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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단편소설/김성달/돌아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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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단편소설/김성달/돌아보지 마라
김성달 소설가
돌아보지 마라
동우는 할머니와 나란히 걷는 게 처음이다. 어려서는 할머니 뒤를 따라다니느라 바빴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늘 할머니보다 앞서 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깨를 나란히 걷는 게 여간 어색한 게 아니지만, 누군가 일부러 조종하는 것처럼 발걸음이 할머니의 보폭에 맞추어지고 있다.
아침에 소나기가 쏟아진 도로는 빗물로 번들거리지만 며칠째 계속되는 폭염으로 후끈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고층 건물이 빽빽한 시가지를 등 뒤로 한 채 두어 시간을 걸었는데 할머니는 도무지 말이 없다. 여전히 도로는 길게 이어지는데 주변이 점점 흑백의 빛으로 어두워진다. 동우는 소나기가 또 쏟아지나 싶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피지만 태양 빛이 여간 강렬하지가 않다. 그런 하늘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주변의 풍경은 흑백텔레비전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이 색깔과 빛을 잃어간다.
“할머니, 어디로 가는 거야?”
도로는 물론 주변의 풍경이 완연한 흑백의 경계로 들어서는 순간 동우는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바라본다. 할머니의 모습 역시 색깔이 사라진 흑백으로 바뀌었다. 순간 동우는 일식인가 싶어 얼른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태양은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약간 쉰 듯하면서도 끝이 갈라지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온전하게 모아져 동우의 귀에 들린다. 동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어깨선에 걸린 할머니의 얼굴을 흘끔거리지만 흑백의 공간에서 음영이 뚜렷하지가 않다.
“넌 어떻게 된 일이냐?”
“뭐가?”
“주말도 아닌데 어떻게 집에 왔어?”
“그런 할머니는 아침에 왜 집에 있었어? 새벽에 일을 나가면서….”
“할미가 꿈을 꾸다가 늦잠을 잔 모양이다.”
“무슨 꿈?”
“….”
동우는 오늘따라 할머니의 모습이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자신의 모습도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인다. 눈을 뜨니 실습을 나간 공장의 기숙사가 아니라 할머니와 둘이 사는 단독주택의 반지하 방이었다.
동우는 2학기가 시작되자 음료 공장으로 현장실습을 나가면서 월요일 아침에 회사에 들어가 금요일 저녁에 집으로 오는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기숙사라고 하지만 따로 갖춰있는 게 아니고 공장 바로 옆 사무실 건물 3층 구내식당에 임시로 2층 침대를 놓고 사용했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음식 냄새는 그렇다 하더라도 공장 사람들이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내지르는 소음이 칸막이 넘어 고스란히 들려왔다. 종일 고된 현장 작업을 하고 다음 날 일을 하려면 쉬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아예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아 술을 받아마시는 동료들도 있었다. 동우는 저녁이면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 듣던 반지하 방에서의 빗소리가 그리웠지만 꾹 참고 현장에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옆에서 나란히 걷던 할머니가 궁금한 듯이 동우를 부른다.
“동우야? 넌 원예과인데 공장에서 왜 다른 일을 하고 있어?”
“할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할미가 어떻게 알어? 네가 이야기를 했으니 알지.”
동우는 할머니가 알면 걱정을 할까 봐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실습을 나간 공장에서는 전공인 원예일을 할 수 있는 현장은 없고 온통 허드렛일만 시켰다. 그래서 동우는 현장에서 자주 이용하는 지게차 면허증을 속성으로 땄다. 전공과는 무관하지만 면허를 따두면 나중에 작물이나 꽃을 재배할 때도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회사에서는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포장된 음료 팔레트를 지게차로 옮기는 일을 동우에게 덥석 맡겼다. 동우는 그런 일이라도 맡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열심히 했더니 반장으로 뽑혀 관리자와 소통하는 역할을 했다. 회사에서는 동우가 일하는 눈썰미가 좋다고 포장 전체라인의 일을 알려주었다. 실습생인 동우는 공장의 여러 업무를 알려주어 감사하다는 마음에 잔업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원예과 출신이라 포장기계에 관련해서는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회사에서 알려주는 대로 배워서 포장라인을 가동했다.
