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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김은정 홍일표의 작품세계/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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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남석
댓글 0건 조회 5,699회 작성일 02-06-1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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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호 김은정 홍일표의 작품세계
   -물(水) 형(形)·나무(木) 심(心), 나무와 물이 어우러진 풍경
   김남석


 Ⅰ. 물의 몸짓으로 길 넘기

홍일표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갈피에는, 가볍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단어가 다수 끼어있다. 시인이 고르는 단어가 결국 시인의 생각을 반영하는 질료라고 할 때, 이러한 단어는 생각의 유연성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것이다. 가령, 제목부터 유연함의 기미를 물씬 풍기는 「曲」의 경우를 보자.

구부러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도 함께 구부러진다

미시령이나 대관령을 넘을 때

휘어진 바람의 푸른 등허리가 보인다

강원도 산길은 실버들이다

헐렁한 두루마기다

여기서는 사람과 길이 함께 출렁이고

함께 흘러간다

오래 전 리듬이 발바닥을 타고

쩌릿쩌릿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내 몸이 고무신처럼 쉽게 구부러지고,

모든 구부러짐은 다 노래가 된다

저 멀리

허리 가느다란 해안선이 낭창낭창 걸어오고 있다   

이 시에는 부드러움을 형상화하는 시어가 아주 많다. 뽑아보면, 〈구부러짐〉, 〈휘어짐〉, 〈헐렁함〉, 〈출렁임〉, 〈흘러감〉, 〈낭창낭창〉이 그러하다 할 것이다. 〈바람〉, 〈실버들〉, 〈고무신〉, 〈노래〉, 〈해안선〉 역시 부드러움을 보조하는 시어로 선택되었다. 이러한 시어들이 던져주는 미려한 어감은, 굴곡이 심한 길을 여행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탄력있게 투영한다. 특히 〈구부러짐〉은 세 번에 걸쳐 강조될 정도로, 이 시에서 애호되고 있다.

나는 앞에서 홍일표의 시가 보여주는 의태어 내지는 단어들이 생각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시적 선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시적 화자가 짜증스러울 수 있는 고개길의 주행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일단 수긍된다. 시적 화자는 길과 함께 좌우로 구부러지는 몸의 반동을 즐기고 있으며, 노래를 절로 떠오릴 정도로 흡족해 있다. 결미에서는, 멀리 보이는 해안선의 굽은 호선까지도 반가운 심정으로 맞이하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시적 화자가 체득한 생의 지혜가 원숙한 것임을 알려준다. 현대사회는 기본적으로 규격화된 기준을 준수하는 사회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경제적이고 합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규칙의 강제성과 능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다. 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도시의 길은 모두 직선을 표방한다. 곡선 도로는 경제적인 낭비일 뿐더러, 심정적인 불편함으로 인식된다. 아무도 고속도로를 곡선으로 만든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홍일표는 이러한 세상의 속성을 〈뻣뻣함〉(「산길」)이나 〈반듯함〉(「옷 벗는 풍경」) 혹은 〈정돈된 질서〉(「태풍」)로 요약해낸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 화자가 넘어가는 도로(미시령이나 대관령)는 이러한 문명 사회의 합의된 패턴을 거부하는 길이다. 하긴 이 거부는 자연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던 인간의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이기는 하지만, 화자에게는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그는 기꺼이 이 어지럽고 피곤하고 더딘 길에서 기쁨을 찾고 있으며, 얼마든지 유쾌하게 걸어가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도로가 끝남을 알리는 해안선이, 안도의 한숨이 아닌, 또다시 맞이해야 굴곡진 인생의 한 축도이자, 느긋하게 음미해보고 싶은 심정적 여유로 수용되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표현하면, 홍일표 시가 길에 대한 명상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산길」,「거리에 사람이 꽃피다」,「옷 벗는 풍경」은 길과 흐름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는 시편이다. 특히 「산길」은 홍일표가 부여하는 길의 의미 윤곽을 직접적으로 노출한 시이다. 그는 〈뻣뻣이 서 있던 나무 병정 수만 그루가/ 깃발도 방패도 다 놓아버리고/ 일제히 손을 들고만 가을산〉사이로 유유히 뻗어나간 길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 길을 〈산봉우리 하나 점령하지 못한 빈 나무들 사이로/ 산허리를 통째로 휘감아 오르는 빛나는〉 길로 격상시킨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점령과 빛남의 영광 뒤에 숨은 〈물의 형식〉을 거론한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무성한 나무에 가려 존재마저 희미했던 길이, 물의 형식을 본받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뻣뻣〉한 나무도 포기한 산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룩했다고, 그는 믿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물에 대한 믿음이 어디서 연유하는가 따져보아야 한다. 아쉽게도 이 시에는 물길의 형태가 〈미꾸라지〉, 〈뱀〉, 〈오솔길〉, 〈오라〉, 〈치마끈〉과 외형적으로 상동하다는 암시만 남아있을 뿐, 구체적인 의미 상관성을 짐작하게 하는 근거는 미약할 따름이다.

