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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단편소설/거미 노인의 키스/장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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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거미 노인의 키스
장태일
근사한 일은 다른 놈들이 다 해버렸잖아. 아침에 눈을 뜨자 식탁 의자에 팬티바람으로 쪼그려 앉은 그녀가 볼멘 소리를 했다. 나 역시 모든 것이 너무 지겨워 뭔가 그럴 듯한 일을 하고 싶었던 참이었지만 그렇다고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근사한 일은 없었다.
우리들은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문화센터에서 만났다. 여긴 팝콘 안 팔아요? 하고 옆 자리의 그녀가 내 어깨를 두드렸을 때, 그저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포스터와 화살표를 따라 와보니 여기였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나 역시 그런 저런 이유로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마음에 든 건 벌써 반 년이 넘도록 여자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팜플릿만 사면 그냥 입장시켜주는 문화센터 영화 워크숍의 발표회였으니까 커피 한 잔 값보다 쌌다. 그리고 그만큼 분위기는 어색하고 따분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눈물이 맺힌 눈웃음을 지었다. 하품을 늘어지게 한 직후였다. 내가 먼저 일어나 나왔고, 그녀가 30초쯤 있다가 뒤따라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살게 되었다.
"근사한 일은 다른 놈들이 다 해버렸잖아."
매트리스에 몸을 반쯤 걸치고 늘어져 있는 나를 힐끗 보더니 그녀는 똑 같은 말을 지껄였다. 그녀의 넓고 도드라진 이마를 세로로 가로지르며 신경질적인 핏줄이 곤두섰다. 동감이야. 나는 벌거벗은 채 일어나 앉았다. 눈두덩이 쿡쿡 쑤셨다. 저 놈의 햇빛! 동남쪽을 향한 베란다의 넓은 창 가득 하얀 햇볕이 가득했다. 늦잠을 즐기는 꼴을 봐줄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빛이었다.
"돈 좀 남은 거 있으면 천 끊어다가 창문 좀 가리자. 다 저 놈의 햇빛 때문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요 뒷 동으로 가는 건데..."
나는 팬티를 찾아 입으면서 투덜거렸다.
며칠 사이 우리들의 권태는 거의 극에 달해 있었다. 한 달 가량은 틀어박혀서 섹스만 했다.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슈퍼마켓에 가는 것이 우리들의 유일한 외출이었다. 사는 동안에 이런 시기도 있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문득, 섹스에 열중하다가 그녀의 이마에 곤두선 핏줄을 보게되었을 때, 이렇게 힘들고 뻔한 짓을 뭐하러 하고 있는 걸까,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게..., 하고 그녀가 대꾸했다. 섹스에 몰두해서 끙끙대는 우리들의 꼴이 심드렁하다 못해 지겹게 느껴졌다. 그날부터 우리들은 아파트 구내의 비디오 가게에서 한 권에 5백원 하는 오래된 비디오를 빌려다 보았다. 한 보름쯤 보고 나니 두통이 생겼다. 하루 종일 볕이 드는 집안에서 뿌연 화면으로 화질이 좋지 않은 비디오를 보는 건 고역이었다. 이제는 뭔가 다른 일이 필요했다.
"이번 달 월세 내고 나면 냄비 바닥 핥아야돼. 헝겊데기 살 돈 있으면 라면이라도 사다놓겠다."
그녀의 눈 밑이 검었다. 원래 그랬는지 나와 함께 살면서 그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운전면허증에 있는 생년월일로 미뤄보면 나이보다 다섯 살은 더 들어 보였다. 그녀는 감귤 만한 가슴을 드러낸 채 팬티 바람으로 어슬렁거리며 담배를 피웠다. 밝은 햇빛 속에 파란 연기가 꾸물꾸물 번져나갔다. 오락가락하던 그녀가 식탁 위의 컵에 꽁초를 던져넣고는 뭔가 생각난 듯 현관 옆, 수납장을 벌컥 열었다. 거기엔 우리 두 사람의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이 처박혀 있었다. 그녀는 나의 낡은 노트북 컴퓨터를 끄집어내 들어보였다.
"소설 쓰자."
"뭐에 대해서?"
"그냥, 우리 얘기가 아니면 뭐든 상관없어.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잘 관찰해보면 쓸 만한 얘기가 있을 거야."
"은퇴하고 애들은 떠나고 모아놓은 돈은 없는 노인네들, 악착같이 벌어서 애들 밑으로 들어가는 교육비나 겨우 매꾸는 맞벌이 부부 얘기, 에, 또...관리비를 6개월 넘게 안내서 게시판에 공고되니까 술 먹고 관리소장 죽인다고 난리 피우다 경찰에 잡혀간 실업자, 또 뭐가 있지? 아, 며칠 전에 105동 4층 베란다에 매달린 여자 얘긴 어때? 119가 출동하니까 그냥 슬그머니 집안으로 들어가버렸잖아. 비디오 가게 여자가 그러는데, 그 집 남자가 고자래. 그래서 여자가 바람이 났는데 뽀롱이 나니까 쌩쇼를 했다는 거야...써 볼만 하긴 하겠지만 쓸 만하진 않은 거 같다. 지겹잖아, 벌써. 그리고 난 소설이란 거 말이지 춥고 배고픈 거, 그런 거 딱 질색이거든."