그렇게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 선임이 갑작스럽게 퇴사하자 회사에서는 인원 충원 없이 동우에게 포장라인 전체를 맡겼다. 실습생의 값싼 노동력으로 숙련공의 일을 시켰지만 동우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우가 책임을 맡은 포장기계 라인이 자주 멈추었다. 포장 공정은 음료를 화물차에 싣기 위해 포장하는 작업으로 자동화 기계가 팔레트에 음료를 차곡차곡 쌓은 후 랩핑을 하는 것이다. 간혹 팔레트가 투입되면서 기계의 센서를 건드려 설비가 멈추거나, 5층으로 쌓이는 음료 중간중간에 들어가는 간지(골판지) 투입 기계가 멈추는 등 고장이 잦았다. 동우는 그럴 때마다 기계를 잘 모르면서도 관리자가 시키는 대로 기계 밑으로 들어가 오류를 제거하고 상태를 보고했지만 회사에서는 수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우는 할머니가 놀랄까 봐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벌써 두 차례나 사고를 경험했다. 첫 번째는 작업 도중에 미끄러진 사고였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핸드폰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 두 번째도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갈비뼈를 부딪쳐 병원에 갈 정도였지만 동우는 꾹 참고 일을 계속했다. 두 사고 모두 포장기계가 고장나 조치를 하고 나오던 중 발생한 사고였다.
영순 씨는 동우가 공장에서 다친 것을 알고 있었다. 주말에야 겨우 보는 동우의 얼굴이 반쪽이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면서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입이 무거운 성정이라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손주를 실업고등학교에 보낸 게 죄를 지은 것 같아 영순 씨는 늘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오늘은 폭염경보 속에 한낮 기온이 35를 넘었다. 영순 씨는 오전 청소일을 마치면 10층짜리 공대 건물 지하층 계단 아래를 막아 만든 휴게실로 잠시 쉬러 온다. 그곳은 원래 청소도구 창고였던 곳을 개조해 만들었는데 선풍기 한 대와 환풍기가 하나가 달려있다. 곰팡내가 너무 심해 청소부들이 자비를 들여 직접 설치한 조그마한 환풍기가 그나마 외부로 연결되어있다. 휴게실에서는 출입문을 함부로 열 수도 없다. 출입문을 열면 학생들이 다니는 강의실 문이 바라보여서 미관상 보기 싫으니 문을 닫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러니 며칠간 계속되는 폭염에도 문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몸으로 선풍기 앞에 앉았으나 휴게소 안의 온도가 30도를 넘길 정도로 무더웠다. 봄부터 휴게실 위치를 옮겨달라, 에어컨이라도 설치해달라고 애원해도 학교에서는 나 몰라라 였다. 교도소 독방보다 협소한 공간에서 영순 씨를 비롯한 세 명의 청소원들이 더위를 견뎠다.
계속되는 폭염에 지친 영순 씨는 아침부터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옥죄는 것처럼 뜨끔거렸지만 조퇴를 할 수 없었다. 용역업체와 1년마다 재계약을 하는데 회사에 밉보이면 6개월이나 3개월 단위로 계약을 하기 때문이다. 일전에 너무 더워 사람이 살 수 없으니 에어컨을 설치해달라고 계속 청원을 넣던 반장은 연말에 재계약에서 탈락했다. 더구나 올해 칠순인 영순 씨의 처지에서는 이만한 직장 구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식당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는데 장시간 고무장갑을 사용하면서 생긴 피부염 때문에 견딜 수 없어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용역업체에 뒷돈을 찔러주고 얻은 일자리이다. 영순 씨는 잠시나마 눈을 붙이려고 선풍기 앞에 누웠다. 뜨거운 공기를 내뿜은 선풍기 바람 때문에 땀이 식을 줄 몰랐지만 지쳐서 곧 잠이 들고 꿈을 꾸었다.
