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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신작시/이영숙/벽시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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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37회 작성일 23-01-1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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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신작시/이영숙/벽시계 외 1편 


이영숙


벽시계 외 1편



동물계에는 있고 식물계에는 없는 게 있다

인간도 동물이므로 물론 인간계에도 있다


너는 어느 쪽이니 물으면 

뒤로 숨는 벽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묻는 것도 아닌데

자꾸 무례해져서 

내가 동물인 것도 잊고 

조간신문에서 오려낸 시 한 편을 벽에 또 눌러 붙이는 밤  

스카치테이프에 낡은 벽지를 뜯길 때

모욕당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벽도 아랑곳없이


고장 한 번 없이

어떻게 맨정신으로 일년삼백육십오일을  

대단타, 이런 세기에 이런 말은 모욕인데

스카치테이프에 낡은 살점을 뜯기는 말인데

아랑곳없이

OX형 문제처럼 

벽시계는 저벅저벅 

살래, 죽을래, 

지치지도 않고


올해 태풍에도 이재민이 된 새들의 통계는 잡힌 바 없는데

기류가 흐른다 기체가 흔들리면

손잡이 없는 벽이라도 꽉 잡아야 하는데 


밤은 직육면체 

직육면체가 아니라면 세계는 쌓아지지 못했을 것이고


동물의 왕은 있어도 식물의 왕은 없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오고야 마는 

왕처럼 인공 장기를 갈아치우던

벽시계가 멎었다 그럴 줄 몰랐겠지만 

전통에 따라 무심하게 유리로, 나무로, 바늘로 해체되는 동안   

벽은 모처럼 식물의 잠에 들 것이다  





장소의 불문율

―환승역 



오래 벼른 끝에 이 생에 맡겨진 배역을 갈아타려고 나는 생활부터 조지기 시작했다 따분했던 김에 생활은 성별을 조지고 성별은 외모를 조지고 외모는 직업을 조지고 직업은 감정을 조지고 짧은 시간에 디테일도 황금률도 없이 감정은 라인을 따라 시나리오작가를 조지러 간다 


대체 나는 이 생에 주연인지 조연인지 알지 못했다 주연이라고 생각하는 조연이거나 조연이라고 생각하는 주연도 아닌 것 같았다 가장 빈번한 자세가 저물녘 떠나는 강물을 붙잡지 않노라네 눈감고 의자에나 앉아 있는 거였으니 대체 어떤 작자가 시나리오를 이따위로 써! 


열에 두 번은 길을 잃고 낭하는 아까 그 델리만쥬 블랙슈가 수제쿠키맛집 앞으로 나를 다시 데리고 나온다 단 게 싫어서 인생이 쓴 건지 단 게 좋아서 길을 잃은 건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비상구는 없고 뇌의 회로에 꼭꼭 박혀 있어서 코스마다 길목마다 달콤한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어딘가 폭발하지 않았다면 마구 찍어내지 않았다면 배역들이 이렇게 뒤엉켜 쏟아져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나리오대로 살지는 않겠다면서도 배역에 들러붙은 얼룩은 뗄 수도 지울 수도 없어서 숱한 나들은 한 목소리가 되는 따위는 취급하지 않았던 거고   


작가는 대본으로 말할 뿐 허튼 말은 삼가는 사람 먼저 온 다른 배역들도 비뚤비뚤 주먹을 쥐고 서 있었지만 그는 친절했고 단호했다 문이 열립니다 하매 문이 열리고 더 독한 배역으로 갈아탈지도 몰랐을 배역들이 모두 주먹을 풀고 문이 닫힙니다 하매 문이 닫히기 전 전동차 안으로 얼른 발을 들여놓았다  





*이영숙 1991년 《문학예술》로 시 등단, 2017년 《시와세계》로 평론 등단. 시집 『詩와 호박씨』, 『히스테리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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