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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초점/'작은 이야기'를 통한 '큰 세상'의 길은 요원한가?/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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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명철
댓글 0건 조회 5,306회 작성일 02-06-1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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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작은 이야기'를 통한 '큰 세상'의 길은 요원한가?
―1990년대 이후의 소설에 대한 비판적 성찰

고 명 철
(문학평론가, 광운대 겸임교수)

1. 깊고 그윽한 맛이 결여된 풍성한 소설의 만찬

나는 우리 소설의 현주소를 생각할 때면,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하면서 머리가 묵직한 게 마치 체증에 걸린 것처럼 속이 메스껍다. 글쎄,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까. 산해진미를 만끽할 수 있는 뷔페 식당에서 온갖 다종다양한 음식을 정신없이 먹어치우다보니, 이내 포만감에 사로잡히고 급기야 소화불량에 걸리게 되는 것 말이다. 물론 여기까지 이르게 된다면, 뷔페 식당을 찾은 자는 모르긴 모르되 십중팔구 보통 사람보다 식탐이 많은 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자신의 눈 앞에 놓여 있는 수십종의 음식을 지켜보면서, 그것도 그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기회에서, 비록 식탐이 적은 사람일지라도 뷔페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새 자신이 평소에 섭취하는 음식량을 초과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지금-여기에서 우리의 소설을 떠올려볼 때마다 체증에 걸린 것인 양 속이 메스껍다고 느끼는 데에는, 바로 이처럼 뷔페 식당에서 차려진 산해진미를 먹고 소화불량에 걸린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 없듯이 1980년대와 급격한 단절을 체험한 1990년대 이후의 소설은 다원성이란 캐치프레이즈 아래 다양한 이야기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주체-역사-민중-인간해방'이란 소설적 패러다임이 '타자-일상사-개인-욕망의 분출'이란 소설적 패러다임으로 전이되고, 그 도정에서 작고 비루한 일상성의 틈새에 숨어 있는 삶의 가치에 대한 발견은, 그 동안 소홀히 간주해온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다각도로 형상화하는 주요한 동인으로 작동되었다. 하여 우리 소설지평은 적어도 외형적으로 볼 때는 뷔페 식당에 성대히 차려진 산해진미처럼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롭고 풍요로운 소설의 모양새를 보인다. 작가들 나름대로 정성들여 만들어낸 작품은 저마다 독특한 매혹으로 독자를 글읽기의 욕망으로 붙잡는다. 분명, 이것은 환호할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1990년대 초반부터 문학지평에 짙게 그늘을 드리운 문학의 위기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작가들은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독자들의 다양한 입맛에 맞는 작품들을 독서시장에 내놓으며, 독자들은 그처럼 다양한 성향의 작품을 마음껏 즐기게 되었다. 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문학의 르네상스로 인식될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1990년대 이후의 소설이 소재와 주제 면에서 그 넓이를 확장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확장된 넓이에 비례해서 깊이까지 그러했는가, 하는 점에서는 이모저모로 수긍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소설의 외형적 모양새는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해졌으나, 내면적 영혼은 성숙해지기는커녕 때로는 유소년기의 유치함과, 때로는 사춘기의 질풍노도와 같은 객기와 가냘픈 감수성과, 때로는 성인기의 간교한 음흉함이 착종되는 미성숙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내가 정작 우려하는 바는 이처럼 소설의 내면적 영혼의 미성숙을 전략화하는 글쓰기이며, 이것이 바로 변화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우리 소설의 임무라고 인식하는 작가들과 여기에 정합성을 부여하는 비평가들의 담론이다. 깊이의 부재를 냉철하게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고사하고, 깊이의 부재야말로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서사화라고 웅변하는 그들의 담론은, 삶과 현실을 현상적으로 추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깊이가 결여된 채 넓이만 확장된 소설. 독자는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된 풍성한 소설의 만찬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다양함에서 맛볼 수 있는 순간적이고 자극적인 양념 맛일 뿐이지, 소설적 재료의 그윽함과 그 재료를 다룬 작가의 혼신의 열정에 스며있는 깊은 맛을 음미하기는 어렵다. 순간적이고 자극적인 양념 맛은 곧 사라지고 또 다시 독자는 그와 비슷하거나 더욱 농도가 강한 맛을 지닌 소설에 탐닉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2. 외화내빈(外華內貧), 자기갱신이 부재한 소설


작금의 우리 소설이 직면한 문제가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고 한다면, 성급한 단순화의 오류일까? 이미 나는 여러 차례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한 비평을 통해 최근 우리 소설이 보인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오면서, 잠정적으로 이러한 비평적 판단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다른 글에서 지속적으로 보인 우리 소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입장을 다시 한번 숙구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우선, 나와 동세대의 작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나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한 바 있다.


