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창간호/특집/존재의 질곡과 영원에의 꿈/고명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고명수
댓글 0건 조회 6,685회 작성일 02-06-14 10:22

본문

특집 존재의 질곡과 영원에의 꿈 
-김구용의 초기시에 대하여 
고명수(시인·동원대 교수) 


1. 김구용 시의 이질성과 그 성격 
흔히들 김구용의 시는 난해하다고 한다. 그것은 김구용 시의 코드가 낯설기 때문에 일상적인 의미나 논리 맥락이 잘 잡히지 않는 데서 오는 평가라 할 것이다. 기존의 시들에 강렬한 회의를 품고 있던 그가 도전적으로 쓴 작품들이 출현했을 때 당시 시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전통파 시인들은 매우 당혹해 했다. 김종철의 지적처럼 '논리의 해체와 직관의 환상적인 인식'(《현대문학》338호 대담)에 바탕을 둔 김구용의 시가 추구했던 것은 우선 김수영을 제외한 다른 시인들에게서는 잘 보여지지 않았던 추상명사의 도입에 의한 정신적 내부세계의 표현이었다. 김구용이 추상명사에 천착했던 것은 서구시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그가 경도되었던 사조나 시인으로는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와 폴 발레리의 시였다고 대담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시의 바탕에는 보다 더 선험적으로 노장사상이나 불경과 같은 동양 고전의 교양이 스며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동학사에서 10여 년 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많은 서구의 번역서들과 동양의 한적漢籍들을 접했던 것 같다. 우선 그가 산에 있을 때 접했던 상징주의 계열의 작품들, 특히 폴 발레리의 시는 엄밀한 지적 정신의 결정체로서 그의 시적 개성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영향으로는 일본의 모더니즘 계열의 잡지 {시와 시론}이나 초현실주의 시인 니시와키 준사부로西脇順三郞의 시와 같은 한번 굴절된 일본의 초현실주의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초현실주의의 발상지인 프랑스의 폴 엘뤼아르나 로베르 데스노스와 같은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시를 통해 나름대로 초현실주의를 이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징적인 점은 김구용이 이미 선시禪詩들을 많이 접한 상태에서 초현실주의의 시와 시론을 대했기 때문에 보다 깊이 육화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구용의 시는 폭넓은 동양적 고전의 섭렵의 바탕 위에 그만의 독특한 모더니티 기획에 의해서 전후의 혼란 속에 부유하는 자아의 실존의식과 자의식의 세계를 펼치 보이고 있다. 이제 이러한 특징들을 지닌 김구용의 전집 제1권에 수록된 그의 초기시를 연대기 순으로 읽어나가며 그 정신적 궤적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2. 고졸한 미와 '맑은 원적圓寂'의 세계 
김구용의 습작 초기 시는 '쉽고 단순하며 정감적인 세계'를 노래했다. 우선 15세 소년 시절, 그가 개성에 수학여행 갔을 때 쓴 [회고]라는 시를 보면 매우 조숙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맑고 푸른 가을날 
고려의 옛 도읍을 찾아드니 
송악松嶽은 반기건만 
산들바람은 적적도 하네. 

충성의 어린 피가 풍상風霜을 겪어도 
선죽교善竹橋는 변함이 없건만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만월대滿月臺는 잡초만 우거졌구나 
-[회고] 1, 2연 

무상한 인간사와 무심한 자연사가 대립되어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시조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다소 상투적인 인식에 젖어 있지만, 화자는 역사의 유적지에서 생의 허무함과 고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회고적 에스프리에 젖어들고 있다. 이러한 시적 분위기는 같은 시기에 쓴 [부여扶餘]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때는 사월 만발한 꽃 
새는 그늘에 울어 한적하네. 

사비루泗搱樓에서 쉰다. 
고요히 흐르는 백마강白馬江 
하늘에 솟은 낙화암洛花岩. 

가버린 꽃들과 
타서 남은 곡식 낱은 대답 없으나 
저녁 노을에 밀려드는 뱃노래인가 
평제탑平濟塔은 슬프네. 
-[부여] 부분 

화자는 화창한 사월의 어느 날 백제의 고도古都인 사비성, '사비루'에서 쉬며 서글픈 역사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망국의 역사와 함께 사라진 인간들('가버린 꽃들')과 그들의 삶의 흔적들('타서 남은 곡식 낱')은 '고요히 흐르는 백마강'처럼 말없이 있는 것 같으나 화자의 마음의 귀에는 슬픈 '뱃노래'가 들려온다. 여기서 '평제탑'은 무상한 역사를 지켜 본 산 증인이면서 그것을 응시하는 시인 자신의 심경을 투사한다. 시상의 전개는 전반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전아한 어조를 동반하여 고졸한 정취를 자아내는데, 이는 한시의 훈습에서 온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면 당시의 김구용에게 시란 어떤 존재였을까? 

시여 둘도 없는 친구여 
괴로움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슬픔으로 안내하는가. 
나는 황홀하여 들어선다. 
한없는 낙원으로. 
-[시] 전문 

시는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공기 맑은 산사를 전전해 온 시인에게 독서와 함께 유일한 벗이 되었던 것 같다. 아무 것도 벗할 만한 게 없는 고독한 세상에서 화자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것이다. 시는 육체를 지닌 한 인간이 지상에서 겪어야 하는 갖가지 괴로움에서 시인을 건져내 주는 구원의 존재이다. 그러나 세계와 존재의 본질에 눈을 뜨면 뜰수록 인간은 슬픔에 도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지양된 슬픔일 게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시란 즐거움의 존재이면서 또한 슬픔으로 안내하는 역설적 존재이다. 화자는 그 역설적 존재의 '황홀' 속에서 무한의 '낙원'을 발견한다. 

