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창간호/작가가 쓰는 산문/망또의 기억/김창활
페이지 정보

본문
작가가 쓰는 산문
김창활
망또의 기억
형이 아직 형님으로 불리우기에는 많이 젊었던, 아니 어렸던 시절, 양복장 거울 앞에서 당시로서는 터무니 없이 고급인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까만색 낙타기지 망토를 처음 입어 보던 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소련 작가 고골리의 「외투」가 쓰여졌던 제정 러시아 시절만큼이나 물자가 발랐던 우리 일제시대의 말엽, 그때 형은 육년제 중학교의 삼학년이었던가, 그때의 형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그해 겨울, 형은 엘리트 의식이 대단했던, 그래서 지금의 서울대학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은 챙피하다고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동경제국대학 문과에만 들어 가려고 기를 쓰다 삼수(三修)를 끝으로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소설을 쓰고 계시던 외삼촌으로부터 당신이 예과시절에 입던 예의 그 망토를 선물 받은 것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고급인 망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호사 취미가 대단했던 부자집 외아들인 우리 외삼촌 같은 사람이 아니고는 좀처럼 꿈도 꾸어 보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 이 외삼촌으로부터 형은 스케이트도 선물 받았고, 미술전집도 선물 받았고, 여러 가지를 사랑과 함께 받아 왔는데, 그중에서도 받고서 제일 마음 설레이게 기뻤던 것이 이 망토가 아니었을는지. 품이 좀 넓었던 것 같고, 기장도 좀 긴 듯 싶었지만, 형한테는 오히려 그쪽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기럭지를 좀 줄여줄까 묻는 어머니의 말에 형은 오히려 펄쩍 뛰는 것이었으니까.
형은 이 망토를 받은 즉시 입고 다니지는 않았다. 양복장에 잘 걸어 두고 겨울 방학을 기다렸다. 망토를 걸치려면 우선 거기에 걸맞게 모자부터 모양을 바꿔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빵모자에 채양을 평창으로 바꿔 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모자 채양으로 쓸 돼지 가죽은 어디서 났는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검정색이 아니라 푸른 빛이 도는 회색, 그러니까 청회색이었다. 이 청회색을 검정색으로 염색하는데도 며칠은 걸렸던 것 같다. 원하는 농도의 색깔이 한번에 나와 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염색을 한 가죽이 다 마르자 형은 검정 구두약으로 광을 내고 정성스레 재단을 했다. 아래 위 두 쪽을. 그리고 가운데에는 딱딱한 마분지를 재단해서 끼웠다. 그리고 가장자리는 얇게 도려낸 가죽띠를 가지고 재봉틀 앞에 앉아 한뜸 한뜸 조심스럽게 단을 박았다. 그리하여 상당히 길쭘한 평창의 모자 채양이 완성되었는데, 걸린 기간은 약 일주일 정도, 아니면 조금더 걸렸던가, 그랬던 것 같다. 이놈을 기존의 교모 채양을 뜯어내고 대신 달았다. 그 다음은 모자 뚜껑을 삼분의 일쯤 줄이는 일이었다. 뚜껑을 뜯어내서 가위로 오려내 줄이고는 옆면을 주름을 잡아가며 거기다 다시 재봉질로 박는 것이었는데, 웬만큼 꼼꼼한 솜씨 아니고서는 제대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형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 일을 해냈다. 그 꼼꼼한 솜씨라니! 그리하여 완성된 불량 학생의 빵모자. 내가 보기엔 그걸로도 훌륭했다.
그러나 형은 빵모자 뚜껑에 면도칼을 들고 연신 열십자로 뾵는 시늉을 하면서 망설이는 것이었다. 열십자로 뾵고서 다시 재봉질로 누비는 것이 가장 기분은 나는 것이었는 모양이었는데, 간이 그닥 크지를 못해서 그렇게 망설이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다 못한 나는 단호하게 한마디 훈수를 하고 나서고야 말았다. 겨우 일곱 살배기 주제에.
