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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특집 제7회 전국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 문예연구|박선애·수상작 적색 점멸등이 켜졌다 외 1편 /신작 자가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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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특집 제7회 전국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 문예연구|박선애·수상작 적색 점멸등이 켜졌다 외 1편 /신작 자가격리
박선애
문예연구─수상작
적색 점멸등이 켜졌다 외 1편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였으리라
엑스레이 사진을 가까이 끌어당긴 시선에서
벌써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저 아래 어디선가
산수유 벚꽃 목련이 일제히 피었다는 기사가
TV 화면을 채우며 부산하게 봄이 오더니
미세먼지로 뿌옇게 흐린 눈에도
얼어서 뵈지 않던 꽃눈 하나
자꾸만 눈에 밟히고
깜박깜박
불쑥 가슴에 얹혀있던 딱지 속에서
스멀스멀 봄기운이 살아난다고
어둠을 틈타 신호를 무시할까,
손바닥이 촉촉해지면
잠시 쉬었다 가는 것도 괜찮지
몰아쉰 한숨에
산수유 벚꽃 목련이
순서대로 지는 것을 구경하며
염치없다
가가 나에게 염치없다 했다
A가 B에게 염치없다고 했다
그가 그녀에게 염치없다고 했단다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보이는 발가락에게
염치없다고
염치없다고 했단다
잘 자 한마디 던져놓고
맨발로 먼 길 떠난 그녀에게
염치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
오늘은 나도
정말 염치없다
신작
자가격리
이제 나가도 될까요
마른 옥수수 낱알은
버터를 만나 팬 위에서 뒹굴며
펑펑 터질 폭죽을 기대합니다
어젯밤 땅콩밭을 죄다 파헤쳐놓은
멧돼지는 사람과 같이 사는
꿈을 꾸었답니다
덕분에 땅콩밭은 철망 속에 갇히고
깜박이는 커서에 자음과 모음을 채우느라
밤새 물을 길어 올렸는데
새벽이 되어서야 나는
밑바닥이 깨진 것을 알았습니다
손가락에 걸쳐진 단어 하나 남기고
고소한 맛을 나누며
우리 하나가 되는 자리
나, 언제쯤 나가면 될까요
심사평
시적 긴장의 현재 구축
계간 《문예연구》는 박선애 시인의 「적색 점멸등이 켜졌다」(《문예연구》 2020년 겨울호) 외 1편을 올해의 전국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으로 선정하였다. 박선애 시인은 시가 인간 영혼의 잠재적 화법이라는 오랜 기율에 충실하면서도 때때로 날렵한 육성으로 시적 긴장의 현재를 구축해왔다. 이러한 작법은 최근 우리 시의 본류를 형성하고 있는 분방한 화술과는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그의 시는 다변과 달변의 소란에서 비켜서 있고, 산란하는 이미지들의 네트워크에도 간여하지 않는다. 「적색 점멸등이 켜졌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의 시는 발화된 언어와 이미지를 발화 이전으로 복귀시키고자 한다. 물론 발화된 것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거라는 모종의 고집이 박선애 시인의 시를 견인하는 힘이다.
우수작품으로 선정된 「적색 점멸등이 켜졌다」는 부감법의 한 전형처럼 읽힌다. 알다시피 부감법은 높은 곳에서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응시의 방법이다. 이러한 작법은 보이는 것들의 구도를 선명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적절하게 조절된 응시의 기울기를 통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밀도 있는 관계를 만들어낸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밀도에서 시가 발화하고자 하는 잠재 세계가 개시된다. 그런 점에서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이 시는 발화되었고, 이때 형성된 시적 응시의 기울기에서 “엑스레이 사진”이 포착되었다. 그럴 때 ‘갸웃’의 기울기 속에서 돌이킬 수 없다는 자각과 그럼에도 돌이키고 싶어 하는 각오가 충돌한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일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자각이라면, 2연 이후의 시적 발화들은 시인이 회수하고 싶은 각성된 장면들이다. 그것들은 “엑스레이 사진을 가까이 끌어당긴 시선”에 포착되었고, “미세먼지로 뿌옇게 흐린 눈에도”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삶의 의지라고 해버리면 투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지 속에서/스멀스멀 봄기운이 살아”나는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건너뛴 적 없는 ‘갸웃’의 순간이자 삶의 의지다. 그 의지는 “잠시 쉬었다 가는 것도 괜찮지”를 통해 삶의 장면을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렇게 박선애 시인은 불가능한 세계를 자신의 잠재 세계로 삼아 현재의 긴장을 구축하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한다. 이것이 동시대 우리 시에서 의미 있는 목소리가 되고 있다./《문예연구》 편집위원회
수상소감
문 두드리는 소리 듣습니다
예기치 않던 자연재해 앞에서 곰이 되어 살았습니다.
가끔은 호랑이의 꿈을 꾸며 내달리고 싶었지만
마늘과 쑥을 먹어가며 날수 세기도 잊을 무렵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동굴은 깊었습니다.
생각처럼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마늘의 알싸한 맛이 위로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참 묘한 매력을 가졌습니다.
안을 허락하지도 않으며 테두리를 벗어나려면
솔깃한 제안을 해옵니다.
무심한 듯 손을 잡고 나가볼까 합니다.
100일이 지났다지요.
모든 이에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주는 무게는 무겁습니다.
견디어내겠습니다.
*박선애 2010년 《문예연구》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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