김구용은 소년기에 부친을 여읜다.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그는 항상 부모에게 죄책감을 느꼈을 게다. [아버님 생각]이란 시에 보면 그런 처지에 있던 자신의 불효자 의식이 나타난다. 

저녁 개구리는 운다./ 하염없이 눈물을 닦고/ 빈소 방에 절하면/홀로 밝은/ 푸른/ 등불. 
-[아버님 생각]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부친을 오랜 동안 떠나 있어야 했던 자신을 '저녁 개구리'에 투영시킨다. 아버지를 가까이 하지 못했던 그에게 있어 아버지의 존재는 '홀로 밝은 푸른 등불'과 같은 유리된 존재일 뿐이다. 

김구용의 초기 시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조촐하면서도 고졸한 미와 함께 불교적 상상력과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그가 요양차 오래 기거했던 산사에서의 체험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누가 알거나 
내 마음을 아느니, 나 뿐이로세. 

아직도 두려운가 
한 번 마음하면 부처님도 되느니. 

아들아, 보람을 찾아라 
넘어서 못 넘을 산은 없느니. 
-[내 마음] 전문 

1939년 18세 때 쓴 위의 시에서 이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사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는 유심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이다. 마음 먹기 따라서는 누구나 부처도 될 수 있고 중생도 될 수 있는 것이니, 유심을 통한 자내증自內證이야말로 인생의 행·불행을 결정짓는 가늠자가 되는 것이다. '흰빛도 검은 빛도/ 차별없이 대하는'([무제] 부분) 평등과 '사랑'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언제나 '내 마음'일 따름이다. '넘으면 못 넘을 산은 없'는 것이며, 산을 넘었을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보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보람'을 찾아 헤매는 김구용의 시는 늘상 길 위에 서 있는 나그네의 시다. 지난날들의 추억을 뒤로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서 간다. 

낙엽은 쓸쓸하네. 
푸른 하늘에는 흰 달 
길은 끝없어라. 
못 잊는 지난날인데 
우리 아버님은 어디에 계시나. 

가을은 산성山城에도 짙어 
마음은 멀다. 다리가 아푸건만 
반나절이 지났네. 

푸른 연기 오르는 
고향에를 돌아왔으나 
닭소리, 샛바람에 다시 떠난다. 
생각도 버리고 간섭도 않으리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느니. 
-[나그네] 전문 

늘 고향을 떠나있던 화자가 일시 귀향을 했으나 '닭소리, 샛바람'에 다시 떠나는 화자는 어쩌면 영원한 방랑자의 숙명을 안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깨달음의 세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불멸의 세계를 찾아서 끝없는 길을 가려 하는 방랑자, 그러니까 김구용의 10대에 쓰여진 초기 습작시의 화자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암울했던 일제 말의 시기를 징용을 피해 산사에 은둔해야 했던 김구용의 20대 초의 시들은 어둠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드러나며 또한 그 어둠을 견디며 가야 하는 방랑자의 고통스러운 음성이 짙게 드리운다. 

① 파아란 등을 달고 어둠을 가노라. 
가기도 하려니와 저기서도 지나가는구나 
험할수록 가는 길은 고되어서 보람이라. 

알고자 하옵는 것 맑아서 밝으면 
애궂은 파아란 등불은 소용도 없으련만 
서로가 다 만날 때까지 나와 함께 꾸준히 가노라. 
-[등불] 부분   

② 괴로움의 무게를 아시는지요. 돌사자와 의논한 날은 숨이 가빴다. 돌사자의 목을 안고 늘어져 울었다. 빗방울들은 이기낀 돌털石毛들에 뚝뚝 돋았다. 돌사자는 크게 부르짖었다. 물 속의 행렬을 따라갔으나 단청 짙은 상여 앞의 촛불들도 꺼졌다. 요령소리는 은은히 넘어간다. 얼굴들은 어둠에 사라진다. 돌사자는 돌아보았다. 그는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옛터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돌사자石獅子] 전문 

①에서 구원에의 희망을 암시하는 '파란 등'을 달고 화자는 '어둠'의 시간을 가고 있다. 그러나 '험할수록 가는 길은 고되어서 보람이라'라는 진술에서 보듯이 화자는 인생을 달관한 견인주의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알고자 하옵는 것 맑아서 밝'아질 때까지 꾸준히 가겠다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전히 나이에 비해서 매우 조숙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②에서도 현실의 고통이 절제된 채 나타난다. '돌사자의 목을 안고 늘어져 울었다'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이 시인은 내면을 객관화하여 사물에 투영함으로써 차분한 어조로 정서를 통제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지적인 시작 태도는 20대 중반의 시들에 오면 더욱 단단한 이지理智로써 사유의 궤적을 묘사한다. 

