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제3호/특집/사이버 섹스는 현실의 섹스를 대신하는가?/변희재
페이지 정보

본문
특집 사이버 섹스는 현실의 섹스를 대신하는가?
변희재(문화평론가)
모든 일을 인터넷으로 한다.
인터넷 붐이 한창이었을 때 한 일간지에서는 인터넷 서바이벌 대회를 개최하였다. 인터넷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간단한 교육만 실시한 뒤, 3박 4일 동안 밀폐된 공간에서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 한 대만 지급하여 생활하도록 하는 이벤트의 일종이었다. 그 대회 참가자들은 우선 인터넷 전자상거래를 통해 옷과 음식을 사고, MP3를 다운받아 음악을 듣고, 자기 회사의 인트라넷에 접속하여 업무도 보고 채팅방을 통해 가족들과 대화도 나누는 등 현실의 삶과 거의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 한 대만 가지고도 거의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인터넷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부터 현대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일을 자기 스스로 할 필요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쇼핑은 쇼핑 대행업소가 대신해주고, 귀찮은 공공기관 서류 제출 같은 것은 심부름 센터가 대신해주고, 여행의 스케줄도 여행 대행사가 다 알아서 해준다. 심지어 교통 벌칙금 같은 것도 벌칙금 대행사가 대신 내주고 결혼도 웨딩 플래너의 재량에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어디 그뿐이던가? 결혼의 상대마저도 결혼중개회사가 고성능 컴퓨터를 동원하여 분석해서 골라준다.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거의 모든 일을 민간 사업가들이 도맡아서 해주는 것이다. 여기에 인터넷이 개입되었다는 것은 단지 앞으로는 대행사를 직접 찾아갈 필요조차 없어졌다는 의미밖에는 없다. 마우스 클릭 하나로 사이트를 찾아가 그냥 아무 생각없이 툭툭 쳐넣으면 곧바로 화면 속의 가상 이미지가 현실에 등장한다.
인터넷 서바이벌 대회의 참가자들의 심리를 분석한 결과 놀랍게도 그들이 3박 4일 동안 거의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모두 할 수 있는데 뭐가 부족하겠는가? 이것은 어찌보면 중독에 가깝다. 인터넷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책의 경우, 단 한 번만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입해보면 더 이상 오프라인 서점에 가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다. 이 코너 저 코너 뒤지고, 바쁜 점원의 눈치를 보며 물어볼 필요도 없이, 자기 방에서 원하는 책의 서평도 모두 검토해본 후 보다 저렴한 가격에 책을 구입할 수 있는데 무엇하러 그 복잡한 오프라인 서점까지 가겠는가? 이것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현실의 거의 모든 영역은 인터넷으로 진출하여 새로운 구매층을 확보하고 있다.
흔히들 인터넷으로 모든 일을 다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으로 그들의 사회성 부족을 지적한다. 항상 자기 방에만 있다보니 같이 더불어 살아가도록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네티즌들은 더 많은 것을 인터넷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섹스도 하기를 바란다. 어차피 다른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다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이것들만 인터넷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사이버 섹스는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볼 때, 그냥 농담으로 들어넘길 일은 아니다.
