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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문화/일본 연극의 낯선 잔영 속으로/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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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남석
댓글 0건 조회 4,076회 작성일 02-06-14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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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본 연극의 낯선 잔영 속으로
김남석(본지 편집위원,고려대, 경기대 강사)



Ⅰ. 한국 연극 속의 일본 연극


2001년 1/4분기는 일본 연극의 질감이 뚜렷하게 부각된 시기였다. 2월 8일부터 3월 25일까지, 스미즈 쿠니오 작· 오태석 연출의 「분장실」이 공연되었다. 스미즈 쿠니오는 일본 현대 연극계에서 각별히 주목받는 작가이고, 「분장실」은 탁월한 문학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다. 이 공연의 관건은, 작품이 드러내는 문학적 원숙함을 자유로운 상상력의 연출가인 오태석이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가 였다.

그 다음은 한일 제휴작품인 「아, 제암리여!」이다. 이 작품은 일본측의 요청을 받아, 한국작가인 이반에 의해 창작되었다. 무대적 형상화 작업은 일본인 우찌다가 담당했고, 3.1절을 기점으로 한국의 문예회관 대극장과 지방(속초)에서 공연되었다. 「아, 제암리여!」는 한국측과 일본측의 관심사가 공유된 지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3.1운동에 대한 보복적 탄압으로 제암리 교회가 불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기독교 교단은 사과의 표시로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려고 하고, 과거 일본의 만행을 잊지 않은 주민들은 교회 건립에 반대한다. 이러한 대립은 정통 서사극의 기법으로 꾸려진다. 이러한 기법은 역사적 사건을 연기하는 배우들이나 이를 관람하는 관객에게, 혹은 피해자인 한국 사람이나 가해자인 일본 사람에게 객관화된 시각을 종용한다. 이러한 창작 의도는, 연극이 수행해야 할 현실적 소임을 제시한다. 실제 완성도는 작품의 의도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여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일본의 연극적 시야가 자국의 문제의식을 이웃 나라의 문제 사안에서 찾을 만큼 폭넓은 것임을 증빙하는 자료로는 유효하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음악적 퍼포먼스를 지향하는 「히비끼(響)」의 내한 공연이다. 공연은 3월 중순 경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히비끼」는 전반적으로 우리 나라의 「난타」와 유사했지만, 실제 수준은 다소 떨어졌다. 그러나 봄·여름·가을·겨울의 소리를 담아내어 파는 '소리 가게' 대목이 인상적이었고, 작품의 전체 구조가 문학적 서사성에 의거했다는 점은 기억할 만했다. 이는 상대적인 수준에서 우위를 점하지만, 작품 구조에 다소 허술함을 드러낸 「난타」에 유효한 참조 사항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세 연극에서 직·간접적으로 산견되는 특징은, 일본 연극계가 형식적 실험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며, 폭넓은 연극적 시야를 통해 파격적 실험과 다양한 모색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연극계는 60·70년대에 이미 격렬한 실험과 열정적 모색에 빠져든 바 있다. 이 시기의 연극적 내실이 현재의 일본 연극을 추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세 공연은 연극사의 교훈을 일본 연극이 잊지 않고 있다는 반증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이다. 우리가 일본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어떠한 점을 배워야 하는가 이다. 먼저 「히비끼」에 나타난 서사성의 반영이나 「아, 제암리여!」에 나타난 폭넓은 시야는 기억해두어야 할 점이다. 또한 스미즈 쿠니오의 「분장실」이 보여주는 메타 연극적 구조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는 70·80년대에 이현화의 작품을 배출한 이후에, 이렇다 할 메타 연극 작품을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불가불가」는 20년 전부터 한국 메타 연극의 대표작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스미즈 쿠니오의 「분장실」은 여러 가지 사항을 동시에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분장실」을 통해 세 가지 문제의식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스미즈 쿠니오의 「분장실」은 어떠한 구조적 치밀함을 보이고 있는가. 둘째, 이러한 구조적 치밀함은 우리 나라의 체홉 이해 수준과 어떻게 변별되는가. 셋째, 오태석의 연극이 이 작품을 소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결국 이러한 세 가지 문제의식은 2001년 상반기 일본 연극이 한국 연극에 던졌던 중요한 화두인 셈이다.

