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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예술, 예술인/클라운 마임 세계를 개척한 최규호의 인생/최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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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예술인
최규호
클라운 마임Clown Mime 세계를 개척한 최규호의 마임 인생
마임에 입문한지 벌써 20여년이다. 마임에 대한 꿈을 키우기 훨씬 전 내가 처음으로 문화를 접한 것은 허영심 많은 청년 시절 T.V 라는 매체를 통해서였다. 그 다음으로 접한 것이 영화였을 것이다. 고교 시절 학내 문화제에서 개그 아닌 개그를 선보여 뭇 여학생들로부터 달뜬 시선을 받았던 터라, 나는 마지막으로 연극을 해 보리라 마음을 먹고 서울 신촌에 있는 '거론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그것이 내 마임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소극장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을 무렵이어서 막 태동하던 극단 '거론'에는 할 일이 참으로 많았다. 우선 손재주가 많다고 자타가 공인 해 주던 나는 망치와 톱을 들고 소극장을 누볐다. 조명, 음향, 배선, 설치 등 온갖 지혜를 짜내어 최소의 비용으로 그럴싸하게 만들어내는 재주로 인해 나는 금방 극장 대표의 눈에 들게 되었다. 그 이후 극장가에 여러모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당시 신촌의 이화여대 주변에는 소극장이 몇 군데 있었는데, 조명 설비가 고장이 나면 전문적인 기술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먼저 나를 불러 수리를 부탁하곤 했다. 연극 배우 최규호보다는 조명 기사 최규호가 더 어울리는 시절이었다.
거론 스튜디오, 내 손때가 묻은 이 작은 소극장에서 '유진규 판토마임'이 공연되었다. 나는 이 공연에 조명 기사가 아닌 조명, 음향 오퍼레이터로 참여하여 연습을 했다. 고된 연습이 거듭될수록 나는 마임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매료되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임이란 모든 것의 말이 없는 표현으로 표정과 손짓 몸짓 발짓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표현하는 세계 공통의 몸짓 언어이다. 간결 명료하게 함축시켜서 진수만 전달하는 예술, 수십 마디의 언어를 오직 한 단어로 함축시킬 수 있는 마임의 세계는 마치 시의 세계처럼 오묘해 보였다. 마임에 대한 생각으로 온 밤을 꼬박 지새우기 시작했다.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기를 반복하면서 결국 나는 마임을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목표로 삼으리라 결정해버렸다.
유진규 선배가 연습하던 주요 장면들을 나 역시 매일 밤 연습하곤 했다. 혼자서도 너무 재미가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연습을 계속하다보니 유 선배의 공연이 끝나갈 무렵엔 거의 완벽할 정도로 유 선배의 테크닉을 구사하게 되었다.
유진규 선배의 마임 공연이 끝나고 쫑파티가 벌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열악한 제작 여건으로 인해 공연으로의 수입 창출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간의 노고를 지나칠 수도 없는 터였다. 극단 대표, 배우, 스텝 선후배들, 그리고 타 극단의 지인들이 함께 모여 그간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있는 장기 없는 호기 다 부리는 광란의 파티였다.
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극장의 막내 최규호의 끼를 관람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놀이 문화에는 별 흥미가 없던 나였으나 그날만은 나는 자신있게 일어나 그 동안 혼자 연습했던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날 쫑파티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지금은 청주대에 재직하고 있는 극단 대표 김수남 선생께서 내게 마임을 권유했고, 그 얼마후 '최규호 판토마임'이 만들어져 처녀 공연을 하게되었다. 1978년 '거론 스튜디오'에서의 '시시딱딱이 놀이'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마임이 인연이 되어 나는 아내 박상숙을 만났다. 그녀와 나는 마임 공연을 함께 하기도 하고, 잦은 전국 순회 공연 중에 한솥밥을 먹으면서 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 마임을 하는 사람은 채 몇 명도 되지 않았다. 유진규, 김성구, 김동수, 최규호, 다섯 명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딱이 누구에게 배우거나 가르쳐 주거나할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가 자기 방식대로 공부하고 터득해가는 독학을 해야 했다.
아내는 나에게 가끔 말한다. '당신 공연을 처음 보았을 때 마치 도둑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신의 작품이 너무너무 좋아서 일 주일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 연극과 문학에 심취해 있던 그녀를 나는 결국 작품을 빙자해 아내로 맞이해서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 결과로 열일곱 살의 의협심 강한 딸이 항상 내 곁에 있다.