투명한 사색의 날개짓이 이다지 숨가쁜 밤, 못(池)은 고요하다. 창을 열면 두 별(星) 이상의 별들이 시각視覺에서 연결하는 착잡한 각도들과 선들의 접맥점들을 집어낼 수는 없으나 분명한 현실로서 저마다 빛나는 자유의 통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싸늘한 콤파스의 송곳을 어느 곳에 박아, 한 원 속에 쩔은 호흡과 바쁜 구두소리로 한계 없는 도가니 속 명상을 제사祭祀할까. 

친구가 옛 병甁에 꽂아주고 가버린 꽃봉오리 끝에 불이 켜진 밤, 공연한 초조일까. 분紛을 아스스 흩날리며, 날아온 나비와 더불어 의논하는 것은 이르지 못할 계절을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색의 날개] 전문 

내면적 혼란을 시를 통해서 질서 지우며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화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스테판 말라르메나 폴 발레리의 지적 포즈를 느끼게 된다. '창을 열면 두 별(星) 이상의 별들이 시각視覺에서 연결하는 착잡한 각도들과 선들의 접맥점'이라든가 '싸늘한 콤파스의 송곳을 어느 곳에 박아 한 원 속에 쩔은 호흡과 바쁜 구두 소리'와 같은 표현에서 우리는 화자가 사물에 접근하는 태도가 매우 기하학적인 포즈를 보이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화자에게 있어 현실은 '분명한 현실로서 저마다 빛나는' 절대적 섭리의 실체로서 존재하며 그것은 또한 자체의 질서에 의해 '자유'롭게 통솔된다. '친구가 옛 병甁에 꽂아주고 가버린 꽃봉오리 끝에 불이 켜진 밤'에, '분紛을 아스스 흩날리며, 날아온 나비와 더불어 의논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려는 화자의 의지를 암시한다. 현실의 모순과 혼란을 넘어선 절대의 세계의 추구는 같은 시기에 쓰여진 [보이지 않는 손님]이나 [산 속의 오후 2시]에서도 그러한 '청정한 마음'의 세계, 혹은 '영원'의 세계에의 지향을 보여준다. 대단히 환상적이기까지 한 그 세계의 모습은 시 [동화童話]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나는 장벽臟壁에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새소리를 따라간다. 
물방울은 연잎사귀에서 도그르르 굴러 떨어진다. 
태초같은 초당草堂이 황혼의 숲에 있더라. 
버섯 위에서 별을 향하고 날개를 편 나비와 
소나무 밑에서 자는 사슴 곁을 지나 

산방山房으로 들어가면 
쩌르렁, 산을 넘는 종소리는 
그새 어디로 가고 
밝아오는 침묵 

자아를 향하여 향을 고로古爐에 피운다. 
달은 창에 둥긋이 솟아오른다. 

원적圓寂에 부각浮刻하는 조응照應이여 
먼 흐름으로 날아 내리는 하얀 새야. 
-[동화] 전문 

그곳은 한 마디로 '원적'의 세계이다. 청정하고 신비롭고 고요하여 만물이 선정禪定에 들어있는 듯한 영원한 세계의 모습이다. 그곳은 '나'가 없는 만물융화의 세계이며 '맑은 원적'([관음찬])의 세계이자 화엄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 고졸하고 적요한 동양적 조응의 세계는 샤를르 보들레르의 '만물교감'correspondances 혹은 우주적 조응correspondances universelle의 세계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명상과 침잠의 세계는 다음과 같은 유마적 입전수수立廛垂手의 세계와 함께 할 때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도시의 기슭을 흐르는 물소리에서 나는 그대 말씀을 들었다. 
그것은 나의 속삭임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고 종일 떠들던 소란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심정을 내 자신이 괴로워하는 심정으로 이해하였다. 
달의 호흡이 적산 가옥 맞은편 탁류에 은빛으로 부서질 때 나는 그대의 말씀을 흘러내리는 물소리에서 들었다. 
-[그대] 부분 

화자는 이제 저자에 있다. 타자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인식하며 '탁류'로 흘러내리는 시궁창의 현실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보살의 심처心處일 것이다. 보살은 '설명 이전의 자비'의 화현이며, '중생의 괴로움을 괴로워하고/중생의 기븜을 기뻐하시기에' '평생 자기가 없는' 자([원허대사])일 것이다. 맑은 물 속에서만 고고하게 자적自適하는 소승적 안주보다는 탁류 속에서 오히려 '은빛으로' 부서지는 대승적 진리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바라본 진리의 실체란 곧 근원적 생명인 물이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물은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야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법이다. 

