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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단편소설/중국 여자에 관한 흐리고 느린 필름/박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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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중국 여자에 관한 흐리고 느린 필름
박청호
1
카메라는 오직 대상의 첫인상만을 기록한다. 어떤 사람과의 첫 대면에서의 인상, 그것이 사진 속에 그대로 박힌다. 내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받았던 첫인상과 그 사람을 찍은 사진과는 반드시 일치한다. 내가 그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약간 놀란 듯한 눈을 h나를 비롯한 다른 사물들을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 며칠 뒤 나는 그의 수첩에서 증명 사진 한 장을 발견했는데 그는 사진 속에서 예의 그 놀란 듯한 눈으로 사진 밖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는 내가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첫인상을 그대로 포착해 그 순간을 정지시켜 놓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첫인상을,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사진 속에서 그를 재발견했을 때의 상태로 기억하게 된다. 실재는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이제 익숙해진 그와 만나고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그도 더 이상 그 놀란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인상을 가진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그의 관계의 변화가 그의 얼굴을 변형시키기에 이르렀고, 그 역시 나를 첫 번재 대면에서의 나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에게 나도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사진은 늘 첫인상 의 그를 기록하고 있으며, 나는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을 거슬러 그때 그의 현존을 본다. 나는 첫 번째 그를 되찾고는 안도한다. 그는 바로 그다. 숨을 길게 내쉰다. 휴우우.
밤 열 시쯤 전하벨이 울렸다. 그때 나는 일본 작가가 쓴 추리소설을 읽으며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었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종아리에 속옷이 걸린 채 엉거주춤한 포즈로 마루로 나와 무선 전화기를 들었다. 내가 받자마자 전화가 끊겼다. 나는 전화를 내려놓고 화장실로 돌아와 휴지로 항문을 닦았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와 내 방 책상 앞에 앉았다. 일본 추리 소설은 한켠에 놓고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읽던 『노아의 외투』를 다시 펼쳤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놀이소리가 반복적을 들려왔다. 벚꽃이 피어서인지 밖이 아직 훤했다. 나는 커튼을 쳤다. 그리고 언제 다시 울릴지 모르는 전화에 잠깐 신경을 썼다. 계속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옆 방의 내 침실에는 중국여자아이가 잠을 자고 있다.
갑자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악다구니. 아이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가고 중년 여자와 그 나이 또래의 사내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책을 덮고 시계를 보았다. 벌써 12시 반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를 들으며 한 시간 넘게 라캉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데 아버지란 존재는 어머니가 자식에 이분이 네 아빠야, 라고 말해줌으로써, 생물학적인 아버지라든가 법적인 보호자라든가 하는 실질적으로 규명될 수 있는 그 무엇과도 다른 어쩌면 허상에 가까운 그저 네 아빠야, 라고 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서만이 존재한다, 뭐 이따위 말을. 사실 누군들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 하나님처럼 애초부터 아버지였던,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아는, 어쩌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그런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왜 중년 여자와 사내는 악을 쓰며 싸우는 것일까. 사내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목청껏 부르던 술레 아이가 진짜 자기 아이냐고 다그쳐서 일까. 아니면 여자가 사내에게 숨겨놓은 아이가 있다며 미쳐 날뛰어서일까. 나는 읽던 책의 내용과 현실을 뒤섞어서 제맘대로 생각했다. 여자아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왜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일까. 벌써 사흘째 깨어났다가는 밥을 조금 먹고는 다시 잠들어 버린다. 여자아이는 무엇을 꿈꿀까. 나는 그 꿈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싶었다. 발기하는 렌즈를 손으로 돌리며 밀어넣고 싶다. 렌즈에 필터는 씌우지 않고 알렌즈 그대로.
아침에 깨어나서 중국여자아이는 다짜고짜로 나에게 말했다.
"나, 목욕시켜줘."
밥 먹고 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나는 그저 웃었다. 중국여자아이는 내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작달막한 키에 제법 살집이 붙은 몸매였다. 가슴의 곡선도 꽤 쓸만 했다. 허리와 엉덩이의 윤곽도 뚜렷했다. 나는 뭔가를 붙잡으려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녀가 말했다.
"카메라는 절대 안 돼요."
나는 목욕 타월을 챙겨서 그녀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둘이 들어가기엔 왠지 비좁아 보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몸은 그녀와 밀착되었다.
"당신도 옷을 벗어요."
중국여자아이가 말했다. 나는 옷을 벗었다.
