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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초점/그 여자의 전투, 그 여자의 말투/김승희 시집/황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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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전투, 그 여자의 말투
-김승희,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황호덕
오늘날 나는 사랑의 힘을 믿는다.
그것이 내가 사랑의 불완전성과 도착성의 근거를 추적하는 이유이다
―프란츠 파농
1. 흰 토끼, 붉은 토끼-이 한편의 색깔 논쟁
토끼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겠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두 종류의 토끼가 있다. 옛날의 토끼가 흰 토끼라면, 이제 말할 토끼는 붉은 토끼다. 내가 아는 김승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즐겨 비유의 바탕으로 삼는데, 앨리스가 아니라 토끼가 주인공이다. 옛날의 토끼는 몰리는 토끼, 모는 토끼, 그러니까 '토끼 몰이'에 나오는 그 토끼다. "우리는 누군지 모를 토끼를 몰고 있는/ 몰이꾼이거나/ 누군지 모를 토끼에게 몰리고 있는/ 몰리는 토끼이거나 하는 것이다"({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 1991). 김승희의 옛날 시집의 입구에는 [유목을 위하여1-누군가 토끼를 몰고 있다]는 표제의 시가 실제로 존재한다. 색깔이 흰 옛날의 토끼는 먹이사슬의 토끼, 속도의 토끼이다. "지평의 속도 위에서는/ 단지 몰리는 불안과 모든 갈증이/ 있을 뿐, / 그리하여 멈출 수 없는 파시스트적 질주만이 있을 뿐"이다. 이 토끼는 쫓기거나 쫓으며 나날이 줄어들어 입을 옷이 없어진 토끼이다. [줄어드는 나]-"내가 줄어드는 그만큼 세상은 늘 넓어져 간다"([유목을 위하여5]). 약 먹은 앨리스의 진기하고 불행한 신축성을 이 불쌍한 흰 토끼가 반복한다. 주로 줄어들 줄 밖에 모르는 이 토끼는 구멍을 찾고 싶어 안달난 토끼이다. "알 수 없는 수동태적 빙빙거림 속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토끼는 어디로 빠져나가야 하나?". 탈주와 유목을 희구하는 욕망 정치 안의 토끼. 이 들뢰즈적이고 푸코적인 토끼의 줄어듦과 슬픔을 표현하는 담배 연기-"먼 곳으로 보내는 하나의 봉화의 애소". 그녀의 질문법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
그렇다면 이번 토끼가 붉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소린가. (대조의 뉘앙스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붉은 토끼가 등장한다. 이 토끼는 '빨간 책'의 색골 토끼가 아니라, '붉은 사상'의 토끼이다. 이 토끼는 밖으로 빠져나가려 하지 않고, 땅을 파고 이 도시를 개간하며 해골을 쌓고 뼈들에 번호를 매기는 정치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이 토끼는 불쌍한 토끼, 줄어드는 토끼, 몰리는 토끼-요컨대 현생의 토끼가 아니라, 행복한 토끼, 대시간(大時間)으로 넘어가버린 토끼이다. 이 붉은 토끼는 경주하는 토끼가 아니라 뒤섞이는 토끼이고 한 두놈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큰 패이다.