영순 씨는 여고 1학년 열일곱이었다. 그해 서울에 세종로 지하도와 명동 지하도가 생겼는데 두 곳은 서울의 명물이었다. 영순 씨는 꿈속에서 좀 생뚱스럽게도 명동 지하도에 서 있었는데 서울시 도시계획과에 근무하는 아버지 덕분에 명동 지하도 준공식을 볼 수 있었다. 그날은 마침 학교 개교기념일이어서 친한 친구 둘과 함께 그곳에 갔다. 특유의 추진력으로 불도저 시장으로 불리던 서울시장이 환하게 웃으며 준공식 테이프를 끊는 그 자리에 아버지도 있었다. 영순 씨는 그때의 아버지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잠도 잊은 채 일에 매달리던 아버지는 광대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얼굴이 상해 있었다. 그날도 파안대소하는 시장과는 달리 아버지는 별다른 감흥도 없는 표정으로 현장에서 아랫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느라 분주했다. 화려한 준공식이 끝난 후 뜻밖의 일이 벌어져 아버지를 당혹스럽게 했다. 준공식이 끝나기 무섭게 수십 명의 구두닦이와 거지들이 지하도 계단을 점령하고 앉아서 호객행위를 했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인 구두닦이들은 지하도 양쪽에 열댓 명씩 진을 치고 앉아 호객행위를 하는데 영순 씨가 그 일행과 섞여 있고, 멀리서 그런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버지의 침통한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면 놀라 잠이 깼지만, 가슴을 압박하는 통증과 함께 숨쉬기가 힘들었다.
“할머니, 무슨 꿈이었는데 늦잠을 자?”
동우가 다시 물었다. 영순 씨는 방금 현실로 겪은 듯이 선명한 꿈을 차마 동우에게 들려줄 수 없어 얼버무린다.
“할미 어린 시절 꿈….”
“그니까 무슨 꿈이냐고?”
평소와 다르게 동우는 꽤 성가실 정도다. 이제야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변했는지 깨달은 것인지 여간 집요한 게 아니다.
“그나저나 넌 어떻게 된 거냐? 공장에서 일을 하다 두 번이나 다쳤으면 할머니에게 말을 했어야지….”
“누가 다쳤다고 그래. 할머니는 뭘 모르면서….”
동우는 발칵 성을 내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빛이 사라진 대지의 끝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곳이 보인다. 그러면서 할머니와 나란히 걷는 이 순간이 그동안 겪은 시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몸에 와닿는 바람의 무게도, 빛의 따가움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몸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새까맣게 모인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해 서두르는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정해진 보폭과 속도를 넘어서지 않지만 동우는 뭣에 쫓기듯이 재촉한다.
“할머니 빨리 걸어요.”
“동우야. 이제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평소 애면글면하던 모습과 다른 할머니 때문에 동우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수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그들이 내지르는 어마어마한 함성이 들려온다. 순간 동우는 지난겨울, 광화문 광장을 꽉 메웠던 수백만 인파가 손에 들고 있던 촛불이 떠오른다. 학교 야간 실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따금 그 집회에 참석했다. 그러느라 밤이 늦어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는 텔레비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저곳의 사람들은 그때의 촛불 집회와는 다르게 누군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고도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 같았다.
그때 할머니가 쑥스러운 듯이 나지막하게 동우를 부른다.
“동우야. 할미가 여고 1학년 때 말이다….”
“여고 1학년?”
동우는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여고 1학년이라는 말이 낯설다.
“그럼, 열일곱 살?”
“그래. 그때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왔었어.”
“미국 대통령?”
“저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미국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래, 그때는 그랬어….”
미국의 제36대 대통령 존슨이 한국에 온 것은 1966년 10월 31일이었다. 그때 영순 씨는 여고 1학년 학생으로 그 환영인파에 섞여있었다. 한국전쟁 이후로 미국은 우리나라 최고의 우방이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때는 언제나 범정부적인 환영 행사를 개최하며 동원하는 환영인파가 엄청났다.