"그거 새 걸 왜 찢어? 난 반대야!"
형은 어처구니 없어하는 얼굴로 나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나 내 말에 타당성이 있는 것은 인정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본인의 간이 그닥 크지를 못 해선지, 모자 뚜껑을 열십자로 찢는 짓은 단념했다.
그렇게 개조한 평창이 달린 빵모자를 눌러 쓰고는 양복장에서 망토를 꺼내 걸치고 형은 거울 앞에서 찬찬히 거울 속의 자신을 살피는 것이었다. 이때 양 팔은 약간 뒤쪽으로 젖힌 채였고, 목은 앞으로 좀 뽑은 자세였다. 그런 자세로 왼쪽으로도 돌아보고, 바른 쪽으로도 돌아 보는 것이었는데, 그러다가는 갑자기 수탉처럼 푸드득거리며 양 팔을 망토 속에서 뽑아내며 그 어떤 한 포즈를 취해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불량배들에게 에워 쌓여 그들과 대적해보는 상상을 해보던 것은 아니었을른지.
그 겨울 방학에 형은 그짓을 참으로 여러번 했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 보던 나는 그럴 때 마다, 야아, 참 멋있구나! 감탄을 하곤 했다.
그해 겨울 방학이 형으로써는 참으로 길게 느껴지는 겨울 방학이었으리라. 그런데 나로써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형이 그해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었을 때, 그 평창을 해 달은 불량스러운 빵모자에 망토를 휘날리며 어떻게 규율부원들이 지키고 있는 교문을 무사히 통과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중학교가 육년제였기 때문에 중학교 삼학년이라는 것은 상급생 축에도 못 끼는 것이었겠으니 말이다. 중학교 5학년이었을 규율부원에다 대면 새까만 후배일 중학교 3학년짜리가 그들로써는 상상도 해볼 수 없는 불량학생 빵모자에 고급 망토를 휘두르며 그들 앞을 지나려 한다면 어느 누가 구경만 하고 가만 있겠는가. 이 문제는 내가 커서도 두고두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렇다고 그 생각이 날 때 물어 볼 수 있도록 형이 늘 옆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형은 어렸을 때부터도 내 옆엔 늘 없었다. 이북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도 일주일에 한번 만나게 되는 존재였고, 총각시절 서울 와 살때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 집에 들어오면 잘 들어오는 편인 것이었다. 그리고는 미국이며 프랑스 등, 먼 나라에서 떠돌며 살기를 사십여년. 어렸을 때의 하찮은 일을 미주알 고주알 캐물을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그러다가 그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몇 년 전 여름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우연찮은 기회에 형님의 중학교 동창 한 분과 저녁을 같이 하게 된 일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선수였고, 육이오 직후 축구 국가대표 선수로도 잠시 뛴적이 있는 이 분은 당시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때 학교에 제일착으로 등교하는 학생은 나하구 당신 형이댔디. 나는 축대 담벼락에다 대고 혼자서 뽈 차러 일찍 오댔구, 당신 형은 미술실에 가서 석고데쌍하느라구 일찍 나오대서. 수위가 문도 따기 전에 교문 앞에 도착하군 하댔거던."
뷸량스러운 교모를 쓰고 멋진 망토를 휘날리며 어떻게 규율 부원 앞을 통과했을까 하던 의문이 자연 해소되던 대목이다. 형은 규율부원이 교뮨 앞에 나와 서기 한참 전에 교문을 통과하던 것이다.
형님은 이젠 수염을 허옇게 기른 칠십을 넘긴 노인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화가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그 동생인 나도 손자 손녀룰 다 본 할아버지다. 빵모자에 망토를 휘날리던 그 기분 다 잊었을 것 같은데 새삼 그 생각이 난다. 망녕이 들려는 것인가. 2001. 2. 5.
- 이전글창간호/예술, 예술인/클라운 마임 세계를 개척한 최규호의 인생/최규호 02.06.14
- 다음글창간호/기행 산문/그런 사랑도 있었네/김인자 02.06.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