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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기행 산문/그런 사랑도 있었네/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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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산문
김인자(詩人)
1955년 강원도 삼척 출생.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대시학》 "시를 찾아서" 로 등단. 시집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시산문집 {그대, 마르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도 있었네.
호주를 거쳐 뉴질랜드를 여행 중이었을 때다. 남섬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뉴질랜드의 수도가 있는 북섬 웰링턴(Wellington)에서 북서쪽으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 파머스톤 노스(Palmerston North) 인접한 곳 폭스톤(Foxton) 비치에다 그간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싶어 가방을 풀기로 했다.
내가 묵고 있던 숙소 이층은 눈이 모자라 다 볼 수 없는 남태평양의 넓은 바다가 시야 가득 들어오고 매일 저녁이면 빨려들 듯한 그리고 마음속까지 붉은 물이 스밀 것 같은 석양을 눈이 아프도록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이미 집을 떠난 지 한 달이나 지난 탓에 적당히 지쳐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불편도 익숙해져 적응이 되어 가는 때이기도 했지만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짐을 푸는 기분은 여니 때와는 달랐다. 특히 들꽃들 무리 지어 있는 모래언덕 위의 일몰에 하염없이 빠져들곤 하였는데 어둠이 내릴 무렵의 수평선은 가히 장관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아름다움으로 몸살이 날 것 같은 붉은 하늘과 바다를 본적이 없었다. 붉다 못해 검은빛이 도는 일몰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피할 줄 모르는 바다새들만 이방인을 반길 뿐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매일 나는 의식처럼 행하는 몸짓이 있었다.
몸보다 더 정직한 자연이 있을까?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움직일 수 있는 한 많이 뒤틀고 흔들며 몸이 곧 모든 도구가 되는 춤을 추는 의식이었다. (말이 춤이었지 그건 춤이 아니라 혼이 나간 광기의 발작 같은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오직 한 사람, 나의 가장 위대한 신, 그분께 드리는 마지막 의식처럼 나는 온 몸으로 바다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뛰고 구르며 춤을 추었다. 춤이 끝날 때쯤 몸은 땀으로 젖어들었고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가빴던 호흡을 정리하며 옷은 입은 채로 일몰에 취해 춤에 취해 나도 모르게(정말 그랬다. 나도 모르게) 남태평양 붉은 바다로 뛰어들곤 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기분 좋은 한기가 온 몸을 엄습해 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수평선 위로 붉게 걸린 석양과 어둠이 내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무도 없는 저녁 바닷가에서 맘껏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는 몸부림이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은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연으로 빨려들 듯한 자유로운 호흡을 통해 몸의 해방감을 맛보게 했던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때, 내 의식에서 열 수 있는 모든 오관을 열고 또 열었다. 그리고 바다도 하늘도 그렇게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곳에서는 새벽에 눈을 뜨면 바닷가를 산책하고 그리고 오후가 되면 수영복 차림 그대로 해변에 나가 일광욕을 즐기던가 아니면 물 속에 들어가 발아래 밟히는 조개를 잠수하여 잡는 일로 소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입은 옷이 좀 거추장스러우면 그냥 벗은 채로 해변가를 서성거려도 눈길 한 번 주는 사람이 없을 만큼 자유로운 곳이기도 했다.
마치, 은빛 밀가루를 쏟아놓은 듯한 고운 모래가 해안을 뒤덮고 있는 그곳 비치에는 아침이면 연인들이 말을 몰고 나와 해안을 달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왔고 ( 그 풍경은 타이티와 마르키즈 섬에서 그렸던 고갱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어떤 연인들은 오픈카로 끝없이 펼쳐지는 해안에서 머리를 흩날리며 달리다가 때론 차를 멈춘 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입맞춤에 빠져있곤 하였다.
특히 백발의 노부부들이 캬라반(캠핑카)을 타고 와선 파도에 부서지는 노을을 안고 느긋하게 비치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거나 혹은 손을 잡거나 서로의 어깨를 감싸안고 산책하는 실루엣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때면 그곳이 곧 낙원이 아닐까도 싶었다. 대체, 그토록 철저하게 몸에 밴 여유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하루는 제법 먼 바다까지 헤엄쳐 나가 조개를 잡아보겠다고 잠수를 하고 있었다. 한 번씩 물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몇 개씩 손에 들려져 나오는 조개잡는 일이 신기하기도 했고 또 재미도 있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사내 아이가 저만큼에서 내가 하는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둘은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헤엄을 치면서 처음으로
"하이!" 하고 가벼운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나란히 해변의 은빛 모래밭에 앉아 있었다.
