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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다시 읽는 고전의 세계-프랑스 문학과의 만남/이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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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고전의 세계-프랑스 문학과의 만남
『어린 왕자』다시 읽기
- 생텍쥐페리에 있어서의 '현실'과 '환상'
이가림
지난 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탄생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서는 그의 문학과 생애를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펼쳐졌다. 그는 1900년 6월 29일 프랑스 리옹에서 출생하여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7월 31일 리옹 근처 론강 계곡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 부대를 추적하기 위해 정찰기로 야간비행을 하던 중 지중해 상공에서 실종됐다. 최근에 한 잠수부가 마르세이유 앞 해저 85m 지점에서 생텍쥐페리가 실종 당시 조종했다는 정찰기 라이트닝 P38의 잔해를 발견하는가 하면, 3년 전에는 생텍쥐페리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가 마이세이유 근처 바다에 쳐놓은 어부의 그물에 걸려 발견되기도 하는 등 그를 둘러싼 기적적 신화가 심심치 않게 생겨나고 있다. 1998년 2월 27일 그의 고향인 리옹에서 '앙트앙 드 생텍쥐페리 재단' 설립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기념관 및 매스미디어 자료관 건립을 비롯해서 연구 보조금, 청소년 모범상, 장학금 제정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03개 나라말로 번역되어 {성경}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다음 가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어린 왕자}는 {남방 우편기}(1929), {야간 비행}(1931), {인간의 대지}(1939), {전투 조종사}(1942)에 이어 내놓은 생텍쥐페리의 모든 고뇌와 진실의 총결산, 그의 문학적 추구의 궁극적 도달점을 보여주는 결정체라 할 수 있다.
1943년 4월에 발표된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 생존시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유일하게 동화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소설'이다. 어떤 작품이 어린이를 위한 동화의 형식으로 쓰여져 있을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작품을 가볍게 취급하기 쉬우며,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음을 보게 된다. 작품에 대한 표피적 해석에 머무르거나 어린이의 수준에 맞는 것으로만 이해해 버린다면 중대한 의의를 부여할 수 있는 열쇠로서의 알레고리(寓意)에 접한다 해도 그저 재미있는 환상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소홀히 간주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화체 이야기의 참다운 가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브 르 이르(Yves Le Hir)가 적절히 말했듯이 "어린이들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를 잃어버린 어른들인 것이다". 게다가 그렇듯 미묘하고 섬세한 뉘앙스로 가득차 있는 작품의 예술성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다름 아닌 어른들이라는 역설적 사실도 이해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생텍쥐페리 자신이 『어린 왕자』의 헌사 첫머리에서 이 동화를 어른들에게 바치는 데 대해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더욱이 생텍쥐페리는 의도적으로 이 작품을 옛날 이야기 식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뚜렷히 밝히고 있으며, 그러기에 이 작품을 가볍게 읽어치워 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독자들(어른들)에게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린 왕자』는 단순히 재미나는 어린이용 동화로써 쓰여진 것이 아니고, 깊은 알레고리가 숨겨져 있는 상징적 의미의 두께를 가지고 있는 생텍스적 추구의 결정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어린 왕자』에 깃들어 있는 여러 가치에 대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접근이 시도된 바 있으나, 이 작품이 쓰여진 당시의 작가 자신의 입장, 즉 사상적·심리적 위상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는 다소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텍스트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바의 상징적 의미를 충실히 추적해 나가면서, 『어린 왕자』의 '죽음'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탐색을 통해서 우리는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왜 동화풍의 우의적 수법으로 기술했는가 하는 질문을 새롭게 던질 수 있으며, 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찾는 과정에서 작자 자신의 내면적 핵심과 상상력의 깊이를 포착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어린 왕자』의 제 1장은 이 소설의 나레이터로 등장하는 '나', 즉 생텍쥐페리 자신임에 틀림없는 한 비행기 조종사의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의 첫머리에서부터 우리는 어른에 대한 지나친 실망과 어린 시절의 '나'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대조적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가 어른의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어린이의 세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특히 어린 시절의 '내'가 그린 코끼리를 삼키고 있는 보아뱀 그림이 어른들에게는 한결같이 모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기발한 삽화를 통해서 매우 날카롭게 표출되어 있다. 