197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변화와 일상성에 대한 미시적 접근과 거시적 접근이 서로 긴장 관계를 맺고, 그 틈새에서 작가 나름대로 발견한 삶의 진실을 형상화해 달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작가 개인이 실존적 고민이 투사되기도 하겠으나, 그 고민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터하고 있는 역사와 현실과의 촘촘한 회로망 속에서 갈고 다듬어질 때 더욱 웅숭깊어질 것이며, 심지어 개인의 현존을 넘어선 삶의 어떤 비의적인 것을 내다보는 투시안마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내가 염려하는 바 그들의 욕망의 밑자리에서 스멀거리고 있는 문학적 허무주의에서 자족할 게 아니라 그 허무주의 심연의 바닥을 차오르는 소설적 역동성으로 충만될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같은 글에서 "단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움의 진정성을 망각한 채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사통팔달 통하는 쾌도난마식의 소설쓰기가 횡행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자고 하였다. 이것은 비단 나의 동세대 작가들에게만 한정된 성질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1990년대의 물적 토대에 기반하여 이른바 90년대의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작가들 대부분이 '문학적 허무주의'에 침전되어 있고, 급격히 부상된 각종 문화양식의 코드들을 소설의 담론으로 차용하면서 종래의 낯익은 정통적 서사형식을 파괴하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역사적 현실'이란 거대 담론은 낡고 고루한 과거의 유산이며, 그들의 선배 세대가 열정적으로 추구하던 미래적 전망은 결단코 현실화할 수 없는 욕망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 시대의 삶 전체를 뜨겁게 불태웠던 소설의 주류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는 그 자리에 밀물처럼 밀려든 것은 삶의 덧없음에 대한 온통 허무주의뿐이었다. 망망대해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나침반을 상실하여 항로를 잃어버린 채 허탈감과 자포자기의 자괴감만이 맴도는 처지로 전락되었다 할까. 더욱이 그러한 시대에 대한 별다른 의식없이 성장해온 1970년대생의 작가들인 경우 선배 세대의 역사적 경험과 단절된 가운데 자신들 세대의 정당성을 자기확인하는 도정에서 잉태되는 역사에 대한 극도의 환멸적 파토스를 보인다. 심지어 파토스의 단계를 넘어 역사의 부재와 현실의 전도를 자신들 세대의 논리로 구체화하려는 로고스를 전략화한다.

물론 이러한 글쓰기를 실현하는 데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서사적 장치는 대중 문화의 코드들이다. 대중 음악, 영화, 만화, 컴퓨터 게임, 각종 인터넷 문화 코드 등이 서사적 장치로 이용된다. 동시대의 삶과 현실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문화 코드들을 소설의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들 문화의 코드를 어떻게 소설의 담론으로 수용하느냐, 하는 문제는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된다.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소설이 대중문화의 코드를 전유하는 문제이다. 가령, 단순히 동시대의 문화 흐름을 적정한 수준에서 반영하기 위해 대중문화의 코드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영화적 기법을 남용한 소설이다. 심하게 얘기한다면, 영화의 한 장면을 소설이란 틀 안에 언어로써 그대로 재현하였을 뿐이지, 영화와 변별되는 소설만의 독특한 미적 체험을 할 수 없다. 영화의 서사와 소설의 서사가 부딪치는 가운데 종래 소설의 서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서사적 형식을 끌어내었다면 별도의 문제이겠으나, 오히려 영화의 서사에 매몰된 소설로 전락된다면 이것은 소설의 서사 그 자체가 갱신된 게 아니라 절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설마저 어느 새 종합예술인 영화를 구성하는 한 하위문화 코드에 불과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지나친 기우일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작가들이 반성적 성찰을 지니지 않고, 그저 귀찮은 잔소리로 여긴 채 흘려버린다면 이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으리라.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자. 점차 소설을 읽는 사람보다 두 세 시간의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총천연색 영상을 즐기는 사람이 폭증하고 있는 현실에서, 소설의 서사가 영화의 서사에 흡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사실을. 무엇보다 90년대 이후 작단에 발을 들여놓은 작가의 대부분이 영상문화의 환경 속에서 성장해왔음을 예의 주시해본다면, 이러한 나의 기우는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다. 활자문화를 접촉하기에 앞서 영상문화를 접촉한 그들의 감수성은 자연스레 영상의 언어에 길들여졌음은 의심할 바 없지 않는가. 하여 그들은 어느덧 영화의 서사에 지배되는 문화 식민성을 체험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러한 기우를 불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작가가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서 구비전승되는 구수한 입담을 능수능란하게 소설 담론으로 섭취하는 성석제가 그다. 90년대의 소설지평에서 성석제의 출현은 붕괴되어 가는 소설의 서사를 새롭게 복원시켜주는 혜성으로 인식된다. 그와 동세대의 작가들 대부분이 잠깐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중문화의 코드를 무차별적으로 도입하여 소설의 서사 자체에 대한 위기의식을 야기시켰다면, 성석제의 경우 고전문학의 전통적 이야기방식을 오늘날의 감각에 맞춰 소설의 이야기성을 환골탈태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 역시 엄밀히 말하자면, 소설의 서사를 갱신시켰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을 지니고 있다. 이야기의 흥미성과 소설이란 허구적 양식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과잉된 의식으로 인해 성석제 소설의 특장(特長)이랄 수 있는 "웃음은 여운이 오래 가지 않은 채 순간적으로 휘발되는 웃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웃고 난 다음에 남는 것은 텅 비어 있음이다. 그러면 또 다시 그 비어 있는 자리를 재빨리 채우기 위해 또 다른 표피적 웃음을 갈망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웃음의 소비, 그 가벼운 소비의 향연만이 연속된다."

