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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신작시/장이지/백하야선(白河夜船)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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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이지
댓글 0건 조회 5,911회 작성일 02-06-14 10:20

본문

신작시 
장이지
백하야선(白河夜船) 외 1편 


오늘밤 나는 
또 다른 나를 떠나보낸 것이다. 
흰 눈은 후일담처럼 가라앉고 쌓여 
고즈넉이 반짝거리는데, 
또 다른 나는 
은하철도 999호에 몸을 싣고 
우주 저편 남십자성을 향해 떠난 것이다. 
오늘밤 또 다른 내가 가는 우주 저편에선 
초록 올리브숲이 
마그네슘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사파이어 모래밭은 
파도에 몸을 담근 채 노래할 것이다. 
길 잃은 철새가 길을 물어올 것이고 
빨간 스웨터가 잘 어울렸던 내 첫사랑도 
정한 돌멩이를 찾고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클라리넷 소리 
온유하게 들리고 
검은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오늘밤 오광대 탈처럼 무서운 얼굴의 
노숙자들이 범하듯 나를 
치욕스럽게 보고 간다. 
눈길은 달빛에 녹아 강이 되어 흐르고 
나는 가벼이 가벼이 가는 
망각의 빈 배. 
오늘밤 나는 
내 유년의 꿈들을 떠나보낸 것이다. 
검은 돛을 올려라. 나는 빈 배. 
호졸근한 내 둥근 어깨 너머로 
999호는 유성처럼 멀어져가고 
격려하듯 깨끗한 눈발 몇 개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거미를 위한 진혼곡(鎭魂曲) 


달이 떠 있는 밤에 너는 왔어.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냐면 
창 밖 상수리나무의 검은 침묵과도 같은 
그늘 속에서 니가 왔으니까. 
그때 바람이 불었던 걸 잊지 않았겠지? 
춤추는 얼룩 그늘 안에서 
거미, 너는 기묘한 걸음걸이로 왔잖아. 
지그재그로, 니체의 책과 
자크 레다(Jacques Réda)의 시집을 넘어, 
내 담녹색 실내화를 촌스럽다고 
한 소리하는 걸 빼놓지 않고,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어. 
「자, 청승은 그만둬, 어른인 주제에. 
이제 춤을 출 시간이야.」 
난 이유 따윈 묻고 싶지 않았지. 
미끄러운 방바닥, 달빛, 
흔들리는 상수리나무 그늘, 
운명을 예감케 하는― 
왜냐하면 염색체 모양을 꼭 닮았거든, 
X자 모양을 한 네 등. 
난 예전의 그 스텝을 모두 잊어버렸어. 
그래서 난 지금 그때 우리가 
춤을 췄다고 쓸 수 있을 뿐이야. 
달이 떠 있는 밤이었지 않아?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면 
그날 춤을 추고 난 뒤 내가 잠든 사이 
거미, 넌 내 미투릴 뜨고 있었지. 
달빛과 상수리나무 사이를 오가며 
넌 거미줄을 뽑느라 무척 지쳐 있었고 
난 잠결에 또 너의 메마른 등을 보았어. 
그때 난 조금 울었어. 
네 실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으므로 
너의 시간을 짐작했었지. 
바람에 흔들리는 미투리. 
흔들리며 멀어지는 시(詩)…. 
내 남은 시들의 주제가 될 단어가 되어 
넌 너의 시와 내 곁을 떠났어. 
슬픈 일이야. 하지만 잘 가, 거미! 
영원히, 영원히 잊지 않을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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