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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특집/김구용의 산문세계/이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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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의 산문세계
이경림
바다와 여인
바다를 하나의 생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바다는 하나의 나체로서 나타난다. 저 광대하고 심원한 바다는 구슬 같은 일적一適으로 시작되어 시작되어 어디서나 일적이 될 수 있는 순수한 합성체로서, 무거운 감벽색紺碧色 바탕과 꺼지고 일어나며 일어나고 꺼지는 하얀 거품과, 변함없는 수평선과, 호흡하는 파도와, 무수한 어족, 조개 등 자라나는 해초를 상념의 발현처럼 내포하기도 한다. 생명의 바다와 한 여인의 육체가 서로 대하였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대조는 하나의 관념을 우리에게 부여할 것이다. 자고로, '바다와 여인' 에 대한 신화가 생기고 예술이 이루어지고 창조는 성취되었던 것이다. 나는 한 폭의 그림을 회상할 수 있다. 그것은 오랜 지난날의 일이어서 그 그림의 제목도 작자도 생각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그림의 색채와 구성과 효력은 지금도 눈앞에 완연하다. 거친 해풍에 병들어버린 돛단배였다. 그 돛단배를 빨아 삼키려는 바다가 하얀 파도를 품으며 그림 전폭의 3분지 2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배의 속도를 나타내는 퍼덕이는 돛폭 위에 우중충한 하늘이 급각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여러분은 내가 다시, 그 그림에서 무엇을 보았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연록빛으로 일어나는 약간의 투명한 기복과 검푸른 바탕이 서로 엉클어지고 휩쓸린 바다에 아름다운 꽃처럼 흩어진 인어들이 풍만한 유방을 드러내놓고 발가숭이 알몸을 요염히 뒤흔들며 있었다. 병든 돛단배에서 눈마다 불을 켜고 인어들을 굽어보는 어부들을 향하여 죽음은 손짓하고 있다. 충혈된 어부들의 눈은 그대로 불덩어리가 되어 타오른다. 머리와 수염이 자라날 대로 자라난 오랜 시일의 해상 생활, 거친 해풍에 적동색으로 변한 체력, 몸과 마음이 자지러지는 듯한 향수, 미칠 듯 그리운 여자의 모습, 그러면서 오랫동안 여인의 육체에 굶주린 그들의 눈은 탐람貪峟한 이빠디라고도 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완전히 자성을 상실하여 버린 표정이었다.
그러나 보라! 이 아름다운 인어들의 후방, 즉 질주하는 돛단배의 전방에 시커먼 암초가 명부冥府의 사자로서 나타나 있지 아니한가. 이 그림도 결국 '바다와 여인' 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다음 안테르센의 동화에 나타나는 바닷속 공주는 도합 몇 명이었던지, 그것 역시 읽은 지 하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동화는 워낙 유명한 만큼 바닷속 아름다운 신비가 사실 이상으로 예술화된 그의 신필神筆에 대하여 군소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다못 다 밑에서 해면을 향하여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공주와, 마침내 사랑을 지상에 발견하였다는 것과, 마침내 육체가 바닷물로 변하고 말았다는 슬픈 공주의 이야기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것 또한 '바다의 여인' 에 대한 상념을 구상화한 좋은 일례라 하겠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란 다 찬란한 과거의 유성流星이었으며 현대에 있어서는 하나의 운석隕石에 지나지 못한다. 바다로 창이 나 있는 방에서 매춘부가 헝클어진 머리를 수습 못하고 망연히 바다를 내다본다.