Ⅱ. '니나'를 꿈꾸는 분장실의 배우들, 그 생의 뒤안길에서

「분장실」은 배우들의 연극이다. 네 명의 등장인물은 커다란 좌절을 경험한 배우들이다. 무대에서의 시련은 그들이 체험하는 인생의 시련으로 환치되는데, 이러한 시련은 초라한 인생에 대해 품어봄직한 일상인의 좌절로 간추려진다. 다시 말해서 여배우들의 실패한 꿈과 내재된 욕망은, 바로 우리네 일상인의 그것들에 비견될 수 있다.

분장실은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알아보기 힘든 여배우들의 이면적 실체를 들춰내기 위해 선택된 장소이다. 원작자는 자신이 극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분장실에 대해 문외한이었다는 사소한 깨달음이, 창작동기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는 무심코 간과하는 일상의 한 모퉁이에, 삶에 대한 주목할 만한 통찰력이 고일 수 있다는 전언이다. 이러한 전언은 자못 심상치 않다.

인물들이 머무는 구체적 장소는, 안톤 체홉의 「갈매기」가 한참 공연중인 무대의 뒤편 분장실이다. 이 분장실을 점유하고 있는 배우는 일단 셋이다. 하나는 3막과 4막 사이의 짧은 휴식을 이용해 퇴장한 '니나' 역의 여배우 C이다. 그녀는 휴식 시간이 끝나면 무대 위로 돌아가 「갈매기」의 클라이맥스인, '뜨레쁠레프'(「분장실」에서는 주로 '꼬스쨔'로 부름)와의 재회 장면을 연기해야 한다. 다른 둘은 죽은 혼령인 여배우 A와 B이다. 이 둘은, 배우들의 대사를 불러주는 '프롬프터'로 살다가 인생을 마감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배우 C는 인생의 화려한 성공에 들떠 있는 니나의 대사를 연습하고, 여배우 A와 B는 여배우 C의 성공을 시셈이라도 하듯 연습을 방해한다. 이처럼 「분장실」은 산 자와 죽은 자 혹은, 주연 배우와 단역 배우를 공존시키며, 보이지 않는 질투와 내재된 아픔을 조금씩 풀어놓는다.

이채로운 것은, 질투와 아픔을 풀어놓는 방식이다. 「분장실」의 인물들은 무대에서 한참 진행중인 「갈매기」 속 대사들을 빌어 의사소통을 하고 갈등을 빚어낸다. 따라서 인용된 대사들을 깊숙하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여배우 A  아 주제가 생각나서. 자그마한 단편의 주젠데. …… 호숫가에 꼭 당신 같은 젊은 처녀가 어릴 적부터 살고 있습니다. 갈매기처럼 호수를 좋아하고 갈매기처럼 행복하고 자유로웠죠. 그런데 우연히 나타난 사나이가 그 처녀를 보자 심심풀이로 처녀를 파멸시키고 말죠……

니나는 3막의 말미에서 뜨레쁠레프와의 애정 관계를 청산하고 늙은 소설가 '뜨리고린'을 따라 화려한 도시로 떠갈 것을 결심한다. 4막은 3막으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그녀의 실패담이 뜨레쁠레프에게서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정황으로 시작된다. 위의 대사는 본래 「갈매기」에 삽입되어 있는 뜨리고린의 대사이다. 뜨리고린은 2막에서 이 대사를 통해, 3막에서 행해질 니나의 변심과 4막에서 제시될 니나의 실패를 예고한다. 체홉은 니나의 변심과 실패를 예정된 것으로 알리기 위해서, 이러한 대사를 복선으로 배치한 것이다.

스미즈 「분장실」의 배역을 따라가면, 이 대사는 니나 역의 여배우 C를 겨냥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대 위의 갈채에 휩싸일 여배우 C 역시, 조만간 인생의 실패와 해후하거나 이미 대면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녀가 3막과 4막 사이에서 퇴장했던 분장실은, 실패와 몰락을 암시하는 인생의 뒤안길인 셈이다. 이러한 암시는, 심심풀이처럼 위의 대사를 연습하는 여배우 A와 이를 유심히 듣고 있는 여배우 B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들은 텅 빈 분장실에서 기약 없는 연습만 허락받는 처지이다. 인생의 낙오자인 셈이다.