이러한 놀라운 아이디어는 일상적 관념을 파괴하는 상상력의 소산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현실에서 환상의 세계로 날아가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적 환상의 세계는 일반적인 동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공상세계의 비현실적 아름다움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 그가 동화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공상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려는 단순한 의도에서라기 보다는 바로 그러한 우의의 형식이 필연적인 것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필연성의 바탕이 되는 근본적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풀어나갈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로서, 우리는 주인공인 어린 왕자가 지상에서 떠나는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고자 한다. 어린 왕자의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이 장면은 일상적인 관념으로 쉽게 풀이한다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 왕자의 '떠남'에 대해 일상적 현실 속에서의 의미가 아닌 보다 더 섬세한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작가의 깊은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열쇠로서의 상징적 알레고리가 숨어있다고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린 왕자가 자기의 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무엇 때문에 정신과 육체의 분리라는 수단을 필요로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왕자가 지상에서 떠나는 장면은 확실히 상징적 알레고리가 감추어져 있는 장면이며, 그러기에 여러 갈래의 해석이 가능한 장면이기도 한 것이다. 이 장면이 특별히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해석 방법의 차이에 따라 이 작품이 희망의 외침으로 끝난다는 견해와 절망의 외침으로 끝난다는 견해의 상반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지상으로부터 사라지기 직전에 이렇게 말한다.
- 아저씨가 온 건 잘못이야. 걱정을 하게 될테니까 말야. 나는 죽는 것처럼 뵈겠지만 그게
사실은 아니야…
- 이거 봐, 아저씨, 거긴 너무 먼데야. 나는 이 몸뚱아리를 가지고 갈 수가 없어. 너무 무거워.
- 그러나 그건 내버린 묵은 허물같은 거야. 묵은 허물, 그건 슬프지 않아…
이와 같이 설명을 하고 나서 어린 왕자는 '마치 나무가 넘어지듯 조용히 쓰러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사하라 사막에 조난당하기 이전의 생활로 돌아온 '나'는 깊은 슬픔에 싸여 어린 왕자가 가르쳐 준 진실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채, 간절한 기다림 속에서 살아간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요하는 것은 어린 왕자가 사라지는 장면에 관한 것이다. 그가 육체를 버리지 않고는 지구를 떠날 수 없게끔 설정한 것은 자신의 별에서 출발하여 지구에 도착하기까지의 간단한 몸가짐에 비해 다소 번거롭고 심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어린 왕자의 경우,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감히 그런 말을 쓰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린 왕자의 떠남 자체를 '죽음'으로 간주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기면서도 쉽사리 '죽음'이라는 표현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은 데에 문제의 초점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복합적인 알레고리가 함축되어 있는 장면에 대해서 여러 연구가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1) 주인공인 어린 왕자가 신의 나라의 사람, 즉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닌 영원한 존재로 보는 경우, (2)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로 규정하는 경우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어린 왕자를 인간과 같은 운명으로 파악한 연구가들은 다시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진다. ⓐ어린 왕자의 육체는 소멸되었으나 그 영혼은 어른의 세계 속에 다시 소생된다는 입장과, ⓑ어린 왕자의 죽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같이 어른의 세계 속에서 소멸되어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작가의 페시미슴의 표현이라고 보는 입장이 그것이다.