나는 옷을 꿰어 입으며 따따다다 지껄이고는 욕실로 가서 칫솔을 입에 물었다. 거울에 비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내 얼굴 역시 나이보다 다섯 살쯤 더 먹어보였다. 단단한 칫솔 머리를 앞니로 물고 히죽 웃었다. 도대체 비디오 가게 여자는 105동 남자가 고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해보니 웃기는 노릇이었다. 풀썩 웃음을 터뜨리자 거울에 치약이 튀었다.
"아무렴 어때. 우리가 같이 살면서 뭔가 기념이 될만한 일을 해야할 거 아냐."
"사진이나 찍자. 내 가방에 1회용 카메라가 있을 거야."
나는 입안 가득 고인 치약물을 퉤- 뱉고 나서 이죽거렸다. 고작 컴퓨터 자판이나 깔짝대다니... 그런 따분한 일이 기념이 될 성싶지 않았다. 기념이 될만한 일, 그런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와 내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렇지만 조만간 헤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기념이 될만한 일이란, '일단락'이라는 느낌을 틀림없이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가 같이 쓰면, 넌 그다지 머리가 나쁘지 않으니까, 괜찮은 작품 하나는 건지지 않을까? 어디 현상 공모에 내보는 것도 좋잖아. 잘 모르지? 상금이 만만치 않아. 게다가 작가로 데뷔하면 그것도 어엿한 직업이라구. 그러고보니 너한테 아주 잘 어울린다."
욕실 문짝에 기대서서 그녀가 종알거렸다.
"난, 생각해본 적 없어. 난 말이야, 뭐든 제대로 하자고 하면 멀미부터 난단 말이야. 그리고 소설이란 거 아무나 쓰는 거냐? 소설가들은 말야, 다 외계인이 아니면 쓰레기야. 난 멀쩡한 지구인이라구."
"뻣뻣하기는... 알았어. 이렇게 해. 얘기는 내가 만들테니까 넌 타이핑만 해."
나는 세면대에 허리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닦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일단 공동창작을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별다른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는 일 중에 소설 쓰는 것만큼 만만한 게 달리 없었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만족했다.
내가 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그녀는 내 니트를 걸치고 아랫도리는 여전히 팬티 바람인 채로 냉장고에 남아 있는 달걀 세 개를 삶고 있었다. 삶은 달걀을 아홉 조각 내서 마요네즈와 후추를 뿌려 커피와 함께 마셨다. 그리고 담배를 피워물고 식탁에 노트북 컴퓨터를 올려놓았다. 워드 프로세서 화면에 막대 커서가 맹한 표정으로 깜빡거렸다. 그녀는 담뱃재를 위태롭게 매달고 화면을 쏘아보다가 오른손 검지로 자판을 톡톡 두드렸다. 담뱃재가 그녀의 허벅지에 톡 떨어졌다.
<도넛>
왠 도나쓰야? 나는 가위로 대충 다듬은 머리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약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녀가 내민 반투명 위생봉지에 메추리알만한 도넛이 들어 있었다.
드롭이라는 거야. 그녀의 얼굴은 따뜻한 방에서 사십 오분 쯤 자고 일어난 어린 아이처럼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기분이 좋거나 아니면 굉장히 기분이 나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고보니 비디오 가게에 다녀온 그녀는 달랑 도넛만 들고 있었다.
밀가루에 베이킹파우더하고 소금을 섞어서 체에 내려 두고 녹인 버터에다가 달걀을 풀고 설탕 조금하고 우유를 넣어서 소금으로 간을 해. 이것들을 섞어서 반죽을 하고 취향에 맞게 건포도나 아몬드를 곁들여도 돼. 기름은 170도를 유지하면서 숟가락으로 둥글게 떠서 튀겨내는 거야. 설탕하고 계피가루를 큰 접시에 섞어서 튀겨낸 도넛을 놓고 살살 흔들어주면 끝. 어때?
위생봉지에는 설탕을 뒤집어쓴 도넛이 다섯 개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녀의 설명대로 아몬드가 씹혔다. 적당히 바삭바삭하고 끈기가 있는 게 솜씨 좋게 튀겨낸 도넛이었다.
도나쓰 장사 왔니?
아아니, 103호 영감 말이야, 그 영감이 만든 거야. 특이하지 않니?
그녀의 이마에서 실제로 빛이 반짝였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느낌만은 분명 그랬다.
할 일 없는 영감이야.
나는 도넛을 씹으면서 볼멘 소리를 했다.
그래, 도나쓰 만드는 법이라도 수강했니? 너두 해보겠다는 거야? 집안에 튀김 기름 냄새가 진동하면 머리가 아플텐데, 하고 나는 걱정부터 했다.
들어봐봐. 비디오 가게 가려고 나갔잖아. 계단을 내려가는데 기름 냄새가 고소하더라구.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2층 집 꼬마애를 만났는데 걔가 뭘 오물거리고 있어서, 니네집 잔치하는구나, 물었지. 그랬더니 얼굴이 빨개져서 도리질을 치더니 밖으로 뛰어가버리더라구. 왜 있지, 그 단발머리 여자애, 눈이 크고 까만애 말이야. 1층으로 내려오니까 103호 현관 문이 열려 있더라. 기름 냄새는 그 집에서 나는 거였어. 엿보자는 건 아니었는데, 거의 본능적이었다고나 할까, 암튼 뭐 그런 거였는데 기분은 좀 이상했어. 이런 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암튼 상황을 설명해볼게.