"당신은 내게 모든 걸 할 수 있어요. 지금은 당신이 주인이니까. 하지만 카메라는 안 돼요."
"주인한테 명령하는 건가?"
"아뇨, 부탁이에요."
"왜 그래. 이렇게 아름다운 몸인데."
"당신에게 영혼까지 뺏기고 싶지 않으니까요."
뭐라고? 나는 소리나게 웃었다. 원시인들이나 하는 말을 21세기에 듣다니. 내가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곧 눈물을 떨어뜨렸다.
"날 씻겨줘요. 날 망치지 말아요. 내 몸을 착취하려고 들지 마세요. 그냥 내버려둬요. 당신 사진 속에 갇히고 싶지 않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범할 수도 없었고, 그녀에게 다른 어떤 명령도 내릴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 나는 카메라로 그녀를 포착할 수 없는 이상 그녀르 상대로 그 무엇도 자행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독립적이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나는 가끔 그녀를 씻겨주었다. 그녀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걸 소유할 수 없더라도.
나는 빈 손으로 수없이 셔터를 눌러 그녀를, 그리고 그녀의 몸, 아니 그 몸 뒤에 숨어 있을 그녀의 영혼을 찍었다. 그녀를 포착해서 붙들어두고 싶었다. 내 눈과 가슴과 영혼 속에, 아니 내 몸 전부에 그녀를 문신처럼 새겨넣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차라리 자기의 모델이 욕망하는 걸 모방한다. 그러나 도대체 이 중국인 여자는 아무것도 욕망하는 게 없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최소한 내게만은 들키지 않는다. 배고프다. 목욕을 하자. 자고 싶어. 이 몇 가지 말로서 그녀를 다 알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왜 내 집에서 또 잠들고 깨어나 밥을 먹고, 나와 함께 목욕을 하고는 아주 커다란 목욕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오돌오돌 떨면서 날 향해 짙고 검은 눈동자를 굴리는 걸까. 나는 왜 나는 기록하려는 듯 반짝이는 그 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중국 여자아이가 떠났다. 나는 그녀를 향해 신경질로 일관했다. 나는 그녀를 직을 수도 범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여자들을 채집한 뒤로 한 번도 카메라 이전의 몸을 알지 못한다. 나는 사진으로 기록된 몸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검증했을 뿐이다. 사진에 박혀 있던 창백한 몸이 현실에서 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사진 속의 모든 이미지를 태워 버리고 전혀 다른 새로운 육체로 환원되는 것을 즐겼다. 그것만이 날 흥분키켰다. 그런데 그녀는 늘 어루만져주고, 씻겨주고, 재워주고, 먹여주는 걸 원했다. 그런 생물학적인 보살핌 따위는 날 자극할 수 없었다. 나는 고양된 뭔가를 원했다. 예술같은 것, 아니면 차라리 변태적인 것, 어차피 도착적인 성의 본질같은 것을.
그러나 중국여자아이는 물고기처럼 나의 손을 헤엄쳐 달아났다. 나는 그녀가 빠져나간 내 손을 촬영했다. 그 흔적들을, 물고기 비늘이 묻어나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추억, 혹은 상처를. 나는 그녀를 잃고서야 평안해졌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2
어느 날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도시의 거리나 골목, 시야를 가득 채우는 시골의 풍경들을 아무런 연출도 없이 찍어보는 것은 어떨까.
