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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기획특집/창간기념 지상대담/고명철, 이경림, 맹문재,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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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기획특집-창간기념 지상대담
대담자: 고명철, 이경림, 맹문재, 김남석,
질의1-새 천년의 문턱으로 들어선 지금-여기에서 우리 문학 혹은 문화가 놓여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공통적 질의)
질의2-{리토피아}의 창간사에서도 분명히 언급했듯이, {리토피아}는 "점점 현실과 유리되거나 현실에 순응함으로써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화려한 말의 수사학이 아니라, 튼실히 여문 알맹이의 진실된 언어로 유토피아를 향한 꿈꾸기의 욕망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현단계에서 이러한 언어의 유토피아 건설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공통적 질의)
질의3-2번의 질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이 전념하고 있는 글쓰기와 결부시켜보았을 때,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고명철-비평, 김남석-영화, 연극, 맹문재-시, 이경림-시)
질의4-현대는 디지털 혁명으로 정보화시대의 한복판에 놓여 있으며, 거의 모든 일상사가 인터넷과 유리되어서는 곤란한 실정입니다. 지난 해에는 인터넷 가상공간에서의 문학세미나도 주기적으로 열린 바 있으며, 김수영 시를 중심으로 한 하이퍼텍스트 실험도 있었습니다. 이 역시 변화되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문학(문화)의 유토피아를 향한 몸짓으로 생각됩니다. 정보화 시대와 인터넷과 관련된 문학(문화)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공통적 질의, 각자 관심을 두고 있는 영역을 중심으로)
질의5-모든 언어 활동이 궁극적으로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으로 수렴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리토피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획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내는 노력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고명철 씨와 맹문재 씨는 문예지를 편집하는 데 직접 참여해왔습니다. 현단계 문예지를 통한 이러한 기획의 가능성과, 지금까지 여타 문예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해본다면?(고명철, 맹문재)
질의6-90년대 이후 문화의 큰 변화는 영상문화의 폭증입니다. 특히 한국영화의 팽창이 가시적인데, 한국영화의 양적·질적 팽창이 영상문화의 유토피아와 갖는 관계에 대한 생각은?(김남석)
질의7-90년대 이후 달라진 문학 환경 중 하나는 서울 중심의 중앙집중적 문학에서 벗어나려는 지역의 활발한 움직입니다. 이경림 씨는 인천지역에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새롭게 모색되는 문학의 유토피아는 탈중심의 문학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이경림)
질의8-끝으로 {리토피아}와 {리토피아}의 독자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공통적 질의)
질의1-새 천년의 문턱으로 들어선 지금-여기에서 우리 문학 혹은 문화가 놓여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고명철 : 새로운 세기의 전환기에 즈음하면, 다른 분야도 그렇듯이 문학도 혼돈의 터널을 통과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회한과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한 설레임이 교차하면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으니까요. 문학도 사람 살이의 하나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듯이, 90년대 이후 나라 안팎으로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는 세계화의 광풍(狂風) 속에서 문학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될 것 같습니다. 이미 인문사회과학의 여러 방면에서 세계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성찰을 보여주었습니다만, 제가 또 다시 이 문제를 언급하는 데에는, 인간의 구체적 삶에 기반한 형상성을 통해 삶과 현실을 응시하고, 반성적으로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게 바로 문학 본연의 역할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상식적인 생각이 전도되고 있는 게 작금의 문학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유년시절부터 영상문화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진 영상세대가 문화의 주된 담당자층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영상문화의 활황이 직간접적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영상세대의 새로운 현실 감각을 전혀 도외시할 수 없는 것 또한 문학이 새롭게 당면한 과제이니까요. 문제는 문학이 이러한 과제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대응해나가느냐, 하는 문제인데요. 90년대 이후 젊은 신세대 작가군의 소설을 조금만 눈여겨 읽어본다면 알 수 있지만,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지녔다고 하는 작가의 작품에서 대부분 감지할 수 있는 게 바로 영상문화의 코드를 아무런 반성 없이 차용하고 있습니다. 굳이 문학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인데, 다만 인쇄매체의 질료인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상문화와 변별될 수 있을 뿐이죠. 이렇게 말한다면, 혹자는 저를 시대에 역행하는 퇴영적 감수성을 가진 비평가라고 몰아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비평과전망}(2호, 2000)의 [같은 세대 작가에게 던지는, 한 비평가의 전언-70년대생 소설의 풍향계]란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90년대의 복판을 가로지른 "우리세대의 정당성과 타당성이 보증되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미시적 접근과 거시적 접근을, 각각 씨줄과 날줄로 하여 한땀한땀 촘촘히 짜인 창작의 그물을 만들"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저와 동세대의 작가에게 애정어린 비판의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혼돈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여기에서 미래의 문학을 짊어질 저의 세대 작가들이 자신들이 직면한 구체적 삶에 근거한 살아숨쉬는 문학에 치열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경림 : 안녕하세요? 우선 리토피아의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창간 대담에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새천년이 되었다고 우리 문학이나 문화가 문득 다른 어떤 코드로 돌아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이 새천년이라는 당연한 시간대 위에 희망을 걸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지금 우리가 기대고 있는 시대 속의 문학이나 문화가 무언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지금까지 문화라고 일컬을 만한 변변한 것들이 있었나 묻고싶습니다. 특히 문학 쪽에서는 아직도 너무나 보수적이고 제도적(?)이라고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아무튼 아직도 우리 문학은 한마디로 진정으로 열려있지 않다는 인상입니다. 아방가르트나 아나키같은(어쩌면 장차 우리 문화를 끌고갈 지도 모르는, 하지만 지금은 낯선 것들)에 대하여 너무 인색한 것같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어떤 역사도 그 당시 현실에서 보면 낯설었던 것들에 의해 발전되고 이끌려오지 않았습니까?