그렇다. 내가 비판하는 지점은 다른 게 아니라 문학적 허무주의를 대중문화의 코드에 의해 형상화하든지, 세계의 가식적 허위를 조소하기 위해 요절복통할 웃음을 자아내는 소설이든지, 이들 소설이 자본주의의 한갓 문화상품으로 소비되는 현실이다. 악무한적 자본주의를 더욱 견고히 지탱시켜주는 물화된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 말이다. 하여 대중문화의 코드에 매몰되고, 무반성적으로 되풀이되는 표피적 웃음의 소비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항체 에너지를 소유한 소설의 서사는 요원하기만 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내포하게 된 데에는 "복잡다기하게 난마처럼 얽혀 있는 현실의 제반 문제점을 적확히 통찰하지 못하는 심미적 이성의 부박함"에 근원적 원인이 있다. '90년대 작가'의 대명사 격인 윤대녕과 신경숙의 경우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소설세계로 인해 90년대 소설 미학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는데, 그들의 소설에서 치명적 결함은 이미 확보한 자신들의 소설세계에 대한 치열한 자기갱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두 작가 모두 자본주의의 물신화 속에서 예술의 신묘한 아우라를 생성해내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달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여 그들의 소설에서는 저 도도하게 흘러가는 자본주의의 물살을 거슬러오르는 예술적 힘을 감지할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의 소설이 자기갱신력 없이 반복적으로 정태화된 소설쓰기에 고착화되어 있으며, 그러한 자동화된 글쓰기의 매너리즘에 푹 젖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의 소설적 화두를 끊임없이 되물으면서 그 화두로부터 제기된 소설적 과제를 다각도로 탐문하는 도정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존중의 대상은 막연히 어떤 것을 열심히 한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그 과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자신을 탁마하고 벼림으로써 자기성찰을 통해 결국 자기를 갱신하고자 하는 도정이다. 이것은 소설 한 편을 쓸 때마다 늘 초심으로 돌아가 팽팽한 소설적 긴장으로 창조의 불씨를 지피는 자세나 다름이 없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윤대녕과 신경숙에게 거는 기대감과 아쉬움의 편차는 크다. 이게 어디 이들 두 작가만의 문제이겠냐만, 나는 90년대 이후의 작가들에게 치열한 자기갱신의 글쓰기에 대한 비평적 열망을 다시 한번 품어본다.


3. 문학제도에 대한 메타비판적 의식이 결여된 소설 비평


우리 소설이 직면한 문제점을 돌이켜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할 게 비평의 문제점이다. 문학의 공기(公器)인 비평은 당대의 문학적 가치를 준엄한 비평적 가치 판단으로 평가함으로써 문학의 자정(自淨) 작용을 촉매하는 책무를 떠맡는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내가 앞서 언급한 1990년대 이후의 소설에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이러한 비평의 기능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지금도 이러한 문제점을 잉태한 비평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갖고 있다.