현실의 섹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 인터넷으로 신문을 읽는 행위라면 다들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할 수 있다는 사이버 섹스의 개념은 좀 모호하다. 사실 언론보도를 보더라도 "한국의 네티즌 중 50%가 사이버 섹스를 경험했다." 이렇게 헤드라인을 뽑아버리면 일반인들로서는 그들이 과연 뭘 어떻게 했다는 것인지 감을 잡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자. 인터넷을 통하여 하는 행위들은 대부분의 경우 현실에서 할 수 있는 행위들이다. 단지 여러 가지 절차와 과정을 생략하여 그것을 보다 편리하게 한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사이버 섹스를 이야기하기 전에 현실의 섹스가 어떠한지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현실의 인간의 섹스가 단지 생식을 위해서라는 이론은 이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였다. 남성은 동력인의 표상이고 여성은 질료인의 표상이니 여성은 항상 질료를 제공하고 남성은 항상 그것에 형태를 부여한다. 이런 행위가 존재의 첫 번째 범주인 생식이고, 섹스는 그 생식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생물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섹스시 발생하는 오르가즘이라는 쾌감이 생식과는 관계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16세기 들어서 렘니우스는 육체적 합일을 이루려는 격렬하고 불타는 욕정과 성욕 없이는 남자도 여자도 생식이라는 신의 명령을 따르지 못할 것이고 여성도 남성처럼 생식선이 있고 성적 욕망이 있으며 보통 성교할 때 체액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오르가즘과 임신의 연결을 확인하였다. 그 뒤로 17세기의 당대 최고의 의사 아브라와즈 파레 등 여러 사람들이 전희, 애무를 통한 오르가즘이 동반되어야 임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임신을 하기 위해서 오르가즘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임신을 하기 위해서만 오르가즘을 추구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임신에 상관없이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더구나 체외수정이 가능한 현대 사회라면 이미 임신과 오르가즘은 완전히 분리된 개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섹스를 하지 않고도 임신을 할 수 있고 오르가즘만을 위해서 섹스를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이상한 일도 아니다. 쾌락만을 위한 섹스는 현대의 성담론의 기본 전제나 마찬가지이다.
그럼 현대인들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오르가즘을 획득하는지 보다 일상적으로 생각해보자.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배우자와의 섹스를 떠올릴 수 있겠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섹스를 즐길 수 있다. 애인과도 얼마든지 섹스를 할 수 있고, 매춘을 할 수도 있고, 나이트 클럽에서 헌팅을 하여 섹스 파트너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것들 말고 더 쉬운 방법도 있다. 바로 자위행위이다. 자위행위는 섹스에 비해 역사적으로 놀라울 정도로 엄청난 사회적 범죄로 탄압 받았다. 자위행위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은 개인의 파괴와 반사회성이었다. 그것은 근대의 사악함이 만들어낸 도덕적 타락이자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사회성을 무시한 죄악이라고 본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성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적당한 자위행위를 권장하고 실제로 마땅히 배우자를 찾기 힘들거나 매춘굴에 접근하기 힘든 사람들의 경우 자위행위만으로 오르가즘을 찾는 일은 빈번하다. 이렇듯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현대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섹스의 목적인 오르가즘을 획득할 수 있다.
사이버 섹스란 과정의 생략이다.
사이버 섹스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과정의 생략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책 한 권 사기 위해 교보문고까지 갈 필요없이 그냥 마우스 클릭 하나로 원하는 책을 받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부부나 연인관계가 아닌 하룻밤의 오르가즘을 원한다 했을 때 이런 것이 여성지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단지 섹스만을 위해서라도 커피 세 잔에 영화 두 편은 기본적으로 마시고 봐야 한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취미도 물어봐야 하고 평소에 읽지 않던 책 이야기도 꺼내야 한다. 하지만 바쁘고 급한 현대인들이라면 이런 과정이 귀찮을 수가 있다. 그래서 곧바로 인터넷 채팅 사이트로 접속하여 단 한 번에 섹스 파트너를 구하기를 바란다.
인터넷상의 성적 유혹은 주로 "어떤 속옷을 입었느냐?" 정도의 가벼운 내용이지만 조사대상자의 3%는 `실제로 만나자'는 제의를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보고서는 "채팅 룸에서는 거의 언제든지 성적 유혹이 난무하고 있다."며 당국에 보고되는 온라인의 성적 유혹은 실제 발생 건수의 10%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한겨레 신문>, 2001년 6월 21일.)
이것은 사실 미국의 연구기관의 조사 결과이지만 한국의 인터넷 채팅 사이트만 들어가도 이런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지만 모 인터넷 채팅 사이트는 초기시절 네티즌들을 확보하기 위해 수백 명의 매춘부들을 사이트 회원인 양 활동하도록 했다는 말도 들린다. 그 사이트에서 채팅을 하면 번섹(번개 섹스)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회원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나이트 클럽에서의 하룻밤 헌팅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익명성을 바탕으로 음란한 대화를 주저없이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인터넷 번색이 당사자들에게는 훨씬 부담이 적은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런 것은 현실에서 파트너를 직접 만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사이버 섹스에 그다지 가까운 개념은 아니다.