맹문재 : 1990년대 이후 문학의 위기 또는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저도 동감합니다. 문학의 위기에 대한 얘기들은 대체로 전자매체나 영상매체의 확장으로 인해 활자매체인 문학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자매체나 영상매체의 급속한 확장에 따라 독자들이 활자매체인 책을 읽지 않는다거나 본격문학보다 질이 담보되지 않은 대중문학이 판을 친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러한 진단이 틀린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의 위기를 외부적 현상으로만 진단할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으로도 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문학 역할이 거대하게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흐름에 대항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인식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본의 잣대로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자본의 잣대로는 악을 선이라고 하고, 허위를 진실이라고 하고, 폭군을 휴머니스트라고 하고, 공해를 업적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가치가 전도되고 있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문학은 저항하지 못하고 눈치나 보거나 오히려 야합하고 있으니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학이 인간 주체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자기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이 세계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으니, 저 역시 문학의 위기를 말합니다.
김남석 : 현실은 〈나〉, 〈너〉, 〈우리〉의 삶이 얼크러진 동시대적 토대를 일컫는 말일겁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자아〉와 〈타자〉와 〈사회〉가 공존하는 시공간적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외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강제적인 것처럼 보이고, 편리하게 도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부차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주류적 문학과 문화 내에서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명제가 받아들여졌고 적극적인 대응을 모색하려는 성향이 우세했습니다. 현실의 내부적 층위로 말하면, 〈우리〉의 모습이 강조되었다고 할까요. 9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명제와 성향이 지각 변동을 일으킵니다. 이제 우리에게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졌습니다. 우리 문학과 문화의 중심은 자꾸만 〈나〉로 흘러들고, 〈너〉나 〈우리〉는 온갖 이유를 붙여서 뒤로 옆으로 미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욕망이니, 성이니, 몸이니, 주체니 하는 관심의 항목들은, 넓게 이야기해서, 〈나〉의 주변을 맴도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7, 80년대 문화적 주류와 비교하는 입장에서 보면, 문학과 문화의 거시적 지평 옆에 세부적이고 미시적인 층위를 생성시키려는 대안적 노력으로 읽혀질 수도 있습니다. 넓게 개척된 〈우리〉라는 정원 안에, 이제 〈나〉라는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우리〉만큼 〈나〉도 소중한 것이니까, 이 작업은 일단 소중합니다. 하지만 〈나〉만 중시할 뿐이고, 이러한 〈나〉의 중시도 결국에는 〈너〉나 〈우리〉를 두루 살펴야한다는 당위성과 근본적 필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면, 현실의 층위를 〈나〉로 국한시킴으로써, 복잡한 층위의 현실에서 발빠르게 빠져나가려는 무의식적 회피 의지의 확산인 듯 싶습니다. 따라서 90년대 이후의 현실은 〈나〉를 중심으로 입체화된 듯 하지만 이것은 외형에 불과하고, 도피와 외면의 수단이 되어 결국에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러한 의식의 팽배가 〈우리 문학 혹은 문화가 놓여 있는 현실〉의 산적한 문제입니다.
질의2-{리토피아}의 창간사에서도 분명히 언급했듯이, {리토피아}는 "점점 현실과 유리되거나 현실에 순응함으로써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화려한 말의 수사학이 아니라, 튼실히 여문 알맹이의 진실된 언어로 유토피아를 향한 꿈꾸기의 욕망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현단계에서 이러한 언어의 유토피아 건설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고명철 : 정말, 말이 많은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90년대 이후 우리의 삶 전반적으로 확대된 (비록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는, 80년대와 다른 말의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억압적 감시체제인 80년대와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아직도 우리는 억압적 감시체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90년대 이후의 삶은 오히려 억압적 감시체제가 더욱 교묘히 우리의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는만큼 우리는 어느새 억압을 억압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세계화란 미명 아래 전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우리의 사소한 일상성마저 정교하게 관리·통제·억압하고 있으니까요.