여기서 내가 제기하는 문제점을 다시 강조하면, 90년대의 작가로 '선택/배제'되는 가운데 작동되고 있는 비평의 권력과 문학제도의 관계 속에서 특정의 몇몇 작가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정작 90년대의 문학현상 속에서 다루어져야 할 작가를 괄호안에 넣어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변화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시대에 뒤처지 않으려는 욕망에 이끌려 자신들의 비평적 동반자-작가를 찾으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평가와 작가의 생산적 대화를 통한 행복한 만남이 아니라, 자신들의 비평적 입장을 재확인·재정비하는 일환으로 특정의 작가를 일방통행식으로 대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때문에 이러한 비평이 창작과 괴리된 채 비평의 나르시시즘에 탐닉됨으로써 우리의 문학은 점차 비평을 멀리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비평가만이 비평을 돌려읽고 자신들의 문학적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려는 편협한 인정투쟁이 난무한 게 90년대 비평의 치부가 아니었던가.


비평적 권력이 갖는 파행성에 대한 지적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문제가 오늘의 소설을 진단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점이 있다면, 비평이 비평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문화산업의 첨병으로 자리하면서 소설을 다른 문화상품과 마찬가지로 소비시키려는 상품미학의 발판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우리 소설의 외연적 확장에 비해 내면적 깊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언급한 바 무엇보다 우려되는 게 소설의 내면적 영혼의 미성숙을 전략화하는 글쓰기이며, 이것이 바로 변화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우리 소설의 임무라고 인식하는 작가들과 여기에 정합성을 부여하는 비평가들의 담론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현실이 부박하다보니, 그 현실에 적극적으로 응전하는 서사의 일환으로 이른바 '가벼움의 수사'를 전략적으로 채택한 게 바로 오늘의 소설이며, 따라서 이제 비평은 그러한 소설을 온갖 화려한 비평의 수사를 동원함으로써 예의 소설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상품미학을 그럴듯한 비평의 고급스런 담론을 통해 더욱 견고히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최근에 이러한 비평의 파행성을 신물나게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지난 해 새천년의 벽두부터 제기된 이상문학상 수상에 따라 불거진 문제는, 단순히 그 문학상 수상과 관련된 해당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상문학상을 운영해오던 출판사와 관련된 복잡다변한 상황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현실이다(출판사의 명예훼손에 따른 법정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미 여러 지면에서 이상문학상 수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있어왔기에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면, 이상문학상의 공정한 심사 절차의 문제이다. 특히 이상문학상 심사에 참여한 비평가의 비평적 판단의 준거틀에 대한 불신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어떠한 종류의 문학상이든지 그 문학상의 수상은 분명한 수상 기준과 그에 합당한 소설 미학의 가치를 두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는 물론, 문학상을 수여한 출판사 역시 정당성을 보증받는다. 여기서 문학상 수상을 선정하는 비평적 판단은 냉정하고 준엄해야 한다. 출판자본의 논리와 영합해서는 금물이다. 비평이 비평으로 남기 위해서는 이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진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로서는 이상문학상을 통해 지금까지 무반성적으로 실행해오던 문학상 제도 자체뿐만 아니라 비평가의 올바른 비평적 책무에 대한 값진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할까.

그런데 이상문학상으로 촉발된 문학상 제도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봉합되지는 않았다. 이어서 동인문학상을 둘러싸고 제기된 문학권력 논쟁은 문학상과 문학권력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요구하였다. 요즘 사회적 아젠다로 설정되어 가히 전방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언론개혁의 맥락에서, 특정 거대언론이 문학과 유착하여 문학을 향한 문화권력을 확장시키려는 음험한 의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게 비평의 파행성이다. 물론 동인문학상과 관련된 문제는 이상문학상과 변별된다. 동인문학상의 경우는 무엇보다 동인문학상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이 지배적인 것으로, 동인문학상을 주관하는 조선일보의 문화권력에 대한 비판을 겨냥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학상 제도를 응당 승인하는 게 아니라 그 문학상 제도에 대한 메타비판적 의식을 병행하며, 문학상에 걸맞는 작가를 선정해야 할 이중의 비평적 임무가 부연된다.