비로소 숲속에서 안개를 헤치며 돌아오는 나의 명을 본다. 물이여,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인 나의 몸을 뚫고 달리라. 네 동경憧憬의 바다와 내 먼 생각의 신비 위로 무너지는 파도와 그 깊이에서 홀로 빛나는 진주여, 이제 해저의 마음도 버렸노라. 명멸하는 거품들이여, 옷을 벗겨다오. 물이여, 너를 내 그림자마저 없어지도록 품에 안아주마. 나를 흐름 속에서 분별하지 말라. 눈부신 물결의 오점인 방향을 찾는 돛대를 지워버리고, 내 그대 본질과 더불어 층벽의 나무처럼 잎을 구름에 펴며, 썩은 진흙 침상에 누워 연꽃 옷을 감고 녹음과 짐승들을 애무하는 심장으로 영원하라. 일적一滴의 허실인 눈물이 자기磁器의 물에 나타난 얼굴로 떨어져 무늬를 편다. 비는 이제 창 밖에 끝났다. 큰 달이 도처마다 내 마음의 수면에 영자映姿한 수목들과 꽃덩굴들 사이로 솟아오르는구나. 
-[물] 부분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의 몸은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이다. 그러기에 화자는 물에게 '나의 몸을 뚫고 달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 그대 본질과 더불어 층벽의 나무처럼 잎을 구름에 펴' 겠다는 진술에서 우리는 생명의 본질에 충실하며 본원적인 생명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은 화자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썩은 진흙 침상에 누워 연꽃 옷을 감고 녹음과 짐승들을 애무하는 심장으로 영원하라' 에서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연꽃' 같은 아름다운 진리의 꽃을 피워내며 동·식물 할 것 없이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원히 살고 싶은 소망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화자는 '큰 달'의 깨달음이 와서 '도처마다 내 마음의 수면에 영자한 수목들과 꽃덩굴들 사이로 솟아오'르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인에게 '물의 세계'란 '침범할 수 없는 장엄과 부드러운 고요'([원천])의 상징이며 '동·서·남·북은 없어'지고 '현율'絃律이 들려오는 곳이다. 

3. 존재의 질곡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협화음의 꽃들 
그러나 세계는 '불협화음'으로 가득하다. 아무리 깊은 산사에 파묻혀 지낸다 해도 외부적 정황은 내부세계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비슷한 시기인 1948년에 쓴 [밤]이라는 시에 오면 불안의 그림자가 나타남을 목격하게 된다. 이 시기는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좌우의 경직된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충돌하며 살벌한 정치적 상황을 연출하던 때이다. 김구용에게 이러한 이념들은 하나의 '꼭두' 즉 환영(幻)에 불과한 것이었다. 

난리 이야기가 미닫이에 타오른다. 
서재에 돌아와 신간新刊을 펴다. 
말쑥하게 꾸민 꼭두(幻)들이 놀아난다. 
마지막 장이 끝나기도 전에 
훅, 등잔불을 꺼 버렸다. 

한낮의 그림자가 등대 위를 지나간 기억도 새로운데 
지구는 이 밤, 열이 올라 어디를 항해하는가. 
사람들이 사람들을 잡아먹는 매일은 전파로 날은다. 

오소소 춥다. 
재를 헤치니 화로에서 
오두수五頭手가 나온다. 
태고太古를 찢는 총소리 
아우성소리는 밀어닥친다. 

무기도 없는 밤 
어둠 속에서 노리는 눈을 
내가 감으면 
비로소 흐르는 산속 물소리. 
-[밤] 전문 

'사람들이 사람들을 잡아먹는' 황폐한 나날들 속에서 화자는 추위를 느낀다. 이러한 불안한 심리적 정황이 3연에서는 그로테스크한 '오두수'의 이미지와 '태고를 찢는 총소리'와 같은 비생명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옛 신화보다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헌사])는 시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화자는 이미 '물고기인 양 유리에 병들었'(〃)으며 '머리에 눈물로 엮은 원광을 쓰고/ 태고의 전설에 서 있는 능금나무 아래 쓰러'(〃)져야만 했다. 조국은 이미 '시드는 금강석'처럼 '구원이 없이 썩고 있'었던 것이다.'시인은 이제 '스스로를 길들일 수 없는 자기에의 저주'([그리운 고백])로 몸부림치며 '사람이 사람을 서로 사랑할 날'(〃)을 고대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시인에게 '구름은 영영 희망이 되어주지 않'([고궁])으므로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용'은 '기와등에서 이끼에 싸여 있'(〃)는 것이다. 

바람이 비구름을 몰아오건만 
너는 여기 무덤도 없이 누웠구나. 
소리 없는 눈이 사람을 서로 노릴 때 
훨훨 나는 새가 차라리 부러웠으리라. 

어머니가 그리워도 가지 못하고, 조국 하늘 아래 고향이 무서워 어두운 마음에 
은하처럼 흐르던 한숨도 이제야 말랐는가. 

순진한 몸이 오죽이나 사무쳤기에 목숨을 걸고 이 산을 밟았더뇨. 
살아 있듯이 눈을 뜨고 석상石像처럼 뜻할 뿐 말이 없구나. 
총탄이 너의 하늘을 뚫은 흔적, 가슴에 말라붙은 핏줄은 너를 쏜 동포에게 사랑으로 빛나라. 

불길한 까마귀 울음이 들리어온다. 
한 떨기 꽃과 잎들이 되어 너를 덮지 못함을 누구에게 하소하랴. 
백골을 수습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삼팔선의 표목을 너의 무덤 앞에 세워주마. 

말하라. 
네 유언을 거기에 무엇이라 새기면 좋겠느뇨. 
-[조혼弔魂] 전문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된 암울한 상황, '소리 없는 눈이 사람을 서로 노'리는 속에서 화자는 수인囚人처럼 답답함을 느끼며 한숨을 쉰다. 차라리 '훨훨 나는 새'가 부럽다. 동족상잔의 참극이 예견되고 '불길한 까마귀 울음'이 들려온다. 위로하거나 조의를 표할 수도 없는 현실 속에서 화자는 '백골'이라도 수습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야말로 당시의 상황은 '하늘도 해도 피투성이'([비둘기])인 살벌한 때였다. 이러한 시대에 화자는 조국의 화평을 날마다 염원하며 '옥피리'를 불지만 강퍅한 현실에 대한 환멸은 시인을 심층의 내면세계 혹은 초시간·초현실의 세계로 지향해 가게 한다. 