며칠 뒤 나는 인천으로 왔다. 인천역 건너편으로 로타리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빠져들었다. 그곳은 몇 해 전까지 '중국인거리'라고 불려졌었지만 지금은 중국인들이 거의 살지 않는다. 낡은 목조의 2층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여서 썩어가는 듯한 어둡고 황폐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무너져가고 있는 집들 사이로 바람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떠나곤 하였다. 나는 그 거리 한복판이 서 있었다. 처음 와보는 낯선 땅이었다. 나는 이곳의 집들에 세들어 산 적이 없다. 단 한 명의 친구도 없다. 나는 왜 여기 왔을까. 거리에 서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불과 몇 킬로미터 되지 않는 골목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다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이 훤히 열려 속을 다 드러내 보이고 있는 집으로 첫발을 들이밀었다. 내가 들어서자 빈 집들 사이에 뭉쳐 앉아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던 바람이 폭탄을 맞은 듯 산산히 부서져 흩어졌다. 나는 도망치는 바람을 향해 급하게 셔터를 눌렀다. 빈 집의 앙상한 뼈들 사이를 휘감아도는 바람의 그림자가 필름속에서 정지했다. 내가 셔터에서 손을 떼자 바람은 어둑하게 저물어가는, 곧 비를 한바탕 쏟아낼 듯한 회색빛 하늘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바람은 또 다시 빈 집들 사이를 떠돌았다. 바람은 날렵한 물고기처럼 허물어져 가는 집의 기둥들 사이를 유영했다. 나는 바람의 지느러미와 꼬리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필름에 비늘이 뚝뚝 떨어져 번들거렸다. 아무도 없는 황폐한 거리를 찍는다는 게 이토록 나를 흥분시킬 줄 몰랐다. 사람들이 떠난 도시의 뒤편에서 사람들의 흔적과 사람들이 떠난 뒤에 남은 사람들의 집과 물건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다 버림받고 미쳐 날뛰는 바람과 하늘과 땅. 이 모든 것이 나를 잃어버린 것들과의 대면이라는 놀라운 테마로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걸었다. 가끔 눈에 띄는 나무 계단들과 창들을 찍었다. 어디선가 존 레논의 이매진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추억의 거리에 부는 바람들 사이로 음악이 스며들었다. 여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였을 것이다. 내가 번화한 로데오 거리에서 여자들을 사냥하고 있을 때 춥고 쓸쓸한 이 거리의 뒷골목에서 여자아이가 겁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추억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곳을 떠났다. 나는 골목을 걸으면서 이곳에 약간의 빛깔이라도 있을까 눈을 비비며 찾았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던 붉은 색, 화목과 번영을 약속하던 붉은 색, 다산을 기원하며 결혼하는 여자에게 입히던 붉은 색을 찾을 수 있다면… 하고. 바람소리와 비틀즈의 음악이 믹싱되어 교교하게 들렸다. 어쩌면 내 귀에는 중국인들의 씨끄러운 고함소리와 쟁쟁 울리는 민속음악이 들려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중국인들의 거리가 아니었다. 한때 이방인들이 살았던 한국의 한모퉁이에 불과했다. 그래서 여기엔 그 어떤 민족의 아이덴티티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그 어떤 사람이라도 여기 들어와서 실컷 놀다가 잠들어도 욕볼 것 같지 않은, 그래서 더욱 망가지고 슬퍼지고 우울해져서 자살을 하거나 서로를 죽여버릴지라도 흔적조차 남지 않고 모두 공기속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마르크스의 말처럼 모든 단단한 것들이 대기 속에 녹아들 것 같은.
필름은 벌써 스무 롤쯤 소모되었다. 나는 이 골목의 모든 것들을 훔쳤다. 이곳은 오늘에서야 진짜 아무것도 없는 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오늘도 잔인한 콜렉터로서 이 거리를 필름 속에서 잡아먹고야 말았다. 벌써 노을인가. 내가 스물두 롤 째필름을 카메라에 끼우고 막 셔터 누르는 순간 붉은 빛이 내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렌즈에서 눈을 떼고 맨눈으로 거리를 다시 보았다. 골목 끝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막 시작된 노을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렌즈에서 눈을 떼지 않고 중국인거리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촬영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빈 집 모퉁이에서도 아주 작은 붉은 빛의 물체가 떠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포즈를 풀지 않고 좌우로 몸을 돌리며 셔터를 마구 눌렀다. 나의 재규어처럼 빠르고 날렵한 동작에 어느 물체든 걸리지 않는 법이 없었다. 붉은 물체는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것은 나의 등뒤에서 등뒤로 움직였다. 내가 몸을 돌려 셔터를 누르면 이미 나의 등 뒤를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360도 회전을 하면서 미친 듯이 셔터를 눌렀다. 나는 고속촬영으로 찍기 시작했다. 아무리 빠른 물체라도 카메라의 눈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최고의 콜랙터니까.
그러나 나는, 아니 내 카메라는 붉은 빛의 물체를 따라잡지 못했다. 내 몸은 온통 땀으로 젖었다. 어디에선가 붉은 빛의 물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카메라의 눈이 발견하지 못한 그 한 점의 빛. 이미 그 빛은 이미 나를 발거벗겨 놓고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제자리에 멈췄다. 움직이거나 회전하지 않고 완전히 정지했다. 다시 바람이 부는 게 느껴졌고 다시 존레논의 이매진이 들려왔다. 내가 정지한 채로 한참을 서 있자 나를 바라보는 일에 지쳤는지 등 뒤의 붉은 물체가 슬쩍 움직였다. 나는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렀다. 나는 정말이지 빠른 속도로 뒤돌아서서 붉은 점을 향해 셔터를 누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빛이 점점 커져서 나의 몸을 완전히 덮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잠시 후 나는 온통 붉게 물었다. 서쪽 하늘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은 나를 미치도록 황홀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을 뜬 것은 하늘 끝에서 빛의 꼬리가 막 자취를 감추려는 순간이었다. 내 앞에 붉은 물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물체는 내게 말을 걸었다.