맵시 있게 수영복을 입은 여인이 사장에 발딱 누워 하늘에 뜬 구름을 보며 파도소리를 들으며 백주의 황금몽을 꾼다. 폐肺를 앓는 여인이 바닷빛보다 진한 각혈을 하며 유리창 너머에 내리는 백설을 통하여 겨울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밤중이었다. 여인이 바다에 투신하였다. 그 여인이 늙은인지 젊은인지도 알 수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자살한 원인도 생활에선지 실연에선지 아는 이가 없다. 현대인들은 대못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며, 아무런 충격도 받지 못하는 데에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지 모른다. 현대는 삼단 논법도 극적 구성도 없다. 현실에만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불행에서 허덕인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후 맥락의 단절에 의하여서만 여기다 제목으로 내세운 '바다와 여인' 도 명료해진다. 그러나 다못 모든 것에서 벗어난 인간 그대로의 전라全裸한 여인이 지금 불변 불멸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결코 인어가 아니다. 자연과 육체-즉 지구가 존속하는 한-이 현재만의 '바다와 여인'으로도 그것은 아름다운 생명의 상징일 것이다. 1955
인간의 성당聖堂
'인간은 소우주小宇宙다.' 이런 의미의 말을 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아니었던가 기억된다. 약학 대학 현관 의자에 앉아 강의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막연히 인간은 소우주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시간이 끝나면 만나야 할 사람을 기다리는 데 지쳤다기보다 갑자기 시간이라도 정지된 듯한 정침停寢과 가끔 고요한 동작과 조용한 음성으로 대화하며 출입하는 학생들과 그곳이 약학 대학이란 선입관에선지 어디고 무색 무취한 약품들이 스스로의 약리藥理를 내포하고 있을 것만 같다는 분위기에 휩쓸려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 사람을 만나러 온 용건으로 가득하던 생각이 자아에의 주시注視로 일변하자 갑자기 미지에 대한 신비로움이 일종의 종교적 엄숙을 느끼게까지 하였다. 의사인 한스 카로사는 어떠한 감상에 깃들여 원고지에다 그의 문학 작품을 썼을까. 6. 25사변 전 어느 눈 내리던 날 지인知人을 문병하러 성모 병원에 갔을 때 복도를 지나며 우연히 유리창 속으로 어느 병실을 보았던 광경이 눈앞에 나타난다. 깨끗한 침대 위엔 저것이 인간인가 싶도록 짐승보다 더럽고 가엾은 거지 아이가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한 흑의黑衣의 수녀가 선 채로 머리를 숙이고 묵주를 돌리며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과학과 종교는 상반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종교와 과학은 인간에 의하여 비로소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종교는 미지에 대한 정신적 탐구며 과학은 신비에 대한 물질적 탐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파란 셔츠를 입고 그 소년이 수부受付에 앉아 있다. 실내에서 뵈지 않는 시계가 11시를 치는 소리에 문득 나는 좌우를 돌아보았다. 정문에서 들어오던 남녀 학생들이 웃으면서 서로 헤어져 남학생만이 나의 앞을 지나가기에 강의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느냐고 물었더니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며 가버렸다. 두 번 다시 나는 언제고 간에 그 학생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무슨 숙명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누구나 약을 필요로 할 때가 오는 것이며 우리들은 싫건 좋건 간에 저러한 약학도에게 자기를 맡기고 신세를 져야 할 때가 오는 까닭이다. 나는 새로이 죽은 사람들이 기억났다. 어렸을 때 꽃같이 다채로운 상여를 보고 수일간 밥도 못 먹고 메스꺼웠던, 그 상여를 타고 간 아버지와 고모 장사 후에 이르렀으므로 묏봉꾼으로 나를 대한 유모乳母, 피란지에서 거의 거적에 말려 나가다시피 한 어머니, 장의차에 실려 홍제원弘濟院으로 간 친우親友 임상순任相淳. 지난날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하나 나는 의사처럼, 약제사처럼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한 번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아무리 약학이 발달된다 할지라도 이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며 만일 생자불멸生者不滅이 실현한다면 약학은 도리어 인류의 파멸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에 대한 최대의 반항, 현실에 대한 최선의 추구야말로 신과 겨룰 수 있는 인간의 위대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동물에서 식물에서 금석金石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자연으로부터 약품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은혜를 감사하며 그 감사의 심정이 자기 아닌 모든 사람들의 병고를 근심하는 마음이 되어 면학勉學하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모습이야말로 20세기의 새로운 종교라 할 것이다. 갑자기 정적과 나의 생각을 뒤흔들어버리는 종소리가 요란스레 일어났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를 쓰다듬고 양복 바지의 먼지를 털었다. 교실에서 복도로 나오는 학생들 사이를 비키며 나의 용무를 위한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인간의 성당을 천천히 걸어갔다.