반면 이런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단지 오르가즘을 위해서 자위행위를 할 때 에로 비디오물을 빌려보는 사람들은 흔히 있다. 특히 마땅히 취미생활을 할 수 없는 고시촌 근처에는 수많은 비디오방과 비디오 대여점이 널려 있다. 고시생들의 생활은 낮에는 공부, 밤에는 에로 비디오라는 말이 돌 정도로 고시생이 에로비디오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상당하다. 최고의 에로 비디오 여배우였던 클릭 영화사의 이규영씨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저의 팬 페이지에는 고시생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저의 팬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고시공부를 하던 도중 저의 영화를 보며 외로운 밤을 달래고 있다고. 아마도 제가 출연하는 영화의 가치는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귀찮을 수가 있다. 자신이 보고 싶은 비디오가 대여중이라거나 혹은 에로비디오만 빌려가는 자신을 마치 변태성욕자를 바라보듯하는 가게 점원의 눈길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다. 그래서 에로비디오 한편 보기 위해 전혀 관심도 없는 <러브레터>와 같은 순정파 멜로영화를 먼저 빌리는 소심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불필요한 과정을 인터넷이 모두 다 생략해준다.
인터넷에서 가장 발빠르게 사업화한 영역은 바로 인터넷 섹스 산업이다. 한국의 거의 전 에로비디오 업체가 인터넷에서 서비스를 하고 있고, 인터넷 에로영화 방송국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콘텐츠 유료화 사업을 현실화시켰다. 어디 그뿐인가? 광케이블 보급으로 인한 고속 모뎀을 사용하여 외국의 무료 사이트에서 국내의 에로비디오와는 질적으로 다른 하드코어 포르노물을 마음껏 찾아볼 수도 있게 되었다. 아마 조사는 안 되었지만 인터넷 때문에 불법 포르노물을 개당 2만원씩 받고 팔던 청계천 용팔이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언뜻 보면 비디오 가게에서 빌리는 것 혹은 청계천에서 사는 것과 인터넷에서 다운받는 것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한국과 같이 고속모뎀이 널리 보급된 나라에서라면 정액제를 이용하여 포르노물을 무한정 다운받아볼 수 있다. 아무리 비디오 가게와 청계천을 들락날락 하는 사람이라도 물리적 시간적 한계가 있겠지만 인터넷은 그런 한계를 초월한다. 마음만 먹으면 24시간 내내 포르노물을 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이버 성 중독증이라는 병도 발생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국내 10-30대 인터넷 이용자의 15%가 인터넷 음란사이트등을 통해 성적욕구를 해결하려고 집착하는 `사이버 성 중독증'에 걸려 있다고 한다. 특히 밤에 남몰래 혼자서 인터넷에 자주 접속하는 사람, 낮에 성적인 공상에 자주 잠기는 사람들은 중독성을 한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한겨레신문>, 2001년 5월 1일.)
이런 사이버 섹스는 단지 손쉽게 성적 오르가즘을 얻게 해주는데 그치는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 그리고 섹스에 대한 가치관을 크게 뒤바꿔 놓는다. 보다 편리하고 보다 빠른 오르가즘을 추구하다보면 그 사람은 현실의 섹스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본격적인 사이버 섹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사이버 섹스는 가능하다.