지금까지는 이상문학상의 문제에서 살펴보았듯이, 해당 문학상에 적합한 비평의 판단 기준에 역점을 두었으나, 앞으로는 좀더 근원적인 문제시각에 의해 문학상 제도 자체에 대한 메타비평적 의식을 병진해야 될 과제가 제기된다. 과연, 해당 문학상이 소설의 토양을 기름지게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면밀한 문제의식을 지녀야 된다는 말이다. 하여 그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와 작품이 문학상 제도 자체가 지닌 불온성으로 인해 추문에 시달려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적어도 아직까지는 문학상을 수여하는 주체 측과 문학상 심사에 참여하는 심사위원, 특히 비평가의 역할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 길지 않은 우리의 근현대문학사를 들여다보면, 문학의 제도 자체에 대한 메타비판적 의식의 전통이 깊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 비평사의 경우 작가와 작품의 세계관과 미학성에 대한 크고 작은 논쟁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축적되어 있으나, 작가와 작품의 존립 기반 자체에 대한 이렇다할 논의는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다른 자리에서 상세한 논의 과정을 밟아야겠지만, 우리의 근대 소설적 토양이 서구와 달리 자생적 근대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소설의 양식을 지배하는 부르조아지의 삶마저 식민지의 억압 속에서 굴절된 삶의 양식을 누릴 수밖에 없는 것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파행적 근대화의 과정을 밟으며, 서구의 근대적 삶의 모델을 추구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근대성에 대한 자기성찰이 치열하지 못하였다. 근대적 삶을 이루는 제반 제도에 대해서는 암묵적인 묵인 아래 근대의 패러다임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자족하였던 셈이다. 이것은 소설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근대적 삶의 다양한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소설도 역시 소설이 쓰여지고 읽혀지는 소설을 둘러싼 문학 제도 자체에 대한 근원적 성찰은 치열하지 못하였다.

내가 이처럼 문학 제도를 향한 메타비판적 의식을 강조하는 데에는, 이제 더 이상 소설은 작가와 작품 혹은 독자의 몫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물적 토대와 관계를 맺는 제도의 총체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자기갱신은 결국 소설을 둘러싼 문학 제도의 자기갱신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좋은 소설을 발표하고 그에 대한 훌륭한 비평이 존재하고, 또 독자가 이러한 소설을 사랑한다할지라도 소설의 생산·유통·소비의 메커니즘 자체가 뒤틀려 있다면, 결국 파행적 문학 제도의 성장을 수수방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하여 나는 소설의 안과 바깥을 동시에 내다볼 수 있는 비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작금의 소설의 문제는 비평가에게 더 힘든 과제를 안겨다 준다. 문학 제도에 대한 메타비평적 의식은 자칫하면 비평이 자랄 수 있는 문학 자체를 황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살을 깎아먹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층 더 메타비평적 의식이 요구되는지 모른다. 곪은 환부를 그대로 방치한 채 죽음으로 치닫게 할 암으로 전이되기 전에 환부를 도려내는 뼈아픈 고통을 견뎌내면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감도는 살이 움트도록 비평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떠올려볼 때면, 지금-여기에서 비평이 백가쟁명(百家爭鳴) 식의 해설 위주의 비평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적 성찰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식의 지도비평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90년대 이후의 비평은 개별 작품의 미세한 접근을 통해 미학적 측면을 해석하는 데 일관되고 있을 뿐, 작품과 세계의 맺는 관계에 대한 거시적 접근 시각을 보인 비평은 많지 않다. 지도비평 혹은 입법자로서의 비평이 보인 문제점을 망각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예의 비평이 지닌 생산적 계기마저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나는 소설의 안과 밖을 아우르는 비평에 요구되는 것은, 소설과 세계의 관계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면서 소설을 해석하는 것으로 자족할 게 아니라 소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비평의 에토스이다. 그렇다고 나는 작품에 대한 꼼꼼한 글읽기를 무시하자는 게 결코 아니다. 비평의 기본이 작품에 대한 정치한 글읽기를 통해 그 작품만이 지닌 독특한 미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작가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또 다른 텍스트를 생성해내는 것이야말로 비평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역할임에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경계하는 바는 이러한 글읽기가 빠지는 미적 자율성의 함정이다. 텍스트의 정치성을 몰각한 심미적 비평의 귀결처가 어딘지는 명약관화하다. 텍스트의 자족적 세계에 갇혀 있게 되며, 텍스트의 오밀조밀한 미로에서 정처없이 헤매일 뿐이다. 그러한 비평이 비평만의 독립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문학의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은 찾을 수 없다. 게다가 그러한 비평은 아기자기한 매혹은 있을지 모르나, 비평의 끝자락에 남고 마는 것은 고급스럽고 현란한 언어 유희에 농락당한 채 텅 비어 있는 실존적 허무감만이 엄습해올 뿐이다. 다소 거칠고 투박하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적 성찰을 보이는 비평은 삶과 현실에 대한 맹목적 지성이 아니라 반성적 지성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 소설에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평이 아닐까.