어린 왕자가 하늘로부터 지상에 보내졌다고 생각하는 클레망 보르갈(Clément Borgal)은 '그리스도가 주의 곁으로 돌아갔듯이' 어린 왕자가 하늘나라로 돌아갔다고 보며, '어린 왕자는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에만 그 육체를 빌어서 가지고 있고, 진정으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때는 그 몸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씨몽(P. H. Simon)은 어린 왕자를 인간의 어린이로 보는 점에서 클레망 보르갈과는 아주 판이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확실히 어린 왕자의 모습에는 보르갈이 지적한 바와 같이, 평범한 모습 이상의 순수무구한 면모가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지구에 도착할 때까지의 어린 왕자의 행동과 말속에는 이 세상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순진성이 넘쳐흐르고 있다. 그러나 지구에 도착한 이후부터 '어린 왕자의 상징은 그 이미지를 바꾼다'는 것이며, 이전과 같이 신랄하게 어른을 책망하거나 풍자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 자신이 '인간이 아들'로서 장미와 사랑의 문제에 대해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상의 두 가지 견해를 보다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보르갈의 해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린 왕자가 단지 육체만을 빌어 입고 있는 신의 나라의 사자라고 한다면, 장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 고민하는 모습은 부자연스런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어린 왕자가 인간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인간성과 신성이라는 두 요소를 모순되지 않게 갖추고 있는 존재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을 다 충족시켜주는 것이 다름아닌 어린이일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어린이의 품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소수의 어른도 이에 해당되는 것이리라. 어린이의 순수성은 더러움이 없다는 점에서 시적인 것에 상응하며 동시에 어른과 동일한 감정을 소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나는 행복스럽거나 불행하거나 했다. 나는 벌을 받거나 용서를 받거나했다. 나는 공부를 잘하기도 했고 잘 안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날그날에 따라서 달랐었다…'라는 진술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은 인간생활의 요소도 아울러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 왕자에게서 엿보이는 신성과 인간성의 모습은 인간의 아들이 아닌 또 하나의 이상적 어린이에 속하는 인물로 볼 경우에 한해서만 그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린 왕자를 인간의 아들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 살펴보면, 결국 어린 왕자가 '떠난다'는 것은 그가 '죽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어린 왕자의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어른의 세계 속에 살아 남는다고 생각하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연구가로서 우리는 뤽 에스탕(Luc Estang)과 씨몽을 들 수 있다. 씨몽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어른으로 태어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어린이는 어른 속에 존재한다. 어른은 이제 더 이상 어린이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어른은 언제나 어린이가 오기를 기다린다.' 이와 같은 씨몽의 견해를 따른다면 어른인 '나'가 어린 왕자의 진실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어른으로 소생하여 현실사회에 다시 복귀한다고 풀이 할 수 있다. 생텍쥐페리의 이상과 비전이 현실 안에서 실천되는 그야말로 희망에 넘치는 세계의 제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의 고장이 해결되고,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 당하기 이전의 사회로 되돌아 온 '내'가 동료들의 환영을 받으면서도 '나는 슬펐었지만 동료들에게는 "고단해서…"라고 말했다' 라는 진술을 하는 것은 이 작품의 결말이 결코 밝은 것만은 아닌, 어떤 무거운 암시를 던져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비록 어린 왕자와의 이별이 슬픈 것이라 할지라도, 그 어린 왕자의 영혼이 '나'의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면, '나'는 이제 고독한 생활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거듭 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나'는 어린 왕자에 대한 생각만을 골똘히 할 뿐, 쓸쓸한 생활을 계속 영위해 가고 있다. '나'는 자신의 슬픔과 절망, 그리고 외로움을 극복해나갈 만한 강한 존재가 되어 돌아온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씨몽의 해석은 생텍쥐페리의 진정한 의도에서 빗나간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린 왕자가 떠나는 장면의 슬픔에 차있는 무거운 분위기에 대해서 매우 명쾌한 분석을 보여주고 있는 피에르 파제(Pierre Pagé)의 견해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어린 왕자를 일단 인간의 아들로 보고 그 어린 왕자가 죽는 것은, 지상(어른 의 세계)에서는 '어린이의 마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내'가 '정신의 소리를 소음으로 덮어버리는 사회라는 사막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 현실(지상)의 세계 속에는 참다운 인간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어린 왕자가 그러했듯이 죽음을 통해서 밖에는 진정한 해방에 다다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오직 계산과 타협의 생활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결국 생텍쥐페리의 페시미슴이 어린 왕자의 '죽음' 속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피에르 파제의 분석은 작가의 페시미슴을 이끌어내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으나, 이러한 접근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작가가 이 작품의 마지막 장('내'가 이전의 동료들 사이에 무심히 되돌아와 어린 왕자에 대해 간절한 회상에 잠기는 장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파제가 지적한 바와 같은 종류의 서글픈 페시미슴의 토로가 아닌, 보다 차원 높은 생텍쥐페리적 의도가 깃들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왕자의 '사라짐'에 관한 의미분석에 있어서,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들이 놓쳐버린 가장 중요한 핵심의 하나는 '나'와 '어린 왕자'와의 관계를 단순히 어른과 어린이의 대립적 관계로서만 다루고자 했을 뿐, 그 밖의 다른 '관계'를 상정해보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나'와 '어린 왕자'라는 두 인물 사이에는 보다 강한 친족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이 작품의 중심적인 주제, 특히 어린 왕자의 '사라짐'의 의미를 놓쳐 버리게 되리라 생각한다.