마르코 브람빌라 감독의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 실베스터 스탤론과 산드라 블록이 사이버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20세기의 인간 실베스터 스탤론은 냉동인간으로 보존되었다가 21세기에 다시 살아난다. 그리곤 21세기의 여인 산드라 블록과 사랑을 나누려 하는데, 산드라 블록은 체액을 교환하는 섹스, 즉 현실의 섹스를 천하고 원시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스탤론과 헬맷을 나눠쓰며 편안히 누워 상상적 교감을 하는 사이버 섹스를 권한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스탤론이 이런 사이버 섹스에 적응하지 못하고 헬멧을 던져 버린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꿈꾼 것은 산드라 블록 한 명만이 아니었다. 공상과학 소설 속에는 이런 사이버 섹스를 소재로 다룬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SF소설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프레데릭 폴이라는 작가는 이미 1960년대에 [아날로그 사랑]이라는 단편에서 이런 사이버 섹스에 대한 상상을 형상화시켰다. [아날로그 사랑]은 천 년 뒤의 사랑과 섹스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돈과 도라는 오십 광년이 떨어진 우주선 속에서 네트워킹을 통해 섹스를 한다.
도라의 머리 위로 몇백 야드 거리에 둥둥 떠 다니는 인공 도시나 오십광년 떨어진 대각성(목동자리의 가장 큰 별)을 선회하는 우주선 안에서 돈은 자신의 기호 판독기에 명령을 내려 페라이트 파일로부터 그녀를 소생시켰습니다. 그러면 그녀가 나타났고 그들은 황홀하게 지칠 줄 모르고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물론 살아있는 육체로 나누는 사랑은 아니지만 그의 육체는 극도로 개조되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쾌락을 위해서 육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식기는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았습니다. 손이나 가슴, 입술로도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감각 기관을 통해 자극을 받아들이면서 전송했습니다. 바로 두뇌가 이런 감각 기관의 역할을 했지요. 그것이 바로 참을 수 없는 격정이나 오르가슴을 해독했고, 기호 판독기는 아놀로그 포옹, 아날로그 키스, 아날로그 흥분, 그리고 도라의 영원하고 열정적이며 절묘한 아날로그를 지닌 또 다른 아날로그를 그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아니 도라의 아날로그뿐만이 아니라 다이앤이나 귀여운 로즈 아니면 웃음이 헤픈 알리시아의 아날로그도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전에 아날로그 장치를 교환한 사람은 누구든지 불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워낙에 과장되고 공상적인 이야기라서 어떻게 저것이 가능한지 언뜻 감을 잡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오르가즘이라는 쾌락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고대로부터 수많은 의학자들과 정신분석 학자들이 연구했던 분야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음경과 여성의 음핵의 외피에 있는 특별하게 민감한 신경 말단이 자극 받으면 이것이 뇌를 자극하여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비전문가가 보더라도 그런 것이 오르가즘의 정체라면 신경말단을 거치지 않고 적접적으로 뇌에 자극을 주면 충분히 그것을 얻을 수 있지 않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신경 자극이 없이도 포르노 한 편만 봐도 쾌락을 느낄 수 있고, 그냥 자다가 깨는 몽정도 가능하지 않던가?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성 윤리의식으로 따지려 들지 말자. 어떻게 남성과 여성의 사랑의 감정도 없이 오르가즘이나 추구하려고 하느냐고 묻기 전에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검토를 하자는 말이다. 그래서 인터넷의 산업화 자본화 문제와 결부시켜 과연 이런 현실이 어떤 방식으로 산업화되어 일상에 침입하는지부터 생각해보자.
원스톱 서비스, 사이버 섹스는 산업이다.
컴퓨터를 비롯한 인터넷 정보통신의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전파는 기본적으로 섹스와 게임이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역사는 게임의 역사와도 일맥상통하고, 인터넷 광케이블의 보급은 포르노 동영상을 다운 받으려는 욕망과 결부되면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물론 이것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상업주의의 힘이라 할 수 있다. 돈이 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달려들고 그런 의지 때문에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포르노물을 유통의 과정없이 간편하게 볼 수 있는 초보적 사이버 섹스가 아니라 보다 인터렉티브(쌍방향성)한 면을 강조하며 고차원적인 사이버 섹스를 이야기하려면 <래리>라는 고전적인 컴퓨터 게임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대머리 주인공이 8등신 미녀를 찾아다니며 섹스행각을 즐긴다는 어드벤처 게임 <래리> 80년대에 처음 제작되어 이미 7편이 출시되었을 정도로 섹스 게임의 기본틀을 완성시켜놓았다. 이런 <래리>라는 대선배의 어깨를 타고 넘으며 21세기에는 보다 과감한 섹스 게임이 출시되고 있다.
