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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기획특집/인문학 위기와 지식인의 직무유기/박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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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정진
댓글 0건 조회 4,266회 작성일 02-06-1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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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기획특집 인문학 위기와 지식인의 직무유기
박정진(문화평론가, 시인)

1.기술학이 되어버린 인문학

인문학의 위기감이 학계일반은 물론, 우리 문단 및 예술계 등 문화전반으로 번져 각양각색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간에도 종종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반성적인 모임이 있으면 으레 몇몇 뜻 있는 분들은 이것을 주제로 떠올리기도 했다. 어딘가 우리 문화에는 기초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어느 분야에 종사하든 공통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간적 자세랄까, 태도랄까, 그런 공통적인 교양이 부족한 데서 오는 허전함을 떨칠 수가 없다. 60년대에 비해서는 월등하게 나아진 소득이라든가, 엄청나게 늘어난 국가의 볼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되레 과거에는 느끼지 못한, 아니 느낄 여유가 없었던 그런 민족적 자아에 대한 궁핍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이제 물질적 가난을 극복하는 단계에서 정신적 가난을 극복하여야 하는 단계로 우리가 접어든 까닭일까? 이유야 어떻든 이제 폭넓은 의미에서 지식인들은 이런 정신적 가난을 극복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제 지식인들이 국제경쟁력을 가지지 않으면 더 나아질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그동안 대체로 자기의 지식을 국가 내부적으로 지위와 명예를 얻거나 부를 높이는 데 사용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자기 안에서의 지위경쟁이 아니라 자기 밖에서의 지배경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국가의 위상을 높일 여지가 없게 된 것이다. 단순노동력이나 베껴먹기로는 국제경쟁력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전망에서 볼 때 그동안 지식인들은 직무유기를 해왔다고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인문학 위기는 바로 우리 문화의 기초의 위기라고 할 수 있고 그런 맥락에서 문화풍토에 대한 착실한 반성으로 이 논쟁을 이끌어가지 않으면 논쟁의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대부분의 이런 등속의 논쟁은 사실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잘못을 개선하려는 생산적인 움직임이라기보다는 현재의 권력을 잡으려는 당파성을 감춘, 논쟁을 위한 논쟁인 경우가 더 많았다. 이것이야말로 종래의 구태의연한 소모적인 논쟁인 것이다. 우리 문화는 전반적으로 외형은 선진국을 많이 본뜨고 근사치에 도달한 것 같지만 실은 그 내용은, 실질적으로 문화를 움직이는 문법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문 경우가 많다. 이것을 한마디로 '주체화되지 않은 근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체화되지 않으면 아직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의 상당수가 실은 '내 것이 아닌 게' 많다.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자'는 것이 이런 위기론의 핵심이라고 본다.

최근의 인문학 위기논쟁은 크게 보면 두 줄기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인문학의 위기를 정부나 사회, 나아가서는 '남의 탓'으로 돌리는 책임전가형이고 다른 하나는 '내 탓'으로 돌리는,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하는 자기반성형이다. 물론 사물을 보는 데는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유용할 때도 있고 주관적으로 보는 것이 유용할 때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본다고 해서 객체적(방관자적)으로 보면 실천력이 부족하게 되고 주관적으로 본다고 해서 주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실천으로 연결하는 힘이 부족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객관적이면서도 동시에 주체적으로 이 문제를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먼저 '남의 탓'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내 탓'으로 결론짓는 것이 생산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자기반성형 쪽이라고 볼 수 있다. 주도문화, 선진문화를 따라가다가 보니 여러 면에서 문제를 발생시켰지만 반성이야말로 우리 지식인이 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항상 남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정부나 사회 쪽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우선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첫째 조건인 자유(自由)에 결격사유라고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은 단순히 자유롭게, 자기 멋대로, 책임을 지지 않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 자기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의 인문학이 쇠퇴일로에서 유실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면 우선 그것을 담당한 세력인 지식인의 책임이 그 누구보다도 큰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문학이 지금 쇠퇴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장황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예컨대 인문학이 그 사회에서 효용성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밥값을 하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인문학 종사자들이 예컨대 근육 노동자들이나 기업 장사꾼에 빌붙어 밥을 먹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다른 기술학과 같이 그 발전과정이나 실적이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성과를 인정받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아무 일도 안하고도 일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며 위선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늘의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면 분명 전자의 인문학의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성격 때문이 아니라 '일하는 것처럼 위장하며 위선적으로 산' 그런 것에 속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일부 양심적인 학자나 유능한 학자들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겠지만 이런 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문화의 주체화는 몇몇 지식인들의 선진문물에 대한 이해나 적응력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반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얼마나 체화되었느냐 하는 정도에 따라 가늠된다. 지식인들, 문화예술인들의 상당수가 훌륭한 정신노동에 종사한답시고 거드름이나 피우고 교수대접이나 받으면서 그 엄청난 서구이론을 가지고 와서 아무런 토착화 노력이나 반성적 작업도 없이 그대로 서구지식에 문외한인 보통사람들에게 팔아먹으면서 사회적 지위나 명예를 사냥하였다고 단죄한다면 너무 가혹한 처벌일까.