"넌 도둑이야."
나는 붉은 물체를 올려다 보았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중국인 처녀였다.
"왜 우리집에 함부로 들어와 있는 거지?"
여자아이는 또박또박 한국말로 말했다.
"너, 중국인 아니니?"
내가 물었다.
"맞아. 하지만 중국말을 못해. 난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자랐으니까."
"여긴 중국인 거리야."
"그래. 하지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여긴 더 이상 중국인들이 살지 않았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아이가 정말 여기 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의 허황된 생각과는 달리 이곳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늘 나의 생각에 도취에서 주변환경 따위에는 별관심을 두지 않는 습관이 있으니까.
"배 고프지 않니?"
여자아이가 물었다.
"자장면이라도 먹잔 말이냐?"
나는 비꼬듯이 말했다.
"흰 쌀밥을 먹고 싶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여자아이를 데리고 그 거리를 나왔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월미도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여자아이는 내가 사는 곳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자기가 사는 곳을 보았으니까 자기도 그래야겠다고 우겼다. 택시를 돌려 나의 스튜디오로 갔다. 서울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인천에 가면서 차를 몰고 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택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아이가 한사코 싫다고 떼를 썼다. 자기는 다시 돌아갈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는 내 차와 장비들은 자기집 마당에 얌전하게 있을 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내일 다시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스튜디오 앞에서 내렸다.
중국인 여자아이는 스튜디오로 들어가기 전에 백화점 식품부에서 중국 요리를 할 수 있는 재료를 몽땅 샀다. 나는 스튜디오 한쪽에 놓여 있는 침대에서 케이블 TV를 보면서 여자아이가 요리하는 것을 흘끗거렸다. 여자아이는 비닐 포장을 뜯고 재료들을 꺼내놓더니 모두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는 쌀을 안치고 밥을 했다. 밥이 될 때까지 여자아이는 모델들이 앉는 의자에 걸터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갔다. 음악이 아주 느린 속도로 연주되는 것 같았다. 공기는 압축되어 쇤베르크의 무성화음을 연주하듯 통째로 움직였다. 나는 벽 한쪽에 세워두었던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스튜디오 내부가 셀프로 저속 촬영되었다. 카메라 셔터가 천천히 눌려지면 반듯하던 사물들이 흔들리며 지워져갔다. 여자아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형체가 허물어졌다가 되살아났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밥이 끓는 냄새가 났다. 여자아이가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밥이 다 된 모양이었다. 여자아이가 식탁에 상을 차렸다. 밥 두 그릇. 아무것도 없었다. 잔뜩 사온 재료들은 다 어디로 가고 겨우 밥 두 그릇이라니. 내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니까 여자아이가 말했다.
"난 요리 할줄 몰라. 그리고 난 지금 밥이 먹고 싶고. 그냥 밥 말이야."
여자아이와 나는 밥을 먹었다. 긴 대나무 중국 젓가락으로 밥을 떠 먹었다. 밥은 물기가 전혀 없어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밥은 꽤나 맛이 있었다. 입안에서 밥이 녹는 느낌은 초촐릿이나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웠다. 밥은 아주 오랫동안 입안에서 씹혔다. 내 입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침이 나왔다. 밥을 먹는 동안 여자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순간 미칠 것 같은 매우 관능적인 느낌이 스쳐지나 가는 것을 보았다. 여자아이와 밥을 먹으면서 느끼는 관능적인 쾌감은 느리게 진행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여자아이와 나는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맨밥을 다 비웠다. 단 한톨도 남지 않았다. 내속에 이런 미친 둣한 허기가 숨어 있었나 놀랄 지경이었다.
