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제2호/초점/우리가 잃고 사는 것들/이명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명원
댓글 0건 조회 3,326회 작성일 02-06-14 12:07

본문

초점 
우리가 잃고 사는 것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자들은, 결국 과거를 반복할 운명에 처할 것이다.
-조지 산타야나
이명원 / 문학평론가



  1. 두 가지 편향

  2001년 5월 12일의 아침에 산타야나를 생각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던 내가 달려간 곳은 한국외국어대. 그곳에서 혼란스러웠던 90년대 세대의 대학 시절의 기억과 '공식적으로' 조우하기로 되어 있었다. <1991년 5월 투쟁, 죽음과 폭력의 정치를 넘어>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망각된 투쟁의 '의미화'에 대한 몇 가지 우문>이라는 토론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벌써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이 기억을 되살리는, 아니 정확히 말해, 스스로 망각하고 싶었던 정황들을 복원시키는 작업을 우리는 일컬어 '역사'라고 하며, 그것을 서사적으로 응결시키는 일이 '소설'의 한 존재근거를 이룬다. 

  1991년 한 젊은이가 '백골단'의 폭력진압 속에서 그의 삶을 종결시켰다. 그때 나는 거리에 있었고,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한번쯤 절규했다. 이른바 '91년 5월 투쟁'으로 명명되기 시작한 이 눈물겨운 현장에 대한 본격적인 최초의 보고서는 놀랍게도 한 편의 소설이었다. 그 소설은 김별아의 <<개인적 체험>>이었는데, 나는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가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여기 모인 겁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같은 목소리로 외쳤던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더 오오래 여기 모여 있는 겁니다.

  1991년 4월 26일부터 동년 6월 29일까지의 상황을 일컬어, 이른바 포스트 386세대, 더 정확히는 '비트윈사이더'(between-sider)로서의 90년대 세대는 '91년 5월 투쟁'으로 명명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1991년 5월 18일 '강경대 열사 장례식 겸 노태우 정권 퇴진 2차 국민대회'가 벌어지던 날 공덕동 로터리에서,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이수호 선생이 전율하듯 외친 말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 거의 유일하게 기억을 복원시키고 있는 소설이 <<개인적 체험>>인데, 한 편의 소설이 가질 수 있는 미덕 중의 하나가 기억의 문제, 더 정확히는 '기억의 서사화'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서 여기 모인 겁니다"라는 <<개인적 체험>.에서의 전언을 소설에 대한 이해와 결부시킬 때, 우리는 '역사적 사실'과 '서사적 진실'이라는 필연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소설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재료의 재구성을 통해, 서사적 진실을 길어내는 작업을 오래도록 수행해왔다.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서사화 작업을 이른바 '재현' 미학으로 명명하여 왔거니와, 그때 '기억'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동시적 개입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준화하고 조직화하는 서사적 실천은 1980년대에 이르러 우리 소설 미학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우리는 전통적인 방식의 재현 미학에 반기를 든 일련의 작품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 평론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대로 "동일한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의 체험을 기록하는 재현적 서사와 달리 최근 서사에서 강조되는 기억의 상징은 자아의 내면 속에 구획되는 불확정적이고 돌발적인 특성을 갖"1)게 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객관적 사실의 이면에서 '의미'를 발굴해내는 작업일 터인데, 가령 또 다른 평론가에 의하면, 이러한 서사적 실천 상의 변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깊이의 부재'라는 비판적 견해 또한 제출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즉 "깊이의 부재를 냉철하게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고사하고, 깊이의 부재야말로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서사화라고 웅변하는 그들의 담론은, 삶과 현실을 현상적으로 추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2)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서사화'와 관련하여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난처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한 변화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제기되어야 마땅할 '이행의 근거'가 선명한 형태로 제출되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재현 미학에 대한 편향의 형태로 80년대 소설이 달려왔다면, 90년대 소설은 이에 대한 반(反)편향으로 도망가고 있었는데, 과도단계로서의 '이행'의 문제가 심각하게 고려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90년대 이후의 지배적인 소설경향에 대해 한편으로 환호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맹렬한 비판의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의 이면에는 결국 '기억의 서사화'에 동반되어야 마땅할 '이행'의 문제를 치밀하게 사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이행의 시간을 견디는 방식 - 김하기의 <미귀(未歸)>  