① 해는 무한으로 저문다.// 그들의 육신이/ 싸늘한 절벽에/ 깃발로 펄럭인다.// 
시간도 없는 시선이/ 석각石刻에서 날개를 편다.// 청동빛 기름이 단면에 
흐르는/ 구천九天,/ 바람이 분다/ 무거운 연기緣起의 바퀴소리.// 
-[절벽] 부분 

② 꽃 위에 앉아라./ 잎사귀를 밟은 맨발,/ 여기는 현재가 없다.// 
이곳은 바다이다./ 큰 나신裸身이 이곳에 있다./ 이곳은 꽃이다.// 
바람과 순수에서 일어나는/ 해맥海脈의 난무,/ 난파한 사람들이/ 좀더 가까운 문제에서/ 
검은 하늘을 펄럭이는/ 송으로 움켜잡고/ 등불을 해저에 켠다./ 파도는 비정의 안개/ 
사이로 눈을 뜬다./ 꽃이 스스로 핀다.// 자기 안구眼球를 스스로 못 보는/ 큰 나신이/ 
바다의 꽃에 앉아/ 소라를 분다./ 잎사귀에 올려놓은 맨발,/ 여기는 현재가 없다. 
-[바다의 꽃] 전문 

①에서 우리는 유한의 시간에서 무한의 시간으로 지향해 가는 화자의 시선을 볼 수 있다. '시간도 없는 시선'이 그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육신은 '싸늘한' 시간의 '절벽'에 하나의 흔적을 남기며 '깃발'처럼 펄럭인다. 절벽의 석각을 바라보며 화자는 무상한 인간사에서 '무거운 연기의 바퀴소리'를 듣는다. ②에서도 '현재가 없'는 초월적 시간인식과 바다가 하나의 꽃이 되는 무한의 공간인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시어가 다분히 환상적 상징주의 취향을 보인다. '바다'가 존재의 바탕이라면 '꽃'은 존재의 절정의 모습이자 '영원한 핵심'([백탑송])일 것이다. 

출구가 없는 폐쇄된 상황은 시인으로 하여금 심층의 내면세계를 마주하게 한다. 다음과 같은 시는 신화적 모티프를 자신의 내적 현실과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고 있다. 

벽에는 에덴 동산이 한 폭 걸렸을 뿐. 뱀은 거울 깊이에서 또아리를 틀며 불을 뿜는다. 제 몸인 나를 노려본다. 곡조는 미쳐 날뛰는데, 벽은 문이 아무데도 없었다. 
-[실내] 부분 

신화란 인류의 보편적 무의식의 원형들을 보여준다. 에덴, 즉 낙원은 '벽에 걸려 있을 뿐', 현실에서의 낙원에의 기대는 요원할 뿐이다. 에덴의 신화에서 뱀은 사악한 힘을 상징하지만, 위의 시에서는 그것이 화자의 내면적 욕구를 반영한다. 거울은 곧 자아이다. 그러므로 '뱀'은 자아의 깊은 곳에서 '또아리를 틀며 불을 뿜는' 욕망을 상징한다. 그 '뱀'의 육체가 '나'이니까 나는 욕망의 주체이다. 누군가 '나'의 심층의 욕망을 부추기는 '곡조는 미쳐 날뛰는데' 그것을 해방시켜 줄 출구는 아무데도 없다. '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의 거리를 걷는 화자는 피곤하다. 심층 자아의 피곤함을 자동기술에 가까운 산문체로 토로한 작품이 [피곤]이다. 이 시는 마치 식민지 시대의 우울한 천재 이상李箱의 문제작 [날개]의 주인공의 고백체 문체를 고스란히 닮아 있다. 모더니즘의 원조뻘이 되는 보들레르의 '산책자'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시 [피곤]의 화자 역시 밤거리를 걷는다. 거리에는 '인공낙원'의 유혹들로 가득하다. 

광명이 밤 길거리의 매력이라면 무엇이 나타난다는 말인가. 나는 걸을 때 과일집 이발관, 구두점, 극장, 다방, 은행, 골동상, 포목전, 고깃간, 악기점, 요리집, 책집, 백화점, 운동기구점, 인쇄소, 관공서, 신문사, 이러한 연속에서 혹란惑亂한다. 생각은 직업에 부침하는 군중들로 휩쓸린다. 공간에 꾸겨지는 호흡이 무겁다. (……) 인조人造 물품들의 기상氣像이다. 가지가지 색체, 조형, 음향이 나를 부르는 진열창의 내부 앞에서 의욕은 덜미를 잡혀 반대편 아스팔트 위로 나동그라진다. 나의 저항은 화려한 빛에 밀려날 때마다 기쁨을 조작한다. 그것은 구매력과 소유욕을 정확히 지표하는 나침반이었다. 
-[피곤] 부분 

자본주의는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인조'의 낙원을 건설하고 그 속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한다. 갖가지 가게들, 극장, 다방, 이발관, 인쇄소, 신문사들이 도열한 도시의 거리에서 화자는 '혹란'하여 휩쓸리므로 '호흡이 무겁다'. 그리고 마침내는 '인조 물품들의 기상'에 덜미를 잡혀 '아스팔트' 포도 위로 나동그라진다. 그러나 화자의 '저항'은 나약하기만 하다. 이렇게 '혹란'을 방출하며 '꼭두'들의 난무로 혼돈의 극을 달리던 정국에 마침내 1950년의 전쟁을 불러오고 만다. 이 '이십 세기의 비극'은 일상으로부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을 거두어 간다. 