민주주의의 삼대 목표인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아직도 우리의 체질이 되지 못하고 겉돌고 있어도 서양의 고매한 민주주의의 성전(聖典)이나 법전(法典)을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그냥 신주 모시듯 경배하고 있는 족속들이 앵무새 인문학자들이 아닐까. 반성하는 지금의 자리에서도 그 법전 속의 내용이 글자 그대로 이 땅에서 통용되지 않고 있다고 한탄하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참으로 스스로가 노예인 줄도 모르는 노예를 해방시키기란 현명한 주인에게 노예를 해방시키라고 설득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시점이다.

오늘의 인문학은 우리의 전통과 단절된 채 서양이론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전혀 현실적으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는 '죽은 인문학'인 것이다. 이는 전반적으로 서구적 보편성을 우리의 특수성과 소통시키지 못한 채 관념놀이의 대상으로만, 계층유지의 도구로만 다룬 탓일 것이다. 한마디로 밥값을 못한 인문학인 것이다. 밥값을 하지 못한 인문학은 퇴출되어야 마땅하고 이런 논쟁도 실은 퇴출 일보 직전에서 위기감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이것을 의식적인 차원으로 떠올림으로써 자생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지도 모른다. 잘못하면 머지않아 우리의 인문학은 더 이상 발붙일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저 외국에서 잘 포장된 물건을 사오듯 손쉽게 사들여오면 그만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구제불능의 문화종속이고 문화노예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이다.

오늘의 이런 딱한 현실은 일찍이 원가를 적게 들이고 학교수입을 잡기 위해 대학생 머리 수를 늘리기 쉬운 인기종목으로 인문학이 떠올라 흑판과 분필만 있으면 학생들은 얼마든지 모집할 수 있었고 여기에 서구이론의 맹신자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만 따오면 대학교수로 프리패스시켜 강단에 세워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한 업보인 지도 모른다. 이런 앵무새 인문학을 매개로 하여 인문학과가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대학은 축재를 했던 적이 있었다. 또 조선조 선비사회의 전통은 교수나리를 대접하기에 급급했던지라 너도나도 교수만 되면 된다는 만사형통이라는 슬로건 아래 너도나도 해외에서 인문학 박사 따서 돌아오면 그 때부터 학문을 팽개치고 놀기에 급급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인문학자의 수는 필요이상으로 많아서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온 인문학자의 상당수(이들은 대개 많은 달러를 썼음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땐 국력낭비로 귀착된다)가 취직도 못한 채 실업자 혹은 잠재실업자(시간강사: 보따리 장사)로 전전하면서 교수채용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단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정치학박사는 길에 널려 있는데 우리 나라 정치는 제대로 되지 않은 현상에서 우리의 인문학의 현주소와 낭비와 인력관리 부재를 볼 수 있다. 정치학 박사 과잉은 결국 생산을 하지 않고 출세를 노리거나 명예를 노리는 군상들이 많음을 반영한다. 이를 '인문학적 낭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문학이 전통과 단절된다면 아무리 서구이론을 해박하게 가지고 있어도 우리의 인문학적 현실을 발전시키거나 개선하는 데는 역부족임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오늘의 인문학의 위기가 마치 과학기술에 치중한 정부의 정책 때문에 빚어진 것처럼 주장하는 이가 인문학자 가운데는 많은 게 사실이며 더욱이 군사독재 정권 운운하면서 모든 죄과를 그것에 덮어씌우면서 책임회피를 하는 인문학적 군상을 볼 때는 더욱 암담해진다. 인문학적 위기를 군사정권에 책임전가하는 것은 바로 내부 당파의 원인제공이며 급기야 일종의 문무계급 투쟁에 속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실지로 인문학 위기론자의 일부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위기론을 들고 나와서 전개하는 경우가 종종 목도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좌파적 앵무새인 것이다. 지금은 좌파와 우파의 역사적 경험이 축적된 상태이다. 이 좌우의 말을 잘 컨트롤하여 길을 잘 가야 하는 '훌륭한 마부'가 필요한 시점이다.