  이행의 문제를 고려한다는 것은 현실 역사를 포함한 시간의 문제를 계기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흥미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한 편의 소설은 <<실천문학>>, 2001년 봄호에 발표된 김하기의 <미귀(未歸)>라는 작품이다. 
  김하기는 그의 첫 창작집인 <<완전한 만남>>을 통해 분단체제의 비극적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을 '비전향장기수'들의 비극적 일상을 매우 밀도 높게 형상화시켜 세인들의 주목을 끈 바 있다. 이 소설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분단 반세기를 경과하는 오늘의 시점에까지 견고하게 지속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배후에 은폐되어 있는 삶의 비극성을 '미전향장기수'의 눈으로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제의 내부에서 이단시되는 이념을 관리, 검열, 억압하는 방식의 비인간성을 '비전향 장기수'라는 예외적 인물에 대한 형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환기시키고, 이를 통해 분단체제의 장기적인 지속이 '감시와 처벌'의 일상화라는 구조적 문제를 비판적으로 서사화시킨 것이 <<완전한 만남>>이었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외세의 개입과정에서 이루어진 '분단체제'의 불구성을 매우 강렬한 체험의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한 편의 소설이 아름다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인식의 투명함과 함께 '고뇌의 발견'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의 소설집에 나타난 '미전향 장기수'들에게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고뇌의 발견'에서 오는 자아의 찢김이라기보다는, 그 찢김을 영웅적으로 봉합하고자 하는 신념의 투명성일 경우가 많았는데, 바로 이 사실이 오히려 김하기 소설에 나타나는 '미전향 장기수'들의 삶을 일면적으로 규정하는 오류로 작동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온갖 열악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나가는 미전향 장기수들의 형상은 그리하여 역사적 평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으로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역사적 평가의 결여는 바로 형상의 현실성의 결함으로 이어진다. 그의 작품에서 전향한 장기수들의 문제가 그다지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상징화가 전향 대 비전향이라는 이원적 구도를 불가피하게 초해하기 때문이지 않을까.3)

  위의 비판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미전향 장기수'에 대한 김하기의 묘사가 신념으로 표상되는 내적 역사의 서술에만 그쳐버려 도식화할 수 있다는 지적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로부터 결과하는 현상이 전향과 비전향을 이원화된 가치의 위계로 설정하는 작가의 태도일 터인데, 문제는 이러한 인식태도가 비극적인 분단현대사의 구체적 실상을 오히려 은폐하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신승엽의 주장인 셈이다. 
  김하기는 마치 이러한 비판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미귀>에서 그간 적극적인 조명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전향 장기수'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 소설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이른바 작가적 인식의 '이행'이 뚜렷하게 모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늘날 민족사적 관점의 '이행'과 접목시켜 사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른바 6.15 남북 공동 선언 이후 목하 우리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개혁적 민족 관계 모색은 안보 이데올로기의 급진적인 폐기과정이라기보다는, 점진적인 평화공존 체제로의 완만한 이행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 편으로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시간표를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과도단계로서의 평화공존의 시간표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반목과 대립의 시간표로부터 평화공존의 시간표로, 다시 이로부터 통일된 민족국가의 시간표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이행의 과정의 와중에서 겪게 되는 '시간의 격차'가 오늘날의 민족현실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김하기의 현실인식이며, 이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 '전향장기수'로 설정되어 있는 김길만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참고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달리는 열차를 즐겨 예로 들었다. 광속으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보는 바깥의 시간과 바깥에서 보는 열차 안은 서로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거지. 그래 우린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에서 딴 세상을 살았지.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봉합하고 체현하는 인물이 김길만이며, 이때 김길만이 현실 속에서 느끼는 고뇌와 찢긴 존재로서의 자의식이 '이행의 시기'를 규정하는 멘탈리티다. <미귀>는 이 신념과 현실의 적대적인 갈등과 분열을 관통하고 있는 김길만의 일상으로부터 내면까지를 매우 현실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전향자의 멘탈리티란 무엇인가. 그것은 뿌리 없음에 대한 인식이며, 찢긴 존재로서의 자기의식이다. 그때 "산다는 것, 운명이란 어떤 것일까. 가족과 민중과 민족은 무엇이며 역사란 또 무엇인가. 아, 이렇게 벌레처럼 고물거리고 살아 있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탄식이 피어난다. 외적 강제력에 굴복하여 자신의 신념을 포기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포기가 아니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전향자의 고뇌가 잠복되어 있다. 

  그러나 남으로부터는 빨갱이로, 북으로부터는 전향한 배신자로 단죄되어 버림받은 전향수들에게 희망이라곤 한 톨도 없었다. 강제전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를 정치적 생명의 사망자로 여겼다.