마지막 한숟갈을 입에 넣고는 여자아이가 씩 웃었다. 나도 숟갈을 내려놓고 웃음을 지어보였다. 괜히 자꾸 웃고 싶어졌다. 나는 씹고 있던 밥알이 튀어나올까 이를 악물면서 웃어댔다. 여자아이도 쉬지 않고 밥을 씹느라 입을 꼼지락거리면서 배시시 웃었다. 끄윽 하면서 여자아이가 마지막 밥을 삼켰다. 나도 입을 열어보이며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인상을 썼다. 여자아이가 또 웃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유쾌하고 관능적이면서 이상한 저녁 식사였다.
"나는 이제 가봐야 해."
여자아이가 우울한 것도 아니고 메마르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거기엔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 말은 거의 운명을 앞에 놓아둔 사람은 마지막 유언처럼 들렸다. 나는 약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가도 좋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내일 우리 집으로 와 차가 있을 거야."
여자아이는 머리칼을 휘날렸다.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일까. 나에게는 바람이 불지 않는데 그 여자아이에게서만 바람이 일었다. 여자아이의 머리칼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큰 원을 그리며 휘날렸다. 여자아이의 머리칼이 날릴수록 그녀의 몸은 점점 지워져갔다. 바람은 느린 속도로 그러나 강철 같은 힘으로 불어 닥쳤다. 머리칼이 천장에 닿을 듯 하더니 금방이라도 천장을 뚫고 하늘로 승천할 것만 같았다. 바람이 천천히 잦아졌다. 바람이 완전히 멎었을 때 중국인 여자아이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메라 가방을 들고 암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흘 낮밤을 꼼짝하지 않고 암실에서 작업하였다. 형체가 없는 집들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붉은 빛깔의 바람. 그리고 그 속에 중국인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게 많은 필름을 썼지만 카메라는 소녀의 모습을 한 장도 채집하지 못했다. 그저 중국인 여자아이가 나와 만났었다는 흔적이 붉은 얼룩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사진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중국인거리로 갔다. 여자아이가 말한 대로 내 차가 그녀의 집 마당에 서 있었다. 그곳은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였다. 나는 트렁크에 있던 구명용 줄로 마당의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였다. 그리고 사진들을 줄에 걸었다. 집게로 사진들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매달았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한 줄의 붉은 댕기가 걸린 것 같았다. 나는 휘날리는 빨래들을 보고 서 있었다. 아직 붉은 얼룩이 채 빠지지 못해 희고 빛나는 창백한 얼굴 모습은 아니었다. 중국인들이 모두 떠난 이 거리는 점점 표백되어 가고 있다. 붉은 옷을 즐겨 입던 중국인들이 백의민족을 닮아가고 있어서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찍으려면 아주 느릿하게 셔터를 눌러야 해. 그래야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시간의 뼈가 보이니까."
낡은 집 창 뒤에 숨어 중국인 여자아이가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만의 쾌락을 위해서 했던 일들이 타인의 가슴 속에서 빛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중국인 거리를 떠났다.
3
나는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아주 짧은 순간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할 수조차 없는 시간이어서 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일 것이다.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길이가 아니라 깊이가 사랑을 잴 수 있는 척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깊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 대개의 사람들이 사랑을 채집한다. 벌써 열번째 사랑이야, 혹은 스물한 번째 이별… 하면서. 유행가처럼 사랑은 가고 추억만 남는다. 사진은 그 추억을 담는 그릇이다.
확대기에 필름을 걸고 라이트를 켜면 콘덴서렌즈를 통해 집중된 빛이 하얗게 떨어지고, 이젤 위에 음화가 영사된다. 까만 머리카락은 하얗게, 흰 얼굴은 까맣게, 특히 입술이 하얗게 도드라진다. 바로 그 입술에 포인트를 맞춰 현미경을 갖다댄다. 초점이 잡히면 입술의 입자들이 또렷해지고, 나는 관능적인 즐거움에 빠져든다. 라이트를 끄고 인화지를 꺼내 이젤 위에 놓는다. 노출 타이머를 조절하고 스위치를 켠다. 조절된 타이밍에 맞춰 켜졌다 꺼지는 라이트. 아직은 백색의 인화지, 그러나 그 내부엔 심각한 추억처럼 빛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이젠 그 추억을 불러낼 차례다. 인화지를 현상액에 담근다. 시간에 따라 서서히 드러나는 빛의 추억. 그 추억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모두 걷혀지면 재빨리 인화지를 물에 씻어내고 정착액에 담근다. 그러면 그 추억은 꼼짝없이 사로잡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인화지엔 폴란드 여자가 왼손에 담배를 끼운 채 비스듬하고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의자에 누워있다.