다소 비현실적인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언어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곧 '삶의 유토피아'를 실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유리된 언어가 존재하지 않듯이, 언어의 유토피아와 삶의 유토피아는 서로 쌍생아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언어의 유토피아 실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음험한 억압적 감시체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언급하였습니다만, 이 억압적 감시체제는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억압이라고 인식되지도 않습니다. 개인의 삶에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의 물화된 욕망에 탐닉할 때만 허락되는 자유와 해방입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물화된 욕망은 마치 밑빠진 항아리처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보니, 어느덧 우리는 예의 욕망의 노예로 자연스럽게 전락해버린다고 할까요. 그러다보니, 우리의 언어는 이러한 악무한적 자본주의 물적 욕망의 노예가 내지르는 언어가 될 수밖에 없죠. 이러한 노예의 상태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예는 주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냉철하게 응시하고 성찰의 과정을 거친 후 주인의 지위에 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본주의의 물적 욕망의 노예는 이러한 주인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한 노예의 주체적 의지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언어의 유토피아 실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함니다.
이경림 : 글쎄요, 언어의 유토피아라…… 과연 그런 것이 있을까요? 오히려 언어의 유토피아보다는 문학의 유토피아, 혹은 문학적 모색의 유토피아(?)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사실 저는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문학적 용어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학, 혹은 예술은 오히려 그 반대에 있을 때 성숙되고 진지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유토피아라는 말이 꼭 필요하다면 문학의 어떤 방법적 표현도 진지하게 이해되고 용납되는,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라는 의미와 같이 놓을 수 있겠네요. 그러고 보니 말의 유토피아라는 뜻도 좋게 해석하면 주체(권력)의 반대편에 서있는 타자(약자)들의 말이 존중되고 즐겁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문화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네요. 이야기가 다른데로 흘렀는데 그런 유토피아의 건설에 걸림돌이되는 것이라면 역시 제도권 안에 있는 가진자들의 사고의 진부성, 그것으로 인한 약자들의 피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어느 시대나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속담처럼 그저 약자들의 머릿속에서만 부글거리다 사라지는 것 아니겠어요?
맹문재 : 일찍이 마르크스가 자기 소외라는 개념으로 자본주의를 해석했듯이, 이미 우리 사회는 화폐로부터 지배받는 것을 넘어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파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는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이나 작가들은 창작에 있어서 작품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수단으로 여기고 있고, 그 때문에 창작 과정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독자들 역시 작품을 진정한 인간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에 책 읽는 과정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문학에서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는 작가와 독자가 연대해서 보다 인간다운 삶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서 비인간적인 제도와 규범과 가치들에 대해서 대항하고 싸우는 것인데, 연대의 장(場)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불행이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시인이나 작가들은 무엇보다도 진실한 자기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진실한 자기 고민과 갈등, 절망 그러면서도 희망을 보여줄 때 독자들은 동의하고 동참할 것입니다. 진실한 고민은 의당 사회적 존재로 체득한 언어를 수반합니다. 이러한 언어가 인간적인 언어이고 진실한 언어일 것입니다.
김남석 : 〈언어의 유토피아에 걸림돌〉은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을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각의 부족과 포기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현실을 올곧게 바라보거나 종합해서 판단하는데 실패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것은 현실의 속성과 일차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현실은 무수한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신비녀이나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야생마와 흡사합니다. 그 실체를 감지하기도 어렵고 편안하게 승차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만큼 현실은 복잡다기하고 애매모호하고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인식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일정한 용량과 한계와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면모와 급격한 변화 속도를 담지한 현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 용량과 한계와 규칙이 일단 문제됩니다. 둥근 지구를 평면 지도에 옮길 때처럼, 왜곡과 변형은 불가피합니다. 면적이 일치하면 방향이 안 맞고 방향을 맞추면 거리가 달라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지요. 다시 말해서 현실은, 일사분란하고 논리정연하며 확고부동한 인식틀의 접근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그러니 관념적으로 현실을 인지하려는 노력은 포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포기 이후의 행동 방식은 대략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누군가가 정리해낸 방식을 빌어 현실을 그 방식에 맞게 재단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예 포기하고 나만의 영토로 들어가 편협한 강령과 내규로 자신만의 영토를 구획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문학과 문화적 상황을 장악한 현실 인식 방식은 이 두 가지 태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문학과 문화를 진단하는 책무를 지닌 사람들은 전자의 입장에 치우쳐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방식일지라도 어떻게 해서든 현실을 재단해내려는 경향이 우세한 것 같습니다. 창작과 공연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후자의 입장에 경도되어 거대한 현실에 대한 조망을 지레 포기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은거해버립니다. 이러한 문제적 상황이 우리 문학과 문화가 처한 현실이고, 〈언어의 유토피아〉가 대안으로 제시되어야 할 지점일겁니다 .