한 토끼는 넥타이를 풀어 팽개친다, 피가 흘러내린다,
동맥혈이다, 우리 도시에 세례를 주나 보다,
한 토끼는 교과서를 찢어서 뿌리고
한 토끼는 불이 담긴 꽃병을 처처에 던지고
예수와 석가와 마호메트와 전봉준과 강증산이 엉엉 울며
손을 잡고 춤추며
타임지를 찢어 머리 가리게를 만들고
한 토끼는, 또 한 토끼는, 또 한 토끼는……,
펄 펄 뛰는 그 자체가 춤이 되는,
인디언 선 댄스 춤을 추고
지팡이를 흔들고 방울을 흔들고
산을 이룬 뼈들 위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붉은 심장들을
바쳐놓고
부들부들 땀을 흘리며 주문을 외우고
밤 검은 전화 누군가 지금 위독한데
하얀 얼룩 같은 하얀 토끼들이 점점 더 붉은 토끼들로 이행되는
토끼 집회는 혁명의 과정처럼 행복한 데가 있다
기쁨에 날뛰며 춤의 탑을 짓고 있는,
거대한 피로의 한 탑을 깨고 있는,
이 대시간大時間
달력이 끝나는 13월 13일의 이 대시간
-[대시간大時間] 중에서
"타임지를 찢어서 머리 가리게를 만들고"?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이 붉은 토끼의 선생 혹은 동료는 사이드와 스피박, 호미 바바와 맑스이고 이 토끼의 주제가는 [그 날이 오면]이다. 몰리거나 모는 토끼, 그래서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토끼가 아니다. 내파(內破)의 혁명 전사(戰士)들, 과거와 현재의 뼈들을 묻고 새로 파괴의 경작에 나선 인종을 김승희는 '붉은 토끼'라고 부른다. 줄어든 앨리스, 불쌍해진 앨리스에서 날 뛰는 앨리스, 약 먹고 담대해진 앨리스에로. 탈주에서 전복으로, 연민에서 분노로,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는 흰 토끼에서 붉은 토끼로의 이행들. 김승희는 앨리스의 흥미진진하고 파괴적인 여로(旅路)를 참조하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그 악명높은 뒤섞임, 다른 시간의 마술을 감행하고 있는 셈이다. 어디까지나 전선의 최종적인 파괴, 최종의 승리로서의 대시간을 지시하는 김승희의 시는 그 어느 때 보다 붉고 직설적이며, 강하고 전투적이다. 영토화된 토끼와 반식민 토끼. 정언 명령을 통해 흰 토끼를 붉은 토끼로 이행시키는 시의 주술들.
2. 하위 주체의 기침, 정언 명령의 언어들
2.1. 일상화된 식민주의 ; 탈식민주의라 범칭될 수 있는 거대한 처방전을 참조하며 그녀는 시집 전편을 통해 일종의 이데올로기 전투에 몰두해 있다. 그것은 시의 전투이면서 개념의 전투이다. [신촌 맥도날드]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신촌 로터리에 서서/ 나의 허공에 전시된 너의 금빛 유방을 보면서/ 원주민을 말살해서는 안 된다/ 원주민을 먹여주어야한다-는/ 먹이는 제국주의. 강간이 아닌 유혹으로/ 이제 정책을 바꾼/…". 패스트푸드점 앞에서의 명상―"금칠한 맥도날드의 네온 유방"과 "어머니의 피흘리는 밥상"이 하나의 대조법을 이룬다. 두부공장의 두부처럼 찍어내지는 우리 아이들의 가장 근원적인 배후는 달러화이다([두부 학교]). 그녀는 주위에 가득한 게스 기저귀, 크리스찬 디오르 디너 웨어를 보면서 저기 [제국주의가 간다]고 외친다.
이러한 식민화된 삶은 '그녀들'의 일생을 통해 좀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딸 넷 둔 어머니의 죽음을 표현하는 부고(訃告)가 사위들의 성명과 직책 뿐이라고 할 때, '한국 여인'의 삶이란 "남근 신의 가족 로망스"([한국식 실종자])에 온전히 저당 잡힌 무엇이다. 김승희는 이렇게 물음으로써 가족 제도의 식민성을 적발한다. "그런데 누가 죽었다고?". 잘 발달된 그녀들의 이성에게 있어 결혼이란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에 불과할 수 있다. 패권의 흐름에 복종하는 성정치학은 식민주의의 내면화된 형태이다. 미국의 패권은 러시아의 나타샤, [한국적 죽음]에까지 육박해 들어온다. 그러자, 분노는 개념이 되고 시는 활화산이 된다.