투시가 가능한 X-레이 안경, 최음제 등등을 이용하여, 수퍼모델로 하여금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옷을 벗게 하는 <팬티 레이더>라는 3D 어드벤처 게임, 그리고 최근에 논란이 되는 미소녀 강간 게임까지 이미 제작되어 인터넷을 통해 보급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강간을 소재로한 게임 감금을 친구에게 얻었다는 중학생 정모(13)양은 "친구끼리 몇명까지 성공했는가로 경쟁하고 있다"고 말했다. 10대 회원이 대부분인 한 인터넷 동호회에는 "난 어제 3명을 성공했다. 어제는 엄마에 누나, 선생님까지 2시간 만에 끝냈다", "최고의 음향효과와 3D가 가미된 야한 장면이 나오는 게임 추천." 등의 글이 수없이 올라 있으며, "무삭제판 2개와 신프로를 맞교환하자."는 등 게임을 구하려는 청소년으로 붐빈다. (<한국i닷컴>, 2001년 6월 27일)
이런 것은 단지 게임이 아니냐고 우습게 볼 수도 있겠지만 3D 그래픽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지 게임은 현실이 아니라고 안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더군다나 온라인 사이버 테크놀로지의 특성 상 어떻게 해서라도 가상 현실을 실제 현실처럼 꾸미기 위한 연구를 밤낮으로 하고 있는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미국의 성기구 제조업체인 세이프섹스플러스컴은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특별한 진동기를 팔고 있다. 이것을 몸에 대면 인터넷에서 만난 상대가 마우스나 키보드로 진동의 강약을 조절하며 이쪽을 자극해 준다. 더구나 미국의 비비드 엔터테인먼트는 사이버 섹스를 위한 잠수복 모양의 보디슈트를 시판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한번 생각해보라. 보디슈트를 입고 온몸에 자극을 받으며 3D 안경을 쓰고 실사에 거의 근접한 그래픽을 보면서 섹스나 강간을 하고 있다고. 이 정도면 현실의 섹스와 거의 맞먹는 정도의 현실감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백 년 뒤 천 년 뒤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기술적으로는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해 있다. 과연 상업주의의 힘으로 언제부터 판매의 단계에 진입할 수 있느냐의 문제만 남아있을 뿐이다.
네덜란드의 공상과학 소설가인 마누엘 반 로겜은 이미 60년대에 <파트너 로봇>이라는 소설에서 섹스로봇을 파는 회사를 소재로 다루었다.
파트너 로봇은 상상력이 필요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쓸모있는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파트너 로봇은 침실의 이상적인 동반자입니다. 최신품은 자동 온도조절 장치를 설치하여 흥분 정도에 따라 피부 온도를 조절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소비자의 특별 주문에 따라 동작이 개선되었고, 피부와 음부가 촉촉하게 유지될 수 있게 하였으며, 적절한 때에 소리가 나오도록 기능이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우리 파트너 로봇은 완벽한 짝짓기 기술을 습득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품인 인간보다 한층 더 소비자 여러분의 욕구를 충족시킬 것입니다."