①커튼을 떨리는 손으로 걷는다. 도시가 들어찬 유리창에 전투기는 검은 배를 노박 드러내며 넘어간다. 안개를 흔드는 저승의 아우성소리, 망령처럼 고층들은 소스라쳐 놀라, 눈마다 불을 껐다. 그도 불을 북였다. 창이 먼 포砲소리에 떨린다. 마음 속까지 진동한다. 닿으면 불이 활활 당길 듯, 해는 뱅그르르 돌며 첨탑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행길마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어쩔 줄을 몰라 들끓는다. 라디오는 이십 세기의 비극을 고한다. 그는 미래의 위치에 서서 빛도 냄새도 소리도 맛도 없는 유리창을 내다본다. 비가 두 눈에서 내린다. 
-[유리창] 부분 

②잎들은 저리도 우거졌는데 
집들은 하나하나 터만 남고 
꽃들은 이리도 만발한데 
송장들은 어디서나 썩는 냄새 
-잎은 우거졌는데] 부분 

①에서 '유리창'은 물론 현실을 바라보는 거울이다. 그것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으니 '전투기'가 날고 '포'소리가 들린다. 아주 실제적으로 전쟁 중의 도시의 아비규환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행길마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어쩔 줄을 몰라 들끓'으며, '저승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고 화자의 두 눈에서는 '비'가 내린다. ②는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의 상황을 보여준다. 마치 두보杜甫의 우국시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자연의 변화는 유구한데, 삶이 터전은 폐허가 되어 버린 채, '송장들은 어디서나 썩는 냄새'를 풍긴다. 그리고 그 썩는 냄새가 흩어지고 지구는 뼈만 남는다. 

우리는 무섭지 않으면 괴롭다. 괴롭지 않으면 무섭다. 살아야 하기에 괴롭고 죽을까 봐 무섭다. 사람은 사람을 없애버린다. 사람을 사람이 없애버린다. 
-[겁劫]부분 

공포와 고통으로 미만한 세계에서 화자는 '나는 네가 울기에 아팠다'([겁])라고 말하며 세상의 고통을 자기화하는 유마적 포즈를 보인다. 그러나 세상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세상은 비인간화의 극을 달려 '마음은 철과 중유重油로 움직이는 기체機體 안에 수금囚禁' 된 채 인간은 그 자성自性을 잃었으며 '인간 기계들은 잡초의 도시를 지나 살기 위한 죽음으로 정연히 행진한다.'([인간 기계]) 

우리는 역사책보다 더한 체험을 하였다. 목숨이 쓰러지는 사람들을 밟는다. 바퀴가 죽어가는 사람들 위로 지나간다. 
-[양지] 부분 

사실 우리의 근세사가 몰고 온 격동은 그 어떠한 역사책보다 더 생생한 체험을 하게 했다. 특히 한국전쟁의 참상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목숨은 말할 수 없이 훼손되었으며 삶의 터전은 무자비하게 파손되었다. 이러한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인격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으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아는 찢어져 분열되거나 소멸되었던 것이다. 

목숨을 찾아 해안선까지 쫓겨왔다. 눈바람으로 울부짖는 집들은 폐선廢船 냄새가 났다. 파도를 남루로 가렸다. 폐벽肺壁이 무너지며, 지난날의 꽃잎들로 날았다. 어디로 들어가든지 들어가면 무덤들은 골목을 바다로 열었다. 찾아도 나는 없었다. 등불들이 곰팡난 육신들에 깜박이었다. 이야말로 기적이었다. 
-[피난지] 전문 

전쟁의 폭력 속에서 화자는 목숨을 구하려 항구도시 부산으로 피난을 한다. 세계의 황량함 속에서 존재의 안식처인 집들은 폐허가 되어 '폐선' 냄새를 풍긴다. 거센 시간의 파도 앞에 초라한 인간들은 남루의 방패로 삶을 가리지만 터질 것 같은 화자의 가슴은 마침내 '폐벽'이 무너지듯 폭발하여 자아를 잃어버리고 만다. 오직 지난날들의 흔적만이 '꽃잎'이 되어 흩날릴 뿐이다. 이상을 비롯한 모더니스트들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자의식의 상징물인 '거울'의 이미지가 김구용의 시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다음의 시에서 그것은 현실을 비추는 기능을 한다. 