특히 존슨 대통령이 방한한 1966년 10월 31일~11월 2일의 2박 3일은 한편의 화려한 연극무대 같았다. 당시는 베트남전쟁이 치열할 때였다. 존슨 대통령은 그 전쟁을 반공反共의 성전聖戰이라 선전하면서 자신을 자유세계 영도자로 과시하는 아시아지역 순방 중이었다. 공식 비공식 수행원 350명과 수행 기자,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건국 이래 최대의 손님을 맞게 된 정부와 서울시는 환영 행사에 엄청난 환영 인원을 동원했다. 김포공항에서 한강대교, 용산 삼각지, 시청 앞 광장에 이르는 도로 양쪽에 학생과 시민들이 양국 국기를 들고 있었고, 시청 앞 광장에는 30만 명이 넘는 학생, 시민이 모여있었다.
그날 영순 씨는 시청 앞에 있었다. 가을 하늘은 높고 청명했다. 소풍을 나온 듯이 들뜬 영순 씨와 친구들은 양국 국기와 미국 존슨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도화지, 나무판자. 피켓을 들고 마구 흔들면서도 이따금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곧장 시청 앞으로 나왔으니 벌써 두어 시간이 흘렀지만 기다리는 미국 대통령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환영식을 하는 서울시청에서 청와대를 향하는 연도에는 깃발을 흔드는 학생과 시민으로 꽉 찼고, 광화문 네거리에는 한복차림을 한 연예인들이 꽃다발과 꽃바구니를 들고 미국 대통령을 기다렸다. 이날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00만 명이 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당시 서울시민의 수가 350만 명이었으니 2백만 명은 엄청난 숫자였다. 영순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 대통령 환영 행사라는 게 지겹고 시시하게 느껴졌다. 담임 선생님의 엄한 감시 때문에 빠져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도 눈길은 자꾸 파란 하늘 너머를 향했다. 당장 교복을 벗어버리고 빨간 잠자리가 되어 파란 하늘을 팔랑팔랑 날고 싶었다.
시청 정문 앞에 동서 64계단으로 이루어진 넓은 단상이 마련되었다. 단에는 평화대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계단에는 아름다운 미모의 아가씨들이 서 있었다. 평화대 주위는 수백 개의 노란 국화꽃 화분으로 덮여 있었다. 시청 건물 상단에는 우리나라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가 걸렸고, 하늘에는 특별히 크게 제작한 태극기와 성조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서울시청에 운집한 30만 명의 환영 인파는 이미 오후 3시부터 질서정연하게 미국 대통령을 기다렸다, 환영의 노래를 부를 3천 명의 학생들은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거구의 존슨 대통령이 시청 앞에 마련된 환영식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경찰군악대의 ‘택사스의 황색장미’가 울려 퍼졌고, 3천 명의 학생 합창단이 아리랑을 경쾌하게 불렀다. 한복차림의 여고생 20명이 꽃가루를 뿌리는 가운데 존슨 대통령은 평화대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지친 영순 씨는 북극곰처럼 덩치가 큰 미국 대통령이 이상하게 징그러웠다. 기다린 시간에 비해 환영식은 고작 30분 정도였고, 존슨 대통령의 연설은 10분이었는데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열두 번이나 박수를 보내며 엄청난 환호성을 내질렀다.
영순 씨는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 집회가 이어지던 겨울 부터 그 꿈에서 쉽게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할머니,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이야?”
몇 시간 째 계속 낯선 길을 걷는데도 할머니의 얼굴은 평온하다. 걱정과 근심에 쌓여 종종거리는 모습만 보아온 동우는 그 모습이 자꾸만 생경하다.
“가보면 안다.”
영순 씨는 지난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서울시청까지 꽉 메운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함성을 지르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다가 잠이 들면 자신이 1966년 여고 1학년 그날로 돌아가는 꿈을 꿨다. 떠올리기 싫은 그때가 자꾸 꿈으로 나타나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잊지 못하는 것은 지옥이었다.
영순 씨의 아버지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난 시초는 그날 무료한 미국 측 TV 촬영기사가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의 방향을 돌리면서였다. 존슨 대통령의 방한 모습은 한·미 양국의 TV 방송국으로 실황중계 되었는데 김포공항에서부터 시작해 시청 앞 환영식이 하이라이트였다. 시청 앞 환영식도 실상 공항에서부터 계속되어온 환영의 연장에 불과했다. 그것을 35분간이나 계속 방영한다는 것이 지루했던 모양인지 미국 측 촬영기사가 두 대통령이 앉아 있는 평화대에만 초점을 맞추던 카메라의 방향을 슬그머니 바꾸기 시작했다.