상황은 무슨...여태 영감쟁이하고 노닥거리다가 와놓구서.
나는 첫 번째 도넛을 삼키고 두 번째 것을 집어들었다. 이번 건 속에 딸기 시럽이 들어 있었다. 취미라고 하기엔 전문적인 솜씨였다.
들어보라니깐. 글쎄 그 집 안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리는 거야. 힛, 노인네 혼자 사는 집에서 기름 냄새가 솔솔 풍기고 헐떡거리는 숨소리, 신음 소리가 들리다니...누구라도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겠어. 그래서 열린 문틈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봤지.
나는 그 대목에서 혀에 얹혀진 딸기 시럽의 끈적한 느낌을 맛보고 있었다. 왠지 비릿한 맛이 전해졌다. 우리가 사는 집이 503호니까 103호와는 완전히 똑 같은 구조다. 그녀는 현관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해보였다.
저기쯤에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데, 신음소리는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었어. 에그~~포르노였어. 웃기잖아...포르노라니. 흑인 남자가 금발 머리 백인 여자를 엎드리게 하고는 한참 정신없이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있잖겠어.
1층에 사는 노인이 한낮에 문을 열어두고 포르노를 보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도넛을 튀기면서? 하고 나는 물었다. 딸기 시럽이 아무래도 께름해서 삼키기가 쉽지 않았다.
아아니, 그 영감은 소파에 앉아서 자기 물건을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어. 형편없이 축 늘어지고 시커먼 그걸 반죽하듯이 주물주물하고 있는데, 표정이 말이야, 아주 황홀경에 빠졌더라구.
나는 벌떡 일어나 싱크대로 가서 입속에서 굴리던 도넛을 뱉어버렸다.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난, 그대로 돌아서 나오려고 했는데, 아직 영감이 나를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그게 쉽게 잘 안되더라구. 그래서 엉거주춤 서 있었는데 그만 둘이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어. 어쨌게? 정말 웃기더라. 아주 태연하더라구. 빙긋 웃더니만 말이야, 아, 503호 색시네, 어서와! 하면서 그 손을 들어 흔드는 거야.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서 그걸 집어넣고 지퍼를 올리더라구. 포르노는 막바지였어. 흑인 남자가 삼십센티미터가 훨씬 넘는 물건을 마구 흔들어서 백인 여자의 얼굴에 정액을 쏟았어. 하얀 덩어리들이 툭툭 날아가 여자의 얼굴에 떨어지더라. 히히...나, 그런 거 처음 봤어.
뭘 얘기하고 싶은 거야?
나는 침을 퉤퉤 뱉으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말 뻔뻔한 건지, 아니면 사람들 말처럼 미친 건지, 너무 태연해서 난 내가 본 게 잘못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 기름 온도가 적당해졌을 거야, 마침. 영감이 그렇게 말하고는 비디오를 끄고 주방으로 걸어갔어.
그냥 나올 수 있었잖아!
그랬지. 근데, 자꾸만 계단에서 본 2층 집 애가 마음에 걸리는 거야. 아무래도 걔가 그 집에서 나온 것 같았거든. 그렇다면 영감이 그 짓을 하는 걸 봤다는 얘긴데...그냥 보긴만 했을까, 아니면...
나는 우글대는 정충 같은 느낌을 떨쳐내려고 몇 번이고 수돗물로 입안을 행궈냈다.
그래서? 뭘 알아냈는데?
암튼 난 영감을 따라서 주방으로 갔어.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건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일이잖아. 어떤 의무감 같은 게 생겼던 거야. 근데, 영감을 가만히 보니깐 이 인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너무 태연한 거야. 하도 자연스러워서 내가 뭘 착각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어. 튀김용 팬에는 기름이 끓고 있었고, 도넛 반죽이 마련되어 있었어. 영감은 아주 익숙한 솜씨로 도넛을 만들었어. 그러면서 텔레비전 요리사처럼 아주 신나게 도넛 만드는 법을 설명하는 거야. 내가 끼여들 틈을 주지 않더라구. 도넛에 관한한 정말 전문가였어. 기가 막히더라구. 도넛의 유래와 역사, 도넛에 얽힌 야사까지 주워섬기는 데 정말 대단하더라구.
그게 다 술수야. 니 정신을 홱 돌려놓은 거라구.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전형적인 수법이잖아.
그럴 거라고 나도 생각했어. 내가 누구니? 그런 거에 넘어가겠어. 도넛을 몇 개 얻어먹으면서 기회를 봤지. 슬슬 맞장구도 쳐주면서 말이야. 그러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물었지. 저, 혹시 2층집 아이가 조금전에 여기 있지 않았나요? 여기서 나오는 걸 본 거 같아서 말이에요.
그랬더니?
확실히 당황하더라. 그게 뭐, 에, 그러니까...그냥 예뻐서 도넛을 좀 준 것 뿐이야. 하면서 얼버무리더라구. 난, 요리를 이웃들하고 나눠먹는 걸 낙으로 삼거든. 자, 이건 집에 가서 먹어. 그러면서 도넛을 싸서 내밀잖겠니. 내가 빤히 쳐다보니까, 공짜야, 하면서 웃더라구. 뭐 그렇게 나오는데 자꾸 따지고 물을 수도 없고, 솔직히 좀 겁이 나기도 했어.