바로 그 지옥 같은 식민주의의 첨단에 '바깥'이 없는 나라, 김승희와 우리의 나라가 있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지 않는 사소한 사건만 가지고도 황인종들의 일상화된 지옥도는 거침없이 잘 묘사될 수 있다. "노래방에서 당신 혼자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삼십 분 넘게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남북통일에 반대하는 사람/ DMZ를 만든 사람/ 수원지에 독극물을 붓는 사람. 성수대교를 무너뜨린 사람/ 백범 김구를 암살한 바로 그, 그, 그 장본인이 된다//……//노래방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한국은 노래방]). 삶은 '전체로서의 삶' 뿐이고, 어머니들은 바깥에서 떨고 있다. 일본 대사관 앞의 항의 집회들은 우리 어머니들의 운명, '그녀들'의 미래가 집약된 풍경이다.
2.2. 사랑에 <다친 무릎> ; 그녀의 이번 시집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시집에서 시인이 가장 중심적으로 다룬 소재가 [사랑]이라는 점이다. 무언가 하면, 현생의 사랑이 나쁘거나 틀렸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가장 좋은 연인은 뇌사腦死의 연인// 가장 좋은 하느님은 코고는 하느님"([사랑1]). 사랑에 개입되는 식민주의적 함정에 그녀는 날카로이 벼리를 세우고 있다. 사랑은 종교와 신의 이름으로 진주했던 제국주의가 그러했듯이, 여성의 의식과 몸에 조금씩 진군해온다. 김승희는 이쯤에서 가야트리 스피박을 비롯한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이름을 숨김없이 발설한다. [사랑3-고엽제 이야기]은 그녀의 개념 전투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거이다.
나르키서스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남자
에코는 그만을 사랑하는 여자
그가 말한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에코는 따라서 말한다
사랑해줘요
그가 말한다
제발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
그녀는 말한다
가까이 오세요!
나르키서스는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남자
에코는 그의 말을 (잘못) 따라하는 여자
모든 사랑에는 혀의 고엽제가 들어 있다
혀를 말리는 하얀 약이 키스할 때마다 배급된다
-[사랑3-고엽제 이야기]
이 시집은 김승희 자신의 말처럼 "남성/여성, 주체/타자, 권력/약자, 다수/소수, 제국/변방의 관계들을 좀 살펴보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관계들은 다 내부에 <다친 무릎>을 은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람의 딸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도 아마 그럴 것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다친 무릎>을 만드는 일도 참 많을 것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불순한 것일 때도 많을 것이다"([후기]). 말을 빼앗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의 고엽제를 배달하는 것이 키스이며, 식민주의가 새겨지는 과정이 바로 사랑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발화 방식과 말을 잃어가는 딸들. 사랑은 에코를 반벙어리로 만든다. 의미의 틈과 애매성이란 전선을 교란시킬 뿐이라는 듯, 대개의 시가 이토록 단호하다.
단적으로 말해 [사랑6]의 환웅의 독백이 보여주는 바, 모든 병적 징후와 인간적 한계들은 "네 에미 탓"이 되고 마는 곳에서 모든 여성들은 아메리카의 인디언이고, 제국의 변방이며, 주체의 타자이다. "인디언 보호구역의 북소리"―나날이 커지고 나날이 위험해지는 북소리야말로 김승희의 시에 가장 근사한 소리이다. 스스로의 식민화된 머리가죽을 벗겨 북을 만드는 시인이 바로 여기에 실재하는 것이다. 그 시인이 쓰는 시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인칭인 '너'를 향한) 명령법적 발화이며 안티 테제로 점철된 계몽적 열정·개념 전투로 가득차 있다. 이론은 명령을 낳고 현실은 분노를 낳는다. 그 분노가 바로 시이다.