시청 맞은편에 위치한 중국인 마을의 모습이 가장 먼저 전파를 탔는데 실로 어이없는 슬럼지대였다. 서울의 가장 중심인 시청 앞 광장 일대가 슬럼지대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뉴스거리였다. 이어서 카메라는 천천히 중국인 마을과 남창동, 회현동을 거쳐 남산 중턱까지 비추었다. 고층 건물이라고는 3~4층에 불과한 한국은행 본관과 신세계백화점 정도가 고작이었다. 1930년대 이전에 지은 일본 적산가옥이 연속으로 비추어지면서, 그 사이사이 무허가 판잣집들의 처참한 모습이 카메라에 계속 잡혔다. 이 광경을 본 미국인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이 경악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대다수의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한국을 제법 잘 사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TV로 방영되는 존슨 대통령의 환영식 광경을 지켜보던 그들은 한국의 초라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정부와 서울시민들이 정성을 다해 준비한 존슨 대통령의 환영식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정말로 가난한 나라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려주는 행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서울의 그 지저분한 모습이 미국과 유럽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사실을 정작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알지 못했다.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지 않은 시기였다. 우리나라의 가난하고 지저분한 실상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미국에 이민 간 해외 교민이나 유학생들이었다. 훗날 영순 씨가 듣기로는 이때의 TV 방영이 있은 후 한참 동안 해외 교민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해했다고 한다. 교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존슨 대통령 환영식에서 비춰진 서울의 모습을 입에 올린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해 교민 송년회 자리에서 누군가가 발의해 서울시청 주변의 슬럼지대를 깨끗하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교민 공동의 이름으로 작성해 청와대로 보냈고 그 내용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시청광장 앞 중국인 마을은 물론이고, 가파르게 늘어나는 무허가 판잣집을 정리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다. 영순 씨의 아버지는 대통령의 그 지시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서울시청 도시계획과 공무원이었고, 그런 아버지를 통해 영순 씨는 그날의 이 기막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 난 저곳에 가기 싫어.”
“왜?”
“어쩐지 무서워요.”
“그 추운 밤 광화문 촛불 집회는 무섭지 않았고?”
“할머니는 그것도 알고 있었어?”
“내가 우리 손자에 관해 모르는 게 있을까….”
공장에서의 사고도 그렇고, 야간 실습 끝나고 몇 번 참가한 촛불 집회도 그렇고, 누군가가 고자질을 하지 않고서야 할머니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동우는 야간 실습으로 지친 몸을 끌고 참가한 촛불 집회에서 사람들의 힘을 배웠고, 희망을 본 듯도 했다. 하지만 3학년이 되어 나간 현장은 실습생들을 인간이 아니라 값싼 소모품 취급을 했다. 광장과 현장은 달랐다. 차별이 만만찮았고 효율성을 위한 복종과 억압 또한 보란 듯이 존재했다.
동우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몇 시간 동안 미국 대통령을 기다린다는 시청 앞 역시 실습현장처럼 효율성을 위한 복종과 억압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난무하고, 사뭇 강제되고 경색되어 보이는 분위기에 가까이 가기조차 꺼림칙했다.
“동우야, 할머니도 저곳은 싫다. 그런데 넌 어떡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니?”
할머니의 ‘그런 일’이라는 말에 동우는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듯 자신의 몸을 찬찬히 훑는다.
오늘 오전에 일을 시작할 때였다. 팔레트에 음료를 쌓고 있는데 맨 아래층 팔레트가 투입되면서 또 센서를 건드린 모양인지 자동기계 설비가 멈추었다. 동우는 늘 그랬듯이 고장 원인을 찾기 위해 기계 밑으로 들어갔다. 센스와 간지 투입 기계를 한참 살피는데 갑자기 멈추었던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그 위에 몸이 끼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숨이 막혀왔다. 동우는 할머니를 떠올렸는가 싶었는데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고, 곧 피투성이 자신의 다른 몸이 잠깐 보이는가 싶더니 할머니가 잠든 집에 와 있었다.
