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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젊은시인조명 해설/미로와 거울 ―조말선의 신작시/이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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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인조명해설
미로와 거울
―조말선의 신작시
이창민(문학평론가)
기억의 계단에서 김인환은 시조와 이상을 양끝에 놓고 그들로부터의 거리를 측정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위상을 설정하고, 박상륭과 장정일을 양끝에 놓고 같은 방법으로 한국 현대소설의 위상을 설정하는 방법을 제기했다. 현대시의 경우 여기에 더하여 김소월과 정지용, 김수영과 김춘수를 이차 준거로 수용하면 박경리와 황석영을 박상륭과 장정일의 중간에 정위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특정 시인의 위치나 개별 작품의 의의를 좀더 명확하게 파악하게 될 것이다. 조말선의 시는 시조와 김소월과 김수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이상과 김춘수에 근접해 있다. 리듬에 개의치 않고 이미지를 제시하는 데 집중하기는 하나 심상의 원심적 파장을 의미의 구심적 초점으로 제한하지 않는 데 조말선 시의 특징이 있다. 내심의 파동을 세 마디나 네 마디 율격으로 조절하고, 직관의 유동을 비유적이거나 서술적인 심상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현대시의 일반적인 관례인데,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일을 마땅치 않게 여겨서인지 조말선은 일관된 운율 조성과 유사성에 근거한 비유 구성에 집착하지 않고 본문을 이루는 의미 자질들의 자유로운 상호작용과 연상작용을 유도하는 데 유의하고 있다.
이상과 김춘수에 근접해 있기는 하나 조말선의 시는 이상 시처럼 도설이나 퍼즐에 접근하지는 않고, 김춘수 시처럼 무의미나 기상에 경도되지는 않는다. 시의 의미는 보통 지시적 의미와 운율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의 총합으로 이루어지는데, 운율적 의미를 배제하고 있는 조말선의 시에서 지시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가 대응하는 작품은 드물지만 양자를 상응시켜 이해할 수 있는 약호가 아예 제거된 경우는 없다. 그것은 본문 안에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본문 밖에 배치되기도 한다. 조말선은 전작 [딴다](현대시학, 2000.8)에다 영화에서 취한 '제레미 아이언스의 퇴폐'와 '바그다드 까페? 시에서 택한 '김언희의 그것'과 '수백개의 음순을 가진 프란시스 퐁쥬? 도착에 관련된 '로리타의 도발'을 나열하고, [시인의 시화(詩話)]에 단 주석에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뀉뀉뀉"와 "아주 성능 좋은 빨대"가 각각 "게걸스런 독자들을 위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기도"와 정진규의 시 [토란밭에서]로부터 차용한 것임을 기입했는데, 독자는 이것들을 다른 작품의 주제와 의미를 파악하는 약호로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신작에서 중추를 이루는 작품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다섯 편의 연작이다.(내게 온 원고에는 작품의 일련 번호가 1, 2, 3, 4, 6으로 되어 있다. 5는 어디로 갔을까?) 이 작품의 제목은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빌린 것이다. 보르헤스는 이 소설을 포함해 1941년 같은 이름으로 책을 냈고, 이를 1부로 삼고 2부에 '기교들'을 더해 1944년 픽션들을 출간했다. 이 책은 1992년 녹진에서 허구들, 1994년 민음사에서 픽션들로 번역되어 나왔다. 조말선의 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3]에서 화자는 계속해서 보르헤스의 집을 물으며 미로를 헤매지만 거울 속에 있는 거울과 또 그 속에 있는 거울이 끝없이 질문을 복제하기만 할 뿐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한다. 1996년에 김춘수는 호라는 시집에 실은 [보르헤스가 죽었다]에서 1986년 카리브해가 대낮에 옷을 벗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죽었다고 썼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은 사람이니 그 집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김춘수의 역설은 존재의 환몽성에 대한 보르헤스의 견해와 유관하다. 두 사람은 혼돈과 미망과 우연이 세계를 관통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처럼 여겨지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보르헤스는 이 세상은 어린아이처럼 불완전한 신이 만든 것으로 신은 자기가 만든 작품이 너무 형편없어 부끄러워하며 버렸다고 했다. 이 시로 보건대 시인의 생각도 이에서 멀지 않은 듯하다.