이것 역시 먼 미래의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이미 현실에서 저차원적인 방식이긴 하나 사업화되고 있다. 미국의 포르노 여배우 줄리 애쉬톤은 자신의 성기를 본따 만든 인공성기, 그리고 자신의 몸 전체를 본따 만든 섹스 인형을 팔고 있다. 줄리 애쉬톤의 영화를 본 남성들이 그런 제품들을 구입하여 자기 방에서 줄리 애쉬톤에 대한 상상을 하며 함께 뒹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공성기와 섹스인형은 날이 갈수록 보다 더 정교하고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것이 3D 그래픽과 인터넷 네티워킹과 연결된다면 팬들은 줄리 애쉬톤과 직접 섹스를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성주의자들 쪽에서도 의외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출산과 임신의 고통없이 여성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파트너를 골라 성적 오르가즘을 획득할 수 있다면 여성이라고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70년대의 포르노 논쟁을 넘어서
국내 언론 등에서 이런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사실 "가상 현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여 현실에서 성폭력을 조장할 수 있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이미 이런 논쟁은 70년대 미국에서 포르노 문학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서 다 나온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해도 지금 시점에서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의미는 있다. 21세기에 급격히 산업화되고 있는 사이버 섹스 산업에 비하면 너무나도 얌전하고 아름다운 에로티시즘을 다룬 포르노 문학에 대해서 페미니스트들은 두 가지 논거를 들어 비판했었다.
(1) 비록 포르노물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성추행, 강간, 여성구타와 같이 해롭지는 않아도, 그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유해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긴다.
(2) 포르노물은 여성들의 명예를 더럽히고 여성들을 차별대우하기 때문에 어쨌든 본질적으로 유해하다.
이에 대해서 자유주의자들은 "노골적인 성자료에 노출되는 것이 청장년층에서 직무태만이나 범죄 행태의 인과작용에 대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증거가 없다."라는 것과 "그 정도를 여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인정한다면 아마 표현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축소시키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라는 논리로 반박하였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의미있는 반박은 포르노물에 대한 비판이 부드럽고 정감있는 바닐라 섹스만을 인정하고 그밖의 모든 다른 섹스를 허락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데에 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없이 원하는 상대와 자기가 원하는 방식의 섹스를 즐기고 볼 수 있는 자유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21세기의 사이버 섹스의 산업화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사이버 섹스를 즐긴다고 해서 현실에서 성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사이버 섹스 중독자들이 업무를 태만히 한다는 증거도 없으니 그건 그들이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시민적 권리가 아니겠는가? 누가 무슨 근거로 이런 것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마치 중세와 근대 시대에 자위행위를 즐기는 사람들을 신성모독자 혹은 반사회적 범죄자들로 몰아붙이던 것과 뭐가 다른가?
누가 인간을 대신하는가?
사이버 섹스를 비롯한 사이버 문화가 야기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의 종착점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안이나 정답을 내놓기도 어렵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가치는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에 그 누가 쉽게 답을 낼 수 있겠는가? 사이버 문화를 주로 다로는 문화비평가 홍성태씨의 고민도 그렇다.
이제까지의 기계화과정은 한편에서 인간과 자연, 다른 한 편에서 인간과 기계라는 대당을 비교적 완고하게 확립하였다. 이 이중의 대당 속에서 인간은 자연과 달리 목적의식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의 환경을 변형시킬 수 있으며, 또한 기계와 달리 의지력과 판단력을 지닌 존재로서 행위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제 자연환경의 변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짐과 동시에 인간의 기계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어감에 따라 이같은 대당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동요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밀물처럼 쏟아지며, 거대한 불안감이 저녁 땅거미처럼 내려앉게 된다.
인간이 쾌락을 위해서 산다면 사이버 섹스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 남에게 그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고 자신만의 쾌락을 자신만의 방에서 즐기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없고 비판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쾌락 이상의 그 어떠한 가치가 있고 인간이 그런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라는 확신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이버 섹스를 논하는 사람들도 가끔가다 이에 대한 관점을 언급하게 된다. 앞서 인용한 <파트너 로봇>의 저자 마누엘 반 로겜도 이렇게 낙관적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파트너 로봇과의 섹스에 지친 주인공 에릭의 생각을 통해서.
그러자 그는 갑자기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쾌락을 즐기는 데 완벽한 섹스법칙을 이용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가 진정한 인간과의 사랑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달았고, 그 순간 마음속에 참아왔던 감정이 일시에 폭발하면서 자신이 그토록 강하게 인간을 사모해 왔다는 것에 대해 현기증을 느끼게 되었다.