  그러나, 이 찢긴 존재 혹은 국외자로서의 멘탈리티의 배후에는, 개인의 고뇌를 포괄하는 보다 근본적인 모순으로서의 구조화된 분단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어 있다. 현실 정치의 장에서 진행되는 남북간의 물적 교류와 협력의 이면에는, 여전히 강렬하고 끈끈한 적대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전제되어 있거니와, 그것은 분단 50년이라는 시간이 각각의 개인들에게 부여한 역사적 하중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소설이 이른바 '철도여행'이라는 상황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철도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근대의 물적 구현체이자, 시간의 계기적 진전과정을 상징하는 소설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분단으로 상징되는 한국적 근대의 파행성은 '끊어진 철로'라는 도상학적 상징물에 의해 선명하게 부각된다. 전향장기수인 김길만의 기차여행이 부산에서 서울까지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의 정황이란 결국 끊어진 철도의 복원 이후에야 가능해질 민족사적 통합에 대한 기대와 바램을 낳는다. 
  그렇다면 김길만의 기차여행이란 결국 이 '이행의 시간'을 견디는 인간다운 실천의 방식인 셈이며, 이 소설이 미귀(未歸), 즉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는 어떤 시간의 복원을 강렬하게 희구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다시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진 '이행의 시간'을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견뎌 나갈 수 있겠는가. 작가 김하기가 고뇌에 찬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물음이다.

  3. 파괴적 욕망이라는 전언 - 이기호의 <머리칼 전언(傳言)>

  앞에서 간략하게 검토한 김하기의 소설이 '기억의 서사화'를 역사적 이행의 관점에서 형상화한 작품이라면, 지금부터 검토할 신예작가 이기호의 소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 속한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가 강조점을 두어야 할 것은 이기호 소설의 독특한 미적 형태로서의 '설화적 의장'이다. 설화적 의장을 갖춘 소설에서 강조되는 것은 시간의 계기적 변화에 기반한 '기억'이 아니라, 이로부터 그 가변적 속성을 제거한 후에 남는 원형적 시간, 즉 '운명'이다. 
  그런데 이기호의 소설이 특징적인 것은 이 설화적인 운명의 세계를 오늘날의 현실적 세부와 결합시켜 리얼리티를 높이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시간적/공간적 배경에 있어서는 일상적인 현실의 리얼리티를 충분히 부각시키면서도, 각각의 인물들이 펼치고 있는 삶의 드라마는 설화적으로 각색함으로써, 현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뒤섞는 기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형식실험은 유독 이기호에 이르러 활성화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하게 제기되어야 할 문제는 이러한 미학적 이행의 근거를 묻는 일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하고, 일단은 작품의 세부로 시선을 옮겨보도록 하자. 이 소설의 '문제적 인물'은 '여자아이'로 지칭되고 있는 긴 머리칼을 가진 고아소녀이다. 어느 날 용인 굴암산 기슭에 위치한 용화사 주지인 지종은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이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강조될 필요가 있는 것은 여자아이의 정체성이 그의 세계관이나 성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긴 머리칼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전언 혹은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은 여자아이의 '인성'(pesonality)이나 '성격'(character)이 아닌 '머리칼'이다.

  지종은 숨 호흡 한 번과 동시에 가위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지종은 똑똑히 보았다. 여자아이의 머리칼이 둥글게 몸을 말아 가위의 날과 날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살아움직이는 연체동물처럼 저희들끼리 저희들 동료의 몸을 껴안아주는 것을, 감싸안아 숨겨주는 것을.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때 여자아이의 긴 머리카락이 '성욕' 넓게 보아서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리카락이 풀어지자마자 그것은 아버지 격인 지종을 향해 맹렬하게 접근한다. 지종의 온몸을 빨아들일 듯 애무하는 머리칼은 억압되어 있던 지종의 욕망을 일깨운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지종이 여자아이의 머리에 커다란 무쇠머리핀을 채우는 행위는 여자아이의 욕망을 관리하고 억압하는 가장 현실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욕망은 관리되고 억압될 수 있으나,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는 법. "저 머리칼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자신의 두려움으로 인해 오랜 세월 감금되어 왔던 머리칼이, 그 포한을 어떻게 풀고자 하는지"라는 지종의 자문에서 이 사실을 암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아이의 머리칼을 견고하게 결박하고 있는 무쇠머리핀이 뽑히기 시작하면 욕망 또한 미친 듯 자신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인간이 아닌 자연의 모든 대상에까지 리비도(libido)를 표출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강렬한 것이다.   
  이때 또 한 명의 남자가 등장하는데, 이 남자는 여자아이의 머리칼이 파생시키는 욕망의 파급력을 온몸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애쓰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남자 역시 여자아이의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놓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편의적으로 그것을 활용하려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가 여자아이를 암자에서 데리고 나와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의 옥탑방에 감금시키는 행위를 통해 이러한 의도는 명확히 드러나는데, 문제는 욕망을 관리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가 도리어 자신의 내면 속에 잠복되어 있던 욕망을 과잉 활성화시키는 계기로 작동된다는 데 이 소설의 중요한 메시지가 잠복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남자가 여자아이에서 찾아내거나 자신의 내면 속에서 발굴해내는 욕망은 상호간의 진실한 의사소통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는 소외된 욕망이다. 그때 "타인을 향한 여자의 머리칼"은 매우 파괴적인 속성을 갖게 되는바, 급기야 이 남성은 여자아이의 욕망을 거세하고자 하는 '공격성'을 드러내게 된다. "자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몸이, 치아가, 송곳니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여자의 숨통을 끊어 놓을 듯, 송곳니에 날을 세우고, 자기 아닌 자기의 모습으로, 아니, 자신이 미처 몰랐던 자신의 모습으로"라는 진술문은 이러한 상황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나타나는 '머리칼 전언'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여자아이의 능동적으로 뻗어나가는 머리칼의 파괴적인 힘으로부터 신화 속의 메두사(medusa)를 연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화 속의 메두사는 수염과 남근이 달린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녀의 머리에 달려 있는 수 없이 많은 뱀으로 구성된 머리카락은 그것을 바라본 남성들의 정체성을 단번에 무화시키는 거세의 기제로 등장한다. 이 파괴적인 힘이 상기시키는 것은 여성적인 욕망의 원초적인 강렬성인 셈인데, 남자아이가 이 욕망에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송곳니가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고 느끼는 것은 메두사의 파괴적인 욕망을 절멸시키려는 남성적인 지배욕구의 원초적인 공격성이 발현되는 것의 유비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의 끝에서 남자가 여자아이의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당기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전하고 싶어했던 '머리칼 전언'이란 무엇인가. 원초적인 여성의 욕망을 관리, 통제, 감금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모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설화적 의장을 빌어 이러한 전언을 전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소설의 서술방식이 각각의 인물들이 유장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직면해야 마땅할 삶의 고뇌를 전혀 드러내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이 이른바 삶의 전사(前史)라고 할 수 있을 '기억'이 배제된 존재로 서술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전언은 강렬하고 투명하되, 각각의 인물들에게서 드러나야 마땅할 삶의 고뇌는 느껴지지 않는다.   

