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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산문/시인의 책 읽기-아주 오래된 사진, 줄리언 그린의 {모이라}/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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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상미
댓글 0건 조회 4,253회 작성일 02-06-14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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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시인의 책 읽기
김상미


아주 오래된 사진, 줄리언 그린의 {모이라}


한 청년이 있었다. 붉은 머리의 열여덞 살 청년, 조셉 데이. 아직도 내 오랜 사진첩 속에 꽂혀 있는 청년.

미국 북부의 아주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신약 성서}를 희랍어로 읽고 싶어 남부의 한 대학으로 진학했던 청년. 푸른 계곡 사이에 잠든 남부의 작은 도시, 그 오래된 건물 사이로 빛나는 하얀 기둥의 전통과 편견을 지닌…… 그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껴안고 싶어…… 마음껏 몸과 영혼을 펼치려 했던 한 청년, 조셉 데이.

나는 그를 줄리언 그린의 소설 "모이라"에서 만났다. 그와 같은 나이쯤에 읽었던 소설, {모이라}. 아직도 내 마음의 청춘 한 귀퉁이에 남아 이따금 나를 아프게 만드는 소설, {모이라}.

"극도의 순수함은 천국과 지옥에만 있다"는 생 프랑스와 드 살의 말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극도의 순결함과 신의 사랑 속에서 자라온 한 광신적인 청교도 청년이, 북부의 구릉지대와는 다른 남부의 문화 속에 섞이면서 겪게 되는 천국과 지옥의 처절한 싸움!

그게 소설 {모이라}의 이야기이다. {모이라}는 아일랜드 어로 '마리아'를 뜻하며 희랍어로는 '운명'을 뜻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선 조셉 데이의 손에 죽는 한 여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화장한 얼굴에 꼭 끼는 옷을 입고, 술과 담배를 즐기며, 붉은 보라색 기가 돌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광대뼈가 나오고 양 볼이 평평한, 바다 색의 커다란 눈, 꽃밖에는 연상할 수 없는 강렬한 윤곽을 드러내는 새빨간 입술, 반쯤 비웃듯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러면서도 작고 가냘프고 날씬한 소녀, 모이라.

조셉 데이조차도 처음 모이라와 마주했을 때 "그녀는 내가 상상했던 여자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예쁘다'라고 생각하는 여자와도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보다 더 유혹적이고 그보다 더 매력적이다" 라고 느낄 정도로 남의 시선을 끄는 모이라의 특별한(섹시한) 외모. 그런 모이라와 조셉 데이는 소설 첫 머리에서부터 운명적으로 얽힌다. 모이라는 조셉이 남부로 와 처음 하숙을 하게 되는 집주인 데어 부인의 양녀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모이라가 묶던 방에 조셉이 묶게 된다. 처음 그 방에 들어섰을 때 침대 머리맡에 떨어뜨리고 간 모이라의 담배 갑. 그 때문에 조셉의 머리 속엔 '모이라'라는 한 여성(관능에의 욕구)이 자리잡게 된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다 새하얀 얼굴, 감정의 변화가 섬세하게 드러나는 표정, 건장한 체격, 처녀처럼 순결해 보이는 분위기, 거기다 육감적인 입술…… 금발의 오스카 와일드가 붉은 머리가 되어 나타난 모습과 비슷한 조셉 데이의 외모 또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학생들.

그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온갖 노력을 기울리는 조셉 데이…… 그러다 결국 살인에까지 이르르는 조셉 데이…….

그 중 시몬이란 친구는 조셉 데이에게 동성애에 가까운 사랑을 느끼다,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해 버린다. 어렴풋이 그 죽음에 자신의 냉담함이 한몫 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만, 애써 외면하는 조셉 데이.

