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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특집/시인의 초상/강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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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우식
댓글 0건 조회 4,339회 작성일 02-06-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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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인의 초상 
강우식 


{구용 삼국지}, {구용 수호전} 등 선생님이 번역하신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에서 터득한 비법인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장력掌力은 대단하다. 아니다. 대단함을 뛰어넘어 위대하다. 장력이라니까 무슨 중국 무술영화에 나오는 무사들의 '장풍'처럼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일을 연상하는 분들을 위하여 우선 선생님의 장력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선생님의 장력은 결코 특별난 것이 아니다. 그저 손아귀 힘이 '늙은이가 뭐 이리도 셀까' 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구용선생님의 허다한 일화 중에 굳이 장력을 들먹이는 것은 그 속에 선생님의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장력은 예사 땐 발휘되지 않는다. 반드시 술좌석에서만 나온다. 선생님께서는 이 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술을 드시는 거나 아닌지 하고 나는 생각할 때가 많다. 술을 드셔봐야 오래 전에 받으신 위 수술 때문에 고작해야 맥주나 막걸리 몇 잔의 실력이시다. 위스키 따위의 양주는 절대 사양하신다. 그렇다고 선생님의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다. 지금도 웬만한 젊은이들만큼은 술자리 좋고, 사람 좋으면 사양 않으시고 술을 드신다. 

선생님의 장력이 발휘되는 시기를 대강 요량해보면 맥주 두 병에서 세 병 사이를 오락가락할 때부터다. 그 정도의 주량이 되면 선생님은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손을 수시로 잡는다. 말이 잡는 것이지 실제로 당해본 사람들은 그것이 예사로 잡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도 남는다. 어떻게나 아픈지 손 한 번 잡힐 때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선생님보다 훨씬 젊은 우리들이 손 한번 잡힌 것 때문에 비명을 지를 수도 없어서 가만히 잡혀주고 있으면 어떤 때는 선생님께서 속으로 '이 녀석 이래도 안 아파' 하고 더욱 세게 잡으시는 것도 같고 하여 마침내는 선생님의 장력에 못 견디어 틈을 보아 슬그머니 선생님 곁에서 도망 아닌 도망을 가야 한다. 

선생님을 가끔 모시고 술을 자주 하는 내 연배의 문인으로는 소설가 조건상, 시인 정진규, 박제천 등이 있는데 선생님과 술자리를 같이할 때면 우리는 술자리에서부터 선생님 옆에 안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인다. 예의 그 장력의 맛을 우리는 톡톡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우리들만 일방적으로 당하다 보니까 이제는 더 당할 수가 없어서 비방을 갖게 되었다. 이름하여 '구용 장력을 피하는 법'이다. 창안한 자는 역시 선비 재사형의 시인 박제천이다. 이 박제천과 선생님을 모시고 술이 시작되면 항상 나는 기가 죽는다. 왜냐하면 박제천은 구용 선생님을 깍듯이 모시지만 나하고는 달리 사제지간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나보다는 훨씬 편하고 부드럽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우리는 다 호형호제지간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지나치는 말 한마디 한 것을 가지고 선생과는 진짜로 그런 사이처럼, 더러는 시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제법 담론을 한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 앞이라서 그럴 수도 없다. 그저 고분히 듣는 쪽이다. 나의 그런 낌새를 눈치챈 박제천은 선생과 애기하다가도 내 쪽을 돌아보며, "봐! 호형호제지간이지" 하고는 약을 올린다. 호형호제로 치면 저와 나 사이고 내가 엄연히 형뻘인데도 으스대니 그럴 때면 그 좋던 술맛도 싹 가시고 만다. 