동우는 이제야 오늘 그 짧은 순간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장에서의 사고로 자신은 이미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럼? 할머니는 동우는 새삼스럽게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아래위로 살핀다.
“할머니는 어떻게 된 거야?”
“할미가 꿈을 너무 오래 꾸었나 봐.”
영순 씨는 낮잠을 너무 잤나 싶어 얼른 눈을 떴다. 하지만 감긴 눈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고 마치 뜨거운 훈증 탕에 들어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잠든 거여?” “왜 이래.” “뭐야.”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몸이 가뿐해지더니 집에 누워있었다. 옆을 보니 동우가 자고 있었고, 그런 손주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되어 조금 더 눈을 붙였다.
영순 씨 역시 자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70년이나 살아낸 목숨이라 아쉬울 게 없지만, 이제 갓 열아홉 동우는 너무 짠한 목숨줄이었다. 허나. 인명이 제천이라. 이미 짊어지고 나온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영순 씨는 엄마가 챙겨주는 속옷과 반찬 약 등을 챙겨 아버지가 일하는 시청 도시계획과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 사무실은 시청 본관 4층 동남쪽 구석방에 있었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면 소공동 중국인상가가 정면으로 보였고, 더 위로는 남산이 보였다. 아버지는 매일 창 너머로 중국인상가를 내려다보며 무허가 판자촌을 당장 정비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아버지는 도시계획이론에 밝았고 구획정리 업무에 능한 공무원이기는 했지만 무허가 판자촌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쫓아내는 작업을 서둘러 할 수 있는 강단은 없었다. 그들이 눈에 밟혀 대통령의 지시를 이행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가끔 무작정 철거의 부당성을 토로한 아버지는 어느 날 출근길에 검찰에 끌려가 꼬박 나흘 동안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재산 몰수에 직장에서도 쫓겨났다. 미국 대통령 존슨의 방한 일 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살던 집에서도 밀려나 자신의 손으로 정리하던 무허가 판자촌으로 옮겨온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부터 영순 씨의 인생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아버지가 죽고 탈상도 하기 전에 엄마와 오빠가 죽었다. 엄마는 인도로 뛰어오른 버스에 치여, 군인이었던 오빠는 총기 오발 사건으로 죽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이북에서 월남한 집안이라 남쪽에 일가친척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영순 씨는 겨우 여고를 졸업하고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전화국 교환수로 들어가 혼자 남은 목숨을 책임졌다. 그 후 그녀가 살아온 삶은 서울의 무허가촌을 전전하며 살아온 다른 사람들과 대동소이했다.
“동우야, 엄마 아빠 보고 싶지 않아?”
영순 씨는 동우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엄마, 아빠를 찾지 않은 것이 대견하다. 물론 어려서 울면서 엄마, 아빠를 찾기는 했지만 제 손으로 똥오줌 가리고 몸을 씻고 옷을 챙겨 입게 되면서 아이는 금기어처럼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신통하고도 이상한 일이지만, 지금도 건들기만 하면 고름이 주룩주룩 흘러내릴 영순 씨 가슴의 상처이다.