탱자
요즘 웬일인지 언제나 다름없이 번잡한 도시의 하루하루를 지내면서도 간혹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때가 있다. 낙엽의 가을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이 세월의 흐름을 더 한층 우리에게 알려주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꽃도 잎도 져버린 뜰에 양상한 가지들이 소조蕭條하다. 인생은 기쁨보다도 어떤 소삼蕭森한 데서 도리어 지각知覺하게 되는 성싶다. 그래 그런지 나는 요즘 직장에서나 또는 거리에서도 문득 고향의 탱자나무들을 생각한다. 돌담 너머로 보이는 탱자나무 울타리, 또는 연당蓮塘 위 채소밭 가상두리로 늘어선 탱자나무들이 눈앞에 선연鮮然하다. 웬일일까, 가시 돋은 검푸른 가지들 속에서 홀로 황금빛 탱자들만이 그윽한 향기를 머금고 우중충한 하늘과 거친 산과 가난한 풍경과 겨루며 있을 것인 까닭이다. 비로소 봄여름의 호화로운 화초들이 우리가 생각하던 바처럼 그렇게 높은 미美와 격格있는 깊이를 갖지 못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좀더 우리는 외부에 끄달리기보다는 자기를 알아야 할 것만 같다. 인간을 알기 위하여 자기의 지식만을 신봉하지 말 것, 자기가 제일이란 생각을 어떻게 해서라도 버려야만 할 것 같다. 찾지 않는 곳에 본질이 나타나고 자기를 부정하는 데에서 깨달을 바 많다는 걸 안 이상에야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봄여름보다도 더 화려한 도시의 물질 풍경을 무시하란 뜻은 아니다. 깊은, 다가오는 겨울 처럼 거칠고 어둡고 춥고 우울하고 배고프고 아니꼽고 창피한 주위 환경에 있을지라도 항상 저 황금빛 탱자처럼 홀로라도 좋으니 더욱 생기生氣있고 향기로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요즘 침실인 동시 식당인 동시 서재인 나의 가난한 단칸방에서 글을 쓰다가도 간혹 싸늘한 하늘 아래 빛나고 있을 탱자를 생각한다. 책상에 탱자가 몇 개 놓인다면 탱자에서 나는 많은 의미와 기쁨을 얻을 것만 같다. 가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가난에 굴하지 않고 역경에 기진할 것이 아니라 소생해야만 되기 까닭이다. 글을 쓰거나 글을 읽는 것도 그러할 것이다. 기교가 도리어 시 정신을 감소한다든가 미숙한 정열이 고집으로 끝나서야 안 될 일이다. 그래 그런지 요즘은 번잡한 도시에서도 간혹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 싸늘한 고향집 울타리에서 홀로 빛나며 향기를 머금고 있을 그 수 많은 탱자가 눈앞에 선연히 오른다. 1957
인간의 성당
이 글을 읽기 전에 나도 한 인간은 하나의 사원이라는 생각의 시를 쓴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처럼 거대하고 심오한 성당은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어느날 선생이 누구를 방문하기 위해 잠시 어느 약학대학에 들러 벤취에 앉아 있을 때의 아주 짧은 순간 스쳐가는 감상을 쓴 글이다 아마도 그 때의 상황은 글에 나타난 것과는 아주 다른 여느 다른 학교의 분위기와 비슷한 시끌벅적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생은 아주 잠깐 모든 시간이 정지된 듯 놀랍도록 비현실적인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 곳의 학생들은 마치 무성영화의 화면처럼 조용히 오고가고 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돌리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진행되는 것을 본다. 그 광경은 무색무취한 약품까지도 스스로의 약리를 내포하고 있을 것만 같은 신비로움을 불러 일으킨다. 그 속에서 선생은 서로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인 인간들을 보았고 그 끈은 아무 관계도 없을 것같은 것들까지도 연결시켜주고 있었다.
'깨끗한 침대 위엔 저것이 인간인가 싶도록 짐승보다 더럽고 가엾은 거지 아이가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한 흑의의 수녀가선 채로 머리를 숙이고 묵주를 돌리며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과학과 종교는 상반하는 것이 아닌듯하다. 종교와 과학은 인간에 의하여 서로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이글을 잘 들여다 보면 종교와 과학이라는 서로 상반된 것같은 분야가 거지아이라는 한 초라한 인간에 의해 서로 연결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 초라한 거지아이가 관념적인 두 개의 거대한 페러다임을 연결시켜주는 인연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과학이나 종교같은 즉 인간의 안락을 위해 생겨났지만 어쩌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어떤 의미에선 폭력일지도 모르는) 것까지 끌어 안고 순화시켜주는 성당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 실린 선생의 사진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인간의 성당'이란 말이 실감났다. 한 점의 군살도 허용하지 않을 듯한 깡마른 모습과 날카로운 눈매는 선생이 쓴 글 속에 나오는 '싸늘한 하늘아래 빛나고 있을 탱자'를 생각나게 했다.
그 모습은 선생의 글처럼 가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가난에 굴하지 않고 역경에 기진한 것이 아니라 역경에 소생한 참 문인'의 모습이었다. 선생의 '성당'에 엎드려 경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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