돌이켜 보면 누가 철학을 우습게 알고 교양과목에서 제외시켰으며 국사를 국가 공무원시험에서 선택으로 격하시켰으며, 또 누가 한문을 공부시키지 않아서 우리 조상들의 수많은 문화전적들이 사장되어 전통과 단절되게 했던가? 오 천년의 역사는 간 곳이 없고 우리는 일제 패망 후 해방과 더불어 갓 태어난 신생국과 같은 입장에 있다. 답은 간단하다. 적어도 오늘의 현실을 있게 한 것은 우리의 인문학자 스스로이거나 그들이 가르친 제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인문학이 현실에서 제대로 기능했는가를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외양적으로, 감각적으로 근대를 받아들인 나머지 아직 우리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민주주의의 제도가 아니라 원리에까지 도달하여 다시 우리의 제도를 만들어내는 수고를 우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실에서 방관자로 안주해 있으면서 사회적 지위와 명예라는 열매만 따먹고 소일하다가 뒤늦게 퇴출되는 것에 당황하고 '인문학 살려!'라고 소리치는 것은 분명 자기모순이며 자업자득이다.

혹시 오늘의 인문학자들의 상당수가, 아니면 인문학 집단 전체가 우리 나라의 발전과 성장에 무임승차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개발의 대열에 서 땀을 흘린 것도 아니고 또한 민주주의의 한국적 형태를 만들어 가는 데에도 별로 기여를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막연히 교수니 선비니 하면서 그 알량한 이름으로 사회적 지위를 도적질하는 부류의 인문학자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때가 되었다. 얼마나 관념적 선비주의의 폐해가 심각했던지, 되레 최근에는 기술자-예술가들마저 역류하여 무슨 무슨 대학의 교수라는 타이틀을 훈장처럼 달고 예의 그 생산성 없는 선비들의 거드름을 피우려고 한다. 탤런트나 배우나 코미디언들이 무슨 무슨 대학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활보하고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 또한 대학교수라는 직함을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닌다. 이들은 기술과 예술의 본업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정치학 박사와 비슷한 예에 속하는 것이 바로 화가군상이다. 물론 일찍이 화가들이 대학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온갖 연줄을 동원하고 뇌물을 대학재단에 기증하고 혈투를 벌였던 나라이고 교수가 되지 못한 화가들은 무능한 화가가 되어 자연히 화단에서도 도태되었다. 각계 전문가들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해서 직업이 특정 분야의 전문가(기술자, 예술가)가 아니라 교수가 되어버리거나 교수가 되어야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곳에 우리의 인문학은 바로 기술학으로 전락하여 뿌리를 썩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주객전도가 경제사정이 호황이었을 때는 그 여유로 인해 그런 대로 사회적으로 용인되었으나 경제사정이 나빠지고 기업이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절박성이 강화된 요즈음, 특별히 불거진 것이다. 기술학으로 전락한 인문학(기초과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여기서 인문학이라고 할 기초과학도 포함된다)이 그 분야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퇴출 일 순위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으니 오히려 어느 분야보다도 먼저 퇴출대상에 오르고 구조조정을 받아야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론이 인문학자의 집단이기에 속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이것은 일종의 노동조합 운동의 성격에 머무는 꼴이 된다.