에릭에게는 그것이 첫경험 때 받은 인상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것은 그의 첫경험이었다. 그는 파트너 로봇이란 일시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총족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한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불완전하나마 인간들끼리의 짝짓기만이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이버 섹스를 다루는 소설의 결말도 이와 비슷하다. 아무리 사이버 섹스의 쾌락에 빠져든다 해도 인간인 이상, 결국에는 인간을 찾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주제를 숨겨놓는다. 그러나 이미 급속하게 발전하는 사이버 테크놀로지와 급속하게 퍼지는 사이버 섹스 산업의 현실을 돌이켜볼 때 이렇게 낙관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로 환원되는 21세기에 그 누가 "인간의 길을 가라."고 호통을 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매춘의 천국으로 전 세계에 널리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한국의 기성세대들이 다음 세대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무슨 낯짝으로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사회학자 엄신기호의 책 {포르노 All boys do it!}에서 포르노를 접한 중학생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내 불만은 이런 것이다. 왜 포르노 중에 <타이타닉>이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그런 것이 없냐는 것이다. 물론 거대한 스펙타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에는 로맨스가 없다는 것이다. 포르노는 단지 포르노일 뿐이다. 포르노에는 남녀간에 사랑한다는 느낌도 없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로맨스가 없다. 그러니 포르노는 지겹기만 하고, 행위만 있지 도무지 관계가 없다. 어떨 때 보면 동물들 교미하는 거 보는 것 같다. 물론 포르노에서 로맨스를 기대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포르노는 코미디 같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이 대다수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낭만적인 로맨스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기성세대의 문화에 편입되기 전에는 누구에게나 기계화나 물질화와는 다른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려는 생각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지될 수 있는가 없는가는 바로 인간의 몫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는냐의 문제, 그런 가치가 인정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도 오히려 기계가 아닌 인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인간과 기계와의 또다른 대립전선이 될 수도 있다. 인간과의 섹스와 사이보그와의 섹스, 그 중 어느 것이 더 인간다운 섹스란 말인가?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달로 만약 가장 인간다운 섹스를 사이버 상에서 제공해줄 수 있게 된다면, 이미 오염될 대로 오염된 인간의 섹스와 현실의 섹스가 더 가치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사이보그를 주인공으로 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런너>에서 사이보그 로이가 인간에게 들려준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나는 너희들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보아왔다. 오리온성좌에서 우주전함이 불타는 장면, 탄하우저 문의 어둠 속에서 씨빔 (c-beams)이 찬란하게 빛나는 장면. 하지만 그 모든 순간들도 (내가 죽으면) 영원한 시간 속에 묻혀져 버릴 것이다. 마치 이 빗속의 눈물처럼."
사이버 섹스를 논하기 전에 바로 인간의 섹스, 인간다운 섹스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하고 보듬어 주는 것이 인간다운 섹스인지, 인간 본연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다운 섹스인지 그 경계조차 분명치 않다. 사이보그들이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조차 대신해준다면, 사이보그가 인간의 섹스를 대신해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누가 인간을 대신해 주겠는가?
<참고자료>
1. 홍성태 엮음, {사이버 공간, 사이버 문화}, (문화과학사, 1996)
2. 홍성태, {사이버 사회의 문화와 정치},(문화과학사, 2000)
3. 마이클 해밍슨 외, 이석정 옮김, {사이버 섹스}, (예문, 1995)
4. 토머스 라커, 이현정 옮김, {섹스의 역사}, (황금가지, 2000)
5. 엄기호, {포르노 All boys do it!}, (우리교육, 2000)
6. 로즈마리 통, 이소영 옮김, {페미니즘 사상}, (한신문화사, 199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 졸업.
인터넷 시사 웹진 대자보 편집장.
문화예술 웹진 미인 기획위원.
콘텐츠 프로덕션 놀다, 콘텐츠 개발 팀장.
- 이전글제3호/여성대표시/그녀와 프로이트 요법 외 1편/김상미 02.06.14
- 다음글2호 신작시 권영준 벚꽃 축제 외 1편 02.06.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