질의3-2번의 질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이 전념하고 있는 글쓰기와 결부시켜보았을 때,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고명철 :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저는 지난해 문학 안팎의 뜨거운 감자였던 문학권력 논쟁을 떠올려봅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관행화된 문단내의 암묵적 지배권력과 상징권력의 실체를 적시해내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권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비평의 자기정체성과 비평적 에콜의 생산적 측면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판단됩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되는 바는 이 문학권력 논쟁에 직접 가담한 당사자는 물론, 이 논쟁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비평가들이 대단히 음험한 시각으로 이 논쟁의 가치와 의미를 폄하하려는 시각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문학엄숙주의라는 자장권 안에 붙들린 채 '권력'이라는 어휘에 대한 일종의 생득적 거부 심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하면, 으레 현실정치권의 정치권력을 상기하다보니, 현실정치권의 그 오염된 '권력'을 문학과 연계시키는 데 대한 문학적 순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까요. 차라리 그렇다면, 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문학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비평이라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그래서 부패한 악취에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가고 있는 비평적 에콜이 자신이 소유한 파행적 문학권력에 대한 냉철하면서 준엄한 각성 없이,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 타자에게 가하는 냉소와 침묵, 혹은 치고빠지기 전술의 비평적 대응은, 현실을 몰각한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언어의 유토피아, 비평의 유토피아, 삶의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죠.
저는 지금-여기에서 우리의 비평적 토양이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알몸에 대한 정직한 응시를 통해 비판적 성찰의 치열성을 보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장이 서로 다른 비평적 주체가 부딪치는 가운데 생산적 대화를 통하 제3의 무엇인가가 새롭게 모색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논쟁의 과정을 통한 비평의 성숙을 도모해야된다는 것이죠. 행여나 기존의 문학권력을 소유한 비평적 주체들이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 타자의 비평적 소양의 부족을 빌미로 논쟁 자체를 기피한다면, 이 역시 비판받고 있는 문학권력의 음험한 측면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의미에서 논쟁을 기피하고, 아예 타자를 묵살하는 비평적 주체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오류와 무지로 몰아가는 자연적 성향이 지체없이 진리를 이기게 된다."(필리프 사시에의 {왜 똘레랑스인가} 중에서)
이경림 : 글쎄요, 전 그런 거창한 생각을 내 문학에 끌어들여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처음이나 지금이나 문학 앞의 저는 너무 작고 초라해서 전전긍긍할 뿐이죠. 늘 제 문학이 부끄럽고 늘 불만입니다. 제가 넘어야할 난제는 자꾸 움츠러드는 자신을 어떻게 당당하게 일으켜 세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잠깐 살다가는 수없이 많은 글쟁이 중의 한 사람으로 한 시대의 문학이나 역사 앞에, 궁극에 가서는 자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맹문재 : 오늘날 이 땅에 시인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문예지도 너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나 문예지가 많은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보다는 진정성과 질적인 면이 함께 하지 않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또 실제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면으로 양적인 팽창으로 인해 시인들 사이에 살아남기 위한 경쟁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원리인 이윤을 추구하는 경쟁주의가 어느덧 그것을 배제하는 시를 써야 할 시인들의 몸에도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작품 자체가 아닌 시장 경쟁의 대열에 끼일수록 시의 진정성은 상실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들의 그러한 욕망이 넘칠수록 시인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문예지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작품의 진정성을 상실한 시인일수록 외부에 민감합니다. 특히 매스컴의 눈을 의식합니다. 작품 자체에 대한 진정한 자기 고민보다도 매스컴의 입장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스컴으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색다르고 자극적인 소재를 찾고 홍보에 열을 올립니다. 그 결과 현재의 많은 시작품이나 시집은 무게를 잃고 마치 유행가 아니면 유행가를 수록한 테이프와 같은 정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독자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시집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유행에 따라 나타났다가 묻히고 마는 상품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 스스로도 자신의 시집을 상품으로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자본주의의 병폐를 가장 예리하게 파헤치고 경계해야 할 시문학이 오히려 자본주의와 손을 잡으려고 끙끙거리고 있으니 그저 착잡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 한 개인을 탓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참여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즉 왜곡된 현실에 대해 뒤로 물러서서 불만이나 토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삶의 세계를 추구하기 위해 시인으로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나서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사회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모순들을 극복해 나가는 자세입니다. 