그 상관성을 추적해 보면, 「옷 벗는 풍경」에 닿게 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아이들이 몰두하는 〈글자 바꾸기〉를 주목한다. 아이들은 〈국어를 북어로, 사회를 산화로, 국사를 궁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언뜻 생각하면, 이러한 글자 바꾸기는 단순 유희에 지나지 않기에, 깊은 사색이나 숨은 뜻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시인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시인은 〈멀쩡한 글자에 시비를 거〉는 행위에서 〈혁명〉을 읽고, 가식을 벗은 알몸을 읽고, 규격의 틀을 뛰어넘는 자유로움을 읽는다. 그래서 시인은 글자가 바뀌는 순간을, 〈한 곳에 묶여있던 물들이 재재거리며 달아나〉는 해방의 순간으로 번역해낸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경우라 할 수 있지만, 시인이 지향하는 물의 몸짓의 의미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다시 정리하면, 홍일표는 기존의 세계가 자연의 속성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듯 하고, 그 거부의 방식으로 구부러짐과 부드러운 길의 속성과 물의 흐름을 주시하는 듯하다. 그리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질료들의 속성을 빌어, 생각의 유연함을 옮겨온다. 글자 바꾸기로 인해 글자의 제약이 해제되고 제 나름대로의 뜻으로 흘러가듯이,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삶도, 우리의 마음가짐도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지금까지의 세계, 즉 〈뻣뻣함〉과 〈반듯함〉과 〈정돈된 질서〉로 규정되는 우리의 현실이, 두루마기의 헐렁함이나 도로의 완만함 혹은 거리의 텅빔(「거리에 사람이 꽃피네」) 같은 유연한 사고의 속성을 본받아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시는, 자서에서 밝힌 대로, 자연의 속성을 깊이 따르려는 하나의 몸짓이 된다.   

Ⅱ. 나무의 마음으로 세상 보기
김은정의 시를 살펴보면 〈당신〉이라는 호칭과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김은정은 사물에 당신이라는 호칭을 부여함으로써, 사물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인다. 당신이라는 호칭은 현실 속에서 타자, 특히 타인을 부르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나의 방식이라고 했지만, 부르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진다. 목소리를 낮추고 여운을 둥글게 끌면, 타자와의 존재 거리를 좁히는 유용한 대명사가 되고, 격앙된 어조로 다소 딱딱한 톤을 가미하면 타자와의 격절감을 강화시키는 불쾌한 언사가 된다. 김은정은 시적 사물에 전자의 어조를 가하여, 자아와 사물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사물을 시적 공간으로 초대한다.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순간, 시적 화자에게 이끌려 시의 대상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일단 편입이 끝나고 나면, 그녀는 사물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한다. 시적 공간에 정립된 사물은,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의 기표가 되고 그녀가 감정을 투영시키는 문학적 소재가 된다. 「봄비」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찬찬히 보여주는 시이다.   

이제 시작이군요.

아주 조심스럽게 당신을 들여다봅니다.

나를 향해 당혹해하던 부드러운 솜털 투성이의 수줍음이 글썽일 때 얼마나 혈관이 저리던지요.

당신의 속눈썹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바람의 갈비뼈 붙들고 세상에서 가장 굳건한 게 무언지 물어볼까요.