이 시에 나오는 '미로'와 '거울'은 '꿈'과 함께 보르헤스 소설을 대표하는 상징체이다. 보르헤스 영역판 선집의 서명이기도 한 미로(Labyrinth)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는 '상징과 기호의 미로'로 등장한다. 영국과 전쟁 중인 프러시아의 첩자 유춘 박사는 정체가 발각되어 영국군 대위 리차드 메든에게 쫒겨 애쉬그로브에 있는 스티븐 알버트 박사 댁을 찾아 간다. 그가 역에 내리자 역에서 놀던 아이들이 교차로가 나올 때마다 왼쪽으로 꺾으면 길을 잃지 않을 것이라 알려준다. 유춘은 운남성의 성주였으나 홍루몽보다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쓰기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길을 잃게 될 미로를 만들기 위해 성주의 권력을 포기한 취팽의 고손자이다. 스티븐 알버트의 집을 찾은 유춘은 그로부터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 건축물이 아니라 소설책이라는 사실을 듣는다. 다양한 미래와 다양한 시간이 무한히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증식하는 미로로서의 소설이란 컴퓨터로 인해 가능해진 하이퍼 텍스트에 상통하는 개념이다. 취팽은 선조적 질서를 가진 선험적 형식으로서의 시간을 부정하고 상이한 계열이 병존하고, 분산되고, 수렴되는 출구없는 미로로서의 시간을 소설로 구현한 것이다.
이 소설에는 거울에 관한 언급이 나오지 않지만 이 소설이 실려 있는 첫 작품은 거울과 백과사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며 소설작법 중 1인칭 화자에 관해 논쟁하던 '나'는 거울이 자신들을 염탐하고 있다고 느끼고, 거울에는 아주 기괴한 점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때 친구가 어떤 이교도 창시자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럽다고 선언한 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 말은 영미백과사전에 실린 것으로, 거기에는 한 그노시스 교도에 따르면 가시적 세계는 일종의 환영이거나 좀더 정확히 말해 궤변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고, 거울과 부권은 가증스러운데(mirrors and fatherhood are hateful), 왜냐하면 이것들이 가시적 세계를 증식시키고 또 그것을 마치 사실인 양 일반화시키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울이 부권과 유사하고, 부권이 성교와 상통한다는 시각은 조말선 시 의미 해독에 상당히 계시적인 약호로 이용할 수 있다. 신작에는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지금까지 발표된 조말선의 시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은 양육을 수예(樹藝)에 비유하고 가족 구성을 사물 관계로 치환해 부권의 본성을 적시한 작품들이다. 전작 [거울] [아홉 송이의 자폐] [토마토](현대시학, 2000.8)에는 모종컵 속에 심은 딸을 키워 팔아 눈알을 사고 새 다리를 사는 아버지와 피는 꽃마다 성숙이 자폐로 귀결되는 가족과 딸을 집어 먹고 뱉어 내는 엄마가 등장한다. [화분들](신생, 2000 겨울)의 아버지는 비닐하우스에다 딸을 미혼모로 만들어 재배한다. 그는 행인을 붙잡아 침대에 눕혀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자르고 짧으면 그만큼 망치로 쳐서 늘렸다는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신발이 작으면 발가락을 자르고 모자가 작으면 목을 자른다. 딸은 분노와 빈혈과 공포에 멍들어 나날이 시들어 간다.
시인의 의도와 무관한 우의화의 위험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런 시들에 배경을 이루는 가족 구성은 사회 관계의 축도로, 양육 재배는 권력 작용의 환유로 읽을 수 있겠고, 그렇다면 신작 [염소와 말뚝]도 같은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딸과 마찬가지로 염소에게 "말뚝을 박은 풀밭은 파산하기 시작한 집구석"이고 "부패하기 시작한 식탁이다? 식물과 동물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양자에게 공히 가족의 거처인 집은 안식의 공간이 아니고 사회를 관통하는 구속과 억압, 가학과 피학이 중첩되어 결딴난 분쟁의 세계이다. [송림조경원](시안, 2001 봄)에다 쓴 대로 부권이 전제하는 집은 교실과 다르지 않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1]에서 시인이 개화의 조건으로 애정이 아니라 음모, 칭찬이 아니라 욕설, 다정이 아니라 냉소, 직설이 아니라 반어, 성취가 아니라 실수, 친근이 아니라 불화, 긍정이 아니라 부정, 수락이 아니라 거절을 내세우는 이유가 이 어름에 있을 것이다. 화해를 가장한 교환이 판치는 시대에 참된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식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원수가 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순환버스]와 [연, 못](현대시학, 2000.8)에서 말한 바 맨날 똑같은 대사를 읊고, 맨날 똑같은 풍경을 즐기는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시인은 거절하고 거절하고 또 거절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작을 포함해 볼 때 조말선의 시는 대략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는 듯 한데, 첫째는 이미 지적한 대로 양육과 재배의 비유 체계를 통해 사회 관계를 가족 구성으로 전이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자유롭게 부동하는 내심을 그대로 서술하거나 현실에서 대상을 찾을 수 없는 관념을 조작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4번과 6번, [수박요리] [오해] [하농]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전작에서는 [사막](현대시학, 2000.8)이나 [야간운전](시안, 2001 봄) 등이 그러하다. 이런 시들은 경험의 압력이나 사회의 구속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고 발화되지 않은 의식류의 기록에 접근한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반대로 개연성과 현실성을 부정하고 가능성과 비현실성을 긍정하는 미학 위에 조립되어 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의 짧은 서문에는 '환상소설'이라는 말이 1번,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2번 나온다. 보르헤스는 좀더 그럴 듯 하고, 좀더 무능력하고, 좀더 게으르게 상상의 책에 주석을 다는 글쓰기를 선호했는데, 조말선은 거기다 다시 주석을 닮으로써 상상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어 기록할 수는 있지만 대상을 지시하지 않고 의미를 형성하지 않아 현실의 담화에서는 소통되지 않는 시쓰기를 지향한다.