체홉의 대사만으로 배우들의 내력과 비애를 짐작하게 만드는 효과는, 정교한 상호 텍스트성을 바탕으로 한 메타 연극적 기법에서만 성취 가능하다. 더구나 이러한 성취는, 스미즈 쿠니오가 체홉 작품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고 이러한 참뜻을 인생의 측면과 결부시킬 만큼 깊은 통찰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연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법과 효과는, 삶과 연극에 대한 주목할 만한 성찰과 숙고를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스미즈 쿠니오는 셰익스피어를 이용해서도 주목할 만한 장면을 창출한다. 그는 여배우 A와 B의 실패한 인생을 분명하게 확인시키기 위해서, 원대한 야망을 품었다가 실현 일보 직전에서 좌절하는 「맥베스」의 한 토막을 선택한다. 덩컨 왕의 행차를 기다리며 야심의 칼을 가는 '맥베스 부인'의 소름끼치는 독백이 그 한 토막이다. 이러한 독백은 실패한 여배우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을 끌어올린다. 여기서 더욱 참담한 점은, 두 여배우의 간이 무대가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실패한 자들의 인생을 연기하는 작업조차 실패할 만큼, 그녀들의 삶은 실패한 자의 그것과 닮아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언과 전달 기법에서, 스미즈 쿠니오는 높은 문학적 수준을 과시한다. 장황한 대사와 복잡한 상황으로도 표현해내기 어려운 인물을, 단순한 한 토막의 연기 장면으로 포착해냈다. 이점은, 사변적 극작술과 현란한 무대 배치만을 고집하는 오늘날의 연극적 인습에 경종을 울리는 훌륭한 예라 할 것이다.

여배우 D의 인생도 역시 실패한 자들의 목록에 넣을 만하다. 4막에 등장한 여배우 C가 관객의 박수 갈채에 휩싸일 무렵, 그녀의 전 프럼프터였던 '끼꼬'(여배우 D)는 분장실에 등장하여 실패한 니나 역에 몰두한다.

여배우 D  …… 나 가겠어요. 안녕. 제가 유명한 여배우가 되거든 만나러 오세요, 네? 약속하시죠? 밤이 깊었어요. 저 지금 가까스로 서있는 거예요. 너무 지쳐 버렸어……뭐라도 좀 먹고 싶어요.

이 대사의 원류는, 뜨레쁠레프와 다시 헤어져야 할 처지에 놓인 니나의 작별인사이다. 니나는 이 대사를 통해, 겉보기의 화려함 이면에 감추어진 초라한 자의 초상을 노출한다. 따라서 이 대사는 삼류 배우의 서글픈 독백인 동시에, 가망없는 자의 얄팍한 자기 위안인 셈이다. 끼꼬는 이러한 니나의 누추한 모습을 침착하게 소화해내어, 실패한 자신의 인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여배우의 삶에 대한 우회적 폭로는, 인생에서 화려한 성공을 열망하지만, 그 열망과 관계없이 흘러가는 우리네 인생의 허망함을 일러준다. 여배우 B와 C가 연기하다가 중단하고 마는 「맥베스」의 한 장면처럼, 우리의 인생에 대한 커다란 욕망은 한 낱 꿈으로 그치고 만다. 맥베스 부인이 그러했고, 니나가 그러했고, 여배우 A와 B가 그러했고, 또한 끼꼬가 그러하다. 끼꼬로 인해 내면의 평정을 잃어버린 여배우 C 역시, 이러한 상실감을 토로한다. 여배우 인생의 뒤에 묻혀있는 고통을 어찌 아느냐고. 아니 망가진 인생의 아픔을 경험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느냐고. 우리네 인생은 언제나 이러한 것일까 싶을 정도로, 현실은 꿈의 폐허이고, 그 잔재로만 덩그라니 남는 죽음이라고. 그래서 마치 삼류 배우의 극중 역할처럼 시시하다고.

Ⅲ. 세 자매의 내일, 그 삶에 대한 기다림 속으로

스미즈 쿠니오는 냉정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대안마저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생에 실패만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갈매기」의 뜨레쁠레프처럼 자살만을 긍정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미즈 쿠니오는 오늘이 그렇다고 내일까지 그렇다는 허무주의에 빠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일은 다를 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를 연극으로 말하기 위해, 체홉의 「세 자매」가 다시 천거된다.