삶에 개입하고, 은폐 뒤에도 그 마각을 드러내곤 하는 것들에 대한 일상적이고 개념화된 분노, 격렬한 격발의 시편들. 전선의 확정을 위해 가차없는 개념 전투와 이항대립의 말투도 불사하는 시어들. 분노 때문에 그녀는 정교하지 못하다. 아니, 개념 때문에 그녀는 남김없이 정교하다. 그녀의 적의가 그녀의 비유/은유를 막고, 그녀의 분노가 그녀의 상징과 팩트fact를 정언적 방식으로 생산한다.
3. 토끼들의 대시간―13월13일의 4인칭
저 여자는 말을 못하지
기침밖에 못하는 여자
여자의 밀은 모두 기침으로 환원되고
어떤 말도 말로 번역되지 않고
모든 말은 기침으로 번역되는 어떤 회의會議 석상
저 여자의 기침을 멈추게 하라
기침을 많이 하는 사람은 범죄자나 무신론자, 회의懷疑주의자들,
-[기침을 하는 여자] 중에서
그렇다면 그녀는 왜 수사를 희생해가면서까지 개념의 전투에 몰입하는가. 우리들의 탈식민 토끼는 왜 그처럼 근육질일까. 왜냐하면 '말씀'이 주관하는 남근 신의 세계에서 여자들 혹은 인디언들의 말이란 대개 객쩍은 '기침'으로 취급되는 까닭이다. 요란한 북소리가 아니라면 세상은 들지 않는다. <말하는 여자>가 아니라 [기침하는 여자]가 있는 것이다. 따라하거나 기침하거나. 현생의 사랑의 말하는 김승희의 말투는, 그런 까닭에 종종 <남성/다수/권력/제국>의 명령법적 말투를 되받아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녀들은 자기들을 품을 인칭을 아직 갖고 있지 못한 셈이다.
김승희는 문법적 구조와 인칭들, 시간들에 개입되어 있는 식민주의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일인칭이/ 하나의 명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한낱 하나의 문법적 요소,/ 허구적 자칭으로 반죽된 것임을 바라보았다"([사랑13]). 단적으로 말해 하위 주체로서의 '나'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식탁이 밥을 차린다]. "밥이 나를 먹는다……캘빈 클라인이 나를 입고/ 니나리치나 나를 뿌린다/ CNN이 나를 시청한다". 김승희는 "'나'가 아니라 언제나 '너'인 여자들"을 향해 "대칭을 위한 1인분"을 걷어찰 것을 주문한다. 그녀에게 있어, 여성을 둘러싼 모든 수수께끼는 해답이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남근신을 재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결핍의 장소에 불과하다.
우리를 탐하는 식민주의적 담화에 맞서 김승희는 "너와 나를 욕망하는 제국주의"의 완전한 파괴를 꿈꾼다. 그녀의 대안적 시편들은 거의 유토피아적인데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완전한 해방 이후를 상상하는 까닭이다. 그녀는 자꾸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이라고 되뇌인다. 물론 식민화된 육체, 식민화된 문법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몸에서 활자가 벗겨지지 않는다"). 그녀의 싸움은 '말'에 개입된 이러한 식민주의와의 싸움이다. 김승희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좀 뻔하고 지나치게 안티적인 것이라도 할 수 없다. 개념과 책략을 확정짓고, 전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야전 사령관 같은 전투성에 육본(陸本) 참모와 같은 개념성. 그녀는 점점 시적이기보다는 담론적이 되어간다.