뭐야, 그게 전부야? 그러니까 그 미친 늙은이가 도나쓰로 애를 꼬드겨서 뭔가 일을 벌였던 게 분명하잖아.
증거는 없잖니.
그녀가 풀이 죽어 말했다. 나는 빽 소리를 지르려다가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고개를 처박았다. 커다란 정충이 뱃속에서 요동을 치는 것 같았다.
너무, 그러지마. 도넛을 만들기 전에 손은 씻었으니까.
"도나쓰?"
"그래, 도넛. 소설쯤 쓰려면 정확한 말을 사용해야지. 도넛이야, 도넛. 난닝구, 오도바이, 짱께, 돈까쓰, 테레비...이런 거 안돼. 알지?"
"돈 좀 줘. 비디오나 빌려봐야겠다."
나는 짜증이 나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내 윗도리에 봐봐. 뭐야, 근데? 벌써 그만두는 거야?"
그녀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허벅지의 담뱃재를 신중하게 들어올렸다.
"도나쓰보단 좀 근사한 걸 써야지. 상상력에 보탬이 될만한 영화를 보려구 그래."
"얼씨구?"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도나쓰는 재미없어." 하고 나는 잘라말했다.
"103호 영감 얘기라면...그건 정말 끔찍한 거잖아."
"재미있을 거야."
"그 영감은 알콜중독에 싸이코야."
"비디오나 빌려와. 도입부를 써둘테니까."
그녀가 다시 담배를 피워물며 말했다. 컴퓨터를 켠 이후로 그녀는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막상 작가에 어울리는 건 그녀 자신이었다. 돈을 찾아들고 얼핏보니 이번에는 <칼갈이>이라고 입력하고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칼갈이>
뒷산 약수터에 물 뜨러 간다던 그녀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나는 누렇게 변색되고 뻣뻣한 철 지난 스포츠 신문의 연예면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며칠 전 기자회견을 열어 이혼을 발표한 커플의 결혼 기사가 전면을 뒤덮고 있는 신문이었다. 오전 내내, 어디선가 목공소 소리가 들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파트에 목공소가 들어올 리도 없고 보면 누구네 집에선가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신경이 곤두서면 묵은 신문을 뒤적거리는 게 내 습관이었다. 뛰어들어온 그녀는 싱크대로 달려가더니 허겁지겁 부엌칼을 꺼내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내가 깜짝 놀라서 묻자, 그녀는 잠깐만, 하고 다시 뛰어나갔다.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부엌칼을 들고 뛰어나가다니 예사롭지는 않았다. 나는 뒤따라 나가볼까하다가 그만 두고 주방 창문을 열었다.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았지만 별다른 상황은 벌어지고 있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 동네 여자 서너 명이 모여 있고 103호 영감이 쭈그리고 앉아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곧 나타났다. 여자들이 깔깔 웃었다. 그녀가 칼을 내밀자 영감이 받아들면서 뭐라고 중얼댔다. 다시 여자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따라나가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왱~. 곧, 연마기 돌아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그러니까 오전 내내 시끄럽던 목공소 소리는 103호 영감이 칼 가는 기계를 돌리던 소리였다. 왱, 쓰르륵, 왱, 쓰르륵... 칼 가는 소리만 들어봐도 제법 숙련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힐끗 들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다른 여자들도 하나 둘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집어넣었다. 워낙 작은 아파트 단지라 이곳 사람들은 인사가 없어도 누가 몇 동 몇 호에 사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누구네 집 남자가 노름판에서 집문서 날리고 가출했다느니, 누구네 부부는 매일 새벽 두 시면 밤일을 치른다느니, 그저 스쳐 지나면서도 별 해괴한 소문을 수근대는 걸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이 아파트였다. 인간관계가 없으면 없을수록 그들은 뒤에서 수근거렸고, 친하면 친할수록 끼리끼리 다른 사람들을 헐뜯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 틈에 그녀가 섞여드는 게 불만스러웠다. 단속을 좀 해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어머머, 왜 이러세욧!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 건 신문을 가지고 변기에 막 걸터앉으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재빨리 주방 창문으로 달려갔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기가 무섭게 '씹빨년들이!'하고 질근질근 씹어서 뱉는 욕설이 튀어올랐다.
동네 여자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서 있고, 그녀는 그 옆에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103호 영감이 그녀들을 향해 손을 내둘렀다. 그 손에 쥐어져 있는 하얗게 빛나는 물건이 칼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씨발년들이, 칼을 갈았으면 돈을 내야할 거 아냐! 어디서 공짜로 먹을라 그래.
영감은 칼 든 손으로 삿대질을 해대며 고약하게 욕을 내뱉었다.
이 아저씨가 미쳤는가봐? 아저씨가 장사로 나섰어?
그 중 나이든 여자가 맛대거리를 하고 나섰다. 앞 동의 베란다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고 밖에 나와 있던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게 보였다.
괜히 칼 갈아준다고 해놓고서 이제와서 돈을 내라니 그런 게 어딨냐구요. 안 간다고 하니까 막무가내로 그러라고 해놓고서...정말 이상한 할아버지네.
물러섰던 젊은 여자가 힘을 얻어서 큰소리를 쳤다. 응원을 요청하는 소리였다.