다시금 나에게 많은 꿈을 꾸게 하고 지식을 전해 주었던 분들이 떠오른다. 김수남 교수를 비롯하여 관객 모독의 연출가 기국서, 마임 아티스트 김성구, 유진규, 탈렌트 송승환, 연극배우 기주봉, 명계남, 박영규 등등.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연극 배우 최영준 선배와의 만남도 잊을 수 없는 인연이다. 최 선배는 집이 나와 같은 인천으로 그것도 바로 아래윗 동네였다. 우리는 공연이 끝나면 항상 마지막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가장 작은 비용으로 인천까지 오는 방법을 고안해 내야했다. 술에 취한 우리는 신촌을 출발하여 영등포를 거쳐 인천이 종착지인 버스를 탄다. 차에 오르자마자 차장을 향해 영등포에서 깨워 달라 부탁하고는 잠이든 척 눈을 감는다. 영등포에 이르러 우리를 내려 주기 위해 아무리 흔들어 대며 깨워도 우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차장은 한참 동안 우리를 깨우다가 이내 지쳐서 포기하고 만다. 그러다가 인천에 도착하게 되면 우리는 그제야 잠이 깬 척 눈을 뜨며 차장을 행해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왜 안 깨웠느냐?' 그런 날은 인천까지 차비의 10%만 내면 되었다. 가난한 시절의 참으로 객기 어린 고단한 이야기다.
어떤 날은 배가 고픈 나머지 물을 너무 많이 먹어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뱃 속에서 장화 속의 물처럼 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나의 사정을 알 길 없는 선배들은 밥 대신 술을 사 주곤 했다. 빈 속에 술 한잔 들어가면 나는 급기야 사경을 헤매곤 했다. 그러나 고단한 현실이 피부를 파고들수록 나는 미친 듯이 연습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날 최영준 선배가 나를 끌었다. 인천 경동 싸리재 언덕에 '돌체'라는 싱어롱 하는 장소가 있는데 가 보자' 경동의 '돌체', 연극 소극장으로는 너무도 안성맞춤인 기가 막힌 공간이었다. 천정높이가 4m, 평수는 50평, 벽두께는 62cm, 벽과 벽사이에는 톱밥이 넣어져 완벽한 방음 방충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본래 얼음 창고로 지어진 것이 연극 전용 극장으로서 최적격이었던 것이다.
나는 당시 건물 주인이었던 유용호씨를 일주일 동안 설득했다. 남달리 성품이 온화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공상가였던 그는 30만원을 선뜻 내주면서 객석부터 조명 음향에 이르기까지 잘 만들어보라 했다. 선량한 유용호 선배가 나의 꼬임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1979년 2월 소극장 '돌체'가 태어나고 첫 공연으로 최영준의 연극이 막이 올랐다. 인천 소극장 연극의 정식 출범인 셈이었다. 동시에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소극장 돌체는 21년을 인천의 연극을 걸머지고 줄기차게 달려왔다. 돌체 커플만도 이미 10여 쌍이 탄생했다. 어느덧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노인의 형상이 되어가고는 있으나, 한때는 인천에 소극장 운동을 일으키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곳이기도 하다. 경동 예술극장, 미추홀 소극장, 신포 아트홀, 엘칸토 예술극장 등,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돌체 하나만 남았다.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지금은 시야를 더욱 넓혀 정기 공연 및 국제행사등을 통해 매 해 지구촌 밖으로 그 뜻을 펼치고 있다. 더불어 돌체와 함께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출가 연극배우 영화배우 기획자 판토마임 배우등이 인천의 자존심을 지켜가고 있다.
불가사의한 것은 그간 연극을 제작했던 제작금이다. 편당 500만원만 잡아도 극단 '마임'이 80편 정도는 했으니까, 줄잡아 4억이다. 변변한 스폰서 하나 없이 4억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일 년에 한두 작품은 반드시 창작 마임을 발표하자는 취지 아래 언어 연극은 아내인 박상숙이 희곡을 써 초연작이나 실험작을 공연했다. 그럼으로써 창작에의 갈증을 달래고 스스로 힘을 얻고자 했으며, 그 모든 일이 힘에 부칠 때에는 문득 모래땅에 곡식을 심으려는 어리석음은 아닐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마임을 보려면 인천에 가야 한다는 속설이 있어 심심찮게 신촌 시절의 선배들이 내 극장을 방문해 주기도 했었다.
한국 마임의 시작은 이렇다. 처음엔 몇몇 사람들이 장난삼아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 시작 인물은 개그맨 전유성 ,김종찬, 고흐, 이영유 등이다. 지금은 그들도 각계에서 열심히 자신의 울타리를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쨌튼 재미있는 사람들이 재미삼아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 상황이 나아져 유진규, 김성구가 한국 최초로 입장료를 받고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극단 에·저·또의 방태수 교수가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마임에 관한 이론 서적을 들여와 마임의 구체적인 이론이 만들어지고 그 이론이 다듬어지면서 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지침서가 되어주었다.