4. 초월 혹은 뒤섞임의 세계
김승희는 유창하다. 그 유창함은 비유와 바꾼 유창함, 수사 밖의 유창함이다. 역사적 사실들이 탈식민주의의 담론과 시인의 적의(敵意)를 통과해 상징을 만드는 순간, 그 상징은 다시 적의를 통해 세계의 완전한 폭파를 꿈꾼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시는 철저히 담론적이고 수많은 담론의 파장들을 불러모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희망 없는 개념 전투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이미 말하고 있는 까닭이다. 시를 말하는 순간 그 해명의 술어는 필연적으로 시적이기보다는 담론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꿈꾸는 그런 담론과 세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이 구체적으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어려운 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은 요컨대 " 총, 성경, 질병을 잊어버리는 그런 사랑/ 탈주하는 사랑/ 탈주를 웃는 사랑" 그것이다. 그녀는 누차 [13월 13일] 혹은 [대시간]을 말한다. 그 시간 안에서는 오직 인칭의 권력 게임에서 해방된 4인칭만이 있을 뿐이며, 안도 밖도 없다. 우리는 거기서 [딴사람]이 된다. 김승희가 꿈꾸는 것은 교환이나 역전은 결코 아니다. (그녀가 그러한 방식의 말투를 사용하고 종래의 명령법적 발화를 재생산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자꾸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이라고 써보고 읽어본다. 그녀는 재현과 탐구를 아껴 호명(呼名)에 쓴다. 틀린 사랑과 옳은 사랑 사이에 단계란 있을 수 없다. 완전하고도 확실한 초월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은 너무 나중에 오며, 꼭 몇자국씩 앞에서 멀어진다.
전차를 타고 가다 유리 지바고는 유리창 밖에서 걸어가는 라라를 보았다 헤어진 지 몇 년만에 우연히 보게 된 라라는 긴 머리를 날리며 햇빛 속을 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전차는 달리고 지바고는 달리는 전차 유리창을 손으로 마구 두드렸다 라라는 길을 걷고 있었다 햇빛 속에 가방을 메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전차가 멈추자 그는 전체에서 내려 라라를 향해 달려갔다 향해 달려갔다 달리는 그의 눈동자 바로 앞에, 저기 앞에 라라의 어께가 라라의 등이 라라의 긴 머리가 바로 저기, 저기에 있었다 바로 저기 잡을 듯이 보였다 라라 라라 그는 소리치려고 했다 고리쳐 부르려고 했다 소리는 나오지 않났다 라라는 햇빛 속을 무심히 걸어가고 있었고 그는 가슴을 감싸안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사랑0-저 몇발자국] 중에서
만남과 못만남의 중간은 없다. 완전한 해방없이 완전한 사랑이란 없다. 그녀의 단호함이 이처럼 애절한 풍경을 사랑의 빙점, [사랑0]의 위치에 놓게 한다. 김승희의 시를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일상의 리얼리티와 완전한 해방의 개념이 자리를 바꾸는 곳? 일상과 탐구를 뛰어 넘고 직시되는 탈식민화된 미래? 삶보다는 분노가, 분노보다는 개념이 입법하는 정언 명령의 세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삶의 부피를 가진 분노의 가능성보다는 그 분노의 힘으로 직시되는 초월 그 자체가 그녀에게는 더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완벽주의자이다. 그렇다면 이 완전한 사랑의 담론에 적대적인 것들, 틀린 사랑의 근거란 과연 무엇일까. 아마 그 흔적이 일상 안에 있을 것이다.
<일상>이 鱁을 잃어버린 날
땅 위에서 국경선이 모두 지워지고
아담의 목에 걸린 사과는 사과나무로 돌아가고
뱀의 뱃가죽에선 허물이 떨어져 승천이 돋아나고
여인의 밥상으론 붉은 황토의 푸른 보리밭이 침투하고
시계는 침대가 되고
침대는 시계가 되고
바다가 침대가 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가 되고 여자는 남자가 되고
아이는 왕이 되고
-[<일상>에서 鱁을 뺄 수만 있다면] 마지막 부분
이항 대립이 문제다. 그것이 원흉이고 그것이 작동하는 모든 곳에서 일상화된 식민주의가 발호한다. 남녀의 한쌍, 시계와 침대의 한쌍. 김승희는 위의 시를 통해 시계(속도, 쫓김)가 침대(이탈, 쉼)가 되고 침대 역시 시계가 되는 이항 대립 이후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뒤섞임이 초월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화법은 너무도 구별적이고 이항대립적이며, 또한 분명한 전선이 확인케하는 분명한 이분법을 갖고 있다.