「분장실」을 꼼꼼하게 되짚어보면, 맨 처음 장면에서 여배우 A와 B가 「세 자매」의 극중 배역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음을 반추할 수 있다. 이러한 최초 설정은 끼꼬가 죽어, 죽은 프롬프터가 셋이 될 때를 감안한 일종의 복선이었다. 그들은 실패한 인생 혹은 시시한 배역이 풍겨내는 상실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연극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 작품이 「세 자매」라는 점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점을 시사한다.

「세 자매」는 체홉의 작품 중에서 다소 이질적인 작품이다. 체홉의 장막극이 대개 무너지는 일가의 뒷모습이나 실패한 자들의 잔영을 그리는데 독특한 장기를 발휘한다면, 「세 자매」는 결말의 사소한 차이로 인해 이러한 공통점에서 벗어난다.

여배우 B  (마샤의 대사)…오오, 악대가 연줄 하네…… 저 사람들 떠나가. 우리만 여기 남아서 다시 우리의 생활을 시작하는 거야. 살아가야해……살아가야해…

서서히 조명이 어두워진다.

세사람의 모습은 죽은 자들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여배우 D  (일리나의 대사) 이제 때가 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있었는지 모두 알게 될거야. 하지만 그 동안 이렇게 살아가야지… 일을 해야지……이제 곧 겨울이 와서 눈이 쌓이더라도 난 일하겠어, 일하겠어…

여배우 A, 여배우 B와 D를 끌어안고.

여배우 A  (올리가의 대사) 저 소리를 들으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 세월이 흐르면 우리도 영원히 이 세상 작별하고 잊혀지겠지. 우리의 얼굴도, 목소리도, 세 자매였다는 것도.

(세 사람의 모습은 어두움 속에 사라진다)

이봐들, 우리 아직 끝나지 않았어. 굳세게 살아가자. 저 즐겁고 기쁜 악대의 연주 소리, 저 소리를 들으니 조금만 더 세월이 지나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 그것만 알 수 있다면,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위의 긴 인용문은 체홉의 결말이면서, 동시에 스미즈 쿠니오의 결말이기도 하다. 아니, 1901년에 이미 체홉이 발견한 것이되 스미즈 쿠니오가 재생시킨 결말이며, 스미즈 쿠니오가 재생시킨 것과 관계없이 2001년 오태석이 재창조해낸 결말이다. 우리는 모스크바를 꿈꾸는 세 자매와 니나를 꿈꾸는 프롬프터들의 상황적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좌절을 딛고 일어나서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는 결말을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유연한 패러디 효과는, 스미즈 쿠니오의 현실 투시력과 연극적 통찰력이 대단히 높은 수준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메타 연극의 특질을 살리면서도 작가적 전언을 극 전체 구조에 삽입시킬 줄 알기 때문이다. 형식과 주제에 대한 '조율과 균형의 미학'은, 「분장실」을 수준 높은 문학적 향기로 감싼다.

Ⅳ. 문제는 오태석이다

이제 스미즈 쿠니오의 「분장실」이 2001년의 한국적 상황에서 오태석의 「분장실」로 다시금 부활되었느냐는 질문이자 결론이 남는다. 이 질문이자 결론을 위해 다른 체홉 연극을 우선 살펴보자. 나는 최근 몇 년간 우리 나라에서 공연된 체홉의 연극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연극은 작년에 임영웅이 연출한 「세 자매」와 98년에 선보인 「놀랬지? 체홉」이다.

