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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특집/고3 민규의 클릭 24시/배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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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고3 민규의 클릭 24시
배철호(서울 단대부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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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39분. ○○고 3학년 ○반 교실.
긴 복도를 헐레벌떡 뛰어온 민규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본능적으로 시계를 봤다. 어제보다 무려 9분이나 늦었다. 학교의 정해진 등교 시각은 8시지만 7시 30분으로 바뀐 민규네반 등교 시각, 다행히 담임 선생님은 교실에 계시지 않아 민규는 휴우―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민규는 얼른 건너편 자리의 준호를 쳐다봤다. 준호는 어제와 다름없이 책장을 넘기며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다. 또다시 준호에게 지고 있다는 생각에 민규는 조바심이 났다. 쫓기듯 얼른 수학 정석을 가방에서 꺼내 펼쳤지만 민규는 얼마 전에 받은 3월 학력검사 성적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200점 만점으로 치러진 시험에서 민규가 받은 성적은 187점이었다. 이를 다시 400점으로 환산해 보니 374점으로 비교적 괜찮은 점수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박수소리가 나고 준호는 194점, 400점 환산 점수는 388점으로 인문계열 1등이었다. 자신과 무려 10점 이상 차이가 나고 있었다. 민규는 다시 한 번 가슴을 쳤다. 준호와 자신은 같은 중학교를 다녔고, 그때만 해도 둘은 학교 1등을 놓고 엎치락뒤치락을 했다. 민규는 항상 준호 생각에 일요일도 학원이다, 과외다 마음놓고 한 번 신나게 놀지를 못했다.
같은 고등학교를 배정 받고는 민규는 3학년이 되도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준호를 앞서지 못했다. 1학년 때와 2학년 때는 반이 달랐는데 올해는 같은 반이 되고 보니 민규는 준호의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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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지각자가 한두 명은 됐는데 3학년에 들어와서는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조회시간, 담임 선생님은 출석을 확인하자마자 사뭇 긴장된 목소리로 전달 사항을 말씀하신다.
전국 66개 대학의 올해 1학기 수시 모집이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2학년까지의 학생부 성적과 면접?구술이 절대적이고 추천서?자기소개서?학업계획서 등을 잘 써야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순간 민규가 슬쩍 둘러본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모두들 전장에 나가는 전사들처럼 긴장된 얼굴빛이 역력했다.
민규는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의 말씀대로 수시 모집 지원 여부를 빨리 결정해야 하는데 포인트는 역시 학생부 성적의 유?불리 여부다. 올해 수능시험은 어려워진다는 발표가 있었던 만큼 학생부 성적이 좋다면 과감히 소신 지원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학생부가 안 좋다면 공연한 시간 낭비는 아닌지 따져봐야 하고, 면접?구술에도 자신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민규는 1학년 때 안 좋았던 몇 개 과목 성적이 마음에 걸리고 더욱이 자신은 신문방송학을 전공해 유능한 방송 기자가 되고 싶은데 아버지는 줄곧 법학을 전공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어 그것도 영 마음에 걸린다. 민규는 건너편 분단에서 여전히 문제집을 푸느라 미동도 않는 준호에게 또다시 시선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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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가 끝나고 2교시가 끝나도, 점심 시간이 되어도 교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작년 같으면 LA다저스의 찬호박이 몇 승을 했네, 인기 댄스그룹 '핑클'의 효리보다 유리가 낫네, '바꿔'의 이정현이가 더 낫네 하고 저마다 설전이 벌어져 교실이 한바탕 떠들썩했는데 엎드려 자는 친구들을 빼놓고는 모두들 책을 본다.
이제 1학기 중간고사가 3일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들 1학기 수시 모집은 놓치더라도 2학기 수시 모집 생각에 1학기 중간?기말고사는 정말 잘 봐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어떻게든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 학생의 입장에서 부정행위를 통해 좋은 점수를 받는 친구를 보면 막판 입시에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행동이라며, 성적이 조금 나쁘더라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부정행위를 해서라도 시험만 잘 보면 된다는 막가파식 사고가 팽배해 있는 분위기다.
민규가 학교 급식 시간에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니 5교시 시작종이 울린다. 5교시는 문학수업 시간이었다. 수능시험 언어영역을 대비해 현대시편을 공부 중이다. 오늘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두 편의 시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이 마치 틀어놓은 카세트 테잎 돌아가듯 쉴새없이 이어진다.
"이 작품은 표면상으로는 연가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님'의 상징적 의미와 연결되어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 작품……조국을 상실한 아픔과 극복에의 염원으로 볼 수도 있으며, 단순한 연가로도, 혹은 구도를 염원하는 노래로도 볼 수……앞 부분에서 이별이나 상실의 상황에서 비롯되는 탄식과 슬픔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뒷부분에서는 역설적 인식을 바탕으로 재회와 극복의 신념을 노래하고……"
선생님의 설명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모두들 빠르게 줄긋고 받아적었다. 작년 2학년 때 그래도 시를 배울 때는 한 번 읽고 또 눈을 감고 여러 번 낭송할 기회도 있었지만 올해는 시간이 없다며 선생님의 작품 설명이 끝나자 민규는 춘곤증과 더불어 쏟아지는 오후 잠을 쫓으며 곧장 관련 문제를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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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가 7?8교시 특기적성교육 수업까지 마쳤을 때 시계는 정확히 5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흡연하지 말 것, PC방에 가지 말 것, 당구장에 가지 말 것 등 '말것'의 연속인 종례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모두들 종례가 끝나자 청소를 하는 둥 마는 둥 썰물처럼 교실을 빠져나갔다.
민규는 오후 6시 10분에 시작되는 도서관 자율학습에 참가하려면 저녁 식사부터 해결해야 했다. 같은 반 석규와 옆 반 형준이와 함께 단골로 가는 중국집으로 갔다. 자장면 곱배기로 저녁 식사를 때우고 나왔을 때 이미 재빨리 저녁을 해결한 몇몇 친구들은 PC방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게임 디아블로2와 포트리스2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은 그 짧은 시간에 당구장으로도 몰려갔다. 모두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일한 그네들의 스트레스 해소법이기도 했다.
6시부터 시작된 도서관 자율학습, 모두들 긴장된 모습으로 도서관문을 들어선다. 민규가 지정된 자리에 앉았을 때, 벌써 준호는 책에 몰입한 지가 꽤나 되어 보였다. 남들은 지정된 시간에 들어오는데 항상 30분이나 먼저 들어와 책을 보는 지독한 준호였다. 민규는 준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6시 10분에 시작된 도서관 야간 자율학습은 12시 자정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희망자만 참가하는 자율학습이지만 입시를 앞두고 남들 다하는데 악착스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도서관문을 나서며 민규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서울의 하늘은 별은커녕 도무지 달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하늘이었다. 그때 민규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교문 앞 가로등 아래 대기해 있던 준호네 승용차, 준호가 차에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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