김승희는 거의 의식적으로 반식민주의 전투를 위해 시의 수사와 은유의 말투를 희생하고 있음을 내비친다. 그녀는 이항대립을 깨자고 선언하는 동시에 그 전투를 위한 이항대립을 (거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이 대립의 순간들은 미묘한 불균형보다는 단도직입적인 분노로 먼저 경험되고 시는 시적이기 이전에 전투적일 것을 요구받는다. 그녀의 말투는 모호성이나 의미의 심연과는 거리가 멀다. 말을 잃은 자들의 분노는 현존하는 말의 가장 극단적인 곳(정언명령의 세계)에서 스스로의 화법을 발견한다. 정의justice와 미래(대시간)의 개념에 의존하는 시편들.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에서 웃음은 아주 적은 질량만을 가진다.
5. 흰 토끼, 붉은 가면-복제된 중심
김승희의 시집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중심의 복제'라는 현상이 갖는 끈덕진 마력이었다. 이를테면 인디안 연구로부터 한국의 노래방까지 의심 없이 도달되는 이론의 전이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중심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 물론 그 복제는 발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형식 논리적인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하나,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라는 보편의 테마가 구체적 삶의 일들을 곧잘 초과해버리는 현상, 시의 담론적 정전화를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문학은 민족 의식 혹은 지역 의식을 강조하는 단계로부터 제국 중심과의 차별성을 강화하는 단계를 거쳐 발전해왔다. 그런데 김승희는 이 발달사의 최종적인 정식들-특히 인디언 연구와 같은 영미계통의 탈식민성 연구를 통해 그 '제국 중심-제국 주변부'의 내부적인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복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테면 미국적 맥락 안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김승희의 이번 시집에서 자주 드러나는 인디언들의 <다친 무릎>이라는 테마와 함께, 한국이라는 제3의 장소를 향해 투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차이의 확보' 는 테마가 '복제된 차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들.
김승희의 뛰어난 이론적·시적 감식안을 초과해서 범람하곤 하는, 미국적 맥락의 포스트콜로니얼한 글쓰기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사랑3―고엽제 이야기]와 같은). 미국이라는 식민지 본국의 포스트콜로니얼 텍스트와 대응관계를 이루곤 하는 시구들에는 어쩌면, 부재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권위, 즉 탈식민주의라는 도래 이론의 마력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 정전화된 담론의 세례 없이는 좀처럼 문학적 적법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한국적 리얼리티'의 불행한 운명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김승희의 담론 편향은 필연적으로 담론의 낙차를 재복재하게 하곤 한다. 즉, 탈식민 담론의 전파 과정에서 또 하나의 이론적 식민성이 잉태되는 것이다. 이미 하나의 학제로 자리잡은 미국 내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란 이제 어떤 의미에서 반식민주의가 제국 내에서 하나의 변방부 이론으로 승인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미국 인디언의 <다친 무릎>이란 어찌됐든 제국 자체의 헤게모니 재편성의 결과일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맥락으로부터 이탈해 그 이론의 파괴력을 어떻게 전유(專有, appropriation)하는가 하는 것이리라.
어떤 의미에서 요긴한 것은 일상의 리얼리티, 그것과 충돌하는 탈식민 담론의 파열일 것이다. 그 파열의 침전이 시(詩)로 빚어질 때 담론과 시의 낙차는 좁혀질 수 있다. 아니 그 낙차 자체가 생산적인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은 삶의 부피와 이론의 외재성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파열과 의심, 고뇌의 풍경이 우리에겐 소중한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이론 위의 불안은 그 드물게 빛나는 파열의 한 사례이다.