그 동안 양산된 인문학자들은 토착화세력을 소외시키고 외세의존적 기득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외세의존적 인문학은 불가피하게 기술학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필요에 따라 외래의 인문학적 결과들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할 테니까.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집단이 인문학자 집단이었던 것이 아닐까! 인문학의 위기는 안이하게 외래문물을 받아들이고 안주한 업보일 것이다. 인문학자여! 위기를 논하기 전에 먼저 각자가 제 역할을 하고 제 밥값을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또 남을 탓하기 전에, 시대를 탓하기 전에 내가 그것의 주범이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위기론이 나온 것도 실은 민족적-문화적 자아발견에 속한다. 이런 논의가 있기 전에도 이런 현상을 있어왔는데 논쟁이 없다가 그나마 논쟁이 야기된 것은 한편으로 위기의 발견이지만 동시에 위기의 해소의 출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인문학의 위기와 유행적 포스트모더니즘


우리의 인문학의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서구의 인문학적 결과들을 그대로 이 땅에 적용하고 대입하고 그것을 법도로 삼은 데에 있다.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 연구하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서구에서 만들어놓은 기성품을 여과없이, 가공없이 입거나 그 기술을 도입하면 된다는 그런 안이함과 주체성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 문화를 가장 비하하는 말 가운데 '통과문화'(passage culture)라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 문화는 선진문화가 통과하는 다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과거 중국중심의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중국문화가 통과하였고 오늘날은 미국중심의 서구문화가 통과하는 지역이라는 말이다.

통과문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기보다는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적응하는 데에 급급한 편이다. 물론 여기에도 생존적인 차원의 문화 토착화는 있기 마련이다. 통과문화라고 주장하는 측은 이러한 최소한의 토착화를 문화의 진정한 토착화(주체화)라고 보지 않으려는 측이지만 어쨌든 민족적으로 매우 자괴감을 일으키게 하는 한국문화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전에 반성적 자료로 삼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 문화가 어찌 다른 문화와 문화 사이에 다리역할 하기 위해 존재하리요 마는 이는 우리의 문화가 다분히 근래에 '이름만의 유행'이라든가, '선진문화를 따라 잡기에 급급한 졸속'을 보인 데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준 것이라고 보면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광복 후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들어온 서구의 근대문화의 용적을 압축해서 소화하다 보니 그런 졸속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광복 후 반세기가 지났고 나름대로 정신을 차리고 우리를 반성하면서 우리의 문화적 정향을 주체적으로 달성해 나가는, '문화 모방의 시기'에서 '문화 설계의 시기'를 전환해야 하는 계기를 맞은 것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런 전화의 절호의 기회를 말로만 하고 일부에서 문제제기만을 하다가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다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업보를 지우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흔히 문화의 중심론은 여러 차원에서 제기될 수 있다. 그 중심이라는 것이 동심원적 확대와 축소의 가능성이 있는 매우 탄력적인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 어느 맥락의 논의이든 중심이 있어야 주변이 있고 동시에 그 중심의 역량에 따라 주변을 포용하는 힘의 정도가 결정되고 그 역량이 있으면 있을수록 중심과 주변의 교류가 활발해질 수 있다. 중심과 주변은 가역반응을 하면서 피드백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는 이상하게도 중심은 없이 주변만 있는 그런 썰렁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 연유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다른 논의가 더 필요하겠지만 이제 문화의 중심을 제대로 창출함으로써 주변을 오히려 두텁게 거느리는 그런 문화운영을 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 문화 전반에서 근대는 아직 여물기도 전에 이미 후기근대의 물결이 들어왔다. 이 세계적인 유행과 조류를 막을 필요는 없다. 단지 근대의 성숙이 있기도 전에 후기근대의 물결을 맞고 보니 근대도 튼튼하지 못하고 후기 근대도 성실하지 못하는 흠이 있다. 후기 근대가 한낱 유행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오히려 근대를 다시 한번 확실하게 다지는 노력들이 문화전반에서 전제되어야 하겠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남북분단 이후 근대국가마저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통일을 어차피 민족적 숙원으로 전제하고 있을 때의 상황적 판단이다. 통일의 미달성은 우리의 근대문화 전체를 혼란과 모순의 질곡 속으로 몰아넣기 일쑤다. 그런 점에서 좌우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우리의 근대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고 먼저 저 단군 할아버지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이전에 '홍익민족(弘益民族)'이라도 달성하는 게 눈 앞의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에 대한 관심과 전통을 근대에 접목하려는 노력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강도 높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 일제식민기라는 민족쇠퇴기에 있었던 여러 청산하여야 할 것들을 청산하고 재정리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은 어쩌면 민주주의의 달성보다 더 절실한 것이고 실지로 민주주의의 달성에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생략할 수 없는 과제이다.