목숨 짓이기던 기막힌 날들, 가슴 태우며 겨누는 눈총 눈살에 쩍쩍 갈라지던 얼음장 보듬고 칼칼하게 드세었지요.

겨우 그리움이라니요, 두려움을 사랑하나니, 영혼의 모서리를 문지르며 흐르는 수액, 이 아름다운 춤.

이제 시련이군요.   

이 시의 〈당신〉, 즉 시적 대상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봄비〉일 것이다. 화자는 내리고 있는 봄비를 미세한 부분까지 들여다본다. 세밀한 들여다봄이, 지나는 바람에 날리는 빗방울의 확산까지 감촉하게 만든다. 〈부드러운 솜털 투성이〉 혹은 〈당신의 속눈썹〉이라는 감각적 표현은, 작게 조각난 빗방울의 흩어짐을 감지해낸 결과이다. 문제는 화자가 이러한 빗방울의 비산 내지는 파편화 현상을 바라보면서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화자는 〈가장 굳건한 게 무언지〉를 묻고 싶어한다. 너무 가벼워 지나는 바람에 흩어질 수밖에 없는 봄비를 바라보면서, 왜, 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일까.

먼저 5행은 물음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행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겨누는 눈총 눈살〉은 일차적으로야 매몰찬 시선의 뜻으로 사용되었겠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얼음장〉을 참고하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으로 읽힐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이러한 가능성을 일단 수긍하면 〈목숨 짓이기던 기막힌 날〉은 눈이 내리는 차가운 겨울이 되고, 이어지는 〈쩍쩍 갈라지던〉에 나타나는 회고형의 어투는 화자가 직면한 시간이 겨울의 문턱을 넘어가는 시점임을 알려주는 징표가 된다. 화자는 지난 겨울에 차가운 눈을 맞고 얼어붙은 물을 껴안고 인고하고 있었던 것이고, 물기 부족으로 〈칼칼〉해진 몸을 추스리며 몹시 강하고 사나운 척 하며 굳건하게 서 있었던 것이며, 봄비가 내리면 이러한 갈증과 오기는 사라질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봄비를 맞이하자 화자는 당혹감에 빠져든다. 자신을 버텨온 것이 봄비 그 자체가 아니라, 봄비에 대한 그리움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은정이 주목하는 그리움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잠시, 「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는 사물을 대상으로 삼던 여타의 시편과는 달리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사물화하여 문면에 뚜렷하게 명시하고 있으며, 〈그리움〉의 정서가 〈나를 기르는 무한한 그릇〉임을 천명하여 그리움의 다른 이름임을 일러주고 있다. 이를 참조해 「봄비」로 돌아가자. 봄비를 맞이한 화자는, 자신이 고사 위협(두려움)속에서 물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왔으며, 그리움이 봄비에 대한 기다림의 부피를 형성하는 근원적 동력으로 작용했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척박하고 건조한 겨울을 지탱해준 힘이, 다름 아닌 봄비를 고대하는 마음(기다림)임을 알게 되며, 이러한 기다림은 그리움에서 자양분을 섭취하고 있었음을 또한 알게 되는 것이다.