그 목표는 시인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시대인들이 동참할 수 있는 가치를 작품에 포함시키는 것을 통해 조금씩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김남석 : 나는 앞의 대답에서 우리의 현실이 세 가지 층위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90년대 이후의 문학적 초점은 〈나〉로 편중되었고, 총체적 현실 인식을 포기한 이후에 〈성급한 현실 재단〉과 〈자기만의 영토 건설〉이라는 대응 방식으로 나아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어찌보면 두 가지 대응방식은 모두 〈자아〉를 거창하게 앞세우는 데에서 파생된 그릇된 현실 인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문학과 문화가 안고 있는 중대한 문제이지요. 모든 문학적·문화적 창작과 비평의 중심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은, 분명 심각한 불균형과 파행적 구도를 불러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글쓰기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상황과 파행적 진행 양상을 진단하고 시정하는, 방법적 모색에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진단의 방식을 거창한 이론에 의지하고 싶지도 않고, 나만의 영역을 호령하는 자족적 시정 방침을 마련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호한 거시적 시각도, 편협한 미시적 시각도 적당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관념적으로 현실에 대면하는 방편에 불과할 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 문학과 현실을 유리시킬 가능성이 크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나에게는 〈나〉와 이웃한 〈너〉의 삶이 먼저 눈에 띱니다. 나의 글쓰기는 타자를 살피고 타자를 이해하는 지점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우리가 지나치게 〈우리〉를 강조했고, 오늘날의 우리가 〈나〉를 일방적으로 편애하고 있다면, 〈나〉와 〈우리〉 사이에 있는 〈너〉는 새로운 모색 방향을 제시하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문학이 한 동안 자연을 보고 그 아름다움과 질서를 본받으려고 했던 것과도 비슷할 것이며, 시대적 상황을 보고 우리의 앞날을 예비해보던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너〉를 돌아 〈우리〉로 가는 길을 찾아 글을 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아와 타자와 사회를 온당하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갖추는 것이, 글쓰기의 최종 목표지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의 글쓰기는, 문학이라는 이차적 세계에서 등장하는 타자들의 삶을 엿보고, 문학 밖에서 내가 체험하는 타인들의 삶을 살펴서, 현실을 올바로 보려는, 어쩌면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노력의 궤적이 될 전망입니다.
질의4-현대는 디지털 혁명으로 정보화시대의 한복판에 놓여 있으며, 거의 모든 일상사가 인터넷과 유리되어서는 곤란한 실정입니다. 지난 해에는 인터넷 가상공간에서의 문학세미나도 주기적으로 열린 바 있으며, 김수영 시를 중심으로 한 하이퍼텍스트 실험도 있었습니다. 이 역시 변화되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문학(문화)의 유토피아를 향한 몸짓으로 생각됩니다. 정보화 시대와 인터넷과 관련된 문학(문화)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고명철 : 정보화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거나, 소홀히하면 그야말로 현실과 유리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거의 모든 일상의 영역이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학도 예외가 아닌데요. 저는 문학과 인터넷을 생각할 때면, 저의 관심 분야가 비평이어서인지, 근래 각종 인터넷 싸이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는 논쟁적 글쓰기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인터넷이 없을 때에는 논쟁의 유일한 공간이 인쇄매체를 통한 지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면이 한정되다보니, 논쟁에 가담하는 주체 역시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논쟁의 주제에 부합되는 전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었고, 그것은 또한 일방통행으로 독자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필자와 독자간에 살아있는 대화의 길이 봉쇄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을 보면, 이와 같은 종래의 관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실시간에 이루어지는 논쟁과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 구분 없이 누구나 그 문제 사안에 대한 의견을 활발하게 개진할 수 있으며, 개진된 의견에 대해 가해지는 전방위적 비판은 우리 사회의 비판적 토론 문화 분위기를 한층 고양시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말의 민주화'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부정적 측면 또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좀더 깊이 있는 논의가 연속되지 못한 점, 간혹 논의의 중심을 흐려놓는 일부 몰지각한 네티즌들의 네티켓, 더욱 우려되는 것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해당 싸이트의 접속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것 등의 문제점이 제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비평이 비평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비평적 삶의 태도를 지닌 일반인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삶 속에서 체화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논쟁을 적극적으로 옹호합니다.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 못지 않은 삶과 언어의 유토피아 건설의 길이 열려있으니까요.