어쭈, 이 년들이, 작당을 해서 사람 병신 만드네. 야, 이 년들아, 니들이 한 번 준 적이나 있어. 확 가랑이를 찢어벌라. 칼두 순 싸구려만 쓰는 년들이.
멀리서 아파트 경비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고, 누군가, 경찰 불러! 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녀에게 어서 빨리 피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악몽 속처럼 소리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제법 모여들었다. 업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젊은 여자가 어디론가 냅다 달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영감은 순식간에 아파트 주민들에게 빙 둘러싸여 한껏 주눅든 푼수가 되고 말았다.
아, 아저씨 또 왜 이러세요?
경비가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 쌍년들이 꽁짜로 칼 간다잖아. 천원이 그렇게 아깝냐, 아까워? 순 똥깔보...
하는데, 욕설에 흥분한 동네 여자들이 한꺼번에 악다구니를 쓰자 영감의 목소리는 흔적도 없이 묻혀 버렸다.
아저씨, 정말 경찰 불러요? 왜 이러세요? 아파트에서 이런 거 하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어서 들어가세요, 들어가.
여자들의 기세를 등에 업은 경비가 영감에게 과감히 달려들었다. 영감은 힘없이 밀렸다. 영감은 경비에게 떠밀려 집안으로 들어갔고 연마기와 의자 등속이 치워졌다. 소동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진정되었다. 동네 여자들만이 여전히 서성거리며 웅성대고 있었다. 그 웅성거림 속에 미친 새끼, 하고 새된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담배 한 대참이 지나자 그녀가 돌아왔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대체 뭐야, 저 영감탱이? 하면서 나는 오른손 검지를 관자놀이께에서 빙빙 돌렸다.
약수터 가려고 나가는데 괜히 사람 붙들고 칼 갈아준다고 하잖아. 아주 막무가내더라구. 다른 여자들도 있길래 괜찮겠다 싶었지 뭐. 그리고 우리 부엌칼 잘 안들잖아. 그래서...
하다가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부엌칼을 두고 빈 손으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일본에 여행 다녀오면서 샀다는 뭉툭한 칼이었다.
원래 미친 거야, 아니면 낮술을 먹은 거야?
잘 모르겠어. 사람들 얘기가, 할머니 앞세우고 나서 실성기가 좀 있다는 거 같기도 하고. 집 앞에 의자들 죽 내놓고 다른 사람들 차 못대게 해서, 대판 싸움이 난 적도 있대. 지네 자식들 차를 대는 자리라나. 근데 그 자식들은 코빼기도 안 비친다는 거야, 한번도. 그래도 동네 애들한텐 인기가 좋은 가봐. 애들이 도나쓰 할아버지라고 하면서 졸졸 따른데. 애들한테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면 꼭 나쁜 사람은 아닐텐데 왜 저렇담.
우리 부엌칼의 행방은 묘연했다. 우리들은 저녁 무렵에 내려가 소동이 있던 부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칼을 찾을 수 없었다. 경비가 영감의 연마기와 함께 103호에 넣어준 모양이었다. 103호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벨을 누르고 부엌칼을 돌려달라고 한다는 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겨우 진정한 영감이 미쳐 날 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직도 부엌칼 없이 살고 있다. 그렇게 살다보니 별로 불편할 것도 없었다.
칼갈이라니...! 나는 고개를 내두르며 밖으로 나왔다. 용역회사에서 계단 청소를 했는지 물기가 거무죽죽하게 남아 있었다. 1층, 103호 앞에 멈춰서서 나는 살그머니 현관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약간 무거웠지만 손잡이는 스르륵 돌아갔다. 이제 잡아당기기만 하면 문이 열리 거였다. 이 집의 주인은 분명 떠난 것일까. 혹시 아직도 남아서 포르노를 보며 도넛을 튀기는 건 아닐까. 소문과 사실은 명백히 다른 법이다. 그가 이곳을 강제로 떠났다는 건 소문일 뿐이다. 그것도 그녀가 어느날 주워듣고 온 소문에 불과했다. 지난밤에 엠뷸런스가 와서 발광을 하는 영감을 싣고 떠나버렸다고. 그리고 자식들이 나타나서 가구들을 정리하고 집을 내놓았다고. 하지만 문을 열면 소파에 앉아 자위를 하는 영감과 눈이 마주칠 것 같아 더럭 겁이 났다.
비디오 가게에 간 나는 건성으로 자켓들을 훑어보며 주인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하면 103호 영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골몰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비디오 가게 여자의 표정이 오늘따라 무척 어둡고 무거웠다. 문이 열리면서 초등학교 1학년인 이 집 딸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어, 보람이 학교 안갔니?"
몇 번 본 적이 있는 아이라 알은 체를 했다.
"왜 자꾸 가게엔 나오는 거야? 빨리 집에 가!"
아이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데 주인 여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이가 샐쭉해서 돌아갔다.
"봄방학이잖아요."
"아아, 네에..."
주인 여자와 나는 어색하게 주고받았다. 나는 머쓱해져서 둘 곳 없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낯 익은 제목이 내 시선을 끌었다. <거미 여인의 키스>. 두 번인가 본 적이 있는 영화였다. 마뉴엘 퓨윅의 연극을 헥터 바벤코가 영화로 옮긴 건데 윌리엄 허트의 동성애자 연기가 그럭저럭 볼만했다. 나는 비디오 자켓을 다시 한 번 훑어본 뒤 만지작거리다가 제자리에 꽂았다. 굳이 다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냥 가시게요?"
