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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신작시/신병은/꽃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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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신작시/신병은/꽃 외 1편
신병은
꽃 외 1편
그 보다 더 이전이었으리
그 때 처음으로 누군가,
어둠 속 혼돈의 저쪽에서 귀를 세웠으리
우주의 질서를 열었으리
태초의 표정이었으리
태초의 말이었으리
깊게 혹은,
허공의 문을 닫았다 열었다가
어둠 속 빛을 불러내었으리
이별 속 만남을 불러내었으리
절망 속 설렘을 불러내었으리
진정한 랑그
예언의 파롤
밝은 눈과 맑은 귀로
쫑긋,
사금파리 같은 햇살의 꽃이 피었으리
어머니의 양식
신호음이 길게 이어진 후에야
어머니는 전화를 받습니다.
그렇게 창창하던 분이 기운 없어 보이는 것이
일용할 양식이 떨어졌는가 봅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했던 게지요.
어머니는 지금 남아있는 몇 개 목소리로 견디는가 봅니다
가끔 드리는 전화 한 통으로 사나흘을 견디곤 하지만
목소리도 유효기간이 있어
전화로 하는 목소리, 얼굴로 하는 목소리,
장남이 전하는 목소리, 동생이 전하는 목소리의
약발이 다른가 봅니다.
그래도 유효기간이 제일 긴 것은
오래전에 세상을 달리한 아버지의 목소리입니다
아버지는 어떤 빛깔로 기억 속에 남아
함께 저물어 가고 있는지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면 단번에 눈에 빛이 나며
‘그럼, 니 아버지는 그랬제.’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도 띠웁니다
오늘 아침 한 통의 전화에
어머니의 하루가 탱탱해지면 좋겠습니다
*신병은 1989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바람과 함께 풀잎이』, 『꿈의 포장지를 찢어내며』, 『강건너 풀의 잠』, 『바람굽는 법』, 『잠깐 조는 사이』, 『휴』,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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