  4. 진부한 물음, 고뇌 어린 답변

  김하기와 이기호의 소설은 대립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미귀>에서의 김길만의 현재적인 고뇌가 생동감을 얻는 것은 그의 현재와 과거가 계기적인 시간의 이행 과정 속에서 긴밀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김길만의 현재적인 고통은 과거에 자신이 행한 행동의 결과로서 제시된다. 이에 반해, <머릿칼 전언>에 등장하는 여자아이나 남자의 고뇌가 매우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들 인물들의 삶 속에 '기억'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자아이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어떠한 자의식도 없는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 성격상의 핍진성을 근거로 이 두 소설에 대한 일방적인 가치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우리 소설계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검토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실상 비평가를 포함한 많은 수의 독자들이 김하기 류의 소설적 실천과정을 '한물 간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작품의도는 알겠는데 소설의 서술 방식이 진부하다거나, 아직도 그런 얘기냐는 식의 힐난이 거리낌 없이 제출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소설계의 풍경이다. 이에 반해 이기호 류의 소설들은 그 현실적인 '가독성'과 '흥미진진함' 때문에 독자들에게 매우 높은 관심 속에 읽혀질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작가와 독자들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오늘날 우리 소설이 처해있는 현재적 위기요인을 작가정신의 부재와 이야기성에의 함몰이라는 차원에서 지적할 수 있다면, 이러한 위기를 현실적으로 극복해 나가면서 동시에 소설 읽기를 통해 보다 나은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기획하기 위한 노력은 어디에서 가능해질 수 있을까. 그것은 '망각된 기억의 복원'으로부터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작업이 아닐까. 그때 소설가들은 또 다시 이런 진부한 물음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작가인가, 이야기꾼인가! 실상 오늘날 많은 젊은 작가들은 그들의 문학을 '미학적 엔터테인먼트'로 격하시키는 것을 아주 당연시하고 있으며, 비평가들 역시 이를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실정이다.
  우리는 전언을 읽기 위해서 소설을 읽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언이 없는 소설이란 거리의 솜사탕처럼 화려하기는 하되 공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의 흥미로움을 포기하면서까지 소설 읽기를 지속할만한 인내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흥미로움을 위해서라면 소설이 아닌 다른 문화적 실천행위가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 것인가. 흥미로운 이야기의 심층에 단단하게 박혀 있는 고뇌의 씨방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진부한 물음을 작가들에게 던질 수밖에 없다. 작가이냐 이야기꾼이냐. 우리는 가끔 이 진부한 물음을 잃고 사는 것 같다. 


1) 백지연, <기억과 서사>, <<내일을 여는 작가>>, 2001년 봄호, p. 82.
2) 고명철, <작은 이야기를 통한 큰 세상으로의 길은 요원한가>, <<리토피아>>, 2001년 봄호, p. 220.
3) 신승엽,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에 대한 형상화>, <<민족문학을 넘어서>>, 소명출판, 2000, p. 170. 

이명원 1993년 <문화일보>로 등단. 비평집에 <<타는 혀>>가 있음.

추천1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