"네, 뭐, 오늘은 볼만한 게 얼른 눈에 안들어오네요."
"신프로는 안보세요?"
"비싸잖아요."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비디오 가게를 나왔다. <도넛>이나 <칼갈이>보다는 <거미 노인의 키스>가 훨씬 낫지, 암, 그렇고 말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나왔다.
"뭐야,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비디오가 없어?"
그녀는 내 빈 손을 쓱 훑어보더니 비아냥거렸다. 얼마 안되는 시간이었는데 그녀는 꽤 많은 분량을 쓴 모양이었다. 그녀가 내민 노트북의 화면에는 이야기가 빽빽하게 입력되어 있었다. 나는 대충 훑어본 뒤 원고의 마지막 부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비디오 가게에서 떠올린 제목을 똑똑 찍어넣었다.
<거미 노인의 키스>
늙은 거미는 멈춰야할 때를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다해도 제동을 걸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전혀 반성의 가능성이 없었거나. 어느쪽이 진실인지는 그 자신도 모르고 있을 거였다. 언제나처럼 그날도 이 거미 노인은 거미줄을 치고 먹잇감이 걸려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반쯤 열어두고 포르노 비디오를 걸어둔 채였다. 튀김 기름은 팬에서 또록또록 소리를 내며 알맞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치원에 다녀온 그 여자아이는 놀이터에서 혼자 모래 장난을 했다. 아이의 엄마는 마침 근처에 새로 문을 연 대형 할인점에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갔다. 할인점의 순환 버스가 여자들을 친절히 모시러 왔고, 개점 기념으로 고무 대야를 준다는 말로 꼬드겼던 것이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그녀도 고무 대야를 받기 위해 그 순환 버스에 탔었으니까.
미친년들이잖아, 그깟 고무 다라이 없어서 어디 죽나?
흥분한 동네 슈퍼마켓 주인은 거미 노인 사건의 발단 자체가 고무 대야인 것처럼 몰아갔다.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든 거미 노인 사건의 실체에 가장 근접한 정보는 슈퍼마켓 주인 여자가 가지고 있었다.
그날, 늦은 오후, 모래 장난에 지친 그 여자아이는 혼자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그 끈적거리는 유혹의 냄새는 좌우로 느릿느릿 꿈틀거리면서 먹잇감을 향해 다가갔다. 처음에는 아이의 코끝을 슬쩍 건드리고 물러나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번에는 강도를 높여 콧속으로 밀고들어갔다. 유치원에서 점심을 먹은 지 한참 지난 시각이었기 때문에 냄새에 자극을 받은 아이는 더욱 배고픔을 느꼈다.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침샘에서 솟아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냄새는 아이의 코끝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노련한 움직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103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파트 현관, 그리고 다섯 개의 계단, 아이는 홀린 듯이 움직여 나갔다. 빠끔하게 열린 103호 현관문을 아이는 올려다보았다. 만약 그 너머의 공간이 털끝만큼이라도 어두컴컴하거나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면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대개의 거미과 동물들이 그러하듯, 거미 노인은 용의주도하고 놀라운 참을성을 가지고 있었다.
빠끔히 열린 문틈에서 풍겨나오는 고소한 냄새와 부드러운 햇빛은 상대적으로 어두컴컴한 아파트 계단에 서 있는 아이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몇 번 망설였지만 결국 냄새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거미 노인의 집안을 살그머니 들여다보았다.
안녕, 넌 누구니?
아주 자상하고 반기는 목소리부터 들렸다. 그리고 5초쯤 지나자 사람 좋은 표정의 노인이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사람 좋은 표정의 할아버지다. 아이는 이제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예의바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어, 그래. 들어와 보렴. 마침 할아버지가 도넛을 만들려던 참이거든. 도넛 좋아하니?
네에... 아이는 수줍게 대꾸했다. 거미 노인은 아이의 작은 어깨를 토닥거려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아이가 빨간 구두를 벗자, 모래가 한웅큼 쏟아졌다.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했구나, 귀여운 아가씨!
엄마 같았으면 벌써 觢觢 소리를 질렀을 테지만 이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아이는 이제 편안함을 느꼈다. 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집에서 상냥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늙은 거미는 아이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친절하게 의자를 빼주고 아이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식탁에 기댈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밀어주었다.
이 할아버지는 도넛에 대해선 박사란다. 도나쓰? 아아니, 도넛, 도넛이야. 따라해봐. 도-넛. 그렇지! 도넛이란다. 자, 이제부터 할아버지가 도넛 종류를 얘기해줄테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보렴. 뭐든지 괜찮아. 귤도넛, 깨도넛, 드롭도넛, 꽈배기도넛도 있고, 음, 고구마튀김도넛, 미니도넛, 바나나도넛, 베이비도넛, 사과도넛, 아몬드도넛, 프티도넛...하하, 아주 많단다. 어때 대단하지? 뭐가 마음에 드니?