그녀도 집에 닦지 못한 식기를 한아름 싱크대 위에
버려두고 도망치듯 나온 여자였을까,
강의 준비를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아홉시 수업에 늦지 않게 당도하려고
미친 듯 페달을 밟던 여자였을까,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말을 그저께 들었던,
시부모로부터 네가 인간이냐는 말을 어저께 들었던,
친정 어머니로부터 전세 값이 올랐는데
이사 날짜는 다가오고 어쩌면 좋으냐는 말을
아침에 들었던
그 여자였을까,
당신의 사랑은 거기서 더 기어갈 수가 없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다 끝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를 가진다
-[사랑11] 중에서
코피를 흘리며 차를 멈추고 있는 한 여자의 삶이 시적 화자의 삶과 겹치는 순간을 표시하는 시구들. 간단없는 삶의 흔적, 앎과는 별상관으로 운위되는 그대로의 일상이 포스트콜로니얼리얼 두뇌를 들이받는다. 그러니까, 바로 그 순간에 담론과 삶의 낙차는 결정적으로 좁혀들고, 한국적 식민성을 가르키는 어머니·아내·며느리·딸의 모습은 반식민성의 테마를 응축하게 된다. 그녀의 특수한 삶이 그녀들의 보편적 삶이 되는 순간, 이론의 외재성은 이론의 보편성이 되고, 시의 정언성은 시의 에너지가 된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 이러한 순간들이 지배적이냐고 묻는다면 우리의 대답은 좀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김승희는 온통 테제에 몰입해 있다. 주제적인 측면에서의 전복적 에너지가 시적 리얼리티로 점화되지 못한 채, 테제의 전투성에 머무는 순간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목격하게 된다. 탈식민성의 주제에 관한 한 가장 앞서 나간 시적 분투가 이렇다는 것은 어찌 보면 정히 안타까우면서도 당연한 일이다. 단적으로 말해 김승희만이 전유(專有)하고 있는 반식민의 맥락이 무엇인지를, 현재의 우리로서는 분명히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변두리가 동시대의 가장 풍부하고 혁명적인 문학의 영토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 전복성은 분노의 전복성, 하위문화적 에너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들을 구성하는 언어들의 탈중심성, 언어의 특별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르게 말하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변두리의 언어는 식민성-규율적 권력의 억압적 담론 체계가 형성시키고 그 억압의 극복과정에서 생출된다. 담론의 단일 규범과의 길항으로 인해 그것은 흔히 모호하고 복잡하며 때때로 거의 침묵에 가깝다. 매매혼의 대상이 된 인도의 여성 혹은 장롱 속에 바늘을 숨겨 두었을 할머니들은 그러니까 말하지 않거나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한다. 누구도 그들을 대표해줄 수 없으며, 그들을 전용(轉用)하는 일이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그것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탐구되어야 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 젤리 같은 유동성이 사실은 힘이고 의미의 폭파 지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텍스트들을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김승희가 말한 가야트리 스피박의 '하위 주체를 향한 말걸기'가 그러하며, 변영주가 보여준 [낮은 목소리]의 말걸기가 또한 그러한 고려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할 때, 김승희의 시가 정치적 긴장을 지탱할 만한 말걸기의 방식-주변에의 질문과 천착에 온전히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드물게 자신의 삶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 긴장의 언어는 한국적 리얼리티로 들어서자마자 좀 뻔한 것이 되고 만다. 그녀가 그녀 자신의 주변성(어머니, 며느리, 딸, 여성 운전자, 시 쓰는 일)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그녀는 그녀만의 특이한 방식으로 말하고 그 발화법은 성공적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담론의 폭포 아래에서 울리는 반동적 메아리들은 거의 예측가능한 울림들이다. 그녀의 화자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순간조차, (그녀의 시는) 언어구사에 있어서 중심적이다. 좀 가혹하게 말해, 그 중심성은 식민지 본국의 중심성-포스트콜로니즘 담론의 중심성이다. 이론화된 체험 특히 자신과 겹치면서 미끄러지는 타자의 경험이 다소 일반적인 뉘앙스로 복제되는 몇몇 순간이 이 시집 안에는 있다.