'중심 없는 문화현상',다시 말하면 '주변만 무성한 문화현상'은 여지없이 오늘의 세계화에도 결정적으로 그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민족적인 것을 주장하여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세계화에서 취약한 점을 드러내는 것이고 민족적인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이미 세계화의 전제나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말함에 다름 아니다. 민족적이라는 것은 이미 근대화의 단계에서 이미 성숙되고,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단계에 접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인 것을 계속 세계화와 관련하여 논의하여야 하는 알량한, 순진한, 모방문화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은 어쩌면 구제불능의 수준에서 맴돈다고 할 수 있다. 후기 근대문화가 또 하나의 '통과문화'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지식인 각자가, 문화예술인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물과 경쟁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그 작업을 내놓는 것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세계화가 되는 것이다. 말로만 세계화를 떠들어댄다고 세계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게 작업을 내놓을 때에 토착화도 저절로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착화란 과거의 소재가 아니라 현재의 창조적 삶을 통해 몸으로써 직접 겪고 고민하게 되는, 보다 인간적인 것을 향하는 그런 몸짓이며 옷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창조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책무는 크다. 인류가, 서구인들이 근대에서 이룩한 것들 가운데는 문제점들을 노출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근대적 제국주의도 그렇고 도구적 이성주의와 과학주의도 그렇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도 또한 그렇다. 이런 근대적 성취들을 우리의 '홍익인간' 개념에서 소화하고 비판하고 다시 '홍익인간의 틀'에서 재창출해보는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 동시에 홍익인간이 오늘날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까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 홍익인간도 실은 과거의 우리 민족의 문화적 핵심을 한자말로 다시 옮겨 정착시킨 고려조의 업적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의 문화적 볼륨과 성취 위에서 그것을 다른 말로 정착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문화를 얼마나 비하하고 사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런 것을 들 수 있다. 먼저 국내에서 성공하려면 외국에서 인정하는 시민권이나 졸업장이나 코스웍이나 패스포드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국민에게 인정받기 위해 먼 타국을 돌아야 하는, 자기비하의 원정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는 논법이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처음부터 한국에 있었으면 아마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 지도 모른다. 세계적 지휘자인 정명훈이 한국에 처음부터 있었으면 아마 파벌싸움의 희생양!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작고한 민족시인 서정주나 소설가 이문열, 조정래, 박경리가 아직도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모국어로 승부를 하여야 하는 문학적 특성 때문인 지도 모른다. 문학은 그런 타국을 돌아야 하는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소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역논법이 적용되는 분야이다. 이 땅의 특질이 우선 적용되는 것으로 가장 성공적인 것은 역시 체육분야일 것이다. 엘리트 체육이라는 비아냥과 구설수 속에서도 세계적인 경쟁에서 올림픽에서 보면 적어도 랭킹 10위권을 달성하였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우리의 체질적 특성을 기초로 달성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역사적-문화적 특질이 적용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 이어 노벨문학상도 우리의 과녁 안으로 점차 들어오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노벨문학상으로 우리 문화의 수준을 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통과의례로서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세계적 철학자, 세계적 과학자들로 속속 배출되어야 적어도 근대문화에서 선진국의 자리에 진입하게 되고 후기근대를 논의할 자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단순히 후기근대도 유행에 불과한 것이 될 공산이 크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든, 가장 세계적인 것이 한국적이든 어느 쪽에서 시작하든, 결과적으로 우리는 민족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이 논의적으로는 시차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대원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몸은 바로 이 민족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이 동시에 교차하고 뒤섞이고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용광로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의 일상의 하나 하나가 바로 세계적인 하나 하나가 되는 것임을 각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일상의 하나 하나가 진선미(眞善美)의 하나 하나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인문학의 문제는 문화전반의 문제이고 그것이 인문학에서 돌출된 것일 따름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비단 인문학의 위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운영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대적-모방적 문화운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대적-모방적 문화는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로 몰락한다