6행으로 넘어가자. 본래 수액(樹液)이 땅속에서 나무의 줄기를 통하여 잎으로 올라가는 액이나 나무껍질 따위에서 나오는 액(나무즙)을 동시에 가리키는 용어인데, 「봄비」에서는 수액이 〈오른다〉고 하지 않고 〈흐른다〉고 했으니 나무껍질을 비집고 나오는 나무즙으로 풀이하는 편이 보다 온당할 것이다. 즉, 영혼이라는 거대한 몸체의 틈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감정의 격류를, 이 시인은 〈영혼의 모서리를 문지르며 흐르는 수액〉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인이, 스스로를 나무에 빚대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봄비를 다정하게 부르며 미세한 솜털에까지 집착한 마음도, 지난 겨울의 혹독한 고통을 되새기는 마음도, 물에 대한 간절함으로 봄비를 기다리던 마음도, 수액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을 주시하는 마음도, 모두 나무의 마음이라고 설명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봄비」는 화자가 봄비라는 반가운 대상을 통해, 화자의 마음이 나무의 마음으로 옮아간 시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제 시작〉인 봄비가 〈이제 시련〉이 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그 이유를 음미해보면, 이 시의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진술 사이에, 상당한 삶의 관록이 갈무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겨울을 나기 위해서 비축해두었던 나무의 굳건한 마음은, 봄비가 가져오는 환희 앞에서 눈 녹듯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봄의 환희만으로 나무의 생존 조건이 모두 충족될 수 없다. 더구나 봄의 환희라는 것이 영원히 연장되는 행복도 될 수 없다. 봄은 짧게 왔다가 사라질 것이고, 겨울은 또다시 닥쳐올 것이다. 따라서 봄의 환희를 언젠가 맞이해야 할 혹독한 세월의 전초전으로 보는 시각이, 보다 지혜로운 자의 안목에 해당할 것이다. 결국 나무는 생존을 위해 다시 현실 응전 태세를 갖추어야 하는데, 무뎌진 마음을 다시 벼릴 수 있는 숫돌이 〈시련〉이라 한다면 봄의 나무에게는 지금 이것이 사라지고 없다. 시인은 이러한 깨달음을 비틀어 〈이제 시련〉이 도래한다고 노래한다. 이는 우리네 삶의 방식에도 유효한 전언이다. 우리는 닥쳐온 시련으로 인해 삶의 불안정성을 경험하지만, 목전의 시련이 사라진다고 해서 삶의 제반 조건이 반드시 안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적당한 시련은 삶을 단련시키고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는 훌륭한 처방이 된다는 점에서, 시련은 삶의 필수 요소라 할 만하다. 시인은 이러한 시련의 부재를, 당적한 시련으로 포착해내는 혜안과 솜씨를 발휘한다. 이 점은 이 시가 드러내는 중대한 미덕이다.

김은정이 시적 화자를 즐겨 나무에 투영시킨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또 하나의 시가 「손」이다. 이 짧은 시는 시선의 이동을 내밀하게 숨기고 있어 김은정 시의 특질을 이해하는 데에도 일정한 도움이 된다.

벌판을 들여다본다

역경의 조각보

이 근면한 이파리 두 장   

화자는 〈손〉을 〈벌판〉에 비유한다. 사람의 피부 표면을 멀리서 바라보면 부드럽게 느껴지기 일쑤이니, 화자는 대상과 상당히 근접 거리에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손가락 모양에 집중하면 벌판이 아닌 산, 특히 오봉산(五峰山)의 모양에 빚대어졌을 터이니, 이 시에서 화자는 손바닥이나 손등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셈이다. 손에는 미세한 주름이 마치 낮은 구릉처럼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다. 서로 평행하게 지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손금이라고 부르는 피부주름이 마치 굵은 강처럼 길게 흐르고 있다. 이처럼 손바닥 안의 세상은, 구릉과 그 구릉을 지나는 길과 마치 강처럼 거대한 물줄기가 어우러져 있는 〈벌판〉이다. 여기서 화자는 사람의 체취를 발견하려 애쓴다. 다음 연으로 넘어가면, 사람의 흔적을 찾기 시작하는 시인의 시선과 만나게 된다. 손의 주름진 표면에 아로새겨진 힘겨움의 자취가 눈에 들어온다. 힘든 일들을 겪으며 얻은 상처와 고난의 흔적이 눈에 들어오고, 이 흔적 속이 누적된 세월의 격랑이 눈에 들어온다. 손 안에 각종 인간사의 〈역경〉이 〈조각보〉처럼 기워져 있는 셈이다. 다음 행의 〈근면한〉은 이러한 손의 속성을 단적으로 밝혀 놓은 표현이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손은 〈이파리〉로 새롭게 규정된다. 그것도 두 개임을 강조하여, 시인의 시선이 처음보다 멀찍이 물러났음을 드러낸다. 이제 시적 초점은 손이 아닌 손의 주인이 된다.