고아로 떠돈 영순 씨는 평생 혼자 살 작정이었다. 그래서 스무 살이 넘어서는 절에 들어갈까 고민도 하고, 수녀가 되는 길을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접었다. 아버지와 같은 공무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화국 교환수로 일하면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준비했다. 몇 번 떨어진 끝에 합격했지만 신원 조회에 걸려 최종 낙방을 한 것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아버지에게 씌워진 부패 혐의가 발목을 잡은 것 같았지만 낙방 사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영순 씨는 10년 동안 다니던 전화국 교환수 일을 집어치우고 무작정 여기저기 떠돌았다. 몇 달 동안 절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산속의 기도원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생의 어떤 의미도 만나지 못했다. 서른둘에 처음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 결혼을 약속하고 몸을 허락했지만 돈을 벌겠다고 중동으로 떠난 남자는 소식이 없었다. 남자가 떠난 후에야 영순 씨는 배 속 태아의 존재를 알았다. 고아가 된 후에 혼자라는 외로움에 몸을 떨며 살던 영순 씨는 배 속에 느껴지는 태아의 발길질이 따뜻하고 소중했다. 행복한 마음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딸이었다. 영순 씨는 온갖 일을 하면서 그 아이를 위해 살았다. 대학 운동권이던 딸아이는 졸업 후에도 야학을 떠나지 않더니 문득 임신을 했고 혼자서 아들을 낳았다. 수배 중이던 아이 아빠가 외국으로 밀항을 했다던 딸은 네 살 동우를 영순 씨 곁에 남겨두고 외국으로 떠났다. 영순 씨는 딸이 간 그곳이 어디인지, 왜 갔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눈이 새카만 아이를 앞에 앉혀두고 같이 죽을까? 살까? 생각하느라 며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아이가 울면 감정 없는 손길로 밥을 먹였다. 넙죽넙죽 잘 받아먹으며 방그레 웃는 아이를 보며 영순 씨는 차마 죽을 수는 없었다. 아이와 함께 밥을 씹어 삼키며 또 한 번 모진 마음을 곧게 펴 잡았다.
이제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그 아이와 나란히 걷고 있는 영순 씨는 후회가 된다. 차라리 그때 같이 죽었으면 오늘 같은 날은 없었으리라. 무슨 영화 같은 세상이 있다고 믿으며 그 참혹했던 순간을 넘어서고 그 세월을 견뎠을까? 영순 씨는 덧없는 세월에 정신이 사뭇 미끄러울 뿐이다.
동우는 할머니의 물음에 엄마, 아빠를 떠올리지만 존재하는 실체가 아닌 엄마, 아빠라는 단어가 떠오를 뿐이다. 그들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이런 날 이런 장소에서 그들을 소환하는 할머니가 석연찮을 따름이다. 설마 그들을 만나러 가는 것은 아닐까? 동우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져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할머니, 엄마 아빠를 만나러 가?”
“아니다. 새삼스럽게….”
영순 씨는 미국 대통령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모여있는 시청 앞을 훌쩍 지나쳐 계속 걷는다. 흑백필름 같은 주위 풍경과 달리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파랗다. 그런 하늘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동우는 오랜만에 즐겁다. 결핍이 생활화된 19년이었다. 동우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결핍이었다. 엄마 아빠는 물론 형과 동생도 없었고, 침대도 없었고, 친구들이 신고 다니는 몇십만 원짜리 신발도, 백만 원이 넘는 옷도, 고가의 핸드폰도 없었다. 부럽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자신을 서럽게 하던 그 결핍을 보상하고도 남을 파란 하늘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늘빛이 펼쳐진 길을 동우와 할머니는 익숙한 듯이 나란히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할머니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 왔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대지였고, 그 위로 파란 하늘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할머니, 여기가 어디인데?”
“할미와 동우가 애초에 있던 곳이다.”
“할머니, 아무것도 없는데….”
“기다려라, 곧 보일 테니까.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게 있다.” “뭔데?”
“돌아보지 마라. 우리가 걸어온 등 뒤의 세상이 보고 싶거나 궁금해도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왜?”
“돌아보는 순간 우리가 갈 곳이 없어진단다.”
“할머니, 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절대 없어.”
동우는 지금까지 살아온 등 뒤의 세상이 보고 싶지 않다. 그립지도 않다. 추호도 그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눈앞에 놓인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다. 그런 동우의 마음을 읽었는지 할머니가 살그머니 동우의 손을 잡는다. 그러자 파란 하늘에 반사한 태양 빛이 신비로운 검처럼 동우의 심장과 골수를 반으로 가르면서 마지막으로 동우의 몸을 감싸고 있던 생과 죽음의 헐떡이는 실재가 사라지고, 눈앞 텅 빈 대지에 환하고도 파릇파릇한 봄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건 영순 씨도 마찬가지이다.
*김성달 《한국문학》에 단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환풍기와 달』, 『낙타의 시간』 등. 한국문인협회작가상, 아시아문학상 우수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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