이경림 : 저도 지난해에 인터넷 문학 쎄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워낙 그 쪽으로는 서투르다 보니 뭐가 뭔지 어리둥절한 상태로 컴퓨터에 엉기다가 끝이나 버렸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문학의 정보화라는 것에는 깊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쪽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급속도로 그 쪽으로 흘러가고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된 지금, 그런 현상을 외면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취약점들을 보다 인간적인 방향으로 보완해 나가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맹문재 : 인터넷과 관련된 문학(문화)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번 기회에 그 동안 저와 관련 있는 사이트를 생각해보니 포엠큐(www.poemq.or.kr), 삶글(www.tong.or.kr), 북토피아(www.booktopia.com), 아카데미인프라(www.acain.co.kr), 참여했던 문학세미나, 관여하고 있는 출판사……. 저는 사실 인터넷 문학에 큰 관심을 안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니다. 정말 작가나 시인들에게 있어서 인터넷 문학의 영향은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따라서 문학의 표현매체가 활자매체에서 전자매체로 바뀌고 있고 독자들과도 인터넷을 통해 연결되고 있는 상황을 직시할 것이 필요합니다. 문득 기계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라는 사실이 생각납니다. 진정, 인터넷 문학 자체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보고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 적절한 활용에 다가서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인터넷 문학이 확장되면 거대한 패러다임으로 독자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던 문학의 기능은 축소· 분화되고 소집단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놀이 문화의 유입으로 문학의 진지함이 상당히 약화될 것입니다. 따라서 익명성을 이용하여 인간성을 약화시키거나 상업적 유희를 추구하는 인터넷 문학을 경계해야 하며 그것에 대한 대응방안도 마련해야 될 것입니다. 그 대응 방안은 우선 인터넷 문학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동참하는 과정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우리의 옛말도 있듯이, 올바른 인터넷 문학을 정착시키기 위해 능동적인 자세로 참가하여 필요한 것은 수용하고 부족한 점은 보충하고 잘못된 점은 개선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김남석 : 나는 인터넷이 문학의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현실을 살피는 하나의 도구이고 통로에 불과합니다. 유용한 도구이고 편리한 통로라는 점에서, 인터넷이 주요한 화두라는 사실은 함부로 부인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유용성과 편리함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문학의 목표를 여기에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역시 확신합니다. 인터넷은 가상 세계에 불과합니다. 즉 현실의 실감이나 삶의 질감을 담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말을 바꾸면, 인터넷은 천변만화하는 현실에 환상이라는 외피를 한 꺼풀 덧씌울 뿐, 현실 내부를 투시할 힘을 제공하는 데에는 인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현실적 삶에 또다른 도피와 외면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포합니다.
이러한 우려를 문학과 문화적 풍토와 연관시킨다면, 그렇지 않아도 만연해 있는 개인화 풍조를 부채질하는 촉진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은 극도로 개인적인 시스템이기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대사회성을 제약합니다. 지금은 모든 문학과 문화의 중심이 개인에 편중되어 있기에, 인터넷은 시대적 요청을 담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러한 개인성으로 인해 현실의 올바른 실체와 의미가 몰각될 수 있다는 예측을 상기하면, 인터넷은 일종의 병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려와 문제점을 묶어보면, 인터넷은 언제나 반성적 성찰을 지닌 상태에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터넷의 편리함과 유용성을 활용하되, 인터넷의 오류와 모순을 함께 비판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학과 문화를 조감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은, 인터넷의 폐단과 한계에 대해 날카롭게 반문하는 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터넷이 과연 우리의 생존 환경을 편리하게 개선했지만, 그 편리함으로 인해 잃어 가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고요. 이 물음에 충실하면, 인터넷에 대항하는 우리의 문학적·문화적 입지는 저절로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질의5-모든 언어 활동이 궁극적으로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으로 수렴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리토피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획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내는 노력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고명철 씨와 맹문재 씨는 문예지를 편집하는 데 직접 참여해왔습니다. 현단계 문예지를 통한 이러한 기획의 가능성과, 지금까지 여타 문예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해본다면?
고명철 : 우리의 문학은 이웃 일본처럼 문예지를 중심으로 성장해왔습니다. 문예지 이외의 인쇄매체가 다양하게 존재하고, 더욱이 인터넷을 매개로 한 웹진이 우후죽순격으로 팽창하고 있는 현실을 비추어볼 때도, 아직도 우리의 현실에서는 여전히 문예지의 중요성은 강조된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90년대 이후 새롭게 출현한 문예지가 양적으로 증대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리토피아} 역시 예외가 아닌데요. 가히 문예지의 르네상스라 부를 만하죠. 그렇다면, 왜 이처럼 문예지가 폭증하는지에 대한 면밀한 성찰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존의 문예지로서는 급변하는 현실과 새롭게 변화되는 문학적 감수성을 담아낼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해있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게다가 전문화된 문학교육으로 인한 문인의 양적 증가에 따른 표현의 욕망이, 기존의 문예지를 통해서는 충족시킬 수 없는 것 또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문예지의 팽창을 탓할 게 아니라 한 문예지가 어떠한 기획을 통해 문학 토양을 풍부하게 하느냐, 는 것입니다. 사실, {리토피아}는 바로 이 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기존의 문예지의 문제점에 대한 준엄한 비판적 성찰로부터 문예지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문예지는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의 공기(公器)로서의 책무를 수행해야 되지 않을까요. 물론 문학을 통해서말입니다. 문예지의 기획은 다각도로 모색할 수 있겠습니다만, 삶과 유리된 문학의 기획은 스스로 그 영역을 좁힘으로써 결국 문학만의 협소한 성채에 갇히게 될 뿐입니다. 현실을 냉정히 돌아봅시다. 문예지 이외에도 다양한 읽을 거리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무엇이 독자로 하여금 문예지에 대한 매혹에 사로잡히게 할까요. 이 점을 문예지는 치열하게 고민해야 될 것입니다. 그 문예지에 시선을 고정시킨 순간, 그 문예지만의 참신성과 예각적인 문제의식으로 독자의 둔감한 현실감과 미적 감수성을 동요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담아내고자 안간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다양한 문예지 중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문예지와 연대하면서 서로의 생산적 대화를 통해 나날이 경화되어 가는 기존의 낡고 고루한 문예지를 극복하는 데에도 노력을 다 해야될 것입니다.