4. 소설의 새로운 돌파구, 신명나는 삶의 유토피아


이제 우리의 소설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될 것이다. 소설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소설의 내면적 영혼의 깊이를 확보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몇 가지를 덧붙인다면, 우선 소설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 중 하나로, 시에서는 생태계 문제를 다룬 작품이 지속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반면, 소설에서는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 앞으로 우리 소설은 생태계 문제에도 서사적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생태계 문제는 중요한 삶의 관심사이며, 더욱이 생태계의 파괴를 야기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서사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지 않은가. 소설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이견을 가질 자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떠한 영역으로 확장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확장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온갖 대중문화의 코드를 난삽하게 수용하는 데 관심을 둘 게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우리의 삶을 본질적으로 위협하는 생태계 문제에 대한 계몽과 성찰을 동반한 작품을 모색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대안 문명을 형상적으로 사유했으면 한다.

다음으로 내가 근래 주목하는 바는 젊은 작가들 못지 않게 왕성한 창작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중견 작가들의 작품 세계이다. 그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노년기의 삶에 대한 통찰은 파란만장한 역사적 질곡의 터널을 통과해온 노년의 시선으로 삶을 지혜롭게 투시하는 혜안을 보여준다. 흔히들 90년대 이후의 소설을 언급할 때마다 중견 작가들의 작품은 일단 뒤로 미루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사실 중견 작가들의 작품에서 우리 소설의 외연은 확장되고, 내면적 영혼의 깊이는 웅숭깊어지고 있다. 세대간의 단절이 공공연히 표방되는 요즘, 젊은 세대의 작가와 중견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서사가 교감을 나누면서 소설의 넓이와 깊이를 두루 갖추었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소설의 창작에 대한 전기를 마련해달라는 요구이다. 다음으로 내가 제안하고 싶은 바는 이제 소설가도 작품평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시에서는 시인들이 주체적으로 {시평}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들 시에 대한 비평적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시인들의 이러한 비평 작업은 무엇보다 시를 생산하는 입장에서 자신들 시에 대한 비평을 직접 함으로써 시의 자기갱신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여기에는 시인들이 요즘 시 비평에 대한 불신감이 무의식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나는 시인들의 이러한 비평 작업을 지켜보면서, '아, 시는 비평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저 스스로 부단히 갱신하고자 몸살을 앓고 있구나, 아름다운 모습이구나!'하고 생각해온 터였다. 그러면서 소설을 향한 씁쓸한 심정을 지워낼 수 없었다. 소설가의 자기갱신의 노력은 어떠한가. 소설 창작과 비평이 화해할 수 없는 평행선은 무한궤도로 달리고 있는바, 비평을 존중하기는커녕 박대하고 무시하는 풍토 속에서 소설은 {시평}과 같은 몸짓을 하고 있기는 한가. 이제는 소설가 개인의 자구책으로 돌려서는 무책임한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들 역시 자신의 소설을 위해, 소설의 자기갱신을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비평 작업에 동참해야 될 것이다. 직접 비평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비평가의 비평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해 창작과 비평이 행복하게 만나는 자리를 가져야 되지 않을까. 우리의 소설사와 비평사는 창작과 비평이 논쟁의 과정을 통해 성숙한 토대를 마련한 전통을 축적시켜왔다. 창작과 비평이 나뉘어 서로의 영역을 배타적으로 고수할 게 아니라 한데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생산적 자극이 되는 상생(相生)의 관계를 모색해야 될 것이다. 창작과 비평은 동고동락을 함께하는 공동 운명을 지니지 않았던가 말이다.

소설의 갱신은 요원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주위를 돌아보라. 나날이 새로운 이야기거리는 그야말로 폭증하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낡고 헌부대에 담을 수는 없다. 새로운 부대를 준비하여 담되, 설익은 이야기를 꺼내지 말고, 푹 익을 대로 익은 이야기를 풀어놓자. 하여 그 이야기의 깊고 그윽한 맛에 흠뻑 취해 신명나는 삶을 향한 유토피아의 꿈길을 거닐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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