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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젊은시인조명/홍일표/곡 외 9편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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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젊은시인조명
홍일표
曲 외 9편
구부러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도 함께 구부러진다
미시령이나 대관령을 넘을 때
휘어진 바람의 푸른 등허리가 보인다
강원도 산길은 실버들이다
헐렁한 두루마기다
여기서는 사람과 길이 함께 출렁이고
함께 흘러간다
오래 전 리듬이 발바닥을 타고
쩌릿쩌릿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내 몸이 고무신처럼 쉽게 구부러지고,
모든 구부러짐은 다 노래가 된다
저 멀리
허리 가느다란 해안선이 낭창낭창 걸어오고 있다
相生
하릴없이 공원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의 시선이
아장거리며 걷는 아이에게 흘러간다
가볍게 이슬방울에 톡 부딪는 햇살,
노인의 눈이 반짝 빛을 낸다
폐허의 적막 슬쩍 밀어내고
슬며시 입가에 번지는 웃음.
찰랑찰랑 뛰노는 물을 가득 안은 논두렁처럼
아이 하나 머금은 노인의
짧은 행복
따뜻한 나무
벚꽃나무 속
수만 와트의 빛을 만드는
발전소
겨우 내내 비축한
빛의 양식
튀밥처럼 튀겨내어
식은 가슴마다 뿌려주는
하늘거리는 봄의 손길
성자처럼
밥 퍼주는 공양주 보살처럼
3월
수암사 오르는 길은
갈참나무, 병꽃나무, 오리나무가
모두 입 다물고 묵상 중이었다
가장 먼저
산수유 노랗게 허공에 떠 있었다
쉬임없이 소곤소곤 종알대고 있었으나
골짜기의 물들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좁은 산길 울퉁불퉁 박혀 있는 돌들이
툭툭 발목을 잡았다
줄레줄레 따라오던 잡념들은
그만 슬그머니 나를 놓아버리고,
수암사 가까이 다가갈수록
깊어지는 고요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비로소 맑게 빛나는
바람소리, 새소리
고요 속에서 뭉클 내가 만져지는 순간
꿩 한 마리 푸드득 날아올랐다
산길
또 하나의 물의 형식을 본다
물을 닮은 물의 족속들
미꾸라지, 뱀, 오솔길
그들은 한결같이 물의 몸짓을 물려받았다
뻣뻣이 서 있던 나무 병정 수만 그루가
깃발도 방패도 다 놓아버리고
일제히 손을 들고만 가을산
산봉우리 하나 점령하지 못한 빈 나무들 사이로
산허리를 통째로 휘감아 오르는 빛나는 길을 보아라
긴 오라 같은 길에 묶여 옴쭉달싹 못하는 산을 보아라
아름다운 물의 치마끈,
길게 길게 풀리고 있다
거리에 사람이 꽃피다
공휴일 이른 아침, 텅 빈 거리
사람이 없으니
비로소 사람이 보이네
사람들로 넘치던
골목, 골목들 헐렁하네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풍경들도
하나둘 얼굴 내미네
제비꽃이 제일 먼저 싱긋 웃으며
돌 틈을 비집고 나오네
어쩌다 눈에 띄는 한두 사람도
설렁거리는 바람이네
바쁜 걸음, 걸음에
연신 두들겨 맞던 길바닥도
모처럼 편안히 길게 누웠네
뻥 뚫린 그 위를 휘적휘적 걸어보네
비로소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는 거리
풀꽃이 풀꽃으로 보이는 거리
오늘은 너희에게 배운다
누구나 아픔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법이라고
창 밖 가지 꺾인 나무들이
몸을 흔들며 말한다
땅을 기어가는 것이나
하늘을 나는 것이나
언젠가 먼지로 분분히 흩어질 것들
잠시 살아 붐비는 동안
어차피 안고 가야할 짐
즐거이 끌어안아야 한다고
가느다란 몸으로 이슬 한 짐 지고 있는 풀잎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옷 벗는 풍경
아들은 요즈음 글자 바꾸기에 골몰한다
<국어>를 <북어>로,
<사회>를 <산화>로,
<국사>를 <궁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아무래도 반듯하게 박혀있는 글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무언가 바꾸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지
오늘도 멀쩡한 글자에 시비를 건다
혁명을 한다
책 속의 낱말들은 졸지에 날벼락을 맞아
제 얼굴을 잃어버린다
갈 곳을 모르고 기우뚱거린다
순간, 한 곳에 묶여있던 물들이 재재거리며 달아난다
누더기 같은 이름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알몸으로 국경을 넘는다
아들이 킬킬거리며 웃는다
봄은
아직 잎이 돋지 않은 나무들,
4월의 헐렁헐렁한 바람이 분다
어디선가 날아온 새 한 마리
포릉포릉 옮겨 앉는 자리마다
신생의 봄볕 돋는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푸른 목청들이
파릇한 머리통 내어밀고 출감하기 시작한다
지난해 화려하게 스러졌던
봄,
처처에서 울근불근 다시 솟아오르는 동안
그리움의 꼭지들이 툭툭 터진다
두 손이
붉게 젖는다
태풍
독수리, 독수리떼다 너무 무거워 날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삶의 덩어리들 머리채 휘어잡아 날려버린다 뒤집어버린다 지상에 게딱지처럼 달라붙어 전후좌우 가지런히 정돈된 질서가 마뜩찮은지 어지러이 흐트려 놓는다 난동이다 야생의 거친 짐승이다 한 번도 젖어본 적 없는 유리창의 차가운 가슴을 부수고, 자리 한 번 옮길 줄 모르는 소나무의 외고집을 뿌리째 뽑아 던진다 항아리의 숨통을 막고 있는, 무거운 모자 뚜껑이 날아가고, 허명으로 번쩍이던 거리의 간판도 한순간 떨어져 부서진다 수천 리 질주하던 바람이 자진하여 쓰러진 지상의 한 켠, 하늘에 새로 돋은 별들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폐허의 한 귀퉁이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시작 노트】
이 땅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들 중에 우리와 무관한 것이 있을까. 길가의 토끼풀, 생강나무, 배추흰나비, 맑은 물 속의 버들치 한 마리까지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다. 두아미쉬-수쿠아미쉬족의 추장은 말하고 있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땅이 인간에 속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의 오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곳곳에서 파괴하고, 죽이는 일에 열심이다. 작고, 가볍고, 여린 것들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의 삶을 더욱 황폐하게 할 뿐이다.
시는 온힘으로 말한다. 삶의 진실은 인디언 추장이 가리키는 바로 그곳에 있다고. 윤기 흐르는 나뭇잎, 강가의 물안개, 모래밭을 어루만지는 잔물결조차 신성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그 마음에 자리한다고. 우리의 망가진 生을 수리하는 도크는 바로 그 자연 속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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