검은 피부와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얼굴에 적당히 나있는 주근깨가 정겨워 보이는 웃음이 귀여운, 알고 보니 그가 바로 뉴질랜드의 원시부족인 마오리족 아이였다.
그 후로 한번도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늦은 아침을 끝내고 바다에 나가보면 언제 나타났는지 저쯤에서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며 다가오던 아이, 분명 마오리족이었지만 이름은 영어식 발음을 하고 있었다.
'라이오닐 오브라이언 엘슨(Lionel Obrien Elson)' 모래밭에다 스펠을 쓰며 제 이름을 또박또박 가르쳐 주었을 때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없어 난처해하자 발음이 어려우면 그냥 엘로 부르라고 했다.
엘은 햇빛이 너무 강렬해 그냥 태우면 안 된다며 손이 닿지 않는 내 등에다 썬크림을 서툴게 발라주며 수줍게 내 이름을 물었다.
"킴" 킴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생소한 발음이 그냥 우스웠을까? '킴' 이라고 어설프게 따라하며 아이는 웃었다.
내 나이를 물어와 몇 살쯤 되어 보이냐고 반문하니 글쎄, 라고 고개를 갸웃둥 하더니
"스물 한 살"? 나는 또 크게 웃었다. 그후부터 나는 엘에게 스물 한 살이 되었다. 엘이 또 물었다.
"우리 서로 좋은 친구가 되면 어떨까?"
나는 대답했다.
"굿, 오케이, 온리 프랜드?"
호쾌한 나의 대답과 반문에 크게 소리내어 웃는 엘의 얼굴에 귀여운 볼우물이 생겼다.
그 아이는 코리아가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인지 몹시도 궁금해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짧은 영어실력과 내 나라 말을 섞은 채 대한민국을 두서없이 설명해주곤 하였다.
내가 새 옷을 갈아입고
"이것 어때?" 하고 물으면 언제나 엘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예뻐, 그리고 귀여워" 아니, 귀엽다니!
나는 또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소리내 웃었다.
그 아이가 딱딱한 마오리족 영어로 뭔가 열심히 설명하거나 이야기하면 나는 열심히 한국말로 대답하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 때문에 답답했던 적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서로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 아이를 '엘' 혹은 기분이 좋을 때면 '굿 보이' 라고 불렀다. 아이는 바다 수영을 아주 잘 했고 내 앞에선 언제나 씩씩하고 용감한 사내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가끔은 밋밋한 가슴에 근육을 만들어 힘이 세고 강한 사내라는 걸 보여주려고 그럴 듯한 포즈를 취해주곤 하였지만 나는 놀라움이나 칭찬을 대신해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하였다. 엘과 내가 가장 많이 나눈 대화는 무언의 웃음이었을 것이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나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할 때에도 우리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하고 나면 함께 기분이 좋아지곤 하였고 열심히 설명을 하다가 말이 막힐 땐 웃음밖에는 달리 마음을 나눌 도리가 없었다. 엘은 종종 나의 어설픈 영어발음을 교정시켜 주는 선생님이 되기를 자처했다. 내가 실수를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웃으며 그래도 잘했다, 잘했다며 열심히 혀를 굴려주던 아이.
어느 날이었다. 손에 뭔가를 쥔 채 석양을 등에 업고 바다에서 걸어나오는 엘이 눈에 들어왔다. 구리빛 피부에 벗은 몸이 여니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는데 그날 따라 맨발인 엘이 더욱 원시성의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고 그 후부터 언제나 맨발인 엘을 따라 나도 맨발이기를 자처했다. 귀한 발을 보호해 준다고 굳게 믿어왔던 신발을 나는 그때부터 벗어 던졌다. 그런 내게 엘은 손뼉까지 쳐주며 환영해 주었다. 그렇게도 원하던 원시의 삶, 나는 그날 이후 그곳을 떠나는 동안 내내 맨발인 채로 엘을 따라 원시의 삶에 한 발짝 다가가고 있었다. 바닷가를 거닐 때도 풀숲을 헤치며 꽃을 꺽으려고 능선으로 달려 갈 때에도 윌리암 빌 아저씨의 농장에서 계란 담는 일을 도울 때나 아스파라가스를 꺽을 때나 농장의 울타리를 따라 입술에 붉은 물이 드는 것도 잊고 블루베리를 따먹고 있을 때에도 나는 늘 맨발이었다. 단지 양말과 신발만을 벗은 것뿐인데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유로움은 너무나 컸다. 뭔가를 사러 시내에 있는 마켓에 갈 때나 심지어는 공중 화장실에 갈 때에도 나는 맨발을 고집했다. 저녁이 되어 숙소로 돌아와서도 내내 맨발일 수 있다는 게 나를 즐겁게 했다. 그렇게 한 열흘이 지나자 발바닥이 딱딱해지며 조금씩 여린 피부가 적응이 되는 듯 했다. 그리고 아픔보다는 날아갈 듯한 몸의 가벼움이 거기 머무는 동안 계속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다.