요컨대 두 가지 측면에서의 전유(專有)의 과정이 이 시집에서는 문제가 된다. 그 하나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담론 상의 전유-한국적 결절의 미진함이며, 다른 하나는 담론의 시적 전유 과정에서 발생된 경직성이다. 담론과 시작(詩作), 이 두 가지 측면에서의 변별적이고 독특한 김승희만의 면모, 이론의 복제보다는 이론의 파열을 보여주는 전치의 기술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정치적, 담론적 긴장이 시적 긴장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순간―담론의 정당성이 제압해버린 시적 수사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의 읽기는 조금 불편한 것이 되곤 한다. 우리 자신의 식민성과 타자성을 담아낼 그릇이 일상의 리얼리티라기보다는 포스트콜로니얼한 독서들이라는 사실은 정히 뼈아픈 체험이다. 그 뼈아픔은 우리의 과문(寡聞)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의 가차 없는 정언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노란 피부, 하얀 가면>은 이 순간, 왠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별다를 것 없는 변주처럼 보이고, 황인종의 글쓰기는 딱딱한 종류의 흑인 글쓰기와 구별되지 아니한다. 그 순간, '차이'의 확보라는 테마는 말걸기, 탐구, 시적 리얼리티가 아니라 정치적 공리의 차원에서 "더 기어갈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맑스주의적 맥락의 매판성 이론, 사이드적 기원에서 폭발한 스피박의 에코 페미니즘과 같은 상호 이질적이고 연대적인 언어들의 통사론적·의미론적·구문론적 충둘과 그 과정의 언어적·담론적 탈선이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표면적인 독서, 부주의한 오독(誤讀) 때문이라기에는 그 시어의 가차없는 중심성이 마음에 걸린다.
담론과 일상은 정확히 주체와 타자, 지배와 매개라는 이데올로기 모델을 반복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공인된 우등한 언어란 대개 시적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때의 시는 적어도 이론에 있어서는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옳은' 담론을 중재하는 시적 언어들과 일상들, 너무 드물게 발견되는 시적 전유의 특별함들. 이론적 발화에 의한 시적 영토의 재전유가 일어나고 있다. 시의 이데올로기성이란 차이와 거리, 점유와 파열의 리얼리티를 포함할 때 유독 빛나는 무엇이다. 문화 비판 자체의 통공간성(通空間性)-담론의 보편성이 바로 여기, 한국의 여성 운전자이자 주눅든 며느리인 한 시인의 삶을 점유하고 있으며, 그 시집은 그런 한에서 콜로니얼한 복제와 포스트콜로니얼한 지향을 동시에 드러낸다.
단적으로 말해 초두에서 말했던, 그녀의 붉은 토끼는 옳은 테마·정언적 말투에 쫓기는 그러한 토끼이다. 아직 대시간으로 넘어가지 못한 한에서, 모든 붉은 토끼는 '붉은 가면을 쓴 흰 토끼'에 불과하다. <흰 토끼, 붉은 가면>. 탈주의 강박증에 빠져 있는 흰 토끼와 정언 명령의 공리에 쫓기고 있는 붉은 토끼는 이 순간 아직 현생에 있는 셈이다. 어쨌든 김승희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붉은 토끼든 검은 토끼든 식민주의만 잡으면 좋다. 그런데 전투에 관해서라면 차라리 가차없는 붉은 토끼가 낫겠다. 분명한 것은 이 대시간으로 도약하는 앨리스의 토끼가 붉은 목소리로 말한다는 사실이다. 붉은 토끼이면서 흰 토끼인 이토록 특별한 토끼를 사냥하는 일이란 그런 까닭에 정히 힘든 일이 되고 만다. 그리고 우리를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그 붉은 토끼들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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