1990년 초 몇 안되는 마임인들이 의기 투합해 '한국마임페스티벌"을 계획했다. 이 공연은 공간사랑에서의 공연을 필두로 하여 머지않아 춘천, 인천, 전주, 수원, 예산 등 전국 공연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최규호라는 나의 이름 석 자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간 인천에서 여러 형태로 제작하고 발표했던 것들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춘천국제마임을 통해 알게된 일본 연기자들의 입을 통해 아시아 최고의 클라운이라는 찬사를 듣게되었다. 그로 인해 전세계에 퍼져 있는 클라운들과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인천에 인천국제클라운마임축제를 개최 할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한때는 유진규 선배로부터 섭섭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 춘천을 버려두고 인천에서만 공연할 수 있는가.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특정지역을 벗어나 세계적인 마임인으로 자기 세계를 펼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마임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유 선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도 같다. 역시 우리의 뒤를 이어 유홍영, 임도완, 남긍호, 유진우, 고재경 등의 개성이 강한 후배들이 속속 나타나면서 갖게되는 생각이다.
그러던 중 1988년 나의 마임 세계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대중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재미도 있으면서 누구나 볼 수 있으며 교훈적인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마임의 퓨전이었다. 마임에 대한 나의 고정 관념을 깨고 마임에 여러 장르의 기법을 응용해서 새로운 마임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clown(광대) +mime(마임)이다.
광대 마임은 마술, 아크로바트, 코메디, 서커스 등등, 보는 이의 즐거움을 이용하고 거기에 마임의 예술성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이런 클라운 마임은 일정한 대본이 없이 현장에서 언제든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오랜 경험과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기능과 마음의 흐름 모두를 다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똑같은 공연 형태라 해도 공연장 마다의 분위기가 달라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해야 하므로 현장성 내지 연기자적인 감각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클라운 마임을 처음 선보였을 때 관객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즐거워 했다. 그 이후로 대한민국 여기저기에서 나와 같은 클라운들이 만들어졌다. 축제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광대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으로 뿌듯한 일이다. 한가지 우려되는 일이 있다면 모두가 나와 똑같이 하려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넉넉한 마음이다. 그것부터 시작이니까. 언젠가는 그들도 자기것을 만들리라 믿으므로. 가끔은 예전의 나와 같은 모습을 한 그들과 만나 테마파크에서 거리공연을 화려하게 펼치기도 했다.
사실 광대는 장례식장 외에는 어디에나 어울리는 인물이다. 이젠 최규호의 클라운 마임이 여러나라에서 초청을 받아 각 나라의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갖기도 한다. 정서가 다른 나라에서도 즐거운 것은 역시 박수가 터져 나온다는 점이다. 공연이 끝나고 기분 좋은 박수를 받을 때는 한국 광대라는 것이 가슴 절이도록 행복했다.
마임교육에 대해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직 한국에는 마임 전문 학교가 없다는 것이다. 대학에서도 마임과는 없다. 연극영화과에 속한 마임이라는 과목만이 약간씩 존재한다. 대학 강의를 하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한국 사람이 쓴 마임 교과서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외람되기는 해도 기왕에 마임에 관한 책을 한권 집필하여 출판을 서두르고 있다.
학교 강의 시간이 터무니 없이 짧게 배정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마임을 알아야 연기가 풍성해 지는 것을 왜 모르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의 마임은 대단히 희망적이다. 무엇보다 마임을 하려는 젊은이들이 많다. 마임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반인에게 마임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우리는 곧잘 손짓 발짓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하는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소수의 인원임을 극복하고 이 만큼의 거리낌 없는 공연 장르로 키워온 선배들과 열심히 공연에 주력하는 후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내게 소박한 앞으로의 꿈이 잇다면 그것은 옛날 이야기를 마임으로 구성해 초등 학교 교실에서부터 우리의 아이들에게 상상의 세계와 꿈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마임을 이해하고 익히면 아이들의 표현 능력이 대단히 향상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든 면에서 미흡하지만 '인천국제클라운마임축제'가 모든 시민이 즐기는 행사가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할 생각이다. 누군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어 보인다. 그래도 당신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어리석어 보이겠지' 현실감각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닌지 모르겠다. 어떤 일을 하든 즐거워야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다. 빵을 먼저 생각하면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술은 노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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