"너에겐 살인자의 기질이 있어"라고 외치는 프렐로. 끊임없이 그에게 관능에 대해 말하는 킬리그루. 그리고 조셉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데이비드. 유복한 가정에서 잘 자란 청년. 언제나 예의바르고 따뜻하고 조용한 데이비드. 조셉은 그에게서 많은 도움과 위안을 받지만 그는 조셉이 느끼는 만큼 외부 세계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신과 관계없는 것들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나 조셉은 데이비드처럼 되지 않는다. 조그만 죄악도 그냥 넘어 가지지가 않는다. 학생들이 주말이면 시내로 나가 술을 마시고 더러는 창녀의 집을 찾는다는 것에 대해 조셉이 느끼는 불같은 혐오와 분노. 조셉의 눈에는 모든 게 다 죄악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다가도 거기에 나오는 남녀간의 사랑 장면에 경악하여 세익스피어 강의를 듣지 않으려 할 정도로 조셉의 신앙은 극단적이다. 그는 오로지 성덕을 향한 상승에만 높은 가치를 둔다. 그럼에도 청춘의 본능이 계속해서 그를 유혹한다. 하숙집 하녀가 "모이라 아가씨가 이 방을 썼을 때는, 침대가 거의 방 한가운데, 좀 비스듬히 있었어요"라고 말하자, 그 역시 침대를 방 한가운데로 끌어 벽난로와 문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비스듬히 놓이게끔 한다. 그런 그 자신에 깜짝 놀라면서도.

그렇게 조셉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극과 극을 달리면서 하나님에의 사랑과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 사이에서 좌절하며 곤두박질치거나 담금질당한다. 그때마다 그의 뜨겁고 깊은 신앙심은 매 순간순간 극렬하게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를 분노와 공포에 떨게 한다. 그럴수록 본능적 욕구는 더 큰 유혹으로 다가와 그를 더욱 괴롭힌다.

그런 조셉을 데이비드는 자신의 방 옆으로 이사오게 한다. 데어 부인 집과는 정반대로 수도원 같이 엄숙한 퍼거슨 부인 집으로.

퍼거슨 부인 집으로 하숙을 옮긴 조셉은 자신이 있던 데어 부인 집의 그 방에 모이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녀를 보고 싶은 욕구에 자신이 두고 온 스웨터를 찾으러 간다. 그곳에서 자신이 상상했던 여자와는 너무 다른 모이라를 보고는 조셉은 도망치듯 스웨터를 가지고 나온다. "당신, 꼬락서니가 우스워요" 하며 깔깔대는 모이라에게 분노하며. 게다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라고까지 느꼈던 데이비드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말에 깊은 상처를 입는 조셉.


조셉이 어떤 여자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외모를 가지고도 너무나 도덕가연하며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자, 학생들은 서로 공모하여 조셉의 방으로 모이라를 밀어 넣는다. 모이라라면 조셉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으며, 모이라 역시 도통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조셉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던 터라 자진해서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경직된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책상 위의 책에만 눈길을 주는 조셉에게 오히려 사랑과 연민을 느끼는 모이라.

"조셉 데이, 내가 졌어요" 하며 나가려는 모이라에게 깜짝 놀라 주춤거리다 자신도 모르게 모이라를 범하는 조셉…….


이처럼 끊임없이 조셉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능적 투쟁은 신의 침묵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신이 영적인 존재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되면 악을 도발하게 되고 그 비위를 거슬리게 된다. 왜냐하면 신의 의도에 끊임없이 대항하며 싸우는 악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조셉이 성덕의 위험을 혼자 무릅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유혹을 경험하는 것이다. 게다가 性의 영역은 결코 물질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육체의 모든 잘못에는 영적인 것이 있고, 영적인 모든 잘못에는 육체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셉과 모이라는 한 사람의 동일인물인 것이다. 영혼과 육체! 육적인 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영적인 곳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조셉이 그토록 원하던 모이라를 취한 후, 그녀를 죽이는 것 역시 영적인 문제인 것이다. 조셉을 끊임없이 괴롭힌 육체적 유혹은 결국 성덕의 내기인 셈이며, 하여 조셉이 하나님의 부름을 확신한 그 순간에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모이라가 그를 유혹하기 위해 찾아 왔을 때 그는 꼼짝 않고 그 유혹과 싸운다. 그리고 그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자신의 의지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자신을 이겨내고 있다고 믿기에 이른다. 이 장면 동안 그는 기계적으로 세익스피어의 {오델로}를 읽는데-바로 데스데모나를 목 조르는 장면이다-그 당시는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로 생각하지만, 그의 잠재 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 나중에 모이라의 살해를 유발하게 만든다. 세익스피어 속에 나오는 성적인 부분들을 애써 외면했지만 오히려 그 집념이 세익스피어의 비극의 영상들과 섞여 그의 내부에서 팽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육체가 모이라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모이라가 가겠다고 하자 순간적으로 소스라쳐 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이라의 체온이 그의 몸에 닿자마자 사건이 터지게 되는 것이다. 깊숙이 억눌려 있던 의지가 일단 타격을 입게 되면 추락이 숙명의 힘을 빌어 우리를 유혹하는 데는 일순간인 것이다.