어쨌든 그런 터수여서인지 박제천은 구용 선생님께서 장력을 발휘할 때만 되면 순순히 손가락을 잡혀주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잡히기는 잡히되 주먹을 꽉 쥐고서 잡혀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박제천의 손은 구용 선생님께서 장력을 발휘해도 난공불락이었다던 저 나바론의 요새 같다고나 할까. 잡힐 대로 잡히면서 오히려 무슨 즐거운 파티나 열린 것처럼 저 혼자서 희희낙락하는 꼴이라니. 그것이 또한 더욱 나의 부아를 돋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박제천의 손을 잡다 보면, 구용 선생님께서도 별로 재미가 없어서인지,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내 곁에 오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예의 장력을 또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내 손 한 번 쥐고서 그 유명한 명언, "늬 들이 내 원수 갚아달라"는 한마디 하고, 한참 있다가는, "어머니 곁에 가고 싶다"라고 하고 또 한 번 풀었다 잡고서는, "나 너무 까불지요"를 하시는데, 나의 경우에는 스승이 내 손을 잡는데 아무리 술좌석이라고는 하지만 박제천이처럼 무례하게 주먹을 쥘 수는 없어서 아프더라도 그냥 잡히고 말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이 눈치 빠른 박제천이 또 그것까지도 알고 나를 향해 아주 꼬습게 웃는데 평소에 열 잘 받기로 유명한 내가 스승 옆이라 꼼짝없이 당하기만 해야 하니 그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여기서 '구용 선생님의 장력' 에 대하여 몇 가지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선생님의 장력 과시이다. 한 번 장력권에 들어가 본 사람들은 누구나가 그 힘의 대단함에 놀란다. 구용 선생님의 용모는 직접 뵌 분들에게는 구구한 사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훌쩍 크신 키, 듣기 좋아서 후리후리한 몸매지 뼈에다 가죽을 씌웠나 싶을 정도로 여위셨다. 그 어디를 보아도 그런 힘이 나오리라곤 도저히 상상도 못할 정도다. 그래서 더욱 장력권에 들러간 사람들은 놀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장력이야말로 구용 선생님이 스스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자기 과시임에 틀림없다. "너희들이 나를 우습게 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힘이 세다, 건재하다, 늬들이 나를 힘으로도 이길 것 같애, 어림없지, 어림없어" 하는 건강함의 과시이다. 둘째는 그 장력이야말로 바로 구용 선생님의 제자, 후배,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구용 선생님은 장력으로 사랑을 표시하는 분이시다. 그것을 확인하기란 드문 일이지만 장력 다음 단계로 곁에 앉은 사람의 귓볼을 무는 시늉을 하거나, 실제로 우리들이 귀엽다며 손등을 가볍게 문 적도 있다. 남자들끼리라 쑥스러울 때가 있지만 선생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신다. 내가 왜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그 일에 구용 선생님의 부성적인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 내가 경험해본 바로는 한때 나를 사랑하던 여자에게서 그런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다방에서든 술집에서든 어디에서든지 나와 만나서 이야기하다 사랑스러우면 가리지 않고 내 손가락도 물어주고, 뺨도 감싸주고 했는데, 그 여자에게는 모성적인 사랑이 아주 많아서 나를 어린애 대하듯이 하였던 것 같다. 구용 선생님의 장력이라는 것도 바로 이런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로만 구용 선생님 곁에 앉기를 피하는 체하고, 그 장력을 피하는 법 어쩌고저쩌고 할 뿐이지 누구나 그 장력의 따뜻한 사랑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까닭으로 구용 선생님의 장력은 힘으로도 대단하지만, 사랑에 근원을 두었기에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구용 선생님의 신비의 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 출력은 구용 서체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서예란 무엇보다도 붓을 힘있게 쥘 수 있는 장력이 있어야 한다. 일생을 시 쓰시는 것에 전념해온 한편 선생님은 붓을 잡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그 서예에의 정진이 장력을 지니게 된 원인이라고 본다. 고졸하면서도 물 흐르는 듯한 구용 서체는 나와 같은 서예에 문외한의 눈에도 다른 서예가들의 체와는 다른 구용만의 글씨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하다. 서예야말로 묵향 속에서 살아온 구용 선생님의 맑은 정신의 기를 나타내는 가장 좋은 것이라고 나는 항상 느낀다. 선생님의 곁에 있으면 우리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가져야 할 시인으로서의 정신 자세와 아무도 범접 못할 인품을 느끼게 되는 것도 선생님께서 힘써온 서예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시는 내 푼수로 가늠하기에는 아무래도 도를 닦는 일이 아니다. 그 대신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신은 누구보다도 맑게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시인 정신, 그 누구도 못 따를 시인됨을 아마도 서예에서 얻어오는지도 모른다. 서예를 우리가 일컬어서 도라고 하는 것도 우선은 무엇보다 마음을 닦는 데 가장 좋은 예술의 한 분야로 도道와 관련이 깊음이 그 증거이다. 