삶이 부끄러워 수은이 드문드문 벗어진 거울 안으로 숟가락과 얼굴을 보았다. (……) 생존의 서슬에 찢기다 보니, 하 미안해서 피가 흐르는 손으로 합장한다. 또 배가 고프다. 아무도 원망하기가 싫다. 인정은 구멍난 판자 가게의 음식을 기웃거린다. 밥은 소금빛이었다. 나는 입언저리의 맛난 눈물을 핥는다. 까마귀가 사라졌던 곳으로부터 기원의 갈매기는 온다. 불쌍한 인가人家들과 얼굴들을 스치며 활활 날아오른다. 나는 창 너머 때묻은 항도港都를 굽어보았다. 
-[묵상] 부분 

자아를 상실하고 부유하던 화자는 생존을 위해 하숙하고 있는 친구에게 가서 밥을 빌어야 한다. 참으로 '삶이 부끄러운' 화자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 거기 비춰진 현실의 모습은 남루 그 자체이다. 생의 남루로 인하여 '때 묻은 항도'를 굽어보는 화자는 하루 빨리 이 '불쌍한 인가'들과 사람들에게도 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굶주리며 '생존의 서슬에 찢기'며 화자는 죽음과 결핍의 '까마귀'를 쫓고 '기원의 갈매기'를 날려 보내거나 '낡은 벽화에 꿈을 담는'([반수신]半獸神)다. 충만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조용히 타오르며, 혹은 '사무치는 사념'으로 스며드는 열풍을 맞으며 화자는 '병든 눈'을 하고 멀리 '희망의 이끼'가 파릇파릇 돋아나기를 열망하며 강퍅한 세월을 견딘다. 

그리움은 긴 몸에 화문花紋으로 돋는다. 
스며드는 열풍과 병든 눈으로 멀리 
산호초를 넘는 파도가 하옇게 소리치고 
기어오는 청동빛 두꺼비 등 너머로 
다시 세월이 한아름 솟아오른다. 
날아가는 과실果實 아래, 구름 빗긴 바위에서 
사무치는 사념思念이다, 화문은 조용히 탄다. 
-[성염盛炎-뱀의 소묘] 전문 

4. 분열된 자아와 '욕망하는 기계'들의 꿈 
대체로 김구용 시의 화자는 관념과잉의 자아이다. 이는 그의 시에 나오는 시어들이 매우 추상적이며 관념성이 강한 단어들로 이루어지는 데서 알 수 있다. 외부의 혼돈스러운 상황과 내부의 자아분열로 인하여 김구용 초기 시의 세계는 불협화음을 자아낸다. 그의 시에서 대체로 존재는 의미를 잃고 있으며 '사람들은 의미도 없는 몸짓 '([불협화음의 꽃 Ⅱ])을 한다. 세계 자본주의의 유혹과 외래문명의 침식을 방어하지 못한 채 자아를 상실한 주체들의 혼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김구용의 시는 아닐까. 분열된 세계를 분열된 형식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존의 가치와 윤리가 상실된 전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독특한 형식으로 반영하고 있는 김구용의 시를 읽노라면 '상처가 풍경을 낳는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언명이 생각난다. 세계로부터 입은 상처의 흔적들은 관념을 잉태한다. '상흔이 장미빛으로 살아난다'([내일])는 시 구절처럼 그의 시에는 온통 관념의 꽃들로 무성하다. '절망이 기교를 낳는다'는 이상의 명언처럼 '하얀 세균들'이 '불가해한 뇌를 향연'([뇌염])하는 그의 시들은 온갖 추상관념들이 난무한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이라는 부제가 붙은 {앙티 오이디푸스 }에서 질 들뢰즈는 인간존재를 '욕망하는 기계'로 규정한 바 있지만, 김구용의 시에서도 세계에 의해서 규정되어지는 자아는 하나의 '견해를 잃은 기계'([산재散在])로 나타난다. 자아는 통합된 형태로 정립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산재'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거울 조각들'처럼 분열된 자아를 부여안고 화자는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이러한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욕망하는 기계인 화자는 매춘의 거리를 방황하며 '자학'을 택하기도 한다.([벗은 노예]) 상품 논리에 의해 욕망을 무한히 해방시키는 자본주의의 거리는 사방에서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자본주의는 '무너진 경제' 속에서도 허영의 양분을 막고 독초처럼 피어난다. 

무너진 경제에 피어난 허영의 남녀들, 착종한 고민이 구축되다. 가로수 아래 서서 지난날의 윤곽을 연상하면 廢都의 배경에 다투어 나타나는 욕망들이다. 
-[오늘] 부분 

욕망을 부추기는 현실 속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은 '착종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은행의 화강암 석주들 사이에서 만삭한 처녀 거지가 밤을 세우는, 그러한 궁참窮慘으로 물러서기조차 지난한, 이얼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현실'([관조])의 '폐도'에도 욕망은 '망령'처럼 출몰하며 죄를 짓게 하고 사람들은 '스스로의 죄과'의 감옥에 '수금囚禁'당한다. 이 자아를 상실당한 주체는 '암담한 거리와 고독한 등불 아래'에서 '무언의 관념'에 빠지며 그의 사색은 해답을 주지 못한 채 '하루의 경과와 지식에서 허탈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손'(〃)은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의 시는 대체로 이렇게 휴식하는 '환상적 서재'에서 이루어진다. 