이제 이 여자는 인화지에 나타난 모습 그대로 나에게 사로잡혔다. 나는 인화지를 걸어 말리며 담배를 한대 피워 문다. 어쩌면 사진이란 편집증에 사로잡힌 자들이 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카메라에 사로잡은 여자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저 낱장으로 얇게 포개어져 누워 있을 뿐이다.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가슴과 다리 사이를 두 손으로 가린 채 요염하게 몸을 비비꼬면서 날 유혹해도 그녀들은 그저 채집된 곤충처럼 바싹 말라 핀셋에 꽂혀있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그 여자들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에로틱한 순간을 포착, 수집하는 콜렉터다.
설악산 콘도에서 촬영을 시작했을 때, 폴란드에서 온 모델은 멍청하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포즈를 취했다. 나는 공셔터를 수없이 눌러댔다. 폴란드 여자는 긴장했던 표정과 포즈를 조금씩 자연스럽게 풀었다. 사진이라는 것을 찍기 시작할 때는 그때부터다. 나는 폴란드 여자의 벗은 모습을 넉 장의 찍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계약일 뿐이다. 나는 그 여자의 몸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카메라의 눈은 여자의 몸 어느 부위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나는 의식을 치르는 제사장처럼 폴란드 여자의 벗은 몸을 경건하게 다루었다. 나는 그녀를 무장해제시키고 달콤하고 격정적인 필링으로 그녀의 몸을 가득 채워야 했다. 그래야만 격렬한 정사 후의 나른하고 릴렉스한 표정을 올연히 드러낼 수 있었다. 나는 카메라와 섹스를 하는 모델을 변태적인 관음증자처럼 즐긴다. 진하고 독한 사랑을 나눈 후 흐트러진 침대와 창으로 넘쳐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배경으로 또 다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이번엔 단순한 누드가 아니다. 쉐타만 입거나 니트 원피스를 걸치고 입을 꼭 다문 채 다소 세침하면서도 마른 듯한 포즈를 취하게 하였다. 모델의 내부로부터 변화무쌍한 감정들을 불러내 포착한 뒤 그 순간을 정지시켜 카메라에 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언제나 찰나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깡그리 없어져 버려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 찰나들이 나의 콜렉션에 끼워져 있다. 나는 가끔 우울하고 고독하다. 나의 콜렉션들은 채집되어 말려진 찰나들이고 향기도 움직임도 없기 때문이다.
설악산을 내려오면서 일행은 카지노에 들러 긴장했던 몸을 풀고 싶어했다. 특히 조명부는 매우 힘들어 보였다. 코디네이터들도 생글거리며 뭔가 멋진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표정들이었다. 대박을 터뜨린다는 말처럼 후기 자본주의인들을 흥분케 만드는 것도 없다. 나는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고성을 내질렀다. 마치 카지노에 가기도 전에 크게 한 건 터뜨린 줄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보기 좋았다. 욕망으로 달뜬 사람들의 얼굴, 불안하면서도 예측 못하는 미래 때문에 가슴을 졸이는, 그래서 그 결과가 숨이 넘어갈 듯한 감격으로 이어지거나 참담한 절망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지독한 엑스타시를 향해 마구 달려나가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가는 목숨을 잃거나 커다란 장애로 평생 치유할 수 없을 만한 자기 억압에 몸을 떨고 살아야 할 것만 같은, 도저히 더는 두고볼 수 없을 지경의 오르가슴 때의 쾌락, 지금 그들은 그걸 맛보고 싶어한다. 모델 에이전시 회사의 부장이 타고 온 에쿠우스에 올랐다. 폴란드 여자는 꽤 피곤한 표정으로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스테프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곧 머리를 한쪽 창에 댔다. 나는 괜찮다, 오늘 수고했다, 하고 영어로 말했다. 모델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미칠 것 같은 성욕을 느꼈다. 곳곳에서 검문을 받았다. 군인들이 산길에 잠복해 있다가는 기습하는 형국이었다. 이 길로 곧장 달려가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했다. 산길을 고불고불 달리자 폴란드 여자는 멀리를 했다. 창을 끝가지 내리고 계속해서 웩웩거리며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속엣것을 토해내지는 않았다. 차가 잠시 멈췄다. 나와 부장, 그리고 코디가 내려 포장마차에서 감자떡과 오뎅을 사먹었다. 모델에게 녹차를 권했지만 그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카지노 호텔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살을 에는 바람이 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어깨에 묻었다. 폴란드 여자는 오히려 가슴을 쫙 펴고 숨을 골랐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카지노로 들어와 입장권을 샀다. 그 와중에도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몰래 입장권을 사달라고 부탁을 해서 두 장 더 끊어주었다. 그들은 그저 재미삼아 온 시골 사람들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차 트렁크에서 카메라를 꺼내오고 싶었지만 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촬영을 금지하고 있을 게 뻔하다. 하지만 카지노의 풍경을 담아가고 싶다는 충동은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코디네이터가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당했다. 핸드백에서 초콜릿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왜 초콜릿이 금지 품목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크래커나 사탕 초콜릿 같은 과자류를 가지고는 입장할 수 없었다. 그럼 총이나 다른 흉기를 들고 들어가는 것은 괜찮단 말인가.