어느 날 엘은 감자 튀김 한 줌과 보랏빛 들꽃을 불쑥 내밀었고 어느 날은 내 손바닥에 뭐라고 글씨를 써 보이기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의 글씨를 판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해도 여전히 그의 마음을 알고 느끼는 데는 장애가 없었다.
아침이면 내가 머무는 숙소 문 앞에 뭔가 인기척이 느껴져 내다보면
"굿 모닝 킴. 하아유 필링 투 데이?"
내 기분을 물어보는 인사를 환하게 던지며 영락없이 엘이 서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학교에 가는 길인지 가방이 들려져 있곤 하였다. 또 어느 날은 한참을 내가 일어나지도 않고 반응이 없으면 실망한 듯 내 방 창문을 쳐다보며 무거운 걸음을 아쉬운 듯 놓으며 저만큼 가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2층에서 커튼으로 몸을 숨긴 채 보고 있을 땐 그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또 어김없이 내 방 앞을 서성대기가 일쑤였는데 그런 그의 손에는 언제 꺾었는지 이미 시들어있는 달맞이꽃 몇 송이가 또 들려져 있는 게 아닌가. 그 후로도 나는 참 많은 들꽃을 그 아이로부터 선물을 받은 듯 하다.
하루는 엘이 바닷가에서 늦게까지 연을 날리고 있는 게 멀리 눈에 들어왔다. 숙소 발코니에서 손을 흔드는 나를 향해 엘도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뜨거운 여름 속에서 성탄절을 맞는 날이기도 했다.(서울에는 펑펑 눈이 올 지도 모르는데 타는 듯한 여름에 성탄절이라니) 아마 성탄선물로 연 날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한참 후 누군가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엘이었다. 연을 감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찾아온 게 분명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크리스마스 투유"
그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엘은 쏜살 같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짧았지만 나를 행복하게 했던 일이 있었다면 매일 그 넓은 남태평양으로 피를 토하듯 떨어져 물에 잠기는 일몰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 일몰에 넋을 놓고 있을 때쯤이면 어느 새 나타나 내 앞을 가리며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던 아이 엘. 언제부터인지 내가 드넓은 바닷가에서 일몰에 취해 미친 듯 춤을 추고 있을 때에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춤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쯤 등뒤에서 손뼉을 쳐주는 단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또한 엘이었다. 나는 때로 그가 나의 넓고 큰 무대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무수한 관객처럼 느껴져 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인사가 재미있었는지 엘은 늘 헤진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마치 연미복이라도 입고 있는 신사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내 인사에 답해 주었다. 나의 의식이 끝나면 우리는 긴 해변을 따라 떠들고 웃으며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때 마치 번개처럼 어둠을 가르고 저만큼 내 앞에서 구르기를 멋지게 선보이던 아이, 그도 엘이었다.
바보 같은 웃음,(때로는 진정 바보 같다는 말보다 더 우리를 감동시킨 언어가 있었던가) 언제나 콧노래로 흥얼거리던, 나는 따라 부를 수 없었던 마오리족 연가. 아버지가 힘있는 어부인 것이 자랑스럽다던 아이. 씨익 웃을 때마다 못생긴 덧니가 밉지 않았던 아이. 커다란 반바지가 수영복인 것이 부끄러웠던지 제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며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계면쩍은 웃음으로 모면하려 하던 아이. 늘 맨발이던 아이. 천진한 이마의 곡선. 바지 하나가 그가 보여준 옷의 전부였던 아이. 검은 어깨에서 흘러내리던 힘있는 원시성. 덥수룩한 머리에 눈이 빛났던 아이. 내게 시간을 잊게 해주었던 친구.
모처럼 나는 긴 여행에서 지치고 피곤한 마음을 정리하며 느긋하게 쉬고 싶어서 그 한적한 비치에 여장을 풀고 혼자 조용히 지낼 참이었는데 방해꾼이 나타났으니.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 가끔은 귀찮기도 했지만 분명 싫지는 않았다.