나의 온혈이 한 점 하얀 고병古甁에 번지는 정적이다. 그 열린 뇌수를 바라보면 무엇인지 분명히 들리는 듯한 연꽃이 솟아 피었다. 존재와 관념이 하나로 녹아들다. 
-[서재] 전문 

'존재와 관념'이 하나로 녹아드는 환상의 서재에서 화자는 고대와 현재를 오가며 자아의 내부를 주시한다. 거기에는 '연꽃'이 피어난다. 그것은 '혼란의 소沼에 핀' ([무상의 모태]) 영원의 모습이다. 그것은 '티 없는 하늘'의 모습이며, '한 점의 일日·월月'([잃어버린 자세]), 즉 '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김구용에게 있어 시는 여전히 구도의 수단이며 구원의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시가 없어지려고 하는 시기, 독자가 없는 시기에 시인은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며 또 어떻게 임하고 있는지 살펴 보자. 

감상의 미는 여백마저 없애버리는 사치에 지나지 않으며, 엄격한 생각으로 허영을 버릴 때, 시는 한 사람의 독자를 얻는다. 시인은 생활까지 버리고 연만連巒과 달과 바다와 꽃과 성신星辰을 환상하며, 부풀어오르는 향수와 존귀한 설움을 의장擬裝할 만큼 특수하지 않다. 그는 책상 위 외국제 빈 담배곽 하나를 두고도 버려야 할지 보관해야 할지 기준이 서기까지는 오히려 무관심으로 유지할 따름이다. 이리하여 밤이면 그는 몸에 스미는 추위와 화로 앞에서 시를 자기와 대조하며 만지고 읽는다. 
-[위치] 부분 

김구용의 작시태도를 피력하고 있는 위의 시에서 그는 '엄격한 생각으로 허영을 버리'라는 매우 주지적이며 금욕적이기까지 한 시작태도를 피력하고 있다. 특히 '감상'을 '여백마저 없애버리는 사치'에 불과하다고 하여 배제한 점에서 그가 1930년대의 정지용·김기림류의 주지적 모더니즘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섬세하면서도 염결한 '무관심'의 객관적 정신과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며 자기를 성찰하는 견인주의적 자세로 시에 임해야 함을 밝힌다. 

시는 벽에 붙은 한 폭의 색채도 비둘기 모여드는 종소리도 춤도 노래도 아니다. 시에는 모든 것이 있을 수 있고, 시 이외의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언제나 점토와 정신을 맥락하는 혈액과 지각이었다. 그러므로 시구는 호흡에서 흘러나오며, 주전자라든가 지붕 위를 나는 여객기에서도 정확한 감성과 막연한 심상과 표현을 기다려 한 사람의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약간의 여가가 있어도 고독하지 않으며, 떨어진 외투와 식기와 요강과 구두까지 늘어놓인 구석방에서 견디기 어려운 모습으로 스스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그 남감한 극한의 중압 밑에서 공손한 모습으로 생명을 감수할 줄 아는 것이다. 이리하여 부귀와 훼예로도 빼앗을 수 없는 위치에 용납이 있으나 타협은 없다. 시인은 시련과 성심誠心에 이르러 붓을 놓는 동시, 비로소 한 사람의 독자가 되는 것이다. 
-[위치] 부분 

그에게 있어 시는 대중을 선동하는 프로파갠더의 것이 아니며 삶과 거리를 두는 고답적인 것이어서도 안 된다. 시에는 인간존재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시는 어디까지나 시 그 자체이어야 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있어서의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시인에게는 주위의 사물에 대하여 정확하게 보고 그릴 줄 아는 데생력이 필요한 동시에 끊임없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각고의 자세가 요구되며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겸허하게 생명의 실체를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그 어떠한 세속적 명예에도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참된 마음이 필요하다. 매우 교과서적으로 들리지만, 이것이 또한 전통적인 선비의 자세와도 결부되는 바, 김구용 자신이 또한 그렇게 살아온 것이기도 할 것이다. '직관적 인식의 환상으로 언어가 취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김구용의 시는 평론가 김현의 지적([현대시와 존재의 깊이])처럼 초현실주의 시의 한 유형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은 한국적 초현실주의 시의 독특한 일면을 안고 있다. 즉 자유연상과 데페이즈망(depaysement, 절연絶緣)의 기법을 차용하고 있지만, 시적 상상력의 원질은 한국적인 동시에 동양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내면은 온통 '거부'하는 정신으로 이루어진 아방가르드이자 아웃사이더였으므로 일상성에 젖어 있는 정신들이 다가가기에는 심각한 장애를 느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탐욕과 문명 사이에서 인간은 日沒하니 언제나 학과 함께 식사를 할까?'([언제나 삼·사월이면])하고 잃어버린 참사람과 자연의 고향을 노래했으며, '따뜻한 장판방에서/ 나는 이렇게 편안히/ 작년 봄의 엽차를 마실/ 자격이 있는가.'([따뜻한 장판방에서])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했다. 또한 그는 긴 세월을 '가난과 병약과 고독의 골목을 흘러'([불협화음의 꽃Ⅱ])왔으며, 그는 오로지 '죽음의 형성에서도 영원히 깨지지 않는 식기'를, '동시에 허무가 근접할 수 없는 나의 연꽃을 피워올리'([관음찬Ⅱ])기를 열망하며 시작에 임해왔다. 

이제 그의 전집이 발간되어 오랜 동안 소외되어왔던 그의 문학의 전모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본고에서는 그의 방대한 문학적 업적을 조명하는 첫 시도로서 전집의 제1권인 {시}에 수록된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그의 시 세계의 일단을 살펴보았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의 나머지 시집들을 검토해보기로 약속하며 이만 줄인다.

추천8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