'나'와 '어린 왕자'의 관계는 다름아닌 분신(le double)의 관계이다. 두 인물사이에 분신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텍스트 전체 속에서 예를 끄집어 내어 낱낱이 증명하고 설명하는 일은 이 글의 취지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다만 어린 왕자의 죽음과 결부된 분신관계만을 해명하는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그러면 '내'가 '어린 왕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을 간단히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리하여 나는 6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고장을 일으킬 때까지 혼자서 살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왕자를 만나 비로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때부터 쓸쓸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만남'은 '내'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여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생텍쥐페리의 생애 속에도 실제로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리비아 사막에 조난 당했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의 친구가 되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고백 한 바 있다. 이것은 진정한 자기발견의 인식이다. 바로 그 때의 귀중한 체험이 '나'와 '어린 왕자'사이의 분신관계를 설정하는 인식의 출발점이 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나'는 자기 자신 속에서 어린 왕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 왕자는'나'의 진정한 자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분신관계의 설정 밑바탕에는 생텍쥐페리가 이상으로 생각한 '정신적 공동체'를 어른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다소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이 암암리에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는 그러한 페시미슴의 구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는다. 비록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끝내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절망적 허무를 뚜렷히 인식하여 거기에서 빠져나갈 길을 끝없이 추구한다는 데에 생텍쥐페리의 작가적 성실성과 위대성이 있다 할 것이다. '내'가 정신적으로 위기에 처해있었을 때 나타난 어린 왕자가 단순히 '어른'에 대한 대립적 존재로서의 '어린이'가 아니고 '나'의 진정한 자아, 즉 '나'의 어린시절의 모습으로서, 환상의 세계에 들어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분신이기 때문에 페시미슴으로부터 벗어나갈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신관계의 성립은 동시에 현실세계 안에서의 '나'의 외로움과 소외의식을 더욱 증대시켜주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저씨가 하늘을 보며 웃는 걸 보며 친구들이 아주 이상하게 여길 거야. 그러면 아저씨는
이렇게 말할 거야. 《응 별들을 보면 난 언제든지 웃음이 나네!》그러면 친구들은 아저씨를
미친 걸로 알 거야. 난 그럼 아저씨한테 아주 못할 일을 하게 되겠는데…
이처럼 '내'가 어린 왕자의 환상에 빠지게 되면 언제나 일반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기 마련인데, 이것은 현실 속에서의 '나'의 삶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어린 왕자가 찾아낸 진실을 '내'가 '어른'의 세계 속에서 그대로 반영시키며 가꾸어 나가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에서 페시미슴이 싹트는 것이다. 특히 이 소설에 있어 어린 왕자가 떠나버리는 장면에서부터 더욱 짙게 나타나는 슬픔의 분위기는 '내'가 진실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현실세계 속에 살려나갈 수 없다고 하는 절망의 인식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현실세계 안에서 타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게 되었을 때, 생텍쥐페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은 그가 발견한 진실을 강력하게 실천해 줄 사람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그때까지는 '나'의 내부 깊숙이 그 진실을 소중하게 간직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 진실은 '어른'의 세계(현실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고 환상의 세계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어린 왕자의 사라짐이 필연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내'가 조난 당하기 이전의 생활로 어쩔 수 없이 되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포착한 그 진실을 지키기 위해 어린 왕자의 추억에만 의존하여 살아가겠다는 분신관계의 설정 또한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분신관계의 해명을 통해서 우리는 피에르 파제가 지적한 바 있는 페시미슴의 정확한 의미와 뉘앙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령 '나'는 표면적으로는 어린 왕자와 만나기 이전의 쓸쓸한 생활로 되돌아온 듯 하다. 