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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특집/촌놈들이야/김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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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여정
댓글 0건 조회 4,506회 작성일 02-06-1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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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촌놈들이야
-시인 김구용선생님과의 40여년의 교우에 관한 회고 
김여정 


김구용선생은 나와 선생의 사이를 연인 관계로 자칫 오해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참으로 딱하다는 듯이 곧잘 그렇게 답답한 심정을 독백처럼 내뱉곤 하셨는데, 그럴 때는 언제나 술좌석이거나 술이 곁든 동창모임 후의, 귀가길의 동행 때였다. 

그 당시 선생댁은 현재까지 살고 계신 동선동이었고 우리 집은 돈암동 시장을 사이로 한 삼선동으로 같은 방향이었기 때문에 함께 한 만남 뒤는 대개의 경우 같이 동행하게 되었었다. 

'촌놈들이야'의 불편한 심기를 주기가 오를 때면 농처럼 부담없이 말씀하시게 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되고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는데……. 

구용 선생의 나 김여정에게 대한 진심은 "내 사촌누이"요, 동시대를 같이 사는, 시를 쓰는 동료요, 오랜 연조가 쌓여 스스럼없이 편한 정겨운 동문 후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한데,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이다. 연유인즉, 

술좌석에 앉으면 바로 옆자리의 누구에게나 정표로 남녀 가리지 않고 하듯 내 손을 잡아 비틀고 손등을 쓰다듬고 하시는 것이었는데 그런 자리에 함께 했던 어느 지방 문우가 처음 보는 모습이어서 두 사람의 사이가 심상치 않더라고 돌아가서 소문(?)을 냈던 모양으로 그 말이 또 선생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육친과 같은 차원의 인간관계를 속된 마음으로 본 장본인에 대한 연민에 가까운 안쓰러운 심정이 "촌놈"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흐뭇한 마음으로 미소 짓곤 했다. 

구용선생과의 나와의 교우는 실로 반 세기에 가깝다. 

1950년대 후반에 모교의 강단에 서고 있는 선배로서 만났는데 그때 나는 졸업반이어서 선생의 강의는 직접 듣지 못했다. 후에 후배들로부터 선생의 강의가 놀라운 명강의였다는 것을 들어 알고는 그 명강의에 접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1958년 1월 27일. 종로4가 동원예식장에서 있은 내 결혼식장에서 김구용선생은 두루마리에 붓글씨로 써 오신 축사를 낭독하고 계셨다. "5남5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루라"고. 

그때 선생은 아직 결혼도 안한 노총각이었다. 

그 후로도 낙향하여 교편생활을 하는 나에게 붓글씨로 쓴 엽서를 보내 안부를 물어 주셨고, 서울로 다시 복귀하고 문단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동문문인인 작가 이정호 여사와 최남백씨들과 자주 만나며 자란지교(芝蘭之交)를 돈독히 하여 왔다. 

은사님 월탄선생님을 중심으로 모인 수요회 동문모임에서도 월탄선생님 다음으로 구용선생이 단연 좌장이셨다. 월탄선생님께서는 우리 제자들을 끔직히 아껴 주셨는데 그 중에서도 항상 구용선생을 먼저 찾곤 하셨다. 

한때는 아동문학가이신 어효선선생, 작가 유주현선생, 화가 김세종선생, 그리고 구용선생과 이정호여사, 최남백씨와 나, 그렇게 일곱 사람이 백송회(栢松會)를 만들어 차례로 집을 돌며 서화(書畵)를 곁드린 합작 문인화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차례가 된 집에서는 화선지를 넉넉히 준비해 두고 질 좋은 벼루와 먹을 챙겨두는 일은 필수적인 준비사항이었다. 

그러면서 사이사이에 산과 물을 찾아 벗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화기롭고 흥겨운 교우의 시간을 즐겼었다. 40에서 50사이의 연배들의 기꺼운 만남에서 배워 얻는 바도 컸었다. 나를 빼고는 모든 분들이 학문과 식견에서 도저하였으니……. 

지금 회고하건데 참으로 기쁨의 웃음이 많기도 했던 아름다운 교우의 시간대였다. 

이 모임이 고학문과 불교사상에 보다 깊은 연구와 시문학과 서예에 가히 전문의 경지를 확고히 정립해 계신 구용선생으로 인해 더욱 단단히 울타리 지워졌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무튼 구용선생과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소중함이요 행운이라 여기고 있다. 

취기가 도도하여 같이 동행해 돌아오는 밤늦은 귀로의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의 불야성의 불빛을 기리키며 "누나야, 강변살자." 하시던 50대의 건강한 구용선생의 친오라버니 같이 호기로운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싶을 뿐이다. 

얼마 전에 그간에 써 오신 귀한 글들을 정리해서 출간한 전집 출판을 기념하는 조촐한 자리가 자택에서 있었다. 보행은 불편하시지만 기억력은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 같아 옛추억을 잘도 기억하고 계셨다. 얼굴 모습도 마치 해탈의 경지에 든 도승 같이 깨끗하고 맑아 사심이 없이 해맑게 살아오신 분의 노후가 저렇게 보기 좋구나, 하는 감탄이 가슴을 쩌릿하게 했다. 부럽기 그지없는 생애가 그 자리를 숙연케 하고 있었다. 

옛날같이 자주 뵙지 못하는 소원함이 그저 죄송스럽기만할 따름으로 아기같은 손을 이제는 구용선생이 아닌 내가 꼬옥 잡아드렸다. 

'선생님 사촌누이가 아직도 변함없이 오라버님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라고. 

요즘은 선생의 전집 한 질을 머리맡에 두고 짬짬이 읽느라 삼복 무더위도 곧잘 잊는다. 

오동나무와 난초를 좋아하시는 선생의 향 맑은 인품과 문학의 향기가 온 집안을 휩쌈을 느낀다. 

해마다 한 장씩 써 주신 붓글씨로 열폭 병풍을 만들어 간직하고 있으니 큰 보배다.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붓을 놓는다. 2000년 성하(盛夏) 

추천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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