세계를 나타내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그 세계에 대한 충실한 지향은 필요하다. 지향이 있어야 전망은 가능하고 역사적 운동은 시작되는 것이다.
1991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저서 {한국 민중시 문학사}, 편저 {한국 현대 대표시선} 등. 현재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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