아, 그제서야,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도나쓰 할아버지라고 말하던 사람이 바로 이 할아버지구나, 하고 깨달았다. 작은 위장은 찌르는 듯이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도나쓰 할아버지가 너무 무섭다고 했는데,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 이렇게 자상하고 요정처럼 착한데 뭘. 오늘 유치원에서 읽었던 성에 사는 거인처럼... 괜히 겁을 먹어서 그런 거지, 알고 보면 다른 어른들보다 훨씬 착한 사람인 게 분명했다.
그럼 할아버지가 골라볼까요? 그래, 우리 공주님은 아주 예쁘고 착하니까 베이비도넛에 시나몬 슈가를 곁들이는 게 좋겠다. 어때, 좋지?
거미 노인은 아주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잘 봐라. 그는 아이에게 도넛을 만드는 과정을 일일이 설명해주며 춤을 추듯 움직였다. 마치 텔레비전에 나오는 즐거운 요리사처럼 보였다. 커다란 유리 볼에 달걀을 풀고 셀러드 기름을 넣어서 거품기로 휘휘 저었다. 아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노인은 유리 볼을 아이 앞에 놓아주고 거품기 젓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한쪽으로, 그렇지, 한쪽으로 휘휘 저으면 돼. 살살해도 되니까 걱정마라.
아이는 노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이렇게 하면 맛있는 도넛이 된단 말이지. 유치원 요리 시간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노인이 우유를 붓자 아이는 신이 나서 빨리빨리 막 저었다. 노인은 박력분에 베이킹 파우더를 섞어 체로 내리고 유리 볼의 달걀 반죽물과 혼합했다. 즐거운 반죽 시간이었다. 노인이 코에 반죽을 찍어바르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자 아이는 배시시 웃었다. 노인은 숙련된 솜씨로 반죽을 방울토마토 크기로 떼어내었다.
너도 해보련?
아이는 따라해 보지만 모양이 삐뚤빼뚤,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노인은 잘했다, 하고 아이를 칭찬했다.
자, 이제 기름에 튀겨내면 된다. 잘 봐요.
예쁜 도넛 반죽을 기름에 넣자 뽀그르르-, 소리를 내면서 거품이 올라왔다. 그 소리가 재미있어 아이가 눈웃음을 지었다.
이건 시나몬 슈가란다. 아주 달콤한 거지.
거미 노인은 백합 무늬 접시에 도넛을 담아서 내놓았다. 아이는 뜨거운 것을 호호 불어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은 순식간에 기쁨과 행복으로 변했다. 따뜻한 코코아까지 곁들이자 그때까지 아이의 무의식에 남아 있던 일말의 불안감마저 봄눈 녹듯 사라졌다.
우리 텔레비전 함께 볼까?
아이의 눈에서 행복과 포만감을 읽은 거미 노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아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영화말고 할아버지랑 재미있는 비디오 보자.
아이는 내심 만화영화가 보고 싶었지만 친절한 할아버지의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을 켜자 화면에 외국 아저씨가 보인다. 아주 덩치가 크다. 레슬링 선수인가? 어, 그런데 팬티를 입고 있지 않다. 하하, 우리 아빠 샤워할 때처럼 아주 빨개 벗었다. 거봐, 재밌지? 할아버지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텔리비전 속의 아저씨는 빨개 벗은 채 춤을 추었다. 커다란 방망이만한 고추가 덜렁거렸다. 외국 아줌마도 나왔다. 엄마보다 훨씬 날씬한 그 아줌마는 머리가 빨간 색, 마찬가지로 빨개 벗었는데 아저씨의 고추를 맛있게 빨았다. 아이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신음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어깨에 얹혀진 할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섭니?
아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하얀 타이츠를 자신도 모르게 꽉 움켜쥐었다.
저건 아주 재밌는 놀이야. 저런 놀이를 하면 아주 친해진단다. 너, 보람이 아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슬기는? 슬기는 아는구나. 슬기도 할아버지랑 저 놀이했다. 주희랑 현주도 했고. 니 친구들이지?
...네에..
아이는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거미 노인은 아이가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랄섹스에 열중한 포르노 배우들은 숨가쁜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자, 할아버지랑 놀아주면 매일매일 도넛을 줄게.
할아버지는 바지를 내리면서 아이를 끌어당겼다. 거기엔 시커멓고 쪼글쪼글한 고추가 축 늘어져 있었다. 슬기랑, 주희랑, 현주랑 다 이 놀이를 했다구?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친해지는 건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매일매일 도넛을 먹는 건 나쁘지 않았다.
숨이 막히고 목이 아팠다. 할아버지 말대로 재밌는 놀이가 아니었다. 토할 것 같았고 무서웠다. 다리 사이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할아버지는 도넛을 싸주고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다.
또 놀러올 거니?
아이는 울먹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뺨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었다. 비린내가 났다.
엄마한테 얘기하면 경찰 아저씨들이 잡아간다.
할아버지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무섭기 짝이 없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걸음을 걷기가 힘들었다. 작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야단부터 쳤다.
어디, 어디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지. 이렇게 늦게 집에 안오면 엄마가 얼마나 걱정을 해. 엄마 미치는 꼴 볼래?
엄마, 아파! 하고 아이가 말하자 엄마는 이마를 짚었다.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여태 어디 있었어?