선생님은 특히 서예가로서는 추사 김정희를 좋아한다. 추사체라는 독특한 붓글씨를 창조한 금석문金石文의 대가였던 그분의 붓글씨만이 아니라, 그분의 학문, 살던 집까지도 너무나 좋아해서 답사하였을 정도다. 예산의 추사 고택뿐 아니라 제주도에 추사가 유배되었을 당시의 기거지도 바쁜 일들을 다 제쳐놓고 찾아보았고, 틈만 있으면 봉은사, 화계사도 자주 찾으시는데, 그 절에는 추사의 현판 글씨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어느 때인가는 나와 함께 중앙청 옆길로 해서 자하문 쪽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 길의 구간이 '추사로' 로 불리는 것을 가르쳐준 이도 구용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아마도 이 땅의 시인들에게 시집의 제자題字를 개중 많이 써준 분일 것이다. 선생님의 서예의 대표작으로는 월탄 박종화 선생 시비의 글씨를 비롯하여 많은 서예 작품이 있고 시집의 제자도 있다. 후배 시인들이 구용 선생님께(시집을 내게 되면) 제자를 받는 것도 이 어려운 시대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온 선생님의 고결한 정신을 이어받고 싶어서이리라. 선생님은 시집의 제자를 쓰신 후에도 백화시실白樺詩室 주인이니, 자묘암慈妙庵 주인이니 하여, 쓴 이를 밝히고 반드시 낙관을 찍는다. 백화시실이란 추사 선생의 습작 붓글씨의 하나. 어쩌다 추사 낙관도 없는 소폭 글씨를 한 폭 수중에 넣으시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지은 이름이다. 지금도 내 눈에 선연히 떠오르는, 추사와 관련된 감동적인 일화 하나가 있다. 관수동에 있는 신영 의원인가 하는 데에 선생님이 갑자기 입원을 하셨을 무렵이다. 병명도 급성위염인가여서 마침내는 수술을 하게 되고 입원실에 누워 있을 때이다. 선생님의 입원 소식을 듣고 병원에 가보니 선생님은 수술을 한지도 며칠 되지 않아서 기동도 못하고 계셨다. 그때 선생님은 내가 가자 침대 한쪽에 매달린 끈을 잡고 아픔을 이기면서 억지로라도 일어나려고 한 적이 있다. 불편하신데 편히 누워 계시라고 하여도 막무가내로 몸을 일으키시며 선생님은 병실 한쪽 벽에 걸어둔 액자를 보고 있었다. 그 액자는 추사의 글씨 죽로지실竹爐之室이었던 것으로 아슴푸레 기억된다. 당신이 현재 겪고 있는 아픔마저도 추사의 액자를 보며 달래고 너끈히 이기시는 분이 바로 구용 선생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용 선생님의 장력은 바로 이상과 같은 것이 종합된 데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선생님은 요즘에는 술자리에서 장력을 발휘하시다가 곧 잘 노래도 부르신다. 그 노래 제목이 무엇인가 하면 '귀곡성'이다. 귀곡성이란 귀신을 곡하면서 부르는 소리란다. 내 생전 [귀곡성]을 들어본 것도 선생님에게서 처음이다. 선생님은 어디서 배웠는지, 아니면 혼자서 창작하여 만드신 노래인지 그 연원은 모르지만, 이 [귀곡성]이 십팔번이다. [귀곡성]이란 노래를 들어볼라치면 요상하기 짝이 없다. "어이 어이, 으이 으이" 하는 어떻게 흉내도 못 낼 소리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듣다 보면 귀신이 나올 것도 같고,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사람의 온갖 마음을 다 움직이게 만든다. 나와 같이 선생님의 살아온 일화를 더러 들은 사람은 그 노래 속에 당신께서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또 부모 곁을 떠나지 않으면 제 명대로 수를 다하지 못한다고 하여 어려서 부모님 곁을 떠나 금강산에 홀로 계셔야 했던 유년의 고독과 아픔을 느낄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들 살아가는 인생 자체의 허망함이 느껴져서 더욱 처연한 실감으로 가슴에 다가오기도 한다. 이제 선생님의 시 얘기를 좀 하자.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선생님은 술이 취하시면 "시에, 인생에 내 못다한 원수를 갚아달라"고 곧잘 우리에게 말하신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 개인으로서는 참으로 어정쩡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원수를 갚아드리겠다고 하기도 뭣하고 그럴 수 없노라고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의 뜻에는 너희들이 시를 잘 써달라는 말씀이 깃들어 있지만, 너희들 시가 나보다는 좋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뜻도 있어서 어정쩡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선생님의 괜한 엄살기가 깃들여 있는 것 같다. 누가 내 시를 따라오겠느냐, 아니면 너희들이 내 시를 제대로 알기나 하느냐, 하는 당신의 시에 대한 절대적인 긍지도 있는 것 같다. 어떤 때는 문학 얘기라고는 좀처럼 안 하시는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돈도 안 되는 시를 쓰면서, 할 말 제대로 못하면서 살아온 적이 그 얼마나 많은가. 권력을 가진 자에게, 돈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센 자들에게 눌리고, 밀리고, 괄시를 받으면서,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면서 살아왔지만, 결단코 시에서만은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셨다. 