인문학의 위기의 저변에는 부정부패가 깔려 있다. 우리 사회의 최근 부정부패와 내분을 보노라면 민족적 자괴감이 앞선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현 정권의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우리 역사 내부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어떤 나라의 역사이든 그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생존에 대한 인정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생존이 오욕과 간난과 내분으로 얼룩져 있다면 결코 그 나라의 존재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집단이나 나라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계속적으로 불행한데 나라는 영속해야 한다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집단의 생존은 개인의 행복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오 천년의 역사에서 미증유의 풍요와 국력신장을 구가하고 있는 요즘, 여러 면에서 다시 국력의 쇠퇴의 조짐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과거보다는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있으면서도 불만투성이이고 그러면서도 일은 하지 않고 한탕주의에 빠져 있는가 하면 낭비와 사치로 국가에너지를 탕진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기초에 대한 투자와 미래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하고 계획 없이 재정을 함부로 쓰는가 하면 '말의 정치', '거짓말의 정치'를 자행하고 있다. 어쩌면 그나마도 지금이 피크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이제 내리막길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앞선다.

왜 그럴까? 우리 국민은 왜 힘을 모아야 할 때 그것을 분산하고 공익을 위할 때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지고 마는가? 과연 국가라는 것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준거집단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가문(家門)의 차원에서 삶을 궁극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실은 가문도 아니다. 극도의 개인주의에 의해 사회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그러다가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 중심이 없는 것이다. 중심이 없을 때는 아무리 좋은 이상이 들어오고 물질이 풍부해진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소화하거나 지키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모방문화적 특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외부적으로는 평화주의를 천명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당쟁주의를 구사하고 있는 우리의 말의 성찬의 정치현실, 또 기초과학(학문)의 육성에는 등한하면서 얄팍한 기술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의 학계현실, 외국의 기술종속을 심화시키고 있으면서도 자체 개발연구 투자를 소홀히 하고 있는 기업현실, 그리고 막대한 교육낭비를 하고 있는 문교현실 등을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하다. 인문학의 위기도 실은 모방적 수준에 머물면서 양적으로만 팽창한 채 선비인 체한 우리의 모방적 선비주의의 한계와 위선의 결과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면 현실에서 중용(균형)의 최선의 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역사를 소급하거나 아니면 미리 가서, 보복을 하거나 이벤트(푸닥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즉흥적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은 과거에 발목 잡히고 미래에 저당 잡혀 비틀거리고 있다. 모방도 때때로 발전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모방에 전적으로 매달리기나 안주하면 그 문화는 쉽게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모방에서 창조로 전환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결국 쇠퇴하거나 패망하고 말게 된다. 우리 문화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창조로 전환하지 않으려고 하는 점이다. 기초가 부실한 것도 바로 창조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모방문화의 특성은 외국에서 그 문화를 모방해 들어온 자는 상류층에서 살고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만 나머지는 소수의 그들을 위해 착취당하게 되어 있다. 그 동안 모방문화 세력은 주체화세력을 되레 비주류로 몰며 소외시키고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데 급급하였다. 모방문화는 전성기를 구가하더라도 창조나 모험에 인색하기 때문에 결국 밖으로, 위로 용기 있게 뛰쳐나가지 못하고 안으로, 밑으로 비겁하게 숨어들면서 혈연-지연-학연으로 부정부패를 일삼고 내분을 부채질하게 되어 있다. 모방문화의 융성이 위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방도 필요하지만 정작 창조로 전화하여야 할 때 용기가 부족하고 도피하기 쉽고 몰락하기 쉽다.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풍요와 타락'의 메커니즘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지도층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제 밥그릇만 챙기기에 바쁘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모방사회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선진문화의 토착화는 물론 독자적인 기초학문과 기초과학의 기반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진국들은 바로 기초학문과 기초과학,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첨단학문과 첨단과학을 후진국에게 넘겨주기를 꺼리고 이 분야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말하자면 선진문화를 유지하고 계속 발전시키는 문화적 노하우가 여기에 죄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바로 모방사회인 후진국으로선 여기가 가장 넘기 힘든 고비이다. 여기서 힘차게 선진국으로 진입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는 제자리를 유지하기보다는 후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제자리에 있기보다는 전진하지 못하면 후퇴하게 되어있다.

바로 우리가 이런 고비에 처해 있다. 선진국으로 진입하기보다 후퇴하는 있다는 징후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부정부패, 여야당쟁, 지역감정, 사치풍조, 한탕주의, 부익부빈익빈, 기초학문의 부족, 이상과 현실의 괴리, 주체성 없는 세계화 등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전진하기보다는 후퇴하는 징후군인 것이다. 그런데다가 IMF상황을 맞았고 그 여파로 상당한 국민재산의 손실이 발생하였고 주요기업들이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수난을 겪었다. 이제 경제적 기반마저 외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총체적 난국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를 한마디로 '중용(균형)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국민은 언제나 극에서 극으로 흐르는 극단을 지향하고 중용을 실천하는 데 취약함을 보였다.