사실에 있어서 내면적으로 보이지 않는 변모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정신의 소리를 소음으로 덮어버리는 사회라는 사막'으로 되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별들은 모두 고요히 웃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분신관계의 성립에 의해서인 것이다. 파제의 견해만으로는 이와 같은 복합적 의미구조를 결코 시원스레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1935년 12월 리비아 사막의 조난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을 때의 생텍쥐페리에게는 인간을 향한 열렬한 신뢰와 미래에 대한 눈부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를 살려준 그대, 리비아 사막의 베두인 사람이여, 하지만 그대는 영원히 내 기억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그 얼굴도 생각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는 '인간'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
들의 얼굴과 같이 내게 나타난다. 우리를 눈여겨 뜯어본 적도 없으나, 그대는 벌써 우리를
알아보았다. 그대는 사랑하는 형제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모든 사람들 속에서 그대를
알아볼 것이다.
이처럼 생텍쥐페리는 '모든 인간들' 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정신적 공동체, 또는 연대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3년에 발표한 『어린 왕자』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과 현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을 똑바로 인식함으로써 그로부터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라는 또 하나의 안티 테제를 제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작가가 어린 왕자의 죽음을 필연적인 것으로 설정할 수 밖에 없는 구체적 체험을 맛보았으며, 꿈과 현실의 괴리를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린 왕자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현실세계(어른의 세계) 안에서 정신적 공동체라는 작가의 이상이 허물어지고 만 것을 가리킨다. 작가가 현실사회와 타협하기를 거절한다면, 작가의 이념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가 마련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때문에 생텍쥐페리는 현실세계에서 환상의 세계로 무대를 옮기는 것이다. 이 환상의 세계 속에서만 오로지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설의 형식에도 변화가 요구된 것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념이 환상의 세계에서 전개되어 나가므로, 지금까지 생텍쥐페리가 즐겨 사용했던 리포르타쥬 형식, 즉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행동문학의 스타일은 그렇게 적절한 것이 못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어린 왕자의 죽음의 의미는 단순히 작가의 페시미슴을 드러내 보여주거나 작가로 하여금 현실세계에서 환상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끔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작품형식을 완전히 바꾸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게 하고 있다. 자신의 말이 현실세계 안에서 공허한 소리가 되어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생텍쥐페리는 고차원적인 환상의 세계, 시의 세계 속으로 이야기의 무대를 이동시켜 언어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 왕자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죽지 않으면 안되며 환상의 세계에서는 계속 살지 않으면 안되게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어린 왕자의 조건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옛날 이야기의 세계, 즉 동화의 형식을 빌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환상의 이야기, 어른들에게 바친 아름다운 동화가 의미심중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야기를 환상의 세계 속에서만 가두어두지 않는데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 『남방우편기』,『인간의 대지』,『전투조종사』등 어느 것에 있어서나 생텍쥐페리는 항상 현실 속에 바탕을 두고, 거기에서 환상의 세계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어린 왕자』에 있어서는 거꾸로 환상의 세계에 바탕을 두고 거기에서 현실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무대가 환상의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현실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단순히 어린이용 동화의 차원을 넘어서 꿈과 현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우주적인 상상력의 결정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결국 어린 왕자의 사라짐은 환상과 현실의 세계를 결부시켜 주는 매듭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생텍쥐페리 자신과 분신관계에 놓여있는 진정한 자아의 표상인 어린 왕자가 기나긴 정신적 탐구를 거쳐 형상화된 인물 일뿐 아니라, 현실적 환상의 구조 또는 환상적 현실의 구조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창조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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