정리하면 시인은 손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그 안의 풍경을 벌판으로 노래하다가, 그 벌판에서 벌어질 만한 고난들을 상상해서 손이 수행한 역경의 세월을 짐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나무의 손 격인 잎에 견주어서, 시적 대상을 나무로 탈바꿈시킨다. 나무처럼 황량한 벌판에 서서 역경의 세월을 감내하겠다는 의도인 듯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나무의 속성을 받아들여, 자신의 마음을 나무의 마음과 일치시키려한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 이러한 비유 자체가 참신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이 자신의 마음을 나무의 마음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속내를 직설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시선의 자연스러운 이동 속에 의연한 삶의 자세를 용해시켰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또한 나머지 신작시에서 한계로 드러난 불필요한 수식어와 설명어투를 깔끔하게 제거하여 독자들의 사고와 상상력의 공간을 넉넉하게 마련했다는 점에서 기억해둘 만하다.

나는 앞에서 김은정의 시가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사물을 친근하게 끌어온다고 하였다. 이미 언급한 「봄비」이외에도, 「촉」,「아침」,「품」이 이러한 유형에 속하고, 넓게 말하면 「촛불」도 포함시킬 수 있다. 단 「촛불」의 경우에는, 〈당신〉이라는 호칭을 포기하고 〈너〉라는 이질적 호칭을 거칠게 강조하면서, 자아와 사물의 대립을 강조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개략적으로 다른 시들을 검토해 보면 「촉」의 경우에는 긴 물건의 끝에 박힌 뾰족한 물체를 언급하다가 〈해시계 바늘〉로의 의미있는 집약을 시도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침」의 경우에는 새날을 밝히는 아침 햇살을 대상으로 끌어들여 〈기름진 땅〉을 일구어내는 시혜자(施惠者)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시작 의도는 모두 식물적 환경과 관련된다. 김은정이 시적 화자를 나무에 빚대고 있다는 앞의 결론을 대입하면, 시적 화자는 자신의 성장을 돕는 햇빛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고 종합할 수 있겠다. 따라서 화자는 새날과 토양을 일구는 햇살을 반겨, 세상이 "환한 물이 들고 있어요"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나무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대상을 수용하려는 시적 인식의 발로이다.   

Ⅲ. 경직된 현실 투시로, 사물의 확대된 세계로
간략하게 두 시인의 세계를 점검해 보았다. 홍일표는 유연한 사고로 삶 속의 각종 구속을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인다. 그에게 물은 도도하고 유현한 흐름으로 세계를 감싸안고 통제하는 새로운 질서로 여겨진다. 비록 그 질서가 〈반듯함〉이나 〈뻣뻣함〉과 같은 일률적인 체계를 이루지 않는 것이라 해도, 홍일표에게는 관계없다. 아니 그러한 체계를 벗어난 것이기에 더욱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른다. 김은정은 묵묵하게 서서 대상을 자신에게 끌어모은다. 이러한 성향은 물을 끌어올려 생명의 충일함을 이어나가는 나무의 그것과 흡사하다. 여기서도 물은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다만 세상을 감싸는 유연한 힘이 아니라, 자아를 지탱해 주는 근원적 동력이라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드러날 뿐이다.

마지막으로 두 시인이 노출한 약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홍일표의 경우, 자연 속의 새로운 질서를 시적 대안으로 삼아 현실의 모습을 일부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판은 현실의 모습을 적실하게 탐색한 연후에 이루어져야 더욱 효과적이라 할 것이다. 신작시 열 편만을 놓고 보았을 때, 자연과 대비되는―그의 시에서 부각시킨 〈정신의 유연성〉과 마주 놓인―〈현실의 경직성〉은 다소 모호하게 처리되었다. 자칫하면 정신의 유연함만을 앞세우고 현실의 참모습을 잃어버리는 막연한 시로 전락될 수도 있다. 이러한 우려를 미연에 차단할 수 있어야, 그의 시적 대안은 현실에서의 의미 생산력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김은정의 경우, 나무의 마음을 이용해 대상을 보고 세계를 조감하는 특이한 시선이 우선 주목되지만, 그 시선 안에 담긴 현실 응전력은 아직 확고하지 않은 듯하다. 현재까지는 개인적 정서의 세심한 배려에 묶여 있을 따름이다. 이를 시 내부의 언어적 층위로 바꾸어 표현하면 나무가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만 편애의 시선을 주고 있다고나 할까. 거센 세파(世波)를 이겨낼 시적 대응력으로 발돋음하기 위해서는, 벌판의 모진 바람과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대적할 만한 굳센 의지를 공고하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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