저어기....하면서 아이가 맥없이 고꾸라졌다. 아이의 타이츠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그 타이츠는 뒤집힌 상태였다. 한 시간 뒤, 소아과를 거쳐 산부인과로 옮겨진 아이의 입과 질에서 정액과 음모가 다량 체취됐다. 의사는 질의 찰과상에 대해 4주 진단을 내렸다. 파출소에서 급히 달려온 순경은 전화로 '미성년자 의재 강간'이라는 보고를 했다. 아이의 엄마는 그제서야 무너지고 말았다.
앞에서 밝혔듯이 거미 노인 사건의 전말은 슈퍼마켓 주인 여자에게서 들은 것이다. 슈퍼마켓 주인 여자는 할인점 순환버스를 아파트 구내까지 유치한 부녀회와 사이가 좋지 않은 전 부녀회장과 친했고, 전 부녀회장은 바로 그날 병원에서 사건을 담당한 순경의 아내였다. 그녀는 그 아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 중에서 줄잡아 스무 명 정도는 거미 노인에게 당했을 거라는 비공식 정보도 제공해주었다. 문제가 커지면 아이들이 받을 정신적 피해를 생각해서 모두들 쉬쉬할 뿐이며, 거미 노인 집에 드나들었지만 설마 내 아이만은 그런 일이 없을 거다, 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다 그 놈의 지랄 같은 고무 다라 때문이지 뭐겠어? 그깟 게 뭐라고 딸아이 장래를 망치냐고 내 말은...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합의 봤다잖아. 5백인가 6백인가 받았다지 아마. 아유, 나 같으면 넘사스러워서 이 동네 뜨지 못살아, 못살지 암.
칼갈이 영감, 어젯밤에 정신병원에 끌려갔대.
며칠 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그녀가 슈퍼마켓에 다녀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엠뷸런스가 와서 단 오 분만에 끌고 갔대나봐. 그거 뭐지, 탈출 마술사들이 입는...왜 있잖아, 팔을 꼼짝도 못하게 하는..? .구속복. 그래, 구속복! 그걸 입혀가지고 개 끌 듯이 차에 실었는데 영감이 눈을 허옇게 뒤집고 아주 미친 개처럼 거품을 물면서 소리소리 지르고 난리였대잖아.
어젯밤엔 조용했잖아.
<대부> 1,2,3편을 죽 보느라고 밤을 새웠는데 정말 어젯밤은 조용했다.
어제가 아니었나? 하고 그녀는 자신없게 중얼거렸다.
미친 사람이었대?
아아니, 알콜 중독이래나봐. 그러니까 술을 안 먹었을 땐 아주 얌전하고, 지난번 칼갈이 사건 때는 술을 먹었던 모양인데, 중독자들은 그게 잘 표가 안난데.
이젠 103호 앞 지나다니면서 안심해도 되겠네.
사흘 쯤 뒤에 우리들은 소설을 마무리지었다. 한밤중에 103호 영감이 엠뷸런스에 실려가는 장면이 마지막이었다.
"너무 끔찍한데."
"내가 그랬잖아, 재미없을 거라구. 이런 얘긴 사실 그대로 옮겨놓으면 오히려 끔찍하게 과장한 거 같단 말이야."
"그래도 뭔가 기념될만한 일을 했잖아. 생각보다 수월하게 마무리됐어. 축하해."
또 다시 그녀가 '기념'을 들먹였다.
어쨌든 우리는 소설을 끝낸 '기념'으로 조촐한 파티를 했다.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세 병이나 비웠다. 다음날, 아주 지독한 두통과 햇빛 때문에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았다. 집안을 둘러보지 않아도 그냥 느낌으로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함께 사용했던 여성용 자위기구와 자신의 옷가지만 챙겨서 떠났다. 커피 여과지에 갈겨쓴 메모가 식탁 위에 남겨져 있었다.
-새벽에 깼는데, 우리도 서로에게 거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날 미워하지마.
이별의 변명치고는 형편없는 억지였다. 그나마 참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얼마간의 돈을 남겨두고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월세를 내고 이젠 나도 떠나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잡지사에서 보내온 우편물을 받았다. 그것은 막을 길이 막막한 관리비와 전기요금, 수도요금 고지서 사이에 섞여 있었다. 순식간에 기대감으로 얼굴이 벌개졌지만 내용은 그런 게 아니었다. 당선은 되지 않았지만 당신의 소설은 괜찮은 구석이 많다. 그러니 우리 잡지의 다음 호에 신인 작품으로 게재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 하는 제안이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공중전화로 잡지사에 전화를 걸었다.
<거미 노인의 키스>를 쓴 사람이라고 하자, "어, 여자분이셨네요?" 하고 편집자가 말했다.
"문제가 되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좀 뜻밖이라서..."
한 번 나와달라는 말에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복덕방에 가서 집을 내놓고 돌아오는 길에 103호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무거웠으나 잠겨 있지 않았다. 살그머니 돌려서 잡아당겨보았다.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동남쪽을 향한 베란다 창 가득 햇빛이 들어차 있었다. 집안은 건조했고 소파와 몇 가지 가구들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나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 쓴 식탁 위에 작은 손가락 자국이 몇 개 보였다. 분명 어린아이의 손자국이었다. 싱크대에 기울어져 있는 튀김 프라이팬 속에는 시커먼 기름이 고여 있고 바퀴벌레 몇 마리가 죽어 있었다. 바짝 마르고 검게 변색된 개수대에 끝이 뭉툭한 부엌칼이 버려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우리들의 부엌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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