먼저 「놀랬지? 체홉」의 경우를 보자. 이 작품은 체홉의 단편 4개를 해체하여 하나의 새로운 텍스트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당시에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작품에서 중점적으로 부각된 것은 체홉의 작품을 압축하는 기교였지만, 압축의 과정에서 스미즈 쿠니오와 같은 통찰력있는 세계관이 투입되지는 못했다. 관객으로 위장하여 청소를 하는 배우를 사전에 등장시키거나 공연을 무대 정리로 마무리짓는 것은 그야말로 군더더기에 불과했다. 전체적으로 이 공연은 관객의 어리둥절함을 가중시키려는 것에 치중하여 창작 의도를 망각했고, 이러한 작업이 전제해야 할 체홉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을 간과했다. 체홉은 인생의 점진적인 흐름에 연극을 맡기는 유연한 작가이고 일상적인 상황 안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인물의 감정을 살피는 세심한 작가라 할 때, 형식적 현란함만으로 이러한 삶의 미세한 결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놀랬지? 체홉」은 체홉에 대한 심층적 문제의식을 확보하지 못한 작품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임영웅의 「세 자매」는, 정통적인 연출기법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이다. 임영웅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랜 기간동안 연출한 이력을 앞세워, 이 작품을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했다. 즉 블라디미르나 오스트라공이 남긴 '그래도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언과, 세 자매가 되뇌이는 '살아가야 한다'는 읊조림을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해석 방식은 유효하였다고 판단된다. 체홉 연극에 대한 상당한 이해력과 분명한 연출가적 견해가 간직되어 있다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영웅의 공연은 적어도 「세 자매」를 선택하는, 분명한 이유를 내재하고 있었다. 그가 의도했던 오케스트라의 합주와 같은 공연이 배우 사이의 혹은 배우와 무대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부분적인 한계는 얼마든지 극복될 여지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의의와 극복 가능성은, 무엇보다 임영웅의 연출관이 체홉에 대한 확고한 이해 위에 성립했음을 증명한다.

이제 오태석의 연극 「분장실」로 돌아가 보자. 나는 오태석의 「분장실」이 스미즈 쿠니오의 작품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오태석이 「분장실」에 자기의 색깔을 입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태석은 특유의 연극 문법과 독창적인 상상력을 구사하는 연출가이다. 한국 연극계의 몇 되지 않는 스타일리스트인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공연에서는, 원작이 제시하는 작품성에 침윤되어, 자기만의 연출 스타일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스미즈 쿠니오가 체홉과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그늘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자기만의 스타일을 정립한 것과는 달리, 오태석은 스미즈 쿠니오가 드리우는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두 번째 이유는, 오태석이 무대적 형상화 과정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이 연극을 시작한 다음날과 끝나기 몇 일전에 보았는데, 두 공연 사이의 변별점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연극을 고쳐나가는 그의 연출 방식조차, 이번 공연에서는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일단, 귀착된다.

배우들이 작품 해석에 정통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여배우 B와 C가 「맥베스」의 한 토막을 연기하는 극중극의 대목을 예로 들어보자. 극중 배우는 이 대목에서 자신들의 세계관을 걸고 극중 연기 대결을 벌이는데, 실제 배우(이수미와 조미혜)는 극중 배우가 피력하는 세계관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연기 대결을 재현해 어설픈 흉내에 그치고 말았다. 이해되지도 않는 인물을 무자정 연기했으니, 연기의 리얼리티가 살아날 리 없었다. 쏟아지는 조명의 각도 변화, 번역 어투와 대사의 표면적 차이만으로는 연기의 차별성을 제시할 수 없으며, 차별된 연기를 제시하지 않고는 두 세대간에 놓여있는 인식적 격차를 표현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배우들이 이 장면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지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실패에는, 두 사람 사이의 변별점을 스미즈 쿠니오가 제시한 대로 전전 세대와 전후 세대의 환경적 격차에서 찾으려했던 오태석의 책임도 상당 부분 내재한다. 원작이 제시하는 환경적 격차는, 일본적 풍토에 정통한 사람에게나 변별력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우리의 6.25와 다르다. 그들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 역시, 우리가 6.25를 대하는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그런데도 일본의 세대적 격절감을 고집했던 것은 그릇된 연출 의도로 여겨진다. 한국의 관객에게 일본의 상황을 사전 이해없이 전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스미즈 쿠니오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체홉을 차용하고, 임영웅이 자신의 연출관으로 「세 자매」를 바라보았던 것과는 달리, 오태석은 자신만의 해석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확대하면, 체홉 작품이 「분장실」에서 부분적으로 차용되고 거시적인 구조로 활용되는 이유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했다는 비판이 도출된다.