언제 어떤 돌출변수가 나타나 우리 경제를 망하게 할지, 또는 우리 정치를 얼어붙게 할지 살얼음을 걷고 있는 심정이다. 이게 다 선진국으로 진입하기에는 역부족인 총제적 문화역량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과연 선진국으로 진입할 능력이 없는 것일까. 또 후퇴한다면 어디까지 후퇴할 것인가? 또다시 먹는 것도 해결하지 못해서 허덕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하루 하루의 연속이다. 내실 있는 실천보다는 말의 성찬에 힘을 쏟고 있는 현정부의 경제 및 통일정책과 청사진이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우리는 언제까지나 환상의 제의에 열을 올려야 하는가. 모방문화는 창조적 단계에 진입하면 휘청거리고 선진국의 심각한 견제와 시련을 받게 되어 있다.

선진국은 적어도 창조적 단계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떤 나라가 신입회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모방으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주체화세력과 토착화세력의 양성이 절실한 것이다. 모방사회는 결국 내분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모방문화가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진정한 풍류문화의 회복이 절실하다. 그렇게 하여야만 도덕과 문화예술이 풍성하면서도 절도를 지키고 문화의 문무균형(文武均衡)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흥망의 국제경쟁 속에서도 오늘날 살아남은 것은 그래도 풍류문화가 어딘가에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풍류문화는 우리의 주체적 문화 찾기의 원형이나 모델과 같은 것이다. '오늘의 풍류문화'를 이룩하는 것이 결국 인문학의 위기를 벗어나는 첩경이다.




4. 풍류문화는 '풍류도의 문화'이지 '풍류쟁이 문화'가 아니다


조선조 사회가 주자학 편식과 사대주의와 안으로의 당쟁으로 망했다면 그 끄트머리를 쥐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지금은 권위주의 독재가 물러가고 그야말로 이른 바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민주주의의 속내를 보면 참으로 위선적이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민주주의가 이 땅에 들어온 지 반 백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그 민주주의는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이거나 권력에 명분을 주기 위한 깃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 깃발 아래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민주주의의 토착화는 어디로 가고 다시 당쟁으로 얼룩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당쟁에는 선비들은 어디로 가고 투사와 투사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깡패들만 으스대고 어깨를 자랑하고 있다.

오늘날 투사라는 것도 과거 군사정권과 투쟁을 하기 위한 불가피한 역사적 과정이었고 업보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직화된 군사정권과 맞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민간인들은 민주적 헌장뿐만 아니라 물리적 힘이 필요했었고 그 물리적 힘을 투사들이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공적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투사들, 그 가운데서도 교양 있는 정치인으로 발돋움할 수 없는 깡패의 멘탈리티를 가진 인물들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가야 할 때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소위 정치적 가신(家臣)들은 자신들의 분수를 생각하고 자신의 보스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적당하게 물러갈 때가 되었다는 얘기이다. 지난 정권에서도 그 가신이라는 것이 활개를 쳤고 지금도 정치권에 남아 있긴 하다.

그런데 이런 가신들은 현 정권에도 여전히 실세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지난 해 몇몇 금융비리 사건에서도 일부 그 옷자락을 드러냈다. 소위 가신들은 그 공적을 인정하는 것이 정치적 의리라고 하더라도 그들에 합당한 의리를 밥을 먹고 보통사람 이상으로 살 게 하면 그만이다. 제대로 정치적 도리를 배운 것도 없는 그들에게, 정치적 술수와 물리적 싸움의 주구노릇을 하는 데 익숙한 그들에게 나라를 맡긴다는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의 장래를 암담하게 하는 처사이다. 이들에게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리고 정치적 막후에서 이들의 입김이 요소 요소에서 상당히 작용하여 국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정국이고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는 것이다.