여기에 소설 제목인 "모이라"의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신에 대한 조셉의 지나친 사랑이 그를 살인자로 만든 이 운명적인 힘과 맞먹게 되는 것처럼.


조셉은 모이라를 통해 해방되기를 바랐으나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한다. 모든 것이 끝장인 것처럼 보일 때, 그러나 그에겐 다른 것이 허락된다. 조셉은 모이라를 살해한 후, 프렐로가 제안한 것처럼 도망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수하기를 택하고 길 끝에서 기다리는 형사를 향해 걸어간다. 그는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함정에 빠져 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와 영혼의 이중 이야기는 조셉 개인의 내부 이야기면서 동시에 조셉과 타인들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타인들은 조셉의 감정을 끊임없이 움직여 동요케 함으로써 조셉과 연결되어 있으며, 조셉은 이들을 구원하려는 끈질긴 욕망에 의해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조셉과의 관계에서 그를 돕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데이비드는 우정과 충고와 돈으로 조셉을 도와주지만 결국 그에게 범죄를 가능케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프렐로 역시 끝에 와 그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그가 제공한 호의는 세속적 차원에서의 구원일 뿐, 영적인 면에서는 조셉의 파멸인 것이다. 킬리그루 역시 학생들의 음모를 그에게 알려주지만 어떻게 방비해 볼 수 있는 대안을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조셉의 운명적 비극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붉은 머리칼처럼.

그가 데이비드를 향해 "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늘 내 속에 지니고 있어. 분노의 하나님. 난 욕망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격렬하게 밖에는 사랑할 수 없어. 그래서 난 은총을 잃을 위험이 더 크고, 어떤 점에서는 결코 그렇지 못한 너에 비해서 지옥에 더 가까이 있어. 넌 지옥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난 알고 있어. 불이 무엇인지를 난 알고 있으니까. 불은 내 고향이야."라고 고백할 때 이미 그의 둘레엔 그의 오만한 순수성으로 인한 지옥이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 "모이라"는 줄리언 그린의 자전소설로도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혈통의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줄리언 그린은 본래 신교도였으나 16세에 가톨릭으로 개종, 수도사를 지망하다, 20세쯤 신앙을 포기하고 불가지론자가 되어 오랜 시간 방황하다 40세에 다시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그의 문학엔 이러한 정신적 편력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의혹과 불안, 고통 등이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운명을 만들어 주고 삶의 배경을 구성해 주는가를 {모이라} 외의 작품에서도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 내부에 잠복해 있던 악의 돌연한 폭발이 어떻게 서로를 쫓고 서로를 물리게 하는 가를.

{모이라} 역시 겹겹으로 출구가 막혀 있는 평범하고 잔인한 작은 세계 속에 갇혀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고뇌와 고독,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려는 욕망을 그린 작품이다. 자기 자신조차도 하나의 감옥이 되는 세계, 결국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살인'이란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조셉. 줄리언 그린이 말하고 싶은 것도 '진정한 자유란 없는 것이며, 그것을 취하기 위해선 엄청난 희생을 치르지 않고선 아무도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모이라"는 내 청춘의 분신처럼 아직도 내 가슴 한 귀퉁이에 남아 나를 아프게 한다. 그러나 그 아픔은 내게 어떤 교훈을 주거나 충고를 하거나 살아가는데 힘을 주거나 하는 그런 아픔은 아니다. 나는 한번도 조셉이 모이라를 살해한 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다. {모이라}는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며, 살면서 내가 깨달아 가는 삶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이라}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저쪽…… 어딘가에 알 수 없는 그리움처럼, 모호함처럼 남아, 아마 끝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추천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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