입구를 벗어나자 배당금이 씌어진 전광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3천 5백 8십 3만원. 사람들은 부지런히 돈을 밀어넣고, 레버를 당기고, 버튼을 눌렀다. 배당금은 점점 올라갔다. 그러나 매우 천천히, 감질나고 조바심치게 만들면서 느린 속도로 올라갔다. 카지노는 별로 크지 않았다. 사람들도 예상보다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뭔가 정리가 안 된 싸구려 시장 같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과연 나는 뭔가 품위 있는 도박 문화를 기대했었던가.
사람들은 다소 지쳐보였다. 그러나 돈에 미쳐서 눈이 시뻘게져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밤이 깊어서 그럴 뿐이었다. 처음에 나는 만원짜리를 넣고 버튼을 눌러 그림이나 숫자가 일치하는 소위 빠찡고를 했다. 몇 번 맞아서 아주 적은 돈이 적립되었지만 곧바로 제로가 되고 다시 돈을 넣어야만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높은 숫자가 나오면 곧 게임을 정지시키고 동전을 꺼내리라 마음 먹었다. 옆 기계에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나를 유혹했다. 드디어 나도 103개의 동전을 모았다. 나는 버튼을 눌렀다. 500원짜리 동전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그 금속성 소리에 몸을 떨었다. 나는 동전 교환소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뒤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교환소 직원이 51,500원을 내주었다.
나는 그걸 들고 일행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에이전시 부장은 블랙잭을, 몇은 원판 돌리기에 몇은 주사위판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나는 주사위판에서 빠짱코에서 딴 돈을 칩으로 바꿨다. 게임의 규칙을 익히려고 기웃거리는 데 일행이 소리를 질렀다. 코디네이터가 50배짜리에 걸린 것이다. 만원을 걸었으니 50만원을 단번에 벌었다. 주사위 게임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들 축하해주었다. 코디는 만원짜리 칩 하나를 딜러에게 팁으로 건넸다. 딜러가 환하게 웃으며 칩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가 팁으로 받은 칩을 모아두는 투입구에 밀어넣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75배 배당인데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이 그 자리에 칩을 놓았다고 우겼다. 딜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지배인이 다가와 조정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에 지배인은 천장에 설치된 CCTV 녹화필름을 확인하고 와서는 한 편의 손을 들어주었다. 딴 사람은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몰랐지만 상대방은 계속 자신이 칩을 그 자리에 놓아다고 우겨댔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꽤나 잃은 모양이었다. 나는 결국 빈털털이가 됐다. 내가 놓고 돌아서면 다음판에 그 자리에 놓은 사람이 따는 식이었다. 심지어는 주사위 판에서 가장 큰 배당인 120배 자리에서도 쓰리트리플이 나오는 바람에 누군가 횡재를 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 방금 전에 놓았다가 칩을 잃었던 것이다. 나는 20만원쯤 잃고 호텔로 올라가려고 카지노를 벗어났다. 입구를 막 빠져나오려는데 아까부터 바로 문 앞 기계에 돈을 밀어넣으며 줄담배를 피우던 여자와 마주쳤다. 사실 나는 그 마르고 볼품 없는 여자가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비스듬한 자세로 담배를 피우며 게임에 열중하는 그 여자를 한참이나 쳐다본 적이 있었다. 여자가 날 알아봤다. 아마도 동전 투입구에 천원짜리 지폐를 찔러넣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여자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계속해서 돈을 밀어넣을 것이다. 지금쯤 배당금은 4천만원을 넘었을까. 여자는 대략 스물 대여섯 정도로 보였다. 나는 여자와 스쳐 카지노를 나왔다. 화장실에 소변을 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소변은 생각보다 힘차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쓰며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오줌보를 쥐고 떨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떨어뜨리고 지퍼를 올리고 돌아섰다. 거기 여자가 있었다.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 사이의 막간. 내가 스쳐지나려 하자 여자가 말했다.