현 정권은 이제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었고 광복 후 그들의 말대로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집단이라면 민주정치의 안정적 기반을 이룩하는 것이 역사적 소명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투사정치, 가신정치, 깡패정치를 완전히 청산하는 것이 내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적 구조조정에 못지 않게 중대한 과제이다. 정권 자체, 권력 자체를 잡고 오래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제 제대로 된 민주정치의 전범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그 기반을 다져나가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저 지긋지긋한 당쟁의 후손이 아니라고 할까 봐 그 업보를 짊어지고 술수와 조작으로 권력투쟁을 한다면 언젠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야 말 것임은 분명하다.

지금 정권은 투사정치, 가신정치, 깡패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서 일반국민들은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딴따라의 정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투사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못지 않게 아래에서 국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빠져 있는 딴따라 풍조는 민족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매스콤의 부정적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지난 정권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한 CATV과 방송 3사의 연예오락, 소비 프로의 만연은 이를 부추기고 있는 장본인이다. 말하자면 대중사회의 일반적 풍조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위 먹고 마시고 노는 분위기가 사회를 들뜨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내세우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단면인 것이다. 이것은 '풍류도의 문화'가 아니라 '풍류쟁이 문화'이다. 민주화운동세력들이 기껏 정권을 잡고서 풍류쟁이 문화로 전락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미안하게도 지금 그런 형국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민주'나 '민중'의 본질적 수준이 이런 것이었던가?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풍류쟁이로 겉멋만 들어 딴따라처럼, 건달처럼 살아간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매도하고 저주했던 군사독재 정권을 많은 불명예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먹고살게 하는 경제적 기반을 만든 것임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기껏 민주정권을 탄생시킨 우리들이 이렇게 놀아나면서 국력을 소모하고 미래를 용의주도하게 도모하는 '선진국 진입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이를 완성하는 데 소홀히 한다면 오히려 군사정권에 부끄러운 일이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완전한 독립-민주국가가 아니다. 그런데 나라도 만들기 전에 미리 잔치를 벌이고 놀아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을 짓이다. 좀 심하긴 하지만 위에서는 깡패, 아래에서는 딴따라가 뒤섞여 잘도 놀아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불감증은 이미 위기의 수준을 넘었고 사회 전반에 불신이 팽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국가에너지를 결집하는 데 큰 적이다. 공교육이 무너졌고 요즘 아이들은 탤런트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한다. 과거의 아이들이 대통령이나 의사, 판사,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다고 꿈을 얘기하는 것과는 격세지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를 굳이 나무랄 필요도 없지만 탤런트에 소질도 없는, 불특정 다수의 많은 아이들이 탤런트가 되기 위해 방황하고 있다면 이는 잘못된 대중사회이면서 잘못된 교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상도 우리 사회의 전반을 병들게 하고 있는 딴따라 문화의 영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매체보다도 영향력이 큰 방송들이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여 탤런트들만 내세우고 그들을 파는 프로그램으로 일관한다면 이들의 죄악은 참으로 미래에서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회를 생산적으로, 효율적으로, 인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오늘의 정치의 소명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정반대로 소비적으로, 비효율적으로,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종합적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풍류문화가 타락하였을 때의 모습이다. 풍류문화가 제대로 잘 다듬어지면 '풍류도의 문화'가 되지만 타락하면 '풍류쟁이 문화'가 되고 만다. 이름은 '풍류'를 같이 사용하고 있지만, 겉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둘은 천지 차이다. 전자는 흥하는 길로 가는 것이고 후자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전자는 도를 터득한 사람들이 즐비하여 통일도 이루고 삶의 멋도 이룩하지만 후자는 건달들이 즐비하여 나라는 분열하고 삶은 난장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가 후자에 있지 않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조선조는 사대에 안주하다가 망하였지만 오늘의 우리는 사대를 할 정도로 세련되지도 못했고 아직도 생존 자체를 위한 삶의 야비함도 벗어나지 못한 채 근대국가를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고 있다. 아직도 국민들은 국가라는 단위에서 공공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사적으로 혈연, 지연, 학연에 국가를 맡겨놓은 채 나눠먹기, 패싸움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위에 요란한 딴따라의 나팔 소리와 기생들의 천박한 권주가가 만연하고 있다. 참으로 국가라는 이름을 주기에는 복에 겨운, 과분한 모습들이다. 아직도 망국의 잔재와 일제 식민의 잔재가 '그것을 욕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콤플렉스'에 우리를 매어두고 있다는 말인가! 자기모순 치고는, 자기순환 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여!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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