조말선 시의 세 번째 갈래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2]와 [매우 불온한 담론]처럼 물화가 일반화된 삶의 단면을 비판적 언사를 배제한 채 기술하는 것이다. 전자의 핵심은 화자의 산책길이 네 블록이며, 한 블록에는 전봇대 네 개, 가로수 스물 일곱 또는 스물 여덟 그루, 가로등 세 개가 있다는 것과 그가 이제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의 보도블록 숫자를 세기 시작했으며, 노인의 개입으로 새고 있던 숫자를 놓쳤다는 데 있다. 노인이 사라지면 화자는 분명 다시 수를 세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셈은 강박 신경증의 특별한 증례이겠지만 일상을 제어하는 계산 행위의 대표적 사례일 수도 있다. 후자에서 시인은 특이하게도 국가 단위 문학이 아니고 시집과 광고지를 주제로 삼는 '비교문학시간'에 그 둘을 대비하는 일을 매우 불온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정도를 불순하게 여기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전작의 경우 [중독]이나 [성묘](현대시학, 2000.8)처럼 개화와 낙화로 오인되는 신호등의 점멸이나 빌딩 창문의 개폐, 감정의 강도로 치부되는 조화(造花)의 색도가 물화된 삶을 표현하는 지각형상으로 제시된다.
픽션들을 번역한 황병하는 보르헤스를 이십 세기의 창조자라 했고, 허구들의 역자 박병규는 최후의 모더니스트이자 최초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라는 말로 보르헤스를 규정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포함해 보르헤스의 소설을 해석할 때면 으레 등장하는 술어로 지칭되는 특징들은 언제나 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문학이론의 소설화, 수용미학, 독자반응 이론, 후기 구조주의, 하이퍼 텍스트, 기호, 형이상학, 신, 죽음, 영원, 시간, 상호텍스트성, 책, 책에 대한 책쓰기, 도서관, 페시미즘, 니힐리즘, 꿈, 환상, 환상적 사실주의 등은 그 어느 것이나 글짓기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보르헤스가 문인에게 특히 각광을 받고, 시작의 제재로 수용되기도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본문과 주석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른바 의사 사실주의, 의사 서지, 의사 전기 등의 기법으로 인해, 그리고 번역서에 빽빽히 달려 있는 각주 때문에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는 일은 마치 한가한 소일이 아니고 긴장된 지적 분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르헤스의 소설에는 세상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책과 문학과 도서관에 대한 집요하고도 경탄할 만한 관심이 존재한다. 조말선이 제목으로 삼은 소설에는 단 한 권의 소설책을 쓰기 위해 권력과 압제와 침실과 쾌락을 모두 버리고 십삼 년을 은거했다 이방인의 손에 죽은 인물과 수백 묶음의 원고를 비교하고, 필경사의 부주의로 인한 오식을 정정하고, 지은이의 본질적인 의도를 분석하고, 순서에 맞춰 작품을 정리하고, 작품 전체를 번역하면서 희열에 달뜨는 인물이 나온다. 보르헤스를 포섭하는 시작은 작품의 내포를 지식의 영역으로 오도하거나 외연을 현실의 경계로부터 분리하는 실책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끝>
약력:
이창민: 199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저서 양식과 심상 등. 현재 고려대 강사.
추천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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