"돈 좀 꿔줘요. 찍사 아저씨. 티브이에서 봤어요."
나는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여자의 목덜미를 잡고 칸막이 안으로 밀어넣었다. 여자를 변기에 앉히고는 급히 바지를 내리고 자지를 꺼내 여자의 입에 물렸다.
"이러면 돈 주는 거야."
여자가 입에 내 물건을 넣은 채 우물거렸다.
"잔말 말고 빨아."
나는 소리질렀다. 그리고 주머니와 지갑에서 닥치는 대로 돈을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여자는 내 것을 빨면서 손으로는 돈을 집었다. 계속 울컥거리면서도 흩어진 돈을 한 장이라도 더 주우려고 손을 이리저리 뻗쳤다. 나는 그런 역겨운 모습을 하고 있는 도박에 미친 여자를 보는 게 즐거웠다. 쾌감은 점점 더 상승곡선을 그리며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여자는 더 세게 빨면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여자는 돈이 있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나는 돈을 주고 산 쾌락을 향해 질주했다. 여자는 변기 뒤에 끼인 수표를 집으려고 팔을 벋쳤다. 손이 모자랐다.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반뼘 정도 모자란다는 걸 알고는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물고 있던 자지가 입에서 반쯤 삐져나왔다. 나는 참을 수 없이 화가 솟구쳤다. 이 여잔 서비스 정신이 없어. 돈에만 얼이 나갔어. 무당이 제산에 관심 없고 젯밥에만 눈독을 들이다니. 나는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여자의 머리칼을 움켜 잡고는 고개를 치켜들게 했다. 그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갈겼다. 여자의 코와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나는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변기 통속에 뿌리고 화장실을 나왔다. 여자는 그때까지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폴란드 여자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누군가 들어온 걸 느꼈는지 폴란드어로 지껄였다. 나는 괜찮으냐고 영어로 물었다. 모델이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잘 수가 없어요. 재워줘요. 아님 기절이라도 시켜주세요."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주먹으로 세게 친다면 기절해서 세상 모르고 잠들 것이다. 멀미를 일으키지 않는 편안하고 안락한 잠, 그리고 느리고 평화로운 꿈. 나는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나는 폴란드 여자를 껴안았다. 서둘러 몸에 걸친 슬립을 걷어냈다. 그녀의 손이 날 알몸으로 만들었다. 흰, 또는 노란 두 덩이의 버터가 어울려 붉게 달군 팬 위에서 녹아들었다. 나는 생전 처음 백마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폴란드 여자를 상대로 남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 폴란드 여자는 죽음처럼 잠들었다. 나는 그 길로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나왔다. 에쿠우스로 들어와 음악을 틀어놓고 잠들었다. 내 잠 속에 침묵이 흐르는 게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오후에 에쿠우스 뒷자리에서 폴란드 여자를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 보헤미아 여자는 이제야 겨우 촬영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러나 남은 필름이 없었고, 더 이상 촬영 스케쥴을 짤 수 없었다. 나는 시간을 버리고 헛개비 같은 여자의 육체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관능을 얻기 위해 사람은 인생을 통째로 잃는 것이 아닌가. 나는 폴란드 여자와 한 달간 전속 계약을 맺었다. 그 동안 아무것도 촬영하지 않았다. 나는 휘황찬란한 놀이공원에서 새하얀 목마를 쉬지 않고 타고 달렸다.
그 한 달이 거의 끝날 무렵 문득 중국여자아이가 떠올랐다. 백인 여자들과는 다른 얼굴 윤곽, 까무잡잡한 피부, 탄력이 붙은 근육, 작은 키, 당돌한 눈빛, 희미하게 웃는 표정, 큰 숟갈로 밥을 떠밀어 넣고 있는 입, 늘 뾰루퉁 부어 있는 뺨, 놀란 것 같진 않지만 잔뜩 호기심을 띤 눈동자와 눈가의 예상치 못한 주름. 아, 또 무엇을 기억할 수 있을까. 퉁겨나올 듯한 작기만 팽팽한 가슴, 도발스런 엉덩이, 순식간에 퉁겨졌다가 제자리를 잡는 날렵한 허벅지, 작은 알통이 박인 종아리, 적당한 크기의 발, 재주가 많아 보이는, 실은 적당히 게으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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