남태평양, 한낮의 태양은 살을 익혀버릴 듯이 뜨거웠고 나날이 내 몸이 까맣게 타는 것을 그 아이는 더 건강해 보일 뿐 아이라 아주 예쁘고 귀엽다며 익살을 부렸다. 그렇게 엘과 나는 모래밭에 다리를 묻고 모래성을 쌓으며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을 되풀이하며 반은 눈빛으로 반은 웃음으로 채웠다. 바람 가득한 바닷가 모래언덕 위에 피어있는 들꽃들 흔들릴 때마다 문득 나는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리곤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엘의 웃음이 있어서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온 가족의 불편을 뒤로하고 혼자 여행이라는 미명 아래 떠돌 수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해 받을 수 없는 나만의 이기적 욕심일지도 모르는데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믿고 기다려주는 식구들의 변함없는 지지는 수 없는 여행 중에서 언제나 나를 감사로 새로워지게 하지 않았던가.
노란 들꽃 5송이
그것은 학교 가는 길에 문 앞에 몰래 놓고 간
엘의 선물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또 나는 늦잠을 잔 모양이다.
뜨거운 빛 때문에 금방 시들고 마는 꽃을
다른 날처럼 안으로 들고 들어와
가난하지만 나만을 위한 식탁 유리컵에다 꽂았다
아마 엘이 학교에서 돌아와 식탁에서 웃고 있는 꽃을 보면
그 큰 입을 히죽 벌리고 저도 꽃처럼
환하게 그러나 수줍은 듯 웃겠지
- 어느 날의 메모 중에서 -
그런데, 이상하게도 엘은 내가 언제까지 그곳에 머물 것인지, 서울은 언제 돌아가는지를 한 번도 묻지 않았고 나도 그것에 관해서는 마치 불문율처럼 내 입으로는 직접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엘의 눈빛이 오래, 마치 함께 그곳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간절해 있기도 했고 굳이 헤어지는 걸 앞당겨 미리 말해 좋은 기분을 깰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우리는 헤어짐을 전재로 하지 않는 만남을 본 적이 있었던가?
얼마 후 서울로 돌아올 며칠을 남겨두고 나는 엘과 헤어지는 연습을 혼자 익히고 있었다. 마음은 그게 아니었지만 엘이 쓸쓸히 내 방 앞을 기웃거리다 그냥 돌아가도록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럴 때마다 우린 친군데 뭘, 하며 헤어짐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썼다. 가끔은 나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엘에게 알밤도 주고 엉덩이도 툭툭 두드려주고도 싶었지만 참아야했다. 내가 그런 기분을 참아낼 수 있는 약은 오직 웃음뿐이었다.
어느 날, 숙소 현관 구석진 자리 한 동안 남의 것처럼 신지 않아서 뽀얗게 먼지를 안고 있는 신발과 벽에 걸린 긴팔 자켓과 낡은 청바지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마음도 몸도 서둘러 돌아가 그들을 반갑게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예정대로 끝내 엘에게 단 한 마디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언제까지 엘은 아침이면 내 방문 앞을 서성대며 나를 찾아 폭스톤의 은빛 비치를 돌아다닐까? 아니, 어쩌면 금방 잊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지만,
때로, 언어가 불가능했으므로 더 크고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자위하게 하던 내 무모한 여행에서 만났던 가장 맑고 아름다운 눈빛과 검은 피부를 가진 엘.
귀가 아프도록 '킴' '킴' 내 이름을 불러주던 마오리족 아이. 까만 볼에 주근깨가 가득했던 아이. 귀여운 덧니에 뭐라고 끊임없이 재잘대기를 좋아하던 아이. 들꽃을 꺽어 내게 바치던 아이. 조개를 잡아 치마폭에 가득 담아주던 아이, 눈빛이 맑아 쳐다볼 때마다 나를 기분 좋게 하던 아이.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다니던 아이. 코리아를 묻고 또 묻던 아이. 마흔 여섯의 나이를 스물 한 살로 되돌려 준 아이. 그것은 엘을 통해 얼마 만에 느껴보았던 순정이었고 우정이었는지,
항상 나를 웃게 해주던, 이제 겨우 11살 5개월의 나이를 가진 내 짧은 여행에서 누구보다도 소중했던 친구,
뉴질랜드 북섬 파머스톤 노스. 폭스톤 비치에서 꿈을 키우며 지금도 살고 있을 마오리족 아이, 잊을 수 없는 이름 라이오닐 오브라이언 엘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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