맹문재 : 자본주의의 모순 내지 병폐는 시인이나 작가 개인들보다도 그들을 불러모으고 그들의 작품을 평가하고 그들의 작품을 독자들과 매스컴에 소개하고 판매하는 매체인 문예지에 더 있는 것입니다. 문예지도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사업체의 한 형태이므로 시장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요가(독자나 매스컴)들로부터 관심과 호감을 사기 위한 몸짓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시장적 가치인 인간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 명분과 작가들의 노동력(원고료)과 자체의 운영을 책임져야 할 현실 사이에 이율배반의 운명을 문예지는 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예지 사업은 오히려 인간 가치를 상실하거나 왜곡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주위의 시인이나 작가들을 만나면 한정된 사람들의 작품만이 문예지에 실린다는 불만을 자주 듣습니다. 늘 실리는 작가나 시인만이 문예지를 차지하고 있어 평론가들과 매스컴으로부터 평가를 받고, 그에 따라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데도 기회의 조건이 불평등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름 있는 시인이나 작가들의 작품이라고 해도 별로 읽을 게 없다는 불만입니다. 문예지의 편집자나 기획자는 문예지에 실리지 못하는 이들의 불만을 단순한 시기심이나 상대적 박탈감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문예지의 기획이 자본주의의 속성에 밝은 저널리즘적 평가 기준을 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고 그것이 결국 상업적 자본주의가 가는 길을 뒤따라가고 있음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름 없는 시인과 작가들의 작품이나 독자들의 투고 작품을 신중히 살펴보고 발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문예지도 경영을 해야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하고 좋고 정직한 작품을 싣고 알려서 그 결과 돈을 버는 것하고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요.
우리의 많은 문예지는 대의명분은 그럴듯하게 내걸고 있으면서도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시정잡배와 별반 다른 점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편집자나 기획자가 작가와 작품 그리고 시대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 저널리즘에서 다루는 정도를 표준으로 삼고 있어 문예지의 수준이 낮습니다. 그에 따라 시대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안일하고 표피적이겠습니까? 그리하여 한국적 병폐라고 불리는 학연, 지연 등이 문예지의 기획에도 우선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작품 발표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작가들의 열악한 처지를 악용하여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거나 문예지의 일정 부수를 사도록 강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슬프고도 비참한 현실입니까?
질의6-90년대 이후 문화의 큰 변화는 영상문화의 폭증입니다. 특히 한국영화의 팽창이 가시적인데, 한국영화의 양적·질적 팽창이 영상문화의 유토피아와 갖는 관계에 대한 생각은?
김남석 : 〈유토피아〉는 현실에 근접해 있을 때에만, 대안으로서의 올바른 기능과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토피아적 이상이 현실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것 혹은 현실의 목표와 길을 잃도록 종용하는 허황되고 막연한 것에 불과하다면, 이것은 유토피아의 진정한 이념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 영화는 유토피아와 현실의 거리를 좁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입니다. 아직은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산재해 있지요. 일단 인문학적 소양이 대단히 부족해서, 영화의 현실적 존재 의의를 제대로 체득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하나입니다. 미흡한 시나리오의 수준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적 요인입니다. 서사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며 계속 이어진 것이며, 그 만한 세월동안 다듬어진 것입니다. 영화가 필연적으로 서사를 껴안고 생존해나가야 하는 장르라면, 서사적 완성도는 매우 중요하지요.