선생님의 이 말씀은 그대로 나에게 이어져서 내 어쭙잖은 문학관을 밝히는 어떤 글에서 나도 그렇게 시를 쓰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선생님의 시집으로는 {시詩}, {송頌}, {구곡九曲}, {구거九居} 등 네 권이 있다. 권수로는 비록 네 권이지만, 어이 분량으로만 따지랴. 그에 담긴 내용들은 한결같이 이 땅의 시인 그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는 당신만의 시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젊은 시인들이 실험시를 쓴다고 하여 평론가들이 새로운 스타일의 시라고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구용 선생님의 시는 그들의 시보다 더 고도한 수법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일관해오지 않았는가. 서구의 다다, 쉬르, 그리고 불교의 {유마경}에서 보이는 세계, 노장老莊의 세계들로 그 시의 바탕을 삼고 단순한 실험시의 세계가 아니라 심오한 사상까지도 시의 그릇에 담아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용 시는 난해하다. 오늘날 구용 시에 대해 한 편의 평론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은 선생님의 시 세계가 그만큼 폭이 넓고 깊기 때문이며 그 난해성까지 접근하려면 불교의, 노장의 철학까지도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러면서도 참 이상한 것은 구용 선생님께서 어쩌다 술좌석에서 아주 드물게 자작시를 흥에 겨워 낭독하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선생님의 시가 어렵잖게 이해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집으로 보면 왜 그렇게 난해할까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 다음 선생님의 문학에서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구용 선생님은 우리 시단을 통틀어서 비교적 산문을 안 쓰신 분일 것이다. 선생님에게는 흔히 말하는 산문이 없다. 굳이 들라면, 이상 시와 서정주 시에 대한 평론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도 자의에 의해서 즐겨 쓰신 글이 아닌 것으로 안다. 산문이 없는 선생님에게 산문이 있다면 이상한 일일까. 선생님에게는 '구용 일기'라고 일컫는 일기가 있다. 이 일기는 선생님의 필생의 산문이다. 원고지 매수로도 1만 매 이상이 되는 것으로 아는데, 이 일기 속에는 한국 문단사가 들어 있다. 부산 피난 시절 가난했던 문인들의 생활과 방황과 정신적인 갈등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문단에 대한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있다면 이 '구용 일기'야말로 유일한 자료가 아닌가 싶다. 

요 몇 년 전부터 구용 선생님은 귀가 잘 안 들린다. 곁에 가까이 뫼셔도 큰소리로 말해야 알아들으신다. 이제 남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선생님의 소리만을 해야겠다는 의지에서 그리 되신 것일까. 시인이란 자기의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심인가. 장력의 위대함만큼 선생님, 늘 건강하소서. 선생님, 나 너무 까불었지요. 


* 이 글은 년 에 실린 작품을 재수록한 것입니다. 

  때문이며, 그런 세계에 탐닉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필요한 특별한 소양을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조차도 문제가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정말 어렵기만 한 것이며 그 난해성만이 그의 작품에 대한 일관된 평가일 수 있을까. 그의 세계에 소박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는 없는 것일까. 하여 아직은 천박하고 무모한 시도에 불과할지라도 겸손한 자세로 오늘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조명의 미약한 첫삽을 뜬다. 비록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로 인하여 그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다가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너무 미흡한 준비일 수밖에 없었음에 대해 읽는 이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더불어 그의 작품세계에대한 조망작업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니 문단 평자들의 협조를 간절히 구한다.

추천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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