결국 「분장실」에 대한 비판은, 오태석이 원작이 담지하고 있는 논리적 정합성에 올바로 천착하지 못했다는 견해로 요약된다. 체홉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삽입되는 이유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들의 성격을 형상화했다면, 이러한 실패는 상당 부문 만회되었을 것이다. 극중극의 형식으로 차입된 작품이 원작자의 어떠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었는가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보다 능동적인 변화를 가미한 연극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기계적인 대사 추수와 극중극의 수동적 재현은, 「분장실」을 이질적인 작품들의 조각 모음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미요시 주로의 「잘리는 남자, 센타」의 경우는 좋은 예이다. 관객들의 대부분은 이 작품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전체 구조에서 삽화적 배치를 고려했을 때, 이 작품이 차용된 이유는 두 가지로 간추려진다. 하나는 희극적 상황을 창출하여 관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여배우 A가 한심한 역만 수행했던 삼류 배우였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이유만 달성할 수 있다면, 원작에 삽입된 작품을 반드시 그대로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관객의 이해력을 증진시킬 수 있고, 배우들이 그나마 전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연출가의 작품 해석을 더욱 효과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적당한 작품으로 대체되어야 옳았을 것이다. 이러한 대체는 패러디의 유연한 효과를 능숙하게 구사한 스미즈 쿠니오의 경우를 참고한다면, 전혀 「분장실」의 창작 의도를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증폭시키는 행위라 할 것이다.

오태석은 논리적 정합성에 가장 중대한 약점을 드러내는 연출가이다. 여기에는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작품의 논리적 해석 능력과 맞바꾼 결과 얻어진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소부터 정합성의 상실을 대단히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스미즈 쿠니오의 「분장실」은 논리적 해석능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한 장면도 제대로 만들어 질 수 없는 연극이다. 삽입된 작품과 구조적 외형 사이에는 이질적인 텍스트들이 만들어내는 해석적 간극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삽화와 삽화가 연결되는 혹은, 삽화와 구조가 형성하는 내적 필연성에 대한 섬세한 고찰 없이는, 이러한 간극은 공연의 허점으로 계속 남아있게 된다. 만일 오태석이 「분장실」을 공연하면서 이러한 세부적 문제 사항에 보다 깊숙이 천착했었더라면, 「분장실」에서의 실패를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아울러 자신의 연극적 약점도 치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기가 되지 못한 것은 정말 커다란 아쉬움이다.

Ⅴ. 일본 연극 속의 한국 연극

2001년 전반기는 일본 연극의 잔영을 여러 각도에서 느끼게 한 시점이다. 이러한 느낌은 「히비끼」나 「아, 제암리여!」에서도 연원하지만, 스미즈 쿠니오의 「분장실」에서 더욱 강력하게 파생된다. 이 작품은 분명,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연극적 형상화 방식에 대한 음미할 만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국적 현실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삭감된다. 따라서 오태석의 「분장실」은 원작의 향기가 던지는 보호 그물 아래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둔 연극이다. 스미즈 쿠니오가 체홉과 셰익스피어의 그늘 아래에서 이를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연극적 성과를 보여주었다는 점과 비교하면, 이러한 부분적 성공은 오히려 실패에 가깝다.

그러나 오태석은, 실패의 와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하나 남긴다. 오태석은 원작과는 달리 결말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세 자매의 독백과 같은 다짐으로 원작이 막을 내리는 것과는 달리, 실제 공연은 「세 자매」의 공연에 들어간 세 배우의 모습을 독창적 장면으로 보여준다. 실패와 좌절과 죽음으로 침체되어 있던 일인용 분장실은, 연극 「세 자매」를 공연을 앞둔 배우들과 스텝들의 긴장감으로 일렁이는 모두의 분장실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모는 세 자매의 독백에 담긴 체홉과 스미즈 쿠니오의 전언을 유지하면서도, 역동성과 상상력의 오태석 연극 문법이 발휘된 결과이다.. 그 결과 우리는 오태석의 눈을 통해, 유명한 배우가 될 꿈에 사로잡힌 여배우들의 희망을 전달받는다. 변화된 결말은 오태석의 새로운 「분장실」을 예견하게 한다. 그의 개선된 작품 이해력과 회복된 독창적 연출 스타일로, 스미즈 쿠니오의 「분장실」이 아닌 오태석의 「분장실」이 탄생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이 다시 북적이기 시작한 분장실에서 자신의 배역을 가다듬는 세 자매의 모습이, 스미즈 쿠니오의 세 자매에 비해 훨씬 많은 희망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야 진정한 한국 연극의 한 토막이 만들어진다.◈


성명 : 김남석(본지 편집위원)
등단년도와 등단지 :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 : 오태석 희곡의 개방성 연구(석사논문)
현직 : 고려대, 경기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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