한국 영화는 이러한 고질적인 병폐를 서서히 치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의 한국 영화가 주먹구구식으로 서사를 만들었고 그 존립 근거를 따지기 이전에 상품화하기에 급급했다면, 현재의 한국 영화는 비전을 제시하고 의의를 논의할 수 있는 경지에 육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주변적 관심도 대단히 고양된 상태이고, 한국 영화에 대한 인상도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영화인들도 사명감과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최근 발표되는 일련의 한국 영화이지요. 최근 한국 영화를 살펴 보면, 우리의 현실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증거가 속속 나타납니다. 일상의 미묘한 결절점을 살피는 영화, 한국의 문제적 상황을 진단하는 영화, 과거와 역사적 유산을 수용하여 전통적 미의식을 추적하는 영화, 동시대적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제법 노련하게 담아낸 영화는, 이러한 증거물들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점은, 일상과 개인과 타자를 들여다보는 독자적 시각을 추구하고 있기에, 즉 작가주의 영화를 표방하는 영화들이 드물지 않게 나타나기 때문에, 다음 작품에서는 더 나은 완성도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에게는 이러한 한국 영화의 성장이, 자아를 벗어나 타인과 사회를 살피기 시작했다는 징후로 읽혀집니다.
질의7-90년대 이후 달라진 문학 환경 중 하나는 서울 중심의 중앙집중적 문학에서 벗어나려는 지역의 활발한 움직입니다. 이경림 씨는 인천지역에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새롭게 모색되는 문학의 유토피아는 탈중심의 문학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경림 : 중앙이나 지방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어디가 중앙이고 어디가 지방입니까? 또 지방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기준인가요? 저는 사실 인천에 살지만 인천지역에서만 활동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서울에서만 하는 것도 아니죠. 아까 디지털시대니 정보화 시대니 하는 말도 나왔지만 이런 첨단의 시대에 거주지를 중심으로 중앙이니 지방이니 나누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은, 특히 예술가는 자기가 있는 곳이 중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땅한 일이구요. 어떤 훌륭한 선배 한 분의 이야긴데, 그분이 어떤 이름없는 잡지에 인터뷰를 하신 것을 보고 아직 덜 여문 어린 후배가 '선생님은 왜 그런 잡지에 까지 인터뷰를 하십니까' 하고 핀잔하듯 하는 물었는데, 그 선배는 '잡지가 무슨 상관입니까? 왕이 머무는 곳은 어디나 완궁입니다' 하고 대답했다는 기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일이 있습니다만, 자기 문학이 알차면 중앙이나 지역을 따질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바로 그런 생각이 현 문단이, 또는 문인들이 깨트려야할 가장 큰 장벽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중심이고 아울러 아웃사이더들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누군가 자신이 그 진부한 제도권이 쌓은 장벽 안에 있다고 목에 힘을 주고 있는 문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마땅히 부끄러워해야할 것입니다. 옛날 왕들이 왜 그리 수명이 짧았는지 아십니까? 그 튼튼한 돌담 때문이었어요. 세상이 얼마나 넓고 깊고 아름답고 동시에 추한지 몰랐거든요. 제 오라에 제가 걸려 죽은 거죠. 그런 의미에서 우린 모두 한 삼백살 쯤 살 사람들인가요?
질의8-끝으로 {리토피아}와 {리토피아}의 독자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고명철 : {리토피아}는 창간사에 녹아있듯이 우리의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도래할 미래에 대한 꿈꾸기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리토피아}만의 욕망이 결코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 어깨를 걸고 나아갈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첫 걸음은 어딘가 모르게 못마땅할지라도 여러분의 아낌없는 비판과 따뜻한 격려가 있다면, 우직한 행보로 언어의 유토피아, 삶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것입니다.
이경림 :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기에 오로지 문학에의 사랑과 열정 하나 가지고 창간하는 리토피아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리토피아가 그야말로 중앙과 주변이 없이 온 세상을 고루 아우르는 큰 잡지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맹문재 : 종이의 원료조차 풍족하지 않은 이 땅에 또 하나의 문예지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한 문예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나무가 베어져야 합니다. 적어도 베인 나무의 생명력만큼 의 가치는 지녀야 할 것인데, 걱정이 앞섭니다. 저는 제 이름을 걸고 있는 한 깨끗한 잡지, 노력하는 잡지, 더 나아가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지향하는 잡지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이 깊고 깊을 때 독자들은 당연히 동참의 손길을 내어줄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책읽기가 소외되는 시대일수록 남보다 많은 책읽기를 거듭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혜안을 갖게 될 것'(최동호,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 문학동네, 2000, 33쪽)이라는 사실을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김남석 : 현실을 평안하게 외면하게 만드는 잡지는 중급의 잡지에 불과하다할 것입니다. 상급의 잡지는 현실을 적실하게 관찰하여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우리의 것이 아닐진데, 잡지만 그렇다면 이것 또한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차원에서 잡지는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쉽고 재미있다는 특성은,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의 문제이므로, 인문학적 식견과 세계관을 보다 확장시키려는 시도 내에서 흥미를 찾는 작업도 무척 소중합니다. 잡지는 독자를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대중성을 옹호하면서도, 통속성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대중성과 통속성은 그렇게 만만하게 분리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영원히 분리시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대중성과 통속성이, 우리의 비판과 전망을 담아내는 유용한 그